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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묵상글 들 ( 부활 7주 금요일-우리가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뜻.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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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7주 금요일-우리가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뜻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이나 질문하시고,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주님께서
당신 양 떼를 맡기시는 오늘 복음을 읽고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해준 것만 생각나면 그 사랑은 작고도 얕은 사랑이다.
해주지 못한 것만 생각나면 그 사랑은 깊고도 큰 사랑이다.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을 때 배은망덕하다고 하면
그 사랑은 작고도 얕은 사랑이고,
자신이 사랑한 것조차 잊은 사랑은 크고도 깊은 사랑이다.
왜 이런 생각을 제가 했겠습니까?
당신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다시 사랑을 확인하시는
주님의 그 속 사랑이랄까 속마음이 손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저 같으면 배은망덕에 사랑이 내상을 크게 입고 정이 떡 떨어져
이런 인간하고는 더 이상 사랑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텐데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시는 주님은 밸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정이 똑 떨어지면 사랑은 근본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정이 붙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지
만정이 떨어지면 관계 자체를 맺고 싶지 않기에 사랑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뒤집어 얘기하면 수없이 다시 사랑하고 다시 사랑했는데도
매번 그 사랑이 배반당하여 만정이 떨어진 경우라면
그 탓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배반 때문이지만
한 번의 배반으로 정이 똑 떨어지는 사랑은,
실은 사랑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사랑인데도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작고도 얕은 사랑 때문이지요.
엄마와 애인의 사랑을 생각하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애인은 이벤트 한 번 해주고 대단한 사랑인 양 생각하지만
엄마는 자녀에게 해주는 모든 것이 다 사랑인데도
더 주고 싶은 것을 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미안해하지요.
그래서 애인은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만
엄마는 자식이 당신 사랑을 오히려 타박해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지 않고,
자식들이 사랑을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을 확인하려고 들지 않지요.
남편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엄마는 있지만
자식에게 사랑을 확인하는 엄마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자식의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따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엄마의 사랑에 백 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존심 꺾고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려는 것이겠습니까?
베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베드로의 말대로
주님께서 이미 다 아시기에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한 번의 배반으로 베드로와의 관계를
끝내지 않고 다시 한번 사랑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고,
배반을 사랑으로 만회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며,
사랑이 성장하고 확장하여 주님의 양 떼까지 사랑하게 하심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주님 사랑에 배반은 했어도 사랑치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도 비록 작아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지만, 사랑이 작은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작은 사랑도 하찮다고 무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너 나를 사랑하느냐?'고 매일 질문하심으로 우리 사랑에 매일 물 주시는데
비 내리는 이 새벽 그 사랑의 비에 젖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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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한 외국인 연구자가 각 나라의 1분당 평균 걸음 수를 조사했습니다. 미국은 분당 25걸음을, 영국은 분당 29걸음을, 일본은 평균 35걸음을 걷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의 평균 걸음 수는 어떻게 될까요? 놀랍게도 1분에 평균 56걸음을 걷는다고 합니다. 거의 1초에 한 걸음을 걷는 셈입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빠른 성취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나라가 정말로 빠르게 발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빨리빨리’ 문화는 빠르게 실망하고 빠르게 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무 급하게 원하는 결과를 구하려고 하다가 놓치는 것도 너무나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빠르게 서두르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다시 한번 생각하며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한 일을 언급하지도 또 그간의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운 모습을 야단치시지도 않으시면서 온화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이나 합니다. 즉, 베드로가 세 번의 믿음 고백을 하게끔 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착한 목자에 의해 지위를 회복하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사목자들과 함께 자신의 양들을 먹이도록 불리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던지셨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계속해서 이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막연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주님을 떠올리며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베드로가 들었던 주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나를 따라라.”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닌, 사랑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칙을 좇기보다 주님의 원칙을 좇아야 합니다.
급하고 막연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마시고, 왜 주님을 사랑하고 함께 해야 하는지를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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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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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갑곶성지에는 ‘천국의 문’ 봉안당이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시는 안치식을 거의 매일 하면서, 죽음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첫째, 죽음은 힘든 이별이며 커다란 상실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특히 사랑했던 만큼 그 고통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컷 울고 애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70년이 된, 80대의 할아버지께서도 이곳으로 부모님 유해를 개장하면서 펑펑 우십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나도 죽음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둘째, 죽음은 실패가 아닙니다.
