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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칠은 제1강의]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성령이 임하시도록 빌며 성호경으로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도록 다음 말씀을 천천히 낭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한 1:35-42) : (35) 다음 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서 있다가 (36)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갔다. (38)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39)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 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 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 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42)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파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성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모습을 설명한다. 제자들은 요한과 안드레아였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전에 어디에 있었을까요? 요한과 제자들은 자신들과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성취할 것을 찾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게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택받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다. 메시아는 성령이 그분 위에 머무시는 분이라고 증언한다. 그들은 계속 찾았다. 이 찾은 자체가 성령의 활동이다. 우리가 찾을 때에 우리는 흐릿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찾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찾으라고 영감을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시려는 것이다.
어느 날 예수님은 한 무리의 제자들을 만난다. 사랑 받는 제자 요한과 안드레아이다. 이 만남은 요한과 안드레아의 삶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것은 10시쯤이었다. 요한은 그 시간과 장소를 기억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 준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날 때에 예수님께 무언가를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예수님께로 이끌리는 것을 느낀다. 성령이 활동하시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께 이끌릴 때에 조금이라도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사랑하는 성자께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신다.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성자를 계시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신다.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신비스럽게 그분께 이끌린다. 이렇게 이끌린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돌아서서 물으신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에 들끓고 있다. 다른 많은 일들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있개인적인 응답을 바라신다. 자유로운 투신을 바라신다. 주님은 우리를 강제하시지 않는다.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을 비추어 주면서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으신다. 우리 마음의 원의(願意)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의 기대가 무엇입니까? 너무 많은 것들이 마음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그런 많은 것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 휘둘린다는 것을 안다.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많은 일들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무엇을 원합니까?”라는 질문을 놓고 자신을 식별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비참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분주하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때로 우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고백하자. 때때로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하려다가 포기하기도 하고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우리의 좋은 계획을 수행하다가 그것에 사로잡혀서 주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것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마태20:32)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소경)을 부르신 다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사랑 받던 제자 요한은 성령의 영감으로 아름다운 응답을 한다.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랍비”를 인도에서는 “구루”라고 한다. 인도에서 보면 하느님과의 만남을 원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구루 곁을 지나간다. 선생님 저는 배우고 싶습니다. 참된 제자는 배우기를 원한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게 하고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여 성별 하기를 원한다. 구원의 목표에 이르기를 원한다.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지를 알고 싶어한다. 우리가 먼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 머무십니까?”라는 질문은 체험을 하고 싶다는 말이다.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선생님 어디에 어떻게 누구랑 살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체험하고 싶어하는 원의는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가 받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이런 피정 때에 주님으로부터 받길 원하고 성령으로부터 배우기를 원한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따스한 초대의 말씀을 듣는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여 이런 체험을 하게 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초대이고 이 초대가 우리의 확신이다. “와서 보라.” 우리도 요한과 같이 응답해 볼 수 있다. 단순하고 자발적으로 주저하지 않고 확신 갖고 주님께 응답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응답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데, 이 순종은 맹목적인 굴종이 아니고 자발적인 원의를 말한다.
우리는 성령께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싶은 원의를 주시”라고 청할 수 있다. 그러려면 내적 침묵이 필요하고 내적인 침묵을 할 때에 성령이 우리 원의를 깊게 만들 수 있다. 사랑 어린 주의력을 갖고 확신에 찬 귀 기울임을 통해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모든 것을 마음에 품으시고 성령께 귀를 기울일 준비되어 있었고 성령께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겸손하게 따르려는 열렬한 자세를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고 반쯤 열어 놓지 말고 활짝 열고 바라자. 주님은 활짝 열고 우리를 반기신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주님께 활짝 열고 그분을 기다리자.
(묵시3:20) 들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마태11: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11: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여러분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스트레스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을 알고 계시다. “나에게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와 함께 평화롭게 살수 있는 것을 가르치겠다. 와서 보라. 걸으면서 방에서 성당에서 이런 성서 구절을 묵상할 수 있다.
묵상 방법을 제시합니다.
1. 먼저 성령이 우리를 예수님께 끌어들이시도록 우리를 성령께 맡긴다.
주님이 이끄시는 끌림을 조금이라도 느끼면 더욱 성령께 맡겨서 주님께 이끌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은총으로서 당신의 성자께로 우리를 점점 이끄시는 것이다.
2. 영적 태도이다. 단순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시다. 주님께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침묵하며 귀를 기울이는 자세로 머문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조건 없이 그냥 활짝 열고 계십시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편안하게 모시고 주님과 친밀한 시간을 갖는다. 단순함 유순함과 너그러움으로 주님을 모신다.
3. 예수님 안에 쉰다. 나를 위해서 좋은 것이 마련되어 있다. 나와 내가 맡은 백성들을 위해서 좋은 것을 마련하고 계시다. 와서 보시고 와서 쉬시고 와서 맛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스며들도록 성모송을 합시다.
