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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고무나무의 눈물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번호가 씌어 잇는 스님들의 흰 고무신
스님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다는 우스개가 있다. 왜냐면 늘 ‘백신’, 곧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시기 때문이란다. 그렇구나! 같은 신이라도 검정 고무신을 신어서는 안 되시겠구나!
그런데 백신이 나오기는 나오나?
에라, 모르겠다. 몇 달 집안에 갇혀 있다 좀 풀어 놓으니 사람들은 모래밭으로 산등성이로 마스크도 제대로 안 낀 채 마구 쏟아져 나온다. 처음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는 거의 일요일 아침처럼 텅 비어 있던 프리웨이도 이젠 어느새 차들이 늘어나 씽씽 마구 달린다. 그 틈서리에 끼어 오랜만에 어디를 찾아가는 나의 운전 솜씨가 마치 오랜 일기장에서 눈에 띄는 옛 동무의 이름처럼 조금 낯설기도 반갑기도 하다. 그 사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새삼스런 핸들의 추억이다.
그런데 아뿔싸! 저만치 앞서 가던 픽업 트럭이 갑자기 좀 떨더니 후루룩, 오른쪽 뒷바퀴의 타이어를 넓고 검은 허리띠처럼 미련 없이 풀어 버린다. 위험하다! 픽업 차는 기우뚱거리며 덜커덩거리고 길게 풀린 타이어는 공중을 날아 내 차창을 스쳐 길옆 비탈 쪽으로 사라진다. 순식간이다. 가까스로 앞차를 피해 안쪽 차선으로 질러 들어갔다. 깜짝 놀랐네! 바이러스에 당해도 그렇지만 찢어진 고무 타이어에 맞아 죽기에는 아직 좀 남은 세월이 억울하지가 않나!
그러고 보니 프리웨이 양편 앞뒤로 내달리는 모든 차들이 하나같이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자면 오톨도톨한 이 고속도로의 콘크리트 갈바닥은 마치 무우나 과일을 밀어 갈아대는 갈판처럼 저 타이어 신발들의 밑창을 갉아먹는 기나긴 줄판과도 같으리라. 그리고 프리웨이를 내려서면 바둑판처럼 퍼져 있는 지방도로와 시가지의 골목길들, 거기에 깔려 있는 아스팔트엔 가다가 서다가 흠칫 멈추어 버린 갖가지 바퀴의 자국이 무수하리라. 자동차뿐인가? 공항의 활주로며 항구의 부두며 동네 농구장이며 교외의 옥수수 농장이며…, 그 모든 곳에서 수십 억 인구가 발에 신은 채 뛰고 절고 끄는 신발들은 다 어찌하고? 그러니 우리가 붙어 사는 이 땅껍질은 어찌 보면 수많은 고무 지우개가 문질러대고 갈아대는 커다란 깔판이나 사포(砂布, sand paper)와 같다. 우리 인간들은 뭘 그리 지워 없앨 것이 많았나?
아니지. 우리가 땅에 있는 뭘 지운다기보단 제 성질머리를 못 이기는 거지. 어머니인 대지를 머리로 들이박고 주먹으로 내지르고 두 발을 꿀리고 하다 보니 내 껍질도 벗겨지고 피가 나고 쓰라리므로 그것들은 다 이를 눅이고 가리려는 감싸개요 완충제인 거지. 아마도 이런 누그러뜨림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들이란 제풀에 다 멍들고 곪고 꼽치고 꺾이고 부러져서 제 모양을 못 갖추고 살아가고 있을 거요 아마. 하기야 고무 없을 때는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들 살았나? 우리가 고무를 안 지가 몇 백 년이 되었나? 1백 년? 2 백 년?