질병, 노화로 인한 죽음이 의료적 실패나 기능불량이 아닙니다. 삶이 죽음에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죽음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셋째,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됩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계속된 질문 속에 지금을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은 어떠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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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과 사랑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그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충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당신께서는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시고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몰리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에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당신은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오니
제가 어떤 상화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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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 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옛말이 있듯이 많이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여기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 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입고 좌절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베드로는 배반을 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세 번의 사랑 고백이 우리 교회의 시작인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공생활 동안 하셨던 목자로서의 사명을 베드로가 이어받게 하셨습니다. 양들을 돌보는 고귀한 임무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함께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을 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관계가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만남이 사랑 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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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절)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은 다른 사도들을 제쳐 놓고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그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선택된 이며 제자들의 대변인이며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다른 사도들보다도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자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같은 곳) 하고 대답하였다. 십자가의 처형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한(마태 26,69-75 참조) 분을 세 번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세 번 사랑한다고 고백하도록 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은 오직 베드로를 위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15.16.17절)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돌보라는 말씀을 세 번 하셨다. 주님의 양 떼를 믿음의 음식으로 잘 돌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의 낙인(烙印)이 찍힌 주님의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양들을 돌보게 하려고 사목자들의 머리이신 분이 베드로를 사목자로 만드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양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피를 흘려 구원하신 양들이므로 베드로도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림을 말한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다. 이것은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바로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똑같이 숭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숭배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베드로는 쟈니꼴로에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19절)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처음에는 그들을 가르치시려 부르신 것이고, 지금은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자기 죽음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고난을 겪는 이에게 영예이며 영광임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위치라는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 되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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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 17)
사랑은
서로의 약함을
돌보는 것이다.
약함을
돌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우리자신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함을
기억하는 것은
사랑받았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약한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어린 양들을
돌보면서
예수님 사랑을
다시 만나게된다.
약함에
감사할 때
양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된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다.
약함에 대한
이해가
사랑에 대한
이해이다.
약함과 허물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이시다.
부활의 기쁨은
약함을 돌보는
사랑의 기쁨이다.
복음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이다.
약함을 돌보는
사랑과 무관한
것은 없다.
사랑에는
뜨거운 눈물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끄는
약함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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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일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고,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용서하신 것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용서 자체도 사랑이지만, 사랑하니까 용서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사랑을 몰라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강요하시는 말씀도 아니고,
회개는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사랑 없이 죄책감으로만 하는 회개는 많이 부족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주님을 사랑해서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뒤에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은 그가 이미 회개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회개를 완전하고 참된 회개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랑으로써 그의 회개를 완성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또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음을 그에게 알려 줄 필요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 자신이 스스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도들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말씀도 아니고,
다른 사도들은 베드로 사도보다 예수님을 덜 사랑해도 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랑 실천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실천과 나의 실천을 비교하는 일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천과 나의 실천을 비교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교만이나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만큼만 하면 되겠지.”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아시면서 왜 물으십니까?” 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말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다윗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다윗이 당신께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알고 계십니다(2사무 7,20).”
시편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4).”
이런 말들은 모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를 고해성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베드로 사도의 성찰, 통회, 정개, 고백은 이미 이루어졌고,
예수님의 용서도 이루어졌고, 이제 베드로 사도의 보속만 남은 상황입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마태 16,18-19)
재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그에게 보속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은 분명히 ‘큰 잘못’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취소하시기는커녕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지위와 권한과 임무를 분명하게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든지 원상 복구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아주 잠깐 동안 ‘부러진 갈대, 연기 나는 심지’가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고,
베드로 사도 자신은 곧바로 통회함으로써 예수님의 은총에 응답했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회개했다면 원상 복구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했고,
그래서 그는 영원히 배반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2)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라는 말씀을
베드로 사도에게 보속을 주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보속은 그의 ‘임무 수행’을 겸한 것으로서 평생 해야 할 일입니다.
‘보속’은 ‘벌’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보속’을 ‘죗값을 치르기 위한 괴로운 숙제’로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또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보속을 실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은 연옥에서의 보속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곳입니다.)
<‘어린 양들을 돌보는 일’은 베드로 사도가 실천해야 하는 ‘예수님 사랑’입니다.
(원래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이들’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기를 바라십니다(마태 25,40).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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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사도 행전의 저자는 사도 바오로 대해서 연속적으로 또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천인대장은 사도 바오로가 죄가 없고 다만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하면서 펠릭스 총독에게 보냅니다.
그도 역시 바오로에 대해 판결을 보류합니다.
그의 후임자 페스투스 총독도 천인대장이 파악한대로 바오로가 죄가 없는 정황을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 합니다.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사도 25,18-19)
페스투스 총독은 바오로를 로마 황제에게 보내기까지 감옥에 가두었다고 아울러 왕에게 보고 합니다.