[성령칠은 제2강의]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요한 4:1- 29 :
(1)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으시고 세례를 베푸신다는 소문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2) (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다. ) (3)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기로 하셨는데 (4) 그 곳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하였다. (5)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셨다. 이 동네는 옛 날에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인데 (6)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먼길에 지치신 예수께서는 그 우물가에 가 앉으셨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워 있었다. (7) 마침 그 때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가고 없었다. (9)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10)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시자 (12)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도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 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13)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하셨다. (15)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16)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17) 그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18)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19)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21)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24)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하자 (26)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 때에 예수의 제자들이 돌아 와 예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무엇을 청하셨는지 또 그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물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에 돌아 가 사람들에게 (29)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렸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갈릴리로 가신다. 여행에 지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왔다. 그 때는 정오였다. 요한 복음사가는 다시 한 번 예수님과 만남의 시간을 제시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나왔다. 목이 마르신 예수님은 물을 청하신다. 우리는 이 성서를 모두 읽고 좋아한다. 예수님이 겸손되이 물을 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많은 경우 지치고 갈증을 풀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이 복음을 좋아한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삶 속에 들어가시는 것을 안다. 간단한 섬김을 부탁함으로서 이렇게 하신다. 이것은 육화의 신비이다. 이런 겸손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 여인과 온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섬긴다는 것은 사목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우리는 육화의 신비가 교의나 교의적인 강조를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주기 전에 겸손하게 청함으로서 사목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겸손하게 청함으로서 자신의 갈증을 나누신다. 단순하게 청함으로서 이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정말 겸손이 요구된다. 사람들의 걱정이나 가난을 나눈다는 것은 겸손을 요구한다. 먼저 우리가 줄려고 하기 보다 받음으로서 이루어진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사목하는 신자들에게서 우리를 멀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사목의 대상자들과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풍요로움이나 물질이나 지적인 부유함이나 거룩해지는 부유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신을 낮추어져야 하고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처음에 인도에 갔을 때에 빈민가로 가려고 했다. 노동자 가족과 함께 집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노동자는 최근에 결혼한 사람이었는데, 첫 아이를 낳으려는 참이었다. 이 노동자는 본당신부에게 내가 머물 오두막을 내어 주겠다고 했다. 나에게 오두막을 내어 주고 자신들이 불편할 텐데, 나는 마음이 불편하여 내가 그렇게 까지 어려움을 주어야 하나? 내가 무언가를 주려고 했는데 불편을 주는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얼어붙는 것같았다. 그러나 그 가족들이 나를 환영했다. 가족들이 아이를 팔에 앉고 있었다. 결혼 선물인 접시에다 장미 레몬 사과를 가져왔다. 무릎을 꿇고 앉더니, “신부님 축복하세요. 우리는 신부님을 모시고 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는 것같았다. 저는 말문이 막혔다. 주기 전에 이런 믿음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니. 이들의 믿음과 단순함이 놀라웠다.
위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상처를 알고 계신다.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여인에 대한 초대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한 하느님의 불타는 사랑을 보신다. 예수님은 한 피조물을 보신다. 하느님의 사랑 받는 딸이고 마음이 부서진 상처 입은 딸이다. 예수님은 성부가 성령을 통해서 이 여인의 상처를 어떻게 고쳐 주시려고 하는지 보고 계시다. 하느님의 부드럽고 다정한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 예수님의 선교이시다. 예수님은 “알기만 한다면”이라고 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은 닫쳐 있었다. 종교적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사람들인데, 마음이 닫혀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자만심 때문에 닫혀져 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갈증이나 정열이나 여러 가지를 아신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런 것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많은 일에 분주하여 그분의 선물 앞에 멈추어서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없다. 줄 수 있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시간을 갖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우리는 종종 사제직의 위기를 말한다. 성부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에 주의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인도주의적인 일이나 사회정의 활동에 참여한다. 그런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늘 나라를 먼저 찾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명의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연대하는 일을 하는데 이런 일이 죄로부터 해방이 아니면 그것 또한 헛일이다. 연대성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접근하려면 우리는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성령에 의한 영감 받은 연대(連帶)가 아니면 오히려 인간을 격하시킬 수 있다. 가난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나 영광을 무시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의 마음들이 댐처럼 막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댐에는 많은 줄 수 있는 물이 있다. 그러나 막혀 있다. 물이 막혀 있다면 생명수가 우리에게 올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가 여러분에게 선사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이 조건이 된다. 예수님의 “알기만 한다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이 물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물에 대한 우리의 갈증을 보여주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성령으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부정적인 인생 체험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 여자는 상처를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나 깨어지기 쉬운 모습만을 보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예수님의 이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하느님이 선사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영적으로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서 신자들에게도 사랑과 함께 무언가를 주시고자 하신다.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샘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솟아오르는 샘물, 우리는 이 물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파견되었다.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은 적절하다. “주님 그 물을 주십시오.” 저에게 주십시오. 우리도 이물을 달라고 청하면서 기도합시다. 이 여인은 그 대답으로 어떤 일이 그녀의 삶에 생기고 그로 인해서 어떤 결과에 이를지 모른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사랑과 존경에 힘입어 확신한 바를 간청하고 자신의 마음을 열어 갑니다. 우리도 같은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갑시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를 위해서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은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이 여인은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서 어떤 체험을 나누도록 요청하신다. “와서 보라”는 말씀은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사람에게 말한다. “내가 한 모든 일을 말해 주었다. 와서 보라.”
과거의 우리 삶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와서 보라”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의 은총과 용서의 경험이 많다. 이것이 인격적인 체험이다. 우리는 교리나 복음선교, 특수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일의 효과를 찾는다.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끌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체험해야 한다. “(요한4:39)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 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체험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피정을 하러 모인 것은 우리 믿음을 새롭게 하고 이 믿음이 생활한 체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것을 받으려고 모였다. 묵상하는 방법 3 관점을 말씀드립니다.
1.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우리 마음을 열고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선물에 마음을 열고,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2. 비유의 말씀을 읽읍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려고 하십니다. 당신이 선택한 제자의 마음을 갖은 사람에게 드러내시려고 하신다.
다음 비유 말씀을 묵상하자. 마태 13,3- / 22,1- / 20,1- / 25,1-
마태 13:3-23 :
[(마태13: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6)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9)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18)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보아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21)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투고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23)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태 22:1-14 :
[(1) 예수께서 또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칫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5) 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 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12)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마태 20:1- 16:
[(마태20: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3)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 (4)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5)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6)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7)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9)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10)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11)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16)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 25:1-13 :
[(마태25:1)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 왔다. (3)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4)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7)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8)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10)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 (11)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으나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다. (13)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이 비유를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그 말씀을 흘려 버리고 그 말씀에 우리 마음을 닫아 버리는가?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얼마나 많은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혼인 잔치의 비유를 봅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다. 어린양까지 살해되었습니다!! 이 풍요로운 잔치를 보십시오. 그런데도 우리들의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봅시다.