본래 동양이나 서양이나 고무라는 것을 몰랐다. 축구공도 없어서 촌놈들은 새끼를 돌돌 뭉쳐 공처럼 만들어 차거나 어쩌다 동네에서 돼지라도 한 마리 잡으면 기다렸다가 아랫배알 언저리에서 기어코 오줌통을 얻어 내었다. 그걸 잡고 피 묻은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은 다음 끈으로 묶어 막은 게 우리 공이다. 모양은 좀 찌뿌둥하지만 튀는 힘 좋은 이 공을 좇아 동네 공터에서 몰려다니며 냅다 차고 지르느라 아이들은 해가 꼴깍 넘어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신대륙으로 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 훨씬 전, 지금으로부터 3,200년 전쯤부터 중앙아메리카의 올멕(Olmec) 문명에서는 자연산 고무나무(Hevea Tree)의 젖물(乳液, Latex)을 받아내어 쓸 줄 알았고 언젠가부터 그걸 둥글게 뭉치고 굳혀 공을 만들어 차고 놀았다. 그 후 마야(Maya)와 아즈텍(Aztec)에서는 한 술 더 떠 고무 그릇이나 제 발 모양을 찍어 굳힌 고무신을 만들어 썼고 고무나무 젖물을 옷감에 입혀 방수천까지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민들레 대궁이나 무화과 가지를 꺾어 보면 젖 같은 진이 나오는데 여기엔 얼마간의 고무 성분이 들어 있다. 아픔을 참는 눈물이요 상처를 급히 아물게 하는 식물의 피티(血小板, Platelet) 용액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고무나무도 여러 종류이고 꼭 고무나무에서만 천연고무가 생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천연고무는 아마존 고무나무(Hevea Brasiliensis)라는 수종에서 생산된다.
구세계에 알려진 고무의 역사는 이러하다.
아마존 고무즙 채취
1736년에 프랑스의 탐험가인 라 꽁다민(Charles Marie de La Condamine 1701~1774)이 왕립학사원(Académie Royale des Sciences)에 남미에서 고무 덩어리를 견본으로 가져왔지만 주목을 받진 못했다. 이러다 1770년, 영국의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가 우연히 연필로 쓴 글자에 고무를 문지르면 글자가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이래서 고무를 영어로는 rubber 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우개나 고무나 다 ‘러버’가 돼 버린다. (일본 사람들은 L을 모조리 R로 발음하기 일쑤여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라는 'Love Me Tender'를 ‘날 살살 문질러 주세요’ 하며 'Rub Me Tender'로 노래 부르곤 한다.) 우리말 ‘고무’는 본래 네델란드어 곰(gom)이 일본에서 고무(ゴム)로 됐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원주민인 중미의 인디안들은 코아오추(coaochu), 곧 나무(coa)의 눈물(ochu)이라고 불렀는데 훗날 정말 이 나무 때문에 온 대륙이 피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미처 모르고 붙인 이름일 게다.
그 후 유럽 각국에서 고무를 다루는 방법이라든지 쓰임새가 하나씩 알려지게 되어 돈벌이가 되고 수요가 높아졌는데 이때를 즈음하여 아마존 지역의 고무나무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런데 이 지역은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정글인데다가 돈독이 오른 백인 사업가들은 가뜩에나 사람 취급 안 하던 인디오 원주민들을 완전히 소모품으로 취급하지 않았겠나! 이들은 원주민을 강제로 쥐어짜서 밀림에 자생하는 고무나무의 진을 악착같이 받아내어 팔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랄한 이름을 남긴 자가 있으니 페루 출신의 백인 사업가요 정치가인 아라나(Julio César Arana del Águila 1864~1952)이다.
아마존의 지류들
페루에서 모자쟁이(hatter)의 아들로 태어나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아라나는 1881년, 페루의 밀림 한가운데인 유리마과스(Yurimaguas)에서 고무 거래를 시작한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이 일대에는 이른바 고무 채취 붐이 일고 있었다. 1889년에 그는 페루 동북부 아마존 강 지류들의 상류 유역인 이키토스(Iquitos) 지역으로 들어가 지금 페루와 콜롬비아의 국경을 이루는 푸투마요(Putumayo)강 언저리에서 몇 해 동안 고무 사업을 한다. 그리고 1899년에 그는 이 푸투마요 강을 따라 고무나무 숲의 노다지를 발견함과 동시에 상당히 규모가 큰 원주민 인디오 집단도 찾아낸다. 그리하여 착안해 낸 악마적인 발상이 이 고무나무 숲과 인디오를 철저한 강제 노예노동으로 엮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독점적인 고무 왕국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역사상 ‘푸투마요 추문(Putumayo Scandal)’이라고 불리는 처참한 비극의 시작이다. 물론 이들 경쟁자들도 인디오들에게 무도한 악행을 자행했지만 아라나는 이들의 수법들을 참고하여 더욱 냉철한 구상과 강력한 실행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친 것이다.