로마 법에 범법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사도 바오로는 풀어주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는
그는 사도 바오로를 풀어주지 않고 로마 황제에게까지 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결국 무죄한 사도 바오로는 사형을 받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죄도 없으면서도 유대인들의 폭동이 두려워 빌라도가 결국 그들의 손에 넘겨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게 한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번은 한 형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자기 부인이 요즈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오면 그전에 전혀 하지 않던 질문을 느닷없이 한다고 합니다.
‘나 이뻐?’ 아니면 ‘당신 정말 나 사랑하는 것 맞지?’ 그런데 너무 멋쩍기도 해서 대답은 늘 자신의
마음과는 다르게 빗나간다는 것입니다.
‘당신 요즈음 왜 그래?’ 때로는 ‘당신 어디 아파?’ 그 형제는 늘 부인을 신뢰하고 사랑하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인간적이 사랑은 처음부터 이상적이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사랑의 가장 큰 모델인 부부
사랑에는 시간이 가면서 긍정과 부정적인 것이 합해지면서 완성되어 간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하나의 완제품으로 보려는 착오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부부사랑은 눈에 콩까지가 씌었을 때와 살아가면서 실망과 때로는 후회 등의 차이가 합쳐서 성숙되고
원숙 단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문득 언젠가 우리세대에 유행했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1)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흔히 말하잖아요. ‘인생에 정답이 없듯, 사랑에도 딱 맞는 답은 없다.’라고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공생활을 하시며 복음선포의 여행을 다니십니다.
철저한 유다인인 그들은 유일신 사상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오랜시간이
걸렸고 복음에서는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서야 스승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가 서 계십니다. 그들은 스승을 잃고 더 이상 실망스런 예루살렘에
머물리 않고 자신들의 고향이며 일터인 갈릴리 호숫가를 찾습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그들이건만 밤새도록 호수에서 그물을 쳐보지만 한 마리도 못 잡는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주님께서는 호숫가 저 멀리 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그 모습 그 목소리로 큰 소리로 배에 대고 물어 보십니다.
“예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5) 그들의 실망은 미처 스승의 정다운 목소리마저 잊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의례적인 대답을 할 뿐입니다. “못 잡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의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그들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들은 한 순간에 엄청난 고기가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 호숫가에 서 계신 분이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베드로는 옷을 벗고 있다가 반가움에 겉옷을 걸치고 호수로 뛰어 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숯불에다
고기를 굽고 빵을 준비해 놓고 아침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다운 목소리로 잡은 고기를 더 가져오라고 이르시고는 그들을 아침식사에 초대하십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살아나신 주님에 대해 서먹하고 뜨악한 표정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아침식사를 하신 후에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에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에 다시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시자 사도 베드로는 슬퍼하며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2)
그러고는 주님께서 세 번 다 당신 ‘내 양을 돌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질문을 광경을 보면 주님께서 수난 전에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3)
주님을 사랑하고 따른다는 것은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말이 있듯이 한 번에 완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의 스승에 대한 세 번의 부인, 사도 바오로의 교회에 대한 박해 행위와 그가 고백한 인간의
이중성4) 등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기에는 반대되는 듯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한계가 주님 사랑으로 가는 발판이 되리라는 사실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라는 말은 연필로 쓰는 것보다도 더 쉽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지개 빛 만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에도 고통과 아픔이 따른다면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처럼 주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의
생명과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이중성을 발판으로 주님께서는 이들을 복음선포의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요한은 복음에서 주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합니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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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수 전용록의 힛트곡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1983. 작사: 유영진, 작곡: 남국인)가 생각납니다.
꿈으로 가득차 설레이는 이가슴에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
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시고 베드로가 답하는 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첫 번째(21,15)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른 이들과 비교 하시며 ‘너는 나를 이들보다 더 사랑하느냐?(아가파스 메 프레온 투톤 ἀγαπᾷς με πλέον τούτων)’라고 질문하신다. , 두 번째(21,16)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스 메 ἀγαπᾷς με)’라고 질문하신다. 세 번째(21,17)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Φιλεῖς με)’이시다. 베드로의 첫 째 두 번째 대답은 ‘예, 주님’이라고 하며 ‘당신을 사랑합니다.’이지만 세 번 째에서는 주님께서 물어보실 때. ‘예 주님(나이, 퀴리에(Ναί, κύριε)’라는 자신 있는 말이 없고 대신 ‘주님, 당신은 다 아십니다(퀴리에, 판타 수 오이다스 Κύριε, πάντα σὺ οἶδας)’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수 기노스케이스 호티 필로 세 σὺ γινώσκεις ὅτι φιλῶ σε)’라고 대답한다.