이 비유에서 일한 시간이 다른 품꾼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므로 “사회정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우리 모두가 다 구원의 신비에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나누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관대한 마음을 안다면, 이 아름다운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람들과 나누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받고 있다. 때때로 우리가 하는 사목이 힘들다고 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사목은 하느님이 주신 아름다운 사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비유를 보면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풍요로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마음을 여는 사람만이 그 잔치에 들어감을 본다. 이것은 인격적인 동의의 문제이다. 여러분의 사목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싶다. 사도신경은 구원의 신비인데 우리가 성전으로부터 받았다. 어떻게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고받습니까? 진리의 묶음으로 기성복처럼 만들어 제공합니까? 교리를 사람들의 머리에다 집어넣습니까? 외우게 해서 넣어 줍니까? 이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속삭임으로 받아들이십니까? 사랑의 체험으로 받아들입니까? 사랑의 선포(Kerygma)로 받아들입니까? 하느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또 백성들을 위해서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만 한다면” 아버지가 성자를 보내신 것을 알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아낌없이 나누려고 오셨다. 성령을 주시려고 오셨다. 우리를 교회 안에 한 가족으로 모이게 하여, 삼위일체의 풍요로운 삶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구혼(求婚:propose)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나누어주고 구원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리를 전할 때에 이런 맛을 알아야 한다. 이 사도신경을 묵상하므로서 내일 미사에서 고백할 사도신경을 미리 준비하자.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
[성령칠은 제3강의] 두려움(敬畏 fear)의 은혜
시편 8편 :
(시8:1)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시8:2)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시8: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시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시8: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시8: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시8: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시8: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시8:9)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인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에 귀를 기울이고 묵상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성령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마태7:11)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청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기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당신의 성령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세례의 은총입니다. 모든 성사 통해서 성령을 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성령의 은혜들이 무엇인지 공부합시다. 성령의 여러 가지 많은 선물들이 있다. 사도직을 할 수 있는 은총. 교회에 봉사하는 은총. 이것들을 특은이라고 한다. 은사들도 있다. 이상한 언어를 한다든지 등등. 여기서는 특별히 성령 7은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성령 칠은은 견진성사 때에 가르친다. 피정 시작 때에 오소서 성령이여 하고 성령 송가를 부른다. 이 성령 7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특별한 은총이다. 이사야 11장에 성령의 6가지 은혜가 나온다. 교회 시작 때부터 교부들 특히 이레네오 교부가 성령을 언급한다. 하느님이 성령을 내렸습니다. 지혜와 통달 의견과 굳셈. 지식과 효경. 주님을 두려워하는 영. 이런 똑같은 영을 교회에 주셨다. 이 성령 7은은 우리 마음과 우리의 선교 생활에서 성삼의 생명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한다. 똑 같은 성령 안에 성부 성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이 현세에서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사명이며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똑 같은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누리는 생명을 형제들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이것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령이 주님 위에 충만히 내렸다. 성부 성자의 이 관계가 아주 점진적으로 천천히 주님 안에서 보여진다. 그것이 교회의 생명이다. 교회는 성부 성자의 관계로 풍요로워지는 가족이고 그런 관계를 우리가 전한다. 우리는 자주 성호경을 긋는다. 그 내용은? 뜻은? 성삼의 삶이 무엇일까요?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산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파견되었다. 여러분은 이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성령은 성삼의 삶을 살도록 특별한 감각을 주신다.
(요한 1서 1장) 1절-(1)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3) 우리가 보고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말씀의 생명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여러분에서 선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쁨이 충만해지길 바랍니다. 우리가 본 것인 하느님의 말씀을 와서 보십시오.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 경험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라는 신비에까지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 그분을 뵈었습니다. 요한 성인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보았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만졌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것을 전하려고 한다. 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들도 교회를 통해서 주신다. 그것은 선물이다. 하느님은 자유롭게 주신다. 4-5살 아이들에게도 이런 선물을 주신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을 주신다. 화해하려고 애쓰는 죄인에게도 주신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물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성향은 있다. 특별히 성사의 은총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현대사회는 너무 많은 것들로 혼란을 겪고 있다. 예를들면 다이아나 황태자비를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분을 미친 듯이 좋아했습니다. 그녀의 삶 속에 여러 가지 가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부정적인 것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우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올바르게 방향 지을 영의 선물이 필요하다.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하시며 예수님은 그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다. 하느님이 선사하시고자 하신 선물이다. 그분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자 하신다. 당신 자신 외에 그보다 더 덜한 것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령 7은 중에 첫째 것을 봅시다.
1. 두려움의 은혜 : Fear of God : sense of the sacred /sense of marvel
하느님을 ‘무서워’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노예를 삼지 않고 공포를 일으키는 노예의 성령이 아니시다. 성요한은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성서의 특별한 어휘가 있다. 경탄하다. 감탄하다. 깜짝 놀라다. 숭배하다. 사로잡히다. 경이로 가득할 것이다. 아!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이 있는 가게에서 아! 하고 감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이는 시간을 내서 그 앞에서 멈추어 서 있습니다. 어머니가 잡아끌어도 더 보고 싶다고 우기고 그것에 사로잡힌다. 어떤 때에는 몸을 떨기도 한다. 거대한 폭포 앞에서 전율하기도 하지요. 경탄하는 감각이다. 성서에서 천사가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을 관상하도록 창조되었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묘사가 많다. 욥기를 보자. 욥은 하느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앞도 된다. 시편을 읽을 때에 성령께 이 경외(敬畏)심의 은총을 주시라고 기도하면 좋겠다. 시편 8편 외에 많은 시편이 경탄의 시편이다. 성무일도 시편에도 하느님의 피조물들에게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초대한다. 우리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준비이다.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의 위대함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똑같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성령이 우리를 파견하신다. 성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가 파견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잃어버렸다.
창세기 28장 10절-19;
(창28: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11)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간 뒤였다. 그는 그곳에서 돌을 하나 주워 배게 삼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자다가 (12)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은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13)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 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17)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구나.” (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창28:19) 그 곳을 베델이라 불렀다.