이리하여 푸투마요 강을 비롯하여 카라 파라나 강(Cara-paraná rivers), 카후이라니 강 상류(Upper Cahuinarí), 이가라 파라나 강(Igara-paraná) 등 아마존 강 지류의 페루-콜럼비아 부근 상류지역에 살고 있던 인디오들이 씻지 못할 피해를 입었다. 후이토토(Huitoto)족, 안도케(Andoque)족, 보라(Bora)족, 노누야(Nonuya)족, 무이나네(Muinane)족, 미라냐(Miraña)족 들은 아라나의 회사[Casa Arana]에 의해 모조리 강제로 동원되어 고무 원액 채집, 화물 운송 등 각종 노동에 혹사당했다. 인디오들은 경작이나 사냥 등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이나 활동을 일체 금지당하고 오로지 아라나의 부를 위해서만 희생된 결과 근 십 년 동안에 4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아라나
아라나는 이렇게 쌓은 부를 바탕으로 1902년에 이키토스의 시장이 되었으며 그 후로 페루 동북부 라레토(Lareto) 주의 여러 고위 공직을 지내는데 나중엔 그곳 상원의원과 상공회의소 소장이 되었다. 그리고 사업을 뻗쳐 1903년에는 브라질의 아마존 강 중류에 있는 마나우스에 지사를 내는 등 아마존 각 지역 45 군데에 고무 채집소를 설치하였다. 런던과 뉴욕에도 지점을 두고 페루의 불안정한 정정을 감안하여 1907년에는 영국 런던에다 '페루 아마존 고무 회사(Peruvian Amazon Rubber Company)'를 설립한다. 자산은 백만 파운드라는 거금이었다. 이 회사에는 영국의 투자가들도 다수 참여시키며 경영에도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푸투마요 지역의 콜롬비아 쪽 조무래기 고무 회사들을 다수 사들이는데 그 과정에서 깡패 수법을 동원했음은 물론이다. 당한 자들이 항의를 해도 콜롬비아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정말로 꿀을 먹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런던에 설립하여 영국의 여러 투자자를 끌어들인 아라나의 회사는 마침내 런던에서부터 동티가 나기 시작한다. 작가인 웨이드 데이비스(Wade Davis)가 펴낸 책 <아마존 열대우림 – 강의 탐험과 발견(The River, Explorations and Discoveries in the Amazon Rainforest)>에서 아라나의 회사가 행한 악행들이 폭로된 것이다. 그리고 1908년에는 미국의 젊은 철도 기사인 월터 하든버거(Walter Hardenburger)도 푸투마요 강을 지나다 참상을 목격하고는 런던의 신문인 <진실(Truth)> 지에 '악마의 천국(Devil’s Paradise)'이란 제목으로 투고를 한다. 위의 두 사람이 목격하거나 확인한 참상의 예들은 다음과 같다.
1904년, 아라나는 바바도스의 흑인 수백 명을 데려와 인디오들의 감시자로 썼는데 이들은 인디오가 일을 못 견뎌 도망가면 총을 쏘아 죽였다. 인디오를 ‘개화(civilize)’ 시키도록 특권을 부여받은 회사의 백인 간부들은 새벽에 인디오 마을을 덮쳐서 노무자 후보를 추려서는 강제 노역의 노예로 삼았다. 고무 할당량을 못 채우면 두들겨 패고 손가락이나 손이 잘랐다. 불응하면 아내나 아이들이 대신 당해야 했다. 음식은 죽지 않고 일할 만치만 나눠 줬다.
반항하는 자는 불과 물로 고문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았다. 애들은 나무나 벽에 머리를 패대기 쳐 죽이고 쓸모없는 노인은 그냥 죽여 버렸다. 그리고 재미 삼아 인디오를 조준하여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고 부활절 같은 날엔 인디오를 불러모아 석유를 뿌리고는 한꺼번에 태워 죽이며 희생자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즐기기도 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을 강탈하여 제멋대로 강간하고 성노예로 학대하고 부려먹고 뼈가 드러나도록 매질을 했으며 남자고 여자고 죽을 때까지 재미로 괴롭혔다.
이리하여 십 년 후에는 관련된 인디오 부족 거의 전부인 4만 명이 죽어 멸종 상태에 다가간다. 1907년에 페루 국적자인 살다냐(Saldaña)가 처음으로 아라나의 회사를 페루 당국에 고소하여 회사 관련자 215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아냈지만 이들 대부분은 이미 도망가 자취를 감춘 후였다.