첫째, 둘째에 이어서 세 번째 베드로의 대답은 자신과 연결된 모든 것과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대답한 것이다.
3)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실을 기록한 공관복음(마태 26,69-75; 마르 14,66-72; 루카 22,55-62)에 비해 요한은 그 상황을 시간적으로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요한 18.15-18.25-27) 요한에 의한 베드로의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과 세 번 사랑고백의 장면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이 20,31로 끝나고 21,1-25은 후대에 초대교회 상황 때문에 첨부 편집된 것으로 학자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4) 사도 바오로의 인간의 이중성은 ‘의인과 죄인(simul justus et simul peccator)'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겨이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서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로마 7,21-24) 사도 바오로는 이런 이중성이고 모순적인 자신의 비참함에서 오로지 주님만이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수 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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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분과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요?’ 교우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원예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꽃을 사랑하고, 전례 꽃꽂이를 하시기에 원예를 통해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모래치유라는 말도 들어봤고, 장난감치유라는 말도 들어보았습니다. 꽃과 나무를 통해서 메마른 감정에 사랑의 광합성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 열매 맺어서 슬픔은 기쁨이 되고, 절망은 희망이 되고, 근심은 담대함으로 변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설교학에 대한 자료를 더 많이 모았을 것 같습니다. 책도 번역하고, 강의 준비를 철저히 했을 것 같습니다. 처음 강의를 하면서 준비도 부족했고, 열정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으로 오면서 강의를 다른 신부님께 넘겨 드렸지만 아직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영신수련’ 공부를 좀 더 체계적으로 했을 것 같습니다. 신학생들과 함께 30일 피정을 하면서 영신수련의 구조와 체계는 잘 모르면서 열정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년에 북미주에 계신 수녀님들과 함께 피정을 하기로 했습니다. 1년의 여유가 있으니 차분하게 피정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시즈프스’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사람들이 현재로 넘어온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싶어서 넘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넘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넘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일확천금을 얻으려고 넘어옵니다. 경마의 결과, 복권당첨 번호, 주식의 정보를 가지고 넘어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교회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 주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3번하십니다. 베드로는 3번 대답하면서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충분히 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3번 질문하신 이유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반을 충분히 용서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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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천국天國이다 -
며칠전 산전수전 온갖 고통 다 겪고 면담고백성사시 꽃처럼 앉아 있던 자매에게 확신에 넘쳐 드린 위로와 격려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천국의 삶을 사십시오. 그 힘든 생지옥같고 연옥같은 수십년의 세월을 참 장하게 믿음으로 통과하셨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대로 보속의 삶이었습니다. 참 어려운 굽이굽이 산전수전 고난의 고비들을 다 넘었습니다. 이제부터 꽃처럼 감사와 기쁨 가득한 천국의 삶을 사십시오.”
새벽에 일어나 카톡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전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사입니다. 대단한 언변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기쁨에 가득 찬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기쁨에 가득 찬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선교사의 삶’은 그대로 ‘하느님의 꽃’ 같은 삶입니다. 이른 봄부터 피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에 이어 수도원 곳곳에서 계속 피고 지는 다양하고 무수한 꽃들의 화사한 행렬입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곳에 몇 달간 계속 피고 지는 샛노란 애기똥풀꽃을 보며 어제 써놓은 ‘꽃처럼’ 이란 글입니다. 노오란 애기똥풀꽃의 꽃말,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 참 아름답습니다.
-“볼품없이 초라한 버려진 땅, 자리 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며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내려다 보시면, 볼 수 있으면 행복이다
누가 보아 주든 말든, 알아 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때되면 꽃처럼 활짝 피어나, 주변을 환히 밝힌다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구원의 꽃자리 천국天國이다”-
그대로 우리 정주의 수도공동체 형제들을 닮은 꽃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꽃다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문득 어제 읽으며 메모한 글도 생각납니다.