제가 가정을 방문해서 축복할 때에 이 성서 본문을 택한다.
두려움의 은혜는 경이를 일으킨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하느님이 여기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몰랐구나 라고 한다. 이곳 이 가족들이 사는 이 집이 야훼가 현존하시는 곳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알게 되면 경이로움이 일어난다. 제가 가정을 방문하여 집을 축성 할 때에 그 가족들의 마음을 일으킨다.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하느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거져 주십니다.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똑 같은 영을 여러분에게 주신다. 하느님과 여러분 사이에 똑 같은 사랑이 교환되도록 하신다. 이 집이 하늘의 문이다. 이 교류가 항상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축복으로 이 집에 내려오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내려오신 것처럼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내려오신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축복을 가지고 내려오시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그분께 바쳐 드린다. 하느님은 내려오시고 우리는 올려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선물이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깨닫는 것이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먼저 성령께 우리를 일깨워 달라고 청하자. 아버지는 청하는 사람에게 은총의 선물을 주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성무일도를 바칠 때에 별로 생각하지 않고 바친다. 그냥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반응을 하고 청해야 한다. 당신의 영을 주시라고 청해야 한다. 판에 박힌 듯이 해서는 안되고 그분께 응답을 하고 자신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시간을 내서 그분께 응답해야 한다. 시편을 기도하면서 한 구절 안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자세히 살피며 기도를 해야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온다. 루가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청하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본다. 복음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예수그리스도 안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신비를 체험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그렇게 하자. 예를들면 예수님이 회당에 처음 나타나신다. 루가 4,18에서 이사야를 인용한다.
(루가4: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루가4: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말이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루가4: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루가4: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4:20) 예수께서 두루말이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루가4: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4:22)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탄복한다. 경악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이 성서 구절을 쉽게 읽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다. 내가 내 눈으로 귀로 이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 그 말씀을 관통할 수 있다. 아! 이분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신 분이구나 하고 감탄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난한 사람에게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시구나. 이것이 무슨 뜻인지 시간을 내서 바라볼 수 있다.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성령이 예수께 내려오시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그 선물을 청하십시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청하십시오.
예수님이 부정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경악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일 까”하고 서로 수군거린다. 이분이 부정한 악령에게 명령을 내리니 그들까지도 순종하는구나. 이분은 권한과 능력으로 말씀하시는구나. 우리는 이런 악령을 쫓아내도록 파견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갖고 있다. 그런 능력을 주시라고 청하자. 이 복음과 함께 우리는 이런 권한을 받을 수 있다. 악을 쫓아 버릴 수 있는 권한이다.루가복음에는 이런 비슷한 말씀이 많다. 중풍병자를 낫게 한다든지 나인의 과부의 딸을 일으킨다든지. 예수님이 폭풍우를 잠재우는 것으로 그 사람들은 경외심에 사로잡히고 그 사람들은 깜짝 놀랬습니다. 이분이 누구 신가! 이분은 도대체 누구 신가! 이분이 바람도 파도에 명령하니 그것이 순종하는 구나! 이분이 누구 신가! 그분은 얼마나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가!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능력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우리가 이런 능력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도되는 체험이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계시를 본다. 성삼 안에서 이런 선물들의 원천을 보십시오. 당신의 사랑하는 성자 앞에서 성부께서 영원히 아! 하고 감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자 또한 성부의 풍성한 너그러우심을 보시고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분들의 삶에 동참하라고 주어진다. 유아 세례를 준비할 때에 이 아기 앞에서 어머니가 감탄하는 것을 본다. 우리도 그 아기보고 감탄하면 엄마가 좋아한다. 어머니는 이미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한다.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 안에 실현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세례의 은총을 어머니에게 설명했지만 다시 설명해 줄 수 있다. 세례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아름다움을 일깨울 수 있다. 성부가 당신의 외아들에게 갖은 숭배에 가까운 사랑의 감정을 이 아이에게 갖으심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똑같은 성령을 통해서 어머니가 이것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혼인 성사의 예를 들자. 젊은 사람들이 결혼의 시기가 되면, 결혼 전에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성.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근심 걱정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 딸을 새롭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 있다. 아무도 인간의 마음을 파악할 수 없다.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받아들일 때에 남편과 아내가 상대방을 하느님의 훌륭한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동반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오고 우리의 형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속량된 동반자이다. 결혼의 가장 큰 선물은 두 배우자들 안에 작용할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다. 똑 같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사랑으로 부부를 일치시킬 것이다. 그들의 이 결혼 생활에 똑같은 성령의 활동이 펼쳐진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 배우자들 간에 사랑이 현존한다. 수도 공동체 안에서 수녀들 사이에 현존하신다.판에 박은 것같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기도할 때나 성사를 집전할 때에,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수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할 때에 삼위의 현존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마음 안에 경탄할 시간을 내자. 현존을 깨닫고 참여하고, 현존을 체험할 때에 감사드리자. 조금이라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때에 하느님께 정말 감사드리자.
내가 살고 있는 집 앞에 작은 찻집이 있었습니다. 작은 책상이 있었고 거기에 모든 것을 차려 놓고 있었다. 그는 계속 적으로 “옴! 옴!” 하고 만트라를 외치고 있었다. 찬양의 말이고 하느님 앞에 형언할 수 없을 때에 “옴!”이라고 표현한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경탄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성모님이 예수님의 육화의 신비에 이끌려서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경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성모송을 합시다.
