누구나 전셋집을 전전하다 보면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지게 된다. 나는 무슨 복인지, 첫 내 집이 개미처럼 힘들게 모아서 마련한 집은 아니었다. 시아버지께서 마련해주신 주택자금에 20년 상환 융자를 조금 받아서 결혼 10년차도 채 안된 32세의 나이에 그림 같은 집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정원이 있는 슬래브 양옥집이었다.
우리 집이 얼마나 좋으면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큰 딸이 자고 일어나더니 “엄마! 우리 부잣집 같아~”라고 하며 좋아하던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잊을 수가 없다.
사실 나도 그랬다. 서울 부잣집에나 있을 법한 큰 목욕탕과 당시 최신식 싱크대가 있는 주방까지. 상상도 못할 집에 살게 되니 세상 부러울 게 없어 신바람이 절로 났다. 그때는 땅이 조금만 있어도 텃밭 만들어 먹거리를 자급자족하던 시대였다. 우리는 마당에 잔디를 심고, 철근으로 아치를 만들어 빨간 장미 넝쿨을 올렸다. 하얀 목련과 겹 벚꽃 주목 나무, 화양목 등 여러 가지 나무를 심고, 작은 연못도 만들어 물고기도 길렀다.
그 당시는 정원이 있는 집이 드물었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집이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친목회, 동창 부부들도 와서 잔디밭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술 한잔하면서 축제의 연속! 그렇게 사는 게 행복 그 자체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그 행복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더니 남편은 재력있는 청년회의소 회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그 재력이 부러웠던지 농협에 융자를 받아서 영농사업에 해마다 투자를 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실패를 계속하다보니 개인 빚까지 4부 이자를 주고 쓰게 되었다. 신용을 지킨다고 또 빚을 내어 이자를 갚다보니 악순환의 연속!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빚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하지만, 남편이 실패를 거듭해서 빚에 쪼들리고 힘들어도 남편을 원망해보거나 남편이 나의 사랑 1순위에서 물러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부모님은 아들을 구박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대하는 게 그저 고맙기만 하셨단다. 고생 한번 안 해본 며느리가 고생을 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늘 애처로워 하셨다. 사람이 살면서 평탄한 길만을 걸을 수는 없는지 결국은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직장에서 충청도 서산이라는 곳으로 발령을 받아 8년 동안 정들었던 집을 팔아서 빚 정리를 하고 떠나야 하는 아주 극한 상황에 까지 달하게 되었다. 빚을 정리하고 나니 겨우 전세 한 칸 얻을 돈이 남았다. 집이 망한 것도 서러운데, 처음으로 고향 땅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니, 눈물이 왜 그렇게 쏟아지던지. 이삿짐을 싣고 이사를 하는 날에도 하루 종일 펑펑 울었다.
그렇게 도착한 우리의 새 보금자리. 현관문을 열면 자그마한 부엌 겸 거실이 있고, 작은 방 두 칸이 겨우 있는 오막살이 같은 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과 살 생각을 하니, 애꿎은 눈물밖에 안나왔다. 짐을 풀고 자리에 누웠는데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이 계속 흘렀다.
당시엔 집에 전화기도 없어서, 고향 생각이 날 때면 시내 공중전화박스를 찾아서 시댁에 전화를 드렸다. 전화하고 돌아서 집에 올 때는 시댁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렸다. 앞이 안보여 하늘은 희뿌옇고 온전히 걸을 수가 없었다. 무인도에 우리 가족만 달랑 내팽겨진 느낌.
시아버지는 우리가 절박한 처지에 있을 때 마다 든든한 후원자로 우리 가족의 울타리가 되셨다. 자식 사랑이 각별하신 시아버지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기에 구구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장문의 편지를 6장정도 써서 봉투에 두툼하게 넣어서 우체국에 가서 시아버지와 시댁 식구들에게 편지를 부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시아버지는 그 이후로 내가 보낸 편지를 모아두셨는데 책 한권은 내도되겠다고 늘 말씀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시아버지께 쓴 편지 덕분에 제천단양뉴스의 연재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건 아닐까.ㅎㅎ(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