“헤르만 헷세는 자신이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무상無常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충고한다. 예를 들면 열흘 동안 화병에 꽃힌 채 시들어가는 백일홍 관찰하기, 그 잎의 뒷면도 세세히 들여다 보기,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장미의 모습을 생생하게 감동적으로 응시하기, 그렇게 해서 삶의 무상함에 대해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하여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그대로 삶의 관상적 측면에 주목하라는 충고입니다. 사랑의 관상觀想, 관상의 아름다움입니다. 어떻게 하면 각자 주어진 정주의 자리에서 꽃처럼 아름다운 관상적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사람마다 자리는 다 다를 것이나 그 방법은 단 하나 똑같습니다. 바로 답은 사랑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세 번 거푸 주고 받은 물음과 답이 바로 아름다운 삶의 비결을 알려줍니다. 삶의 자리는 다 달라도 모두에게 공통된 진리를 보여줍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 대신 내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매번 똑같이 당신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종전처럼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지 않고 그냥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질문하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속까지 아신다고 겸손히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정화된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입니다. 어제 읽은 유명했던 여배우 윤정희 데레사의 남편 피아니스트 백건우 요셉 마리의 인터뷰중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이 진정한 음악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어 오면, 난 항상 이렇게 대답하죠. ‘음악은 마음의 순수한 상태’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물음입니다. “예, 주님을 사랑합니다!” 답은 이 하나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때 비로소 마음의 순수요 꽃같은 삶입니다. 사랑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요즘 곳곳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새하얀 찔레꽃들이 ‘마음의 순결’을 상징하는 듯 참 반갑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를 향한 말씀이 구체적 당신 사랑의 처방을 알려 줍니다. 세 차례나 매번 대동소이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내 양떼인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 형제들만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피조물 형제들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분명 생태적 회개의 사랑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모범이 성 프란치스코요 이 성인을 많이도 닮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말씀이 예수님 사랑에 대한 결정적 행위의 응답을 촉구합니다.
“나를 따라라.”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이웃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이제 제1독서 사도행전도 거의 막바지입니다. 복음의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베드로처럼 바오로에게도 순교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예감케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는 바오로의 삶에서 사도의 한결같은 주님 사랑을 확인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당신을,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며 당신을 잘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다음의 공동고백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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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이 되라는 사명에 대한 확증’이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주님의 파견 사명으로 베드로는 교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하십니다(『나자렛 예수』 1권 참조).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사제품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돌보시고자 “나의 양을 사랑하겠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점입니다. 사목의 대상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연결이 없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양을 돌보되 “삯꾼”(요한 10,12)에 지나지 않으며 “착한 목자”(요한 10,11)는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은 사목자뿐 아니라 교우들에게도 해당합니다. 성당에 다니는 이유가 ‘주님을 믿으려고’라고 말하면서, 주님보다는 성직자나 수도자 또는 신자들을 보고 쉽게 낙담하거나 슬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다가도 뒤돌아 섰다가 회개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어보셨듯이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까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주님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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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시기의 막바지에 이른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간 사랑의 대화를 들었고
독서에서는 바오로를 로마인들이 로마로 압송하게 된 사연을 들었습니다.
- 복음 대화의 재료는 베드로의 배반이었으므로 세 차례에 걸쳐 행해진 부인 행위를
사면하는 뜻으로 신앙도 세 번 반복해서 고백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독서 편지의 계기는 형식상 로마인들이 피고소인이. 변호를 받을 로마법상의 권리를
인정하기 때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바오로가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면서
로마법에 의한 정식 재판을 황제에게 항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베드로의 배반이란 그가 스승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가셔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에
그 자리를 얼쩡거리다가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어 추궁을 당하자 얼떨결에 모른다고
스승을 부인한 수제자의 죄를 말합니다. 바오로가 고소를 당한 죄목은 이미 죽었는데
살아있다는 종교적인 부활주장으로서 로마관헌들과 황제는. 본의 아니게
로마의 재판정에서 부활 신앙을 공식재판을 통해 공표하게 되었습니다.
-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이고 독서에서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한복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판은 신앙에 관한 사랑의 심판이요 재판은 부활에 관한 종교사항 재판입니다.
심판이든 재판이든 무척 엄중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분위기는
둘 다 매우 싱겁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심판은 어차피 죄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해 주기 위한 심판이고, 바오로의 재판도 로마인들은. 하도 많은 신들을
믿고 있고 그 신들이 죄다 부활과 같은 하늘의 사정이나 내세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지라 무죄로 판결날 것이 뻔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발현하셔서 물으셨던 질문은
우리가 지녀야 할 부활 신앙의 은총스러운 효과를 알려줍니다.
그분은 죄를 따져서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없애고
용서하기 위해서 발현하십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이 싱거운 심판을 보면 죽은 다음 하느님의 법정에서 받을 심판도
매우 싱거울 것 같아서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해 줍니다.
정작 예수님께서 가지신 관심의 초점은 베드로의 배신죄라든가 배신의
횟수가 아니었고, 베드로가 당신의 양 떼를 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시고
이를 위해 체면을 세워 주시려고 베드로의 입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래도 다른 제자들보다는
수제자가 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시는,
그래서 질문을 하시는 것인지 고백을 하시는 것인지 단정 짓기 어려운 말씀으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복음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도
베드로처럼 수시로 또 세 번도 더 넘게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책임을 잊어버리고
결과적으로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입니다.