[성령칠은 제4강의] 효경(孝敬 piety)의 은혜 (1)
(로마 8:14-17)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효경이라는 성령의 선물은 형제적인 사랑으로서 즐거움을 준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친밀하고 다정하고 연민에 가득한 것이다. 우리는 세련되고 기계화되고 컴퓨터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애정과 다정함의 자리가 없다. 큰 정거장에 가면 사람간의 접촉이 아니고 단추만 눌러서 표를 산다. 점점더 현대 사회가 기계화되어 간다. 심지어 노동자들조차도 기계 때문에 밀려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애정을 무척 갈구한다. 이것이 마음의 근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가 비인간화되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좌절감과 혼란을 준다. 때로는 폭력적이다. 훌륭한 가정에서조차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 아주 작다. 어린이를 탁아소나 유아원에 가능하면 빨리 맡겨 놓고 “아! 내가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이가 유치원에서도 돌아와도 부모가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집에 방치된다. 텔레비전 앞에 있게 된다. 아이의 사랑의 욕구를 가라앉히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애정이 주는 안정감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다. 전기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으로는 애정을 주고받는 관계를 배우지는 못한다. 어른들도 안정감을 찾는다. 사회적인 안정을 찾고, 경제적인 위기가 생기면 다른 안정 장치를 찾는다. 우리가 물직적인 안정을 찾는 한, 인간의 근본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세상적인 안정을 얻어 보려고 재산을 모으고 보험에 가입하지만 자신의 안정을 잃어버린다.
아우스티누스 성인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안착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산다. 인간의 삶은 점점 정이 없어져 간다. 우리는 더 좋은 삶을 위해서 경제적인 성장을 꾀하지만 실재로는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인간은 더 좋은 세상을 가꿀 필요가 있지만 물질적인 것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 편안하게 느끼는 그런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현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는 종종 절망하는 경향이 있다. 애정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것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다가 안되면 실망하게 된다. 현대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더라도 하느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예언자 에제키엘의 환상에 대하여 묵상하기 바랍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 대한 환상입니다.
에제 37장 4-15; (에제37:4) 그분이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마른 뼈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5) 뼈들에게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6)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7)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다. (8) 내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뼈들에게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 그러나 아직 숨쉬는 기척은 없었다. (9) 야훼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10) 나는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다. 숨이 불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 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15)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마른 뼈들이 흩어진 환상을 본다. 마른 뼈들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인간성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이다. “이 뼈들을 보느냐? 이 뼈들이 살수 있겠느냐?” 인간에게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합니다. 나는 “내가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으면 너희가 살 것이다”고 한다. 이 숨결은 마른 뼈들을 다시 창조하는 기운이다. 처음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서로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긴다. 아직은 숨이 없다. 하느님의 숨결이 뼈들 안에 들어가니까 생명이 생기고 일어선다. 큰 무리를 이룬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지반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영이 활동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너희는 내가 야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살아 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이 남편이 되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되리라.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파견되셨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호칭하게 하신다. 이것에 관해서는 내일 다시 봅시다. 오늘은 그냥 구약만 봅시다. 놀라운 방법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에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느님의 능력이 피조물 안에 드러난다. 각 피조물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시편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보고 찬양하라고 한다. 오늘 아침 기도의 성무일도 첫 시편은 하느님의 능하심을 노래하고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분의 사랑의 선물에 대하여 찬양하라고 한다. 사랑의 메시지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의 꽃송이도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어린아이도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임을 볼 수 있다. 우리 형제 자매들도 하느님의 선물로서 우리를 매혹시켜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아씨시를 좋아합니다. 그분은 모든 것에서 친밀감을 표현하는데, 누이 물, 형제 불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느님 가족의 선물이고, 피조물은 가족들에게 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이 온 누리를 채우고 있다. 시편은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 역사 안에 가득하다고 노래합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또 모세를 좋아한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끌려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매혹된다. 모세는 하느님의 빛으로 빛나게 된다. 그는 산에도 가고 만남의 장막에도 들어가고 하느님께 이끌려 간다. 하느님은 모세와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하느님이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신다. 예언자는 “하느님이 아버지와 같다”고 말했다.
호세아 11장
[(호세11:1)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바알 우상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3)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죽을 것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4) 인정으로 매어 끌어 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우리를 향해서 허리를 굽혀서 당신께로 이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이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감동을 주었다. 성녀는 “스스로 하느님께로 갈 수 없다”고 깨달았고 하느님이 자신을 아기처럼 앉고 가신다고 믿었다. 데레사는 효경의 모범이다. 아기와 같은 큰 단순성과 신뢰가 근본적인 효경의 태도이다.
(이사49:15)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사49:16) 너를 나의 두 손바닥에 세겨놓았고 너 시온의 성벽은 항상 내 눈앞에 있다.
우리 이름은 하느님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열정적인 남편으로 묘사한다. 나는 너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이스라엘의 정녀야 내가 너를 가장 좋은 옷으로 입혀 주겠다. 아내의 불륜을 잊어버리고 다시 아름답게 회복시켜 주는 남편으로 묘사된다. 불충한 아내를 용서하여 이끌어 가는 남편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이다. 내가 야훼 하느님임을 알고 내가 너를 사랑함을 알리라. 네가 하는 모든 것을 용서함을 알게 되리라. 예수님은 다시 이 주제를 선택하신다. 탕자의 비유에서 그렇게 하신다. 당신의 자녀를 다시 형성시킨다. 탕자는 아들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품꾼으로 써 주십시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아빠라고 부르도록 아들로 회복하신다. 좋은 옷을 입혀 주신다. 이것이 성서의 주제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꿰어 내신다.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게되면,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말하게 하겠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어진 목자로 묘사한다. 나는 내 양들을 내가 보살피겠다.
(에제34:12)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 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여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오리라. (에제34:15)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에제34:16)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에제34:17)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 수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에제34:20)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몸소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
내가 양들을 다 구해 내고 희생된 양들을 돌보겠다. 양들 사이를 판결하여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하겠다.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은 한 백성을 만든다. 내 영을 불어넣어 주어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리라. 나는 너의 것이고 너는 나의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많은 성서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의 계약에 충실하고, 사랑의 줄로 묶어 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충실합니다. 우리는 걱정되거나 좌절할 때에도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힘이며 평화이다. 오늘 저녁에 단순하게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성녀 데레사가 이끌렸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단순하게 “아빠”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인 복음적인 중요한 자세이다. 주님께 나가서 우리의 걱정이나 긴장을 다 말씀드릴 수 있다. 하느님 앞에 신뢰하는 어린이처럼 나아갈 수 있다. 게으르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용기와 평화를 발견하시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인간의 사랑을 당신의 손에 새겨져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다. 단순하게 우리를 새롭게 합시다. 우리 자신이 불충할 때라도 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새롭게 한다. 당신 용서에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당신의 충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것만이 우리를 평화로 이끈다. 각자 묵상합시다. 성모송으로 끝납시다.
