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양의 군수물자 미군으로부터 인도 받는 한국군
미군이 남기고 가는 무기
1953년 7월 27일의 휴전 뒤 나는 그런 전쟁 뒤의 복구 사업으로 인해 쉴 틈이 거의 없었다. 전후 복구 사업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 등은 대개 미국에서 건너왔다. 민간 차원의 협조 또한 없을 수 없었으나,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행사하던 존재는 미군이었다.
전쟁 복구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시 물자의 일부를 전용해 민간의 시설을 다시 세우기도 했고, 미군이 물자를 이동시키는 경로를 통해 미국 본토로부터 물자 등을 공급 받아야 했다. 그런 모든 과정이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를 통해 이루어졌던 까닭에 내 임무 또한 가볍지 않았다.
미국으로 철수하는 참전 미군은 많은 물자를 남기고 갔다. 우선 무기와 장비 등이 그랬다. 각종 총기는 물론이고 탄약과 유류(油類), 진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축성(築城) 장비 및 자재, 공병과 병참 등이 사용하고 남긴 모든 물자 등은 우리에게 정말 요긴했다.
미군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물자와 장비는 최대한 받아내는 게 우리의 목표이기도 했다. 경제력이 빈약한 한국의 당시 사정으로 볼 때 미군이 남기고 떠나는 물자는 당장 우리 군이 무장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후한 편이었다. 남기고 가는 상당수의 물품을 한국군이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8인치 곡사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군의 인계 물품 목록에서 빠져 있는 점이 눈에 띄었다. 8인치 곡사포는 적의 강력한 진지를 파괴할 수 있는 155㎜에 비해 더 화력이 셌다. 상황이 심각할 때 핵을 투사할 수도 있는 최고 성능의 야포였다.
나는 이 문제 때문에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을 찾아갔다. 한국군의 독자적인 방어를 도우려면 8인치 곡사포도 내줘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테일러 사령관과 나는 이미 가까운 사이로 변한 상태였다. 휴전 직전의 대규모 중공군 공세가 벌어졌던 금성전투에서 함께 싸워 그를 물리친 뒤였기 때문이다.
테일러 사령관은 내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전략적인 무기에 해당한다는 점 때문에 인계를 꺼렸으나 그의 응낙에 따라 문제는 수월하게 풀렸다. 그로써 전선에서 미군이 운용하던 각종 무기는 한국군의 수중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105㎜와 155㎜, 8인치 곡사포에다가 M-46전차까지 받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양의 화약, 탄약, 포탄 등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트럭을 비롯한 각종 공병장비도 받을 수 있었다. 한국군이 향후 4~5년을 충분히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 휴전 직후 한국군은 하루 빨리 전력을 증강해 미군 철수로 생긴 공백을 메우면서 휴전선 단독 방어에 나서야 했다.
1953년 군 부대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모습이 보인다. /백선엽 장군
학교, 병원, 고아원을 세우다
전쟁이 벌어져 한국 땅에 올라선 미군은 연 인원 200만 명에 달했다.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미군과 물자, 장비 등이 쉴 새 없이 한국에 올라서면서 미국의 강력한 힘은 어느덧 한국 전역에 퍼지고 있었던 셈이다. 전국 곳곳에서는 활발한 복구 사업이 펼쳐졌다.
사업의 명칭은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였다. 미군은 무기와 장비 등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고도 열었다. 복구를 위해 필요한 시멘트와 철근, 목재와 유리 등은 전부 그곳에서 나왔다. 사업 진행에는 미군과 함께 우리 군대도 대규모로 나섰다.
무너진 학교 900여 개가 그런 사업을 통해 다시 세워졌다. 연세대학교의 세브란스 병원과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강릉의 관동대학교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교회의 재건도 눈부셨다. 물자와 장비 등을 제공하는 미군의 문화적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200여 개의 병원, 전쟁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도 많이 세워졌다. 그렇게 전후 복구 사업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어느덧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이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는 내게 한국의 야전군(Field Army) 창설 계획을 말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야전군 창설이었다. 단독으로 모든 작전을 소화할 수 있는 규모였다.