영국인이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했기도 했지만 영국령 바바도스(Barbados)가 관련된데다가 당시 영국은 아마존 지역에 개입하려 틈을 엿보고 있는 참에 국제 여론까지 나빠졌다. 그리하여 인디오의 운명에 전혀 관심이 없던 페루나 콜롬비아에 비하여 이러한 폭로가 영국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다. 마침내 영국은 원주민 보호를 앞세우며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기’였다. 당시 영국은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호주, 인도, 자메이카 등지에서 이에 못지않은 악행을 마구잡이로 저지르고 있을 때였으니까 하는 말이다.
어쨌거나 영국은 1910년,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 영사인 로저 케이스먼트(Roger Casement)로 하여금 진상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케 하는데 1912년에 나온 그의 보고서는 위의 웨이드 데이비스나 월터 하든버거가 이야기한 내용을 모두 사실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원주민 희생자는 3만 명으로 되어 있었다. 케이스먼트는 이 보고서를 페루 당국에 보내며 관련자 255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마찬가지로 관련자 대부분은 몸을 숨긴 후였다.
아라나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부정하였다. 설사 그런 나쁜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치더러도 그 모든 잘못은 자기 지시를 오해한 중하급 직원들과 바바도스 흑인들의 잘못된 소행 때문이고 그 사람들의 실수일 뿐이며 지금 당사자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데 그걸 어떻게 콕 집어 증명할 수가 있겠느냐며 발뺌을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더 철저히 감독하고 개선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런 걸 악의 보편성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눈에도 낯설지 않은 익숙한 모습이요 언사들이다. 그는 1913년에도 영국 하원에 출석하여 ‘푸투마요 죄악에 대한 특별 위원회’에서 자신을 방어했는데 자기는 끝까지 이들 야만인이고 식인종인 인디오들을 개화시켰다는 주장이었다.
하여튼 이런 전개와 대중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라나는 끝내 건재했다. 때마침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이도 흐지부지되었고 아라나는 풀려났다. 게다가 그는 여생을 정치인으로서, 여러 공직을 맡으며 88세까지 잘 살다 수도 리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수많은 인디오를 물건이나 짐승 다루듯 처분해 온 이 살인마에 대해서 페루 국내의 일부 인사들은 아직도 그를 국익 수호의 강력한 영웅으로 받들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이런 나라에서뿐이랴?
아라나가 이렇게 인간 백정 노릇을 하며 인디오의 즙을 짜내다시피 하여 바깥으로 생고무를 내다 팔았던 것은 그만큼 바깥 세상에서 수요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1736년 라 꽁다민이 남미에서 생고무 덩어리를 가져온 이래 바깥 세상은 한 동안 이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차차 고무의 효용성을 알아보게 되고 요리조리 가공하여 갖가지 보도 듣도 못한 물건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니 그 가장 획기적인 것이 타이어의 발명이다.
수천 년 전 인류가 바퀴를 발명한 이래 수레나 마차를 탄 인간들은 포장도 안 된 길을 굴러가는 탈것에 올라타고는 바닥에서부터 전해오는 그 덜컹거림에 등뼈가 치받치고 짓눌려 오랜 시간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완충은 아예 포기하고 나무로 된 바퀴 테에 무쇠나 강철로 옷을 입혀 바퀴나무가 쉬 닳지 않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견디다 못해 땅에 닿는 바퀴의 면에 가죽 띠를 감기도 했는데 얼마 못 가 헤어져서 영 실용성이 없었다.
1847년, 영국의 철도 기사이며 발명가인 로버트 윌리엄 톰슨(Robert William Thomson 1822~1873)이 마차 바퀴에다 고무 호스를 덧씌우고 바람을 불어 넣은 타이어를 발명했으나 실용성이 별로 없었는데 1887년 같은 영국의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이 아들의 자전거에 고무 호스를 두르고 바람을 집어넣은 실용적인 타이어를 만들어 냈다. 이 타이어는 나중에 자동차의 타이어로 발전하여 고무의 수요를 폭발시켰는데 아마존의 생고무 사업이 떼돈을 번 것은 바로 이러한 사태 때문이다.
그런데 남이 떼돈을 벌고 있는 것을 가만히 못 보고 있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아마존 고무 농장의 독점을 깨자!