[성령칠은 제5강의] 효경(孝敬 piety)의 은혜 (2) - 하느님의 사랑
1고린 2:7-13 :
(1고린2:7)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8)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10)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십니다. (11)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만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생각은 하느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12)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그 은총의 선물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눈으로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인 없는 그 일 너머로 다가 오도록 하느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선물을 체험하라고 초대하신다.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체험해야 이 선물의 맛을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효경의 은혜 즉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 계속합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형제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적인 사랑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버지는 당신의 아드님을 영원으로부터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분을 탄생시키십니다. 아드님은 사랑하는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은 성자에게 유일하고 신뢰 가득한 아빠이시다. 예수님은 한 남자 한 여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 받는 딸과 아들을 보십니다. 오늘도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딸들이 탄생된다. 우리를 초대하셔서 하느님 아버지께 “아빠”라고 부르도록 하신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있어야 할 삼위 일체의 친교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통교를 이루시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효경의 은혜이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형제적인 사랑을 봅시다. 우리 각자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묵상 중에 이것을 새롭게 합시다. 나는 기도하고 나서 여러분을 사랑으로 선택했습니다.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을 불러 모아 한데 모았습니다.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서 여러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탄생하는 것을 봅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나를 따르도록 초대했습니다. 나의 삶에 동참하라고 ‘와서 보라’고 초대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을 초대해서 하느님이 나에게 맡긴 사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했습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나는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가르쳤습니다. 사랑으로 하늘 나라의 비밀을 여러분에게 나타냈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사랑에 동참하도록 여러분을 사랑으로 초대하여 쉬게 하였습니다. [(마태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나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나의 기도에 초대했습니다. 내 기도 속에 여러분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의 동반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여러분에게 드러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나와 함께 ‘아빠’라고 부르도록 초대했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여러분의 삶의 폭풍우를 잠재우러 했습니다. 사랑으로 내 권능을 나누어 가지도록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여러분의 이름이 하느님의 심장에 새겨져 있음을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으로 수없이 되풀이해서 여러분이 마지막 자리를 택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리를 택하려고 할 때마다 사랑으로 꾸짖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의 발치에 왔습니다. 여러분의 발아래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선물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인 여러분을 섬겼습니다. 사랑으로 내 피와 살로 여러분을 먹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 대한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나의 전부를 주었고 마지막 피를 흘렸습니다. 여러분이 자고 있을 때에도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했습니다. 여러분이 후에 믿음에 굳건히 서라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을 굳건히 해 주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천국의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사랑으로 나의 어머니를 주었습니다. 나는 끝까지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내 심장을 열고 사랑으로 나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천국에 올 때에 여러분을 섬기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장면들을 이렇게 여러 곳에서 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 당신 제자들에 대한 형제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면 내가 이 사랑과 용서를 형제들에게 전할 수 없다. 이 사랑의 영을 묵상하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 형제적인 사랑을 묵상하려면 루가 14장 12-14절을 볼 수 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근본적인 성서구절이다.
루가 14,12-14 :
(루가14: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루가14: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루가14:14)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 (루가14:15) 같이 앉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루가14: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루가14: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루가14: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을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 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루가14: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루가14: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루가14:21)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 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루가14: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루가14: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루가14: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초대받은 사람 중에 착한 사람들도 있고 악한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건설하려고 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려고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잃지 않은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 장애자 즉 마지막 자리에 있는 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가장 장애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입니다. 말을 할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목소리가 없고,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장애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장애자들 죄인들 작은자들을 우리의 진정한 형제로 초대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사랑의 공동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진정한 형제 자매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먼저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내가 스스로 체험하지 못하면,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체험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들의 형제가 될 수 없다. 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그들의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 내가 그들 장애인들 보다 더 잘 본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의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 나도 역시 하느님의 빛과 영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고, 하느님 앞에서 역시 사랑과 확신을 갖고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한 그들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이 루가 14장의 성서구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하신 직후에 나온 말씀이다.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하자마자 우리는 결코 그들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으로 탄생시키시는 것을 체험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볼 때에 하느님이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탄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재로 우리의 형제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부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신다. 그것을 사랑의 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죄 많은 여인이 나타납니다. 바리사이파사람이 이 죄가 많은 여인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받아야 할 죄 많은 여인의 빛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 받아야 할 빛을 받을 필요를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이 여인의 형제가 될 수 없다. 다음 주일에 탕자의 비유에 관한 복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고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두 아들이 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아들은 사랑의 아들이 아니라 하인의 아들처럼 행동했습니다. 노예처럼 열심히 일했는데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다니요. “내가 갖은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방탕한 아들의 용서의 빛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흥청망청 베푸시는 사랑을 체험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 죄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어렵다.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 성령의 은총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일이 많아서 조용히 앉아서 장애인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이런 빛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신비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울 수 있고 여러 방법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책들을 파고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먼저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을 예수님이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능력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신다. 그래서 우리들을 보시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을 보시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는 욕구들을 알고 계신다. 하느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재창조해 주시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알고 계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발치에서 행하신 사랑의 섬김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시고, 발치를 택하신다. 그것은 은총입니다. 모든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의 의미를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다. 사를르 후꾸오는 “예수님은 항상 마지막 자리를 차지 하셨다”하고 하셨다. 우리는 결코 그런 마지막 자리에 이를 수 없다.
여러분의 요청에 따라서 빈민가에서 살았던 체험을 말씀드리지요. 2가지 말씀드립니다.