국군 전선 지휘하기 위해 낮은 직급 전출도 감수하는 백선엽 장군
테일러 사령관은 내게 “당신은 지금 육군참모총장이어서 새로 창설하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옮긴다면 직급이 한 단계 내려간다. 그러나 155마일의 휴전선을 한국군이 단독으로 방어하는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이 야전군 창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야전군을 이끌기 위해서는 풍부한 야전 경험을 갖춘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볼 때는 당신이 적임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듭 내 의중을 물었다.
직급으로 따지면 한 단계 낮은 곳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독방어를 위한 한국군의 전투력 증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직급의 강등은 결코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그 방대한 규모의 야전군을 조직하고 통솔하는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야전군 출범 문제가 매듭이 지어졌다. 내가 병력 40만 명의 대규모 야전군 초대 사령관을 맡기로 했고, 신임 육군참모총장에는 정일권 장군, 신설하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에는 이형근 장군이 가기로 했다. 1954년 2월 14일 정식 인사명령이 내려졌다.
정일권 장군과 이형근 장군은 이 날짜로 별 넷의 대장에 올랐다. 테일러 미 8군 사령관과의 사전 협의에 따라는 나는 1953년 12월 김웅수 2사단장을 1야전군 참모장으로 내정했다. 그와 함께 1야전군 창설 요원들을 구성해 미 10군단이 있던 강원도 인제군 관대리로 파견했다. 대규모 야전군 창설에 필요한 내용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현대 한국 육군의 초석
매우 중차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40만 명을 거느리고 서부전선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휴전선을 모두 자체 역량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나아가 현대 한국군의 초석을 닦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그를 수행할 만한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꼭 필요했던 일이 교육이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인 미군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인제군의 관대리에 있던 미 10군단은 그런 한국군의 홀로 서기를 위한 요람과도 같았다. 1야전군을 실제 이끌 참모와 지휘관들은 모두 이곳에서 엄격한 교육을 거쳤다.
▲ 한국군 부대 창설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미군 지휘관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대 증강에 관심이 매우 높아 부대 창설식이 열리면 노구를 이끌고 반드시 참가했다. /백선엽 장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식 인사명령이 내려진 뒤 나는 미 10군단장 부르스 클라크 장군과 참모장 에이브럼스 참모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클라크 군단장은 나중에 유럽 주둔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에이브럼즈 참모장 역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패튼 장군 밑에서 전차대대장을 역임했으며, 후일 미군이 신형 전차에 그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전차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던 사람이었다. 매우 능력이 뛰어났던 미군의 지휘관으로부터 나와 참모진, 주요 지휘관 등은 작전 이론과 전술 운용 및 부대 지휘, 참모 절차, 보급과 병참 등 군대와 관련이 있는 모든 분야를 배웠다.
특기할 사람은 미 8군 부사령관 새뮤얼 윌리엄스 소장이었다. 그는 야전군 창설 당시 해당 한국부대를 모두 시찰한 뒤 개선해야 할 사항을 정리해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에게 보고한 일이 있다. 그 보고서를 받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한국군 부대의 식당 위치에 관한 문제점까지 낱낱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도대체 어떤 비결을 지닌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웃으면서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인데…”라면서 웃더니 자신의 숙소에 있던 캐비닛을 공개했다. 그는 “30년 동안 군대생활을 하면서 보직을 거칠 때마다 챙기고 점검했던 체크리스트”라고 했다.
나는 그 체크리스트가 아주 탐이 났다. 그를 모두 빌려와서 타자로 친 뒤 우리 부대 운용에 필요한 자료로 삼도록 했다. 아주 장구한 기간과 시련을 거쳐 성숙한 존재가 미군이었다. 그들이 지닌 노하우를 잡아내 우리의 자양분으로 삼는 일이 당시에는 매우 긴요했다. 몸을 낮춰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겸허하게 거쳤다. 그리고 1954년 5월 강원도 원주 사령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귀빈들, 국군 주요 지휘관과 유엔군 고위 장성 등이 참석한 가운데 1야전군 창설식이 열렸다.
4개 군단, 16개 사단을 거느린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야전군 창설이었다. 우리는 그로써 휴전선 단독 방어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아울러 현재의 60만 대군을 거느린 대한민국 육군의 기초를 그로써 반듯하게 세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