바오로의 목표는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함으로써 복음선포의 효과는 극대화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로마에 압송되기 위해서 로마 시민권을 발동했을 뿐,
어차피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부활 신앙 문제를 꺼낸 이유는
바리사이들을 끌어 들여 사두가이들을 제쳐놓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사실 바오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인생이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니던 시절의 자신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대단한 영적 진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도 바오로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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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빵과 물고기로 새벽 허기를 채워주신 뒤,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베드로는 세 차례나 반복된 질문에 슬퍼하며 답하지요. 이 장면을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실패에서 베드로를 일으켜세워 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서 우리 안에 반복해 울리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은 부르심을 받아 주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우리에게 '신앙이란 바로 사랑의 문제'임을 각인시킵니다. 신앙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끄시며 구원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머무릅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시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두셨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그의 신앙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등장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사도 25,15)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기득권자들 입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처단한 뒤 그분의 추종자들도 경계하며 손을 댑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가 명백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고 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의를 표현한 기존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사랑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위험해 보였던 것일까요?
그런데 율법의 정신과 내용이 사랑이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며 예수님은 그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사실 그 둘은 다르지 않지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사도 25,19)
이 견해는 율법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면서 직책상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죽었지만 그 추종자들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일어난 귀찮은 분쟁일 뿐이지요. 이 시각이 어쩌면 지금 이 세상의 입장과 유사할 수도 있습니다. 방관자이고 구경꾼이면서 적당히 이득을 취할 기회 정도로 신앙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부르심 받은 신앙은 율법이나 이익 이전에 사랑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 역시 사랑 때문에 그분께 응답해 지금 여기 존재합니다. 감히 섞일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을 지닌 신과 인간이 사랑 때문에 만나고 사랑하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그런데 이 사랑은 처음에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싶다가, 결국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고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원하지 않는 곳,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이 오묘해서 한때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방식을 그때에는 기꺼이 받아안게 될 것입니다. 강렬했던 원의마저도 사랑 안에 형체도 없이 녹아들어 사랑과 하나가 되어 버릴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사랑이 되어갈 것이니까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그때 비로소 사랑이 된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제 진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처음의 부르심과는 다른 차원이 펼쳐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또 물으십니다. 우리도 "예,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지치지 말고 대답하고 또 대답합시다. 사랑을 물으시고 구걸하시는 주님께 마음을 다해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이들이니까요.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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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의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세 번의 물음은 일찍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베드로의 배반을 상기시키면서, 그의 세 번의 배반을 치유해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면서,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오늘의 이 말씀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서약한 사제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제들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신자들을 잘 돌보아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신자들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작년에 코로나가 한창 일 때, 어느 개신교 목사가 방송에 나와, 코로나 지침을 따르지 않는 목사들을 두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목사들이 있다." 라고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살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제의 삶이든, 신자의 삶이든,
모두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고, 말씀하셨고, 행동하셨을까?'를 먼저 숙고해 보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의 '참된 삶'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인간적인 사랑인 '필레오'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인 '아가페'로,
각자 자기성소에서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기쁘게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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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더 이상 스승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참으로 특별하고 의미심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단과 아침식사를 끝내신 다음,
수제자와의 개별 면담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나 던지시는데, 그 질문 하나가 분위기를 참 묘하게 만들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복음 21장 15절)
시몬은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 그러나 진정성이 조금 떨어지는 대답을 습관적을 하고 있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또 한번 더 하시고, 거기에 또 한번 보태셔서 세번이나 거듭 물으셨습니다.
그제야 시몬은 동일한 질문을 세번 건네시는 스승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셨습니다.
얼마전 시몬 자신이 스승님을 세번이나 배신한 수치스런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고단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야단 한번 치지 않으시고, 언성 한번 높이지 않으시고 똑같은 질문 세번을 통해, 수제자 배반 사건을 은근히 질책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 세번을 통해 수제자에게 초강도 정신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똑같은 세번의 질문에 거듭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면서 수제자는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스승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면 끊어졌지 더 이상 스승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고단수이신 예수님의 특별한 제자교육방식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수제자 직분을 수여했지만 베드로 사도가 못내 못미더웠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럭비공 같아서 언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뜨겁게 타올랐다가도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다혈질 베드로 사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질문을 거듭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런 예수님의 진의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스승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제자의 세번이나 반복되는 사랑 고백이자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그때 마다 한 가지 당부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얼마나 고마운 예수님의 당부인지 모르겠습니다.
세번이나 배반한 수제자, 그러나 크게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거듭난 수제자에게 건네신 스승님의 신신당부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시면서 수제자에게 우리 양들을 잘 돌보라고
간곡히 당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도 듭니다.