1.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누려고 애를 쓸 때에,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쓸 때에, 그들의 삶을 나누려고 애를 쓸 때에, 우리는 즉시 우리의 한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즉시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왜 그들을 버렸습니까?” 그것은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려는 한 형제의 기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형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는 인간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아들의 기도입니다. 인간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만 해답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어느 날엔가 이것이 우리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한계를 느끼고, “아버지 왜? 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가난합니까? 왜 장애를 갖고 있습니까? 왜 죄를 짓고 있습니까?
이 왜? 라는 부르짖음은 어린아이의 부르짖음과 같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해답을 주시리라는 것도 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삶을 나눌 때에 한계를 느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를 쓰지 말란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안으신다는 신뢰와 확신 안에서 그렇게 애를 쓰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비참과 한계를 체험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아침에 강론에서 김신부님이 북한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항상 충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도에 가신다면 여러분의 첫 반응은 충격일 것입니다. 거기서 참다운 형제 자매를 보신다면 정말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들여다본다면 정말 큰 충격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구원받아야 할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해야 될 바를 하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갔을 때에 “내가 섬기러 왔다. 내가 해결책을 제시하러 왔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의 사랑의 구원 계획에 따라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고 청해야 한다. 겸손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주려고 하는 한 우리가 해결책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에 갇히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에 확신을 갖고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가야 한다. 형제들의 고통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과업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비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에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 빈민가에 갔을 때에 제일 먼저 저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내가 절대로 제일 낮은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만이 제일 낮은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정말 가난한 형제들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이시고 제일 낮은 자리를 차지하신다. 적어도 “낮은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마저도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넣어 주신 초대”임을 알게 된다. 마음을 열고 내 공동체 회원들의 형제 자매가 되라는 초대이다. 그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항상 다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신비이다. 빠스카의 신비를 통하지 않고는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형제 자매가 되려고 우리 마음을 열지 않는 한 공동체 건설은 불가능하다. 여러분에게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성령의 은혜를 청하자. 효경의 은혜를 실재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다.
[성령칠은 제6강의] 효경(孝敬 piety)의 은혜 (3)
1고린 3:5-17:
(5)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6)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한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8) 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은 동등한 사람이고 각기 수고한 만큼 삯을 받을 따름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12) 이 기초 위에다가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13)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 줄 것입니다. (14)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15)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16)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건축가로서 귀중한 돌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작은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2가지 예를 들겠다. 작은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정신박약아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집에 초대받아서 그곳 봉사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나와 함께 나누고 그들을 위해서 피정을 지도하여 주었다. 피정 후에 발씻는 예식을 하는 전통이 있다. 상대방의 발을 씻어 주고 그 사람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강복을 받는다. 다운증후군에 걸린 벨라뎃다와 한 짝이 되어 서로의 발을 씻어 주고 서로의 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벨라뎃다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예수님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이 겸손한 섬김이라는 것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겸손되이 섬겨 주셨습니다. 벨라뎃다의 발을 씻어 주고 그녀의 강복을 받았는데 저에게는 그 순간이 회심의 기회였습니다. 그때에 강복을 주는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벨라뎃다가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아서 나에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받았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그냥 단순한 겸손이 아니고, 발을 씻긴 제자들로부터 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 장애인들을 위한 집이었다. 렌즈윗(Ranzwet)이라는 청년이 있다. 전신 마비였다. 손과 다리 전신이 쓸 수 없었다. 오직 얼굴의 근육을 씰룩거리고 말할 뿐이다. 그의 두뇌만 온전했다. 숨을 쉴 수 있는 만큼만 근육이 움직였다. 손은 엄지손가락만 움직였다. 그의 머리로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불편하다. 아이를 대하듯 잘 대하기가 힘들었다. 머리는 총명했다. 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를 보고 첫 반응이 “무엇을 할 수 있나”라고 묻게 되었다. 먼저 가족적인 분위기 있는 집에 보냈다. 보조자를 보냈다. 라디오를 주었다. 우리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찾다가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칫솔을 발견했다. 오른 손에 칫솔을 들고 물감을 뿌리게 해서 수채화를 그리게 해서 어떤 모양을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무늬의 본을 떠 주고 거기에 맞는 색깔을 고르게 해서 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다른 것도 할 수 있다. 저녁에 같이 기도할 때에는 라디오를 듣고 세상을 위한 기도 지향을 만들어 내어놓는다. 그는 이제 공동체의 삶속에 참여하고 있다. 세상에 관한 뉴스를 듣고 그것을 기도 지향으로 바꾸었다. 그것이 렌즈윗의 삶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렌즈윗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느님 아버지는 그의 능력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사랑하신다. 그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다. 하느님은 그의 감수성이 있고 창조적인 일에 연민을 가고 계시다. 그의 활동은 아주 제한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무한한 것이다. 렌즈윗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맡겨진 사명이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나는 오직 제한된 일만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맡기신 구원 사업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면 그 엄청난 구원 계획에 비하여, 나에게 맡겨진 사명이 얼마나 제한된 사명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렌즈윗이 장애자 공동체 안에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인류 공동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비교하니. 하느님의 렌즈윗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이 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보다 훨씬 앞서 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고,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사랑의 구혼(propose)을 함께 이루어 가야만 하는 공동 협력자라는 것입니다. 공동 협력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를 위해 물감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고 카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 마음을 바라보신다.
예수님의 선교 사업을 예를 들자면, 예수님께 맡겨진 사명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되었다. 시간적으로 33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사셨고, 공간적으로 작은 나라에서 당신 구원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30년간은 나자렛에서 그냥 사셨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하느님의 뜻에 마음으로 온전히 일치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서 일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마음을 먼저 기대하셨다. 일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녀된 심정(心情)은 우리에게 맡겨진 어떤 일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이 갖은 권력이나 능력이나 효율성이 높이 평가되는 사회에서 산다. 그래서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마음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효경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상이 렌즈윗이 저에게 가르쳐 준 내용입니다. 저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현대사회의 주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어떤 사람은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시간을 내서 멈추게 된다면 우리는 차츰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눈에는 아주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가장 낙오된 사람을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깨달을 수 없고 하느님 아버지께 ‘아빠’라고 부를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하느님 아버지부터 같은 축복을 받은 진정한 형제들에게 “형제” “자매”라고 부를 수 있다. 공동체를 건설 할 때에 우리의 주의를 더 많이 요구하는 낙오된 사람에게 관심을 더 주어야 한다.