당시 아마존의 고무나무는 특정 국가나 국제적인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지 해당 업체들의 탄탄한 관리 하에 독점이 방어되고 있었는데 드디어 1876년, 영국의 나무 도둑 헨리 위컴(Henry Whickham 1846~1928)이 아마존 고무나무의 씨앗 7만 알을 몰래 빼내 오는 데 성공했다. 이를 런던의 큐 가든(London's Kew Garden)에 심었는데 그 중 2,400 알이 싹이 텄고 이 모종을 싱가포르,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말레이 반도 등지로 보냈다. 말레이 반도가 가장 기후가 맞았는지 얼마 후에는 세계 최대의 고무 생산지가 되고 아마존 일대는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고 만다. 과연 영국에 큰 도둑이 많다.
위컴
스탠리
그런데 아라나를 차라리 좀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고무 악마가 한 사람 더 있으니 아라나보다 스물아홉 살이 많은 벨기에의 군주 레오폴드 2세(Leopold II 1835~1909)다. 1865년, 서른 살에 부왕을 이어 벨기에의 왕위에 오른 레오폴드 2세는 해외 식민지를 얻고자 늘 눈이 벌개져 있었다. 처음엔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라 2세(Isabella II 1830~1904)를 꼬셔서 필리핀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다 두어 번 실패하자 눈길을 아프리카로 돌렸다. 웨일즈 출신의 미국 탐험가 헨리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에게 자금을 대며 아프리카를 탐험하게 한 후 지금의 콩고 지역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스탠리는 지금의 킨샤사 지역에 레오폴드빌(Leopoldville)이라는 전진기지를 마련한 후 레오폴드 2세가 아프리카에 진출할 기초를 닦았다.
1884년에서 1885년에 걸쳐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의 주재 하에 베를린에서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서양 열강 14개국이 베를린 회의(Berlin Conference)를 열었다. 서아프리카를 각국이 어떻게 나눠 먹을 건지 교통정리를 하는 게 주목적이었던 이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각자 자기 몫들을 챙기고는 벨기에 본토의 70배가 넘는 이 중앙아프리카의 정글 지대를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레오폴드 2세에게 떼어 주는 데에 동의했다. 레오폴드는 미리 국제 아프리카 협회(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라는 후원단체를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뒷받침하게 하였으며 열강들 앞에서는 그곳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겠다는 그럴듯하지만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헛다짐을 했다.
레오폴드는 이 콩고 땅을 벨기에 왕국이 아니라 자기 개인 소유의 식민지로 획득한 것이었는데 물론 그곳에 사는 흑인 원주민들에겐 그리 해도 좋은지 일언반구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콩고를 이용하여 오로지 자신의 부를 늘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원주민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겠다는 약속은 개나 줘 버려라! 그는 평생에 한 번 콩고에 가지도 않았으며 멀리서 대리인들을 보내 통치, 감시하며 처음부터 원주민들을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 군대인 공안군(公安軍 Force Publique)을 콩고에 육성하여 무력 통치의 손발로 부리며 마음대로 원주민들의 삶과 생명을 짓밟았다. 처음에는 상아를 거두어들였으나 생각만큼 돈이 되지 않자 마침 세계적인 수요 붐이 크게 인 고무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우선 3개 조항을 선포하여 외국인의 접근을 막고 모든 콩고의 주민은 상아나 고무를 우연히 발견하거나 명령에 의해 채취하거나 간에 무조건 즉시, 오로지 자신이 지장한 대리인이나 당국에만 갖다 바치도록 했다. 물샐틈 없는 독점의 아성을 쌓은 것이다.
콩고 넝쿨 고무나무
다섯 살 난 딸의 잘린 손발을 내려다보는 아버지
콩고의 생고무는 아마존처럼 고무나무가 아니라 젖물이 나오는 고무 넝쿨(Landolphia Owariensis)에서 나왔다. 이 넝쿨은 개활지에서는 작은 나무처럼 자라지만 숲속에서는 다른 나무들을 높이 감고 올라가는 굵은 넝쿨처럼 자란다. 레오폴드의 수하들은 원주민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하루에 채취해야 할 할당량을 지정해 주었다. 할당량을 지정받은 남녀노소 흑인들은 이 고무 넝쿨을 찾아 헤매다 발견하면 넝쿨을 토막으로 잘라 나오는 젖물을 온몸에 발랐다. 살갗에 발라진 젖물은 금방 굳으며 눌어붙었다. 하루해가 기울어 이렇게 겹겹의 고무 덩어리가 되어 구르다시피 하여 감독관에게 가면 몸에서 강제로 이 굳은 생고무를 뜯어내는데 이때 털이 다 뽑힐 지경으로 아프다. 흑인이 백인보다는 털이 적지만 그래도 황인보다는 많다. 이렇게 아픔을 참으며 뜯어 모아진 생고무를 저울에 다는데 저울 눈금이 할당량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먼저 그 사람의 자식을 끌고 와 보는 앞에서 손목이나 발목을 자른다. 다섯 살 난 자기 딸의 잘려진 손발을 처연히 내려다보는 흑인 남자의 사진이 남아 있다. 그 다음 날도 못 채우면 아내의 손발을 자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본인 손발이다.