예수님 권고 말씀에 따라 사목자로서 양들을 잘 돌봐서 영적·육적으로 살찌우게 만들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오히려 목자가 양들을 힘들게 만들고, 궁지로 몰아넣고, 짜증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큰 걱정이 앞섭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에 따라 세상의 모든 목자들의 양들을 좋은 풀밭으로 잘 이끄는 존재, 양들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존재로 거듭 회심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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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요한 21,15-19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7명이 탄 제자들의 배가 153마리나 되는 물고기를 잡게 만드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 양 떼를 맡기시며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3번 고백하게 하십니다.
분명 3번의 사랑 고백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모른다고 한 것의 죄책감을 씻어주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교회에 당신 자녀들을 맡기시는 방식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더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게 될 때, 예수님은 안심하고 그 목자들에게 당신 자녀들을 맡기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위해 당신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피로써 성직자들이 순결해지면 성직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분의 양 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자녀들을 맡아 키우는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를 위해 먼저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녀들의 피에 남편 피도 반은 섞여 있기에 아내가 자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아내가 자녀를 위해 남편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남편도 자녀를 위해 아내가 자신을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영화 ‘바보’(2008)는 강풀 만화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등장인물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혼자 토스트 가게를 하며 고등학생 여동생 지인이를 돌보는 승룡이가 있습니다.
지인이는 바보인 오빠가 싫어서 학교에도 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바보 승룡이는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인 지인이를 잘 보살피라는 것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승룡이는 원래 바보였던 것은 아니고 연탄가스 누출로 아버지는 사망하고 자신은 그런 장애를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승룡이에게는 다방을 하는 양아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동창인 그 친구가 실수로 불을 내 학교 피아노를 태워버린 일이 생겼을 때 바보 승룡이가 대신 다 뒤집어쓰고 덮어줘 승룡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습니다.
승룡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좋아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지호라는 아이인데 피아니스트로 성공하는 게 꿈이여서 유학을 갔다 1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승룡이는 지호가 오기만을 10년째 언덕 위에서 기다리는 그런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지호는 승룡이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호는 사실 유학의 압박감으로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기대 때문에 그 사실도 말 못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지호는 조건 없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승룡이에게 점점 고마움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승룡이뿐입니다.
다시 피아노를 치기가 두려운 지호에게 승룡이는 초등학교 때 했었던 학예회처럼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학예회때 무엇을 쳐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그냥 쳤었던 기억을
지호는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치던 노래를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이 승룡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지인이도 신장이 좋지 않습니다.
신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기적처럼 다방을 하는 양아치 친구 상수가 지인이와 신장이 맞아 하나 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를 질투하던 다른 조폭에 의해 그는 위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를 승룡이와 착각한 조폭들이 상수 대신 승룡이를 죽입니다.
이제 지인이는 지호와 상수가 지킵니다.
지호는 다시 피아노를 쳐서 그 돈으로 지인이의 학비를 대고 상수는 다방을 접고 승룡이가 운영하던 토스트 가게를 이어받아 지인이를 지켜줍니다.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화가 아니면 승룡이와 같은 그런 만화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승룡이의 바보 같은 사랑으로 지인이는 잘 지켜질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지인이를 돌보려 했다면 언제나 바보 같은 오빠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만든 친구들이 있어서 지인이도 오빠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는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피곤해서 잠만 자고 집안일도, 자신을 위해 놀아주어도 재미가 없는 그냥 그런 아버지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빠는 바보 같은 사랑으로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자녀에게도 사랑받습니다.
혼자 자녀를 키울 수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부모라는 두 명의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마음이 얼음과 같이 되어 냉병을 앓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녀를 어떻게 잘 키우겠습니까?
남편은 자녀들보다 우선 아내의 병을 고치려 노력하였습니다.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난로까지 피워야 하는 아내와 바보처럼 고통을 함께 했습니다.
땀띠가 나면서도 자신과 함께 있어 주려 하는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여 아내는 심장의 얼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리고 냉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이 아내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들은 아빠를 고마워하게 됩니다.
엄마를 돌려준 분이 아빠라는 것을 아이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세포 안에는 아빠와 엄마의 유전자가 반반씩 섞여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사랑한다면
(물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면 자기도 사랑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지만) 아이를 반밖에 사랑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한다면 자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빠는 이를 위해 아내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바보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치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세 번 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인 교회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만든 다음에 우리 양 떼를 돌보라고 파견하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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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1.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25,13ㄴ-21)
"그 무렵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13~14)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19)
사도 바오로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자 총독 페스투스는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덜게 되어 상당히 홀가분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상급 법정에 제출할 '고소의 형식' 곧 사건의 개요를 담은 보고서 (사도23,26~30)를 작성해야만 했다(사도25,26~27).
