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한(헌)의 눈물
2021.4.10
산티아고 가기 전 (2017년 4월)
올레길을 걸으며 예행연습 할 때, 추자도의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최경한의 묘소를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를 바라볼 수 있는 양지 바른 곳이었습니다.
마치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를 그리며 눈물짓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추자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네 개의 섬과
아무도 살지 않는 서른 여덟 개의 섬으로 모여 있다.
올레길의 총거리는 18.2Km인데, 안내책자에는 약 6~8시간 걸린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꼭 가볼만한 곳을 꼽으라면
후포해수욕장 근처의 나바론 절벽 능선길과
하추자도의 몽돌해안을 추천한다.
몽돌해안은 약 200m가량 이어지는 아늑하고 자그마한 바닷가인데,
해안 옆으로 난 숲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천주교의 성지가 된 황경한의 묘가 있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제주관노로 유배된 정난주 마리아 부부의 아들인
황경한이 묻혀있는 곳이다.
황경한의 아버지는 황사영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렸고,
17세의 나이에 진사시험에 급제하는데,
정조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
“네가 20세가 되면 벼슬을 주겠다”라고 했다.
임금의 총애를 배경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황사영은
당대 석학들과 학문을 교류하던 중,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과 결혼하며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황사영은 처가로부터 천주교리에 대해 전해 듣고,
천주학의 그 오묘한 이치에 매료되어,
순탄한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통스러운 일생을 선택한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받은 그는 활발한 선교를 하는데
1801년, 수많은 신자와 주문모 신부, 정약종 등이 체포되는
신유박해 사건이 일어나, 그도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는다.
그곳 토굴에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세필로 명주천에 적어
북경 주교에 보내다 발각되어 체포된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으로
사지가 찢어지는 형벌을 받고 숨진다.
이때 그의 나이가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 이윤혜는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를 각각 유배된다.
부인 정난주(마리아)는 1773년 유명한 남인이요,
신자 가문인 정약현의 맏딸로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의 조카고,
천주교 103 성인 중의 한분인 정하상의 누이이다.
18세 때인 1790년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고
1866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정 마리아는 두 살 난 아들을 품고 귀양을 가게 되는데,
추자도에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경한이 죽어서 바다에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부탁한다.
사공들은 추자도에 이르자,
해변 언덕배기에 어린 경한을 내려놓는다.
소를 뜯기던 부인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아기가 있어 집으로 데려와 기르는데,
저고리 동정에 부모와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가 바로 뱃사공 오(吳)씨 였다.
지금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도 생겨났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는 이곳에 묻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보이는 바다로 튀어나온 바위가 바로
두 살 아기가 버려져 울던 장소이다.
제주교구에서는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한편 제주도에 도착한 정마리아는
관비라는 쓰라린 유배 생활이 시작된다.
대정 관노로 유배된 그녀는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정마리아는 김 씨 자손들에게
‘한양 유모, 한양 할머니’로 불리며, 점차 자유로운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관비인지라 죽을 때까지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1838년에 선종하여 대정성지에 묻혀 있다.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로 인해 박해를 피해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뿔뿔히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되고
바오로의 회심으로 이방세계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와같이 황사영 알렉시오의 순교로
제주도에 정난주 마리아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고,
추자도에는 황경한이 씨앗이 된 것입니다.
아래 사진들은 최근에 조성되고 지정된 111번 째 천주교 성지모습
황사영 백서[帛書 - 비단위에 쓴 글] 사건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지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서 자기가 겪은 박해상을 기록해 두었다.
이 때 박해를 피하여 배론까지 찾아온 황심(黃沁)을 만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길이 62㎝, 너비 38㎝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양력 10월27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이 9월 26일에 체포되어 백서는 사전에 압수되고,
황사영 자신도 9월 29일 잡히는 몸이 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1785년(정조 9) 이후의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 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 축소된 백서를 이른바 ‘가백서(假帛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Mutel,G.C.M.) 주교가 입수하여,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로마교황에게 전달되었다.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1831년 조선교구로 설정되기까지 조선의 신자들은
30년간 북경교구에 소속되어 사제없이 신앙생활을 했기에
교황청에서는 조선교회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신유박해 순교자료가 없었는데, 백서가 발견되어
순교자들의 약전을 토대로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르게 된 것이다.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를 비롯하여
1831년 이전 순교하신 선조들에게
성인품에 오르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