이 공안군이나 대리인들에게는 본국에서 실어온 총기와 총알이 지급됐는데 원주민이 도망가거나 반항하는 경우에는 이 총으로 무조건 총살하였으며 그 증거로 반드시 총 맞아 죽은 사람의 잘린 손을 제출해야만 했다. 사람을 죽였다고 해 놓고 실은 짐승 사냥에 썼을까 봐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게 했던 것이다. 참 아깝기도 했던 총알이다, 쯧쯧.
이러한 폭압과 함께 백인들이 가져온 천연두 등 전염병으로 인하여 레오폴드 2세 통치 기간인 23년 동안 콩고 원주민 약 1천만 명이 죽어간 것으로 요즘 와서 거의 합의된 추정치가 나와 있다. 전체 원주민의 약 반이 한 사람의 눈 먼 욕망 때문에 목숨을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고무를 팔아 모은 거액의 부를 레오폴드는 ‘건축왕(Builder King)’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거의 대부분 거대하고 화려한 집을 짓고 거기를 사치품으로 꾸미거나 그 속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데에 쏟아 부었다. 지금 벨기에 곳곳에 남아 있는 거대하고 휘황찬란하며 고전적인 많은 공공 건축물 중 상당수가 바로 이 한 많은 콩고 사람들의 잘라진 손발로 쌓아 올린 것이다. 우리가 이런 나라에 - 비록 벨기에에 한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 구경 가서 그저 그 건물들의 웅장함과 화려함에만 놀라자빠져 찬탄하고 부러워만 한다면 이는 철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며 조금만 더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는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레오폴드 2세
레오폴드는 자기 개인 건물도 벨기에 국내외에 많이 짓고 소유하였는데 자기가 죽은 후 혹시라도 소유권이 다른 나라에 넘어갈까 봐 아까워서 죽기 직전에 다 벨기에 왕실에 헌납하였다. 자신은 두 딸 밖에 없고 두 딸이 다 외국에 시집갔으니 일면 이해도 된다만 참으로 남 주기는 죽어도 싫은 모양이다. 아무튼 지금 벨기에 왕족들이 그럴듯한 처소에 기거하며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은 이 덕분도 있다고나 할까? 레오폴드가 죽자 뒤는 조카인 알버트 1세(Albert I 1875~1934)가 이었다.
아무튼 1885년에 설립된 이른바 콩고 자유국은 레오폴드 2세의 끊임없는 폭정으로 신음하다 차차 이러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1890년대의 고무 붐은 매년 고무의 수요가 타이어, 호스, 전선 등의 생산으로 세계적으로 폭발한 것으로 레오폴드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1903년에 정점에 이른 후 생고무 값은 차차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동남아시아나 라틴 아메리카의 고무 농장들 때문이었고 이는 거의 다 영국인의 소유였다. 씨앗 도둑 헨리 위컴의 덕을 톡톡히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고무의 공급과 가격은 세계정세에 따라 급격히 출렁거렸다. 특히 전시에는 공급이 달렸는데 이렇게 물건이 귀해지고 값이 치솟자 각국은 여러 가지 대안을 모색하였고 그 중에는 인조 고무(Synthetic Rubber)의 발명도 있다. 인조 고무는 석유화학의 합성물인데 1909년 독일 바이에르(Bayer) 사의 실험실에서 프리츠 호프만(Fritz Hoffmann)의 팀이 처음 만들어 내었다. 그 후 각국의 여러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 첨가물이나 가공법을 개발하면서 그 질이나 종류가 폭발적으로 개선되고 늘어났다. 1940년에는 미국의 구드리치(B. F. Goodrich Co.) 사의 알도 시먼(Aldo Semon)이 값싼 인조 고무인 아메리폴(Ameripol)을 개발하였고 미국의 듀퐁(DuPont) 사에서도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신소재가 나왔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에 획기적인 발전이 많았는데 현재는 전세계 고무 생산량의 2/3가 인조 고무다.