그런데 페스투스는 유다인들과 사도 바오로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통해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재료(사도25,26)를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무능한 관리로 로마 황제에게 낙인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 사건을 제대로 심리할 서류나 사람을 필요로 했는데, 그때 마침 등장한 이가 바로 유다 종교 문제에 정통한 아그리파스 임금 (Herod AgrippaⅡ)과 그의 누이 베르니케였다.
페스투스는 유다인들이 고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는데, 첫째는 자기들의 종교 문제요, 둘째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는 '예수의 부활'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문제의 고소 사건은 이미 사도행전 18장 12~17절에서 언급된 갈리오 총독의 재판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로마 법정의 심리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한편 '종교'라고 번역된 '데이시다이모니아스'(deisidaimonias)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 긍정적 의미로 '신에 대한 경외심', 둘째 부정적 의미로 '미신' (superstition), 그리고 셋째 객관적 의미로서의 '종교' 이다.
대체적으로 당대의 로마의 관리들은 종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특히 식민지의 종교에 대해서는 멸시하였다.
아마도 총독 페스투스도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극히 세속적 성취욕만을 가진 로마 관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그리파스 임금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 '성전 후견인'의 권세를 부여받은 자로서 유다 종교에 정통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페스투스는 아그리파스 임금이 신봉하는 유다교를 미신으로 단정짓고 '미신'이라는 비하조의 의미로 종교를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그리파스 임금을 의식하여 중립적인 의미에서 혹은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뉘앙스로 '유다인의 종교'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는 이전까지 주요한 고소거리 가운데 하나였던 성전 모독죄(사도25,8; 24,6)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이란 주제가 거론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유다인들에게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으므로 교리상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경우였는데, 이것은 사도 바오로를 고소한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포함한 유다교 지도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신들이 오히려 난감한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부활했든지간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는 그 사실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비록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과 동일한 수법(루카23,4.14)으로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하시켜 사도 바오로를 죽이고자 했지만, 총독 페스투스는 이 문제가 단순히 유다 내의 종교적 사안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요한21,15~19)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15,16.17)
요한 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을 세 번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스'(agapas),'아가파스'(agapas),'필레이스'(phileis)라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로'(philo),'필로'(philo),'필로'(philo)라고 대답한다.
이들 동사에서 첫번째와 두번째의 경우에 원형은 '아가파오'(agapao)이고, 세번째는 '필레오'(phileo)이다.
먼저 '필레오'(phileo)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자신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내지만, '아가파오'(agapao)는 그러한 관계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이고 신적(神的)인 사랑이므로,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아가파오'(agapao)동사를 통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자신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드러내고 싶어 '필레오'(phileo)라는 동사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아가파오'(agapao)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서 이루어진 사랑처럼 가장 고귀한 사랑을 가리키는 반면에, '필레오'(phileo)는 인간적인 열정이나 애착 같은 일시적 사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가파오'(agapao)를 통해 고귀한 신적(神的) 사랑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필레오'(phileo)를 통해 계속 인간적인 사랑만을 고백하자, 결국 예수님께서도 17절에서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에 국한하여 '필레오'(phileo)로 물으셔서 베드로가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가지 차원의 접근에서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첫번째의 경우, 요한 복음 21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처럼 '필레오'(phileo)로 물으시고 베드로도 '필레오'(phileo)로 대답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뜨거운 사랑을 인정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베드로가 슬퍼했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이 주장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의 경우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적인 사랑에 맞추어 주셔서 베드로가 슬퍼했다는 것도, 요한 복음 21장 15절과 16절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긍정하는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볼 때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엄밀히 따져 보면, 베드로가 슬퍼한 이유는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과거에 세 번 배반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은 신약 성경에서 대부분 '아가파오'(agapao)와 '필레오'(phileo)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친밀성을 드러내기 위해 혼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 3장 35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에서는 '아가파오'(agapao)가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 5장 20절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에서는 '필레오'(phileo)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 번을 물으신 질문에서 어떤 용어가 사용되었는가보다는, 같은 질문이 반복되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고 본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증함으로써, 베드로를 당신이 도래시킨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수위권을 가진 사도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질 반석과 같은 교회의 수위권을 가진 사도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이다.
과거를 추궁하는데 중점이 이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네가 나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묻는 미래에 중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충성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베드로의 과거를 책망하실 수도 있고, 앞으로의 새로운 출발에 대한 당부도 하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모시고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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