효경을 실재로 잘 적용할 수 있는 3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서로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첫째이다. 신부님들이 어떤 사목적인 일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가? 가정을 방문하고, 여러 가정을 한데 모아서 공동체 이루고 거기서 미사를 드리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이 받은 선물이 다양하다. 성령은 다양한 은총을 받은 여러 사람들을 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려고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사람들과 함께하되 작은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그들을 어떻게 초대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유능한 사람들을 먼저 취하려고 하는 유혹을 받는다. 물론 우리는 유능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우려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잃어버린 사람이나 가장 가난한 사람이나 몹시 소외된 사람 즉 작은 사람들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는데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인 진정한 형제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소공동체(BEC)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먼저 사제관에서 함께 사는 사제들의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함께 살까? 서로 다른 은총의 선물을 존중해야 한다. 연장자는 젊은이들이 받은 선물을 존중하고, 젊은이는 연장자가 받은 선물을 존중해야 한다.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을 지칭할 때에 “저에게 맡기신 이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동료 사제들을 예수님이 나에게 보내 주신 형제로 생각해야 한다. 동료 사제가 하느님의 선물들이다. 누가 명령을 내리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종종 젊은 사람이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누가 명령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함께 받아들이는 가가 중요하고 이것이 신비이다. 그것은 나의 사명이 아니고, 함께 불린 것이고 공동 사명을 받은 것이다. 서로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첫째이다.
2. 두 번째는 성령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맺도록 관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바오로 서간이나 베드로 서간에도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받아들이려고 주의를 기우리라고 권합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적의나 싸움이나 말다툼이 있다. 저는 이것이 중요한 관심사라고 생각한다. 각 공동체마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가능하고 성령이 맺어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서의 서간에서 사도들이 공동체 신자들에게 계속 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을 본다. 서간의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성서 구절을 말씀드립니다.
** 로마 12:9-13 ;
(로마12: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로마12: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로마12:11)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로마12:12)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로마12:13)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 1고린 13:4-7 ;
(1고린13: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1고린 14:1~ ;
(1고린14:1) 힘써 남을 사랑하고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2)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키워 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4)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6)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7)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8) 또 나팔 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준비를 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10)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11)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입니다. (12) 성령의 선물은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니 되도록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13) 그러므로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얻으려고 기도하십시오. (14) 만일 내가 이상한 언어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것은 내 심령뿐이고 내 이성은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16) 만일 여러분이 심령으로만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면 그 집회에 참석한 보통 교인들은 당신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할 터이니 어떻게 그 감사의 기도 끝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17) 여러분은 훌륭하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만 남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18) 나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보다도 이상한 언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20)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21) 율법서에 “‘내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자들의 혀와 외국인의 입술을 빌어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은 끝내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이상한 언어는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능력의 표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능력의 표입니다. (23) 만일 온 교회가 모여서 저마다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있을 때 보통 교인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24) 그러나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있을 때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보통 교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25) 마침내 자기 마음에 품은 비밀이 폭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하며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26) 그러면,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27)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28)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느님하고만 말하십시오. (29) 하느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도 둘이나 셋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잘 새겨들으십시오. (30) 그러나 곁에 앉은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경우에는 먼저 말하던 사람은 말을 중단해야 합니다. (31)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다 말씀을 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배우고 격려를 받게 될 것입니다. (32)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33)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대로 (34)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35)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36)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또는 여러분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37) 자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고 생각하거나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말이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8)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3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도 굳이 막지는 마십시오. (40) 다만 나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점잖게 또 질서 있게 처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 갈라 5:22 ;
(갈라5:22)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갈라5: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 에페 4:1-6 ;
(에페4:1)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3)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6)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 갈라 3:12-15 ;
(갈라3:12) 율법은 믿음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다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것을 지킴으로 산다” 고 말합니다. (13)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 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1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15) 형제 여러분, 세상의 관례를 들어서 말해 봅시다. 사람들이 맺은 계약도 한 번 맺은 다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거나 무엇을 덧붙이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1베드 3:8-9 ;
(1베드3:8)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동정하고 서로 형제처럼 사랑하며 자비심을 가지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9)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서를 계속해서 묵상하면서 이런 성령의 은총을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문제를 만나더라도 결코 놀라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3. 셋째로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각각 다른 공동체를 방문하여 그들이 만난 어려움 앞에 격려하고 이들 공동체에게 “어렵지만 그런 어려움이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는 길”이라고 말한다. (사도14:22) 그들은 각 도시에서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온 마음을 다하여 믿음을 새롭게 하라고 격려해야 한다. 공동체를 방문하고 모임에 갈 때에 끝까지 싱싱한 믿음을 가지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삶의 전망을 지니라고 말해 주고,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고 격려한다. 그것이 우리의 첫째가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절망하는 말을 듣는다.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용서를 통해서 이 효경의 선물을 간직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끝내겠다. 우리는 첫째로 화해의 사도들입니다. 용서하고 또 다시 용서하여야 한다. 베드로 사도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7번씩 70번 용서하라고 하신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빛을 탕감 받는 2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여야 하는데 그 사랑은 항상 용서로 드러난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사랑할 수 없다. 화해 없이는 사랑이 없다. 화해를 보면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훌륭한 남편과 훌륭한 아내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죄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제들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제들 간에 용서와 화해 없이 사랑이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착한 사람일 때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 일 때에 아낌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느낀다. 우리는 선물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선물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선물들은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해준다. 기도하고 침묵하고 우리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절대로 절망하지 말자. 나의 한계를 느낄 때에 기도하자. 하느님은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피정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파장의 분위기가 될 수 있다. 서로 대화하고 게임을 하는 것도 좋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머무르는 것은 더욱 좋다. 그렇게 하도록 서로 격려하자. 성모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