그건 그렇고 1900년대가 지나면서 몇 번의 오르내림이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생고무의 값이 떨어질수록 레오폴드는 더 원주민을 쥐어짜 이익을 챙기려 했다. 안 그래도 지옥이던 콩고는 해가 갈수록 지옥의 지옥으로 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고 고무는 원가를 맞출 수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런 와중에 레오폴드의 통치는 그 추한 흉터를 들추는 외부의 틈입자나 간섭자들에게 속수무책이 되기 시작했다. 한 사람, 열 사람, 백 사람…, 사람이 늘수록 그 입을 모두 틀어막기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던롭
콩고 자유국 공안군
선교사들은 몰래 목격담을 기록하고 외부로 흘렸다. 레오폴드는 근거 없는 풍문이라며 ‘원주민 보호 위원회(Commission for the Protection of the Natives)’까지 만드는 촌극을 벌였다. 그럼에도 개인이나 단체로서 콩고의 참상을 고발하는 온 세계 구석구석의 (그래봤자 주로 서구 위주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었지만) 눈과 입들을 가릴 수가 없었다. 폴란드 출신 영국 소설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는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이라는 소설을 썼고 영국의 평화 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모렐(E D Morel 1873~1924)은 1900년에 폭로하기를 콩고에서 나오는 배에는 생고무가 실렸는데 콩고로 되돌아가는 배에는 총기와 총알만 실렸더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발과 비난의 대열에는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 1859~1930),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 버트랜드 러셀(Bertrand Russel 1872~1970)도 합류하였다. 영국 정부도 이때는 콩고 대사로 있던 아마존의 그 케이스먼트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내도록 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레오폴드는 가리늦게 콩고 자유국의 개혁을 약속했지만 국제사회는 등을 돌렸고 결국 벨기에 의회는 1908년, 콩고를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소유에서 떼어내 벨기에 왕국에 식민지로서 합병하기로 의결하였다. 콩고 통치의 전권을 넘기기 직전, 레오폴드는 콩고 자유국의 통치에 관한 콩고 내의 모든 기록을 삭제하고 없애 버렸다. 그래도 자기가 한 짓이 떳떳하진 않았나 보다. 그리고 1909년 12월, 그는 44년 동안 지켜 온 왕위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그 후 콩고는 52년이나 더 벨기에령 콩고라는 이름으로 내리 식민지 통치를 받다가 1960년에야 콩고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벨기에의 동남쪽 도시 아를롱(Arlon)에 가면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있는데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나는 문명에 득이 되고 벨기에에 좋으라고 식민지를 했다.”
(J'ai entrepris l'oeuvre de la colonisation dans l'intérêt de la civilisation et pour le bien de la Belgique.)
못된 원님일수록 송덕비가 거창하다더니 레오폴드가 평소에 한 말을 새겨 놓은 듯한 아를롱의 이 문구는 염치가 없어도 한참 없다. 이건 뭐 문명에 두 번 이득을 줄라 쳤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손모가지가 모두 남아나 났겠나 싶다. 벨기에 사람들에게는 약탈의 콩고물이 좀 떨어졌겠지만 말이다.
무릇 세계 각지의 광장이나 네거리에 서 있는 검푸른 동상이나 기념비 중에는 일방적인 부풀리기와 가리기, 말도 안 되는 어깃장 놓기와 억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특히 드높이 말에 올라타 고삐를 당기는 서구의 동상들은 뒤집어보면 침략과 정복, 포악과 살육의 표상에 다름 아닌 경우가 많으리라. 그 발굽과 칼날에 억울하게 짓이겨지고 잘려 나간 팔다리와 손발이 얼마일까?
저 아마존의 뻑뻑한 젖물로도, 콩고의 찰진 고무풀로도 도로 붙여 줄 수 없고 아물게 할 수 없는 이 지난날의 상처는 우리 모두가 갚아야 할 현재의 죄악이요 업장이다. 동서양이나 국적을 떠나서 그러하다. 만약에 우리가 그에 대한 기억을 쉬 지워 희떱게 잊어버리거나, 도무지 알려고도 하지 않거나 가벼이 여겨 뉘우치지 않거나, 잘못 알아 오히려 부러워하거나, 기회가 오면 나도 언제든 그렇게 할 욕망의 싹아지를 내심 간직하고 있다면.
아를롱의 레오폴드 2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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