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여행길서 돌아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눈 수평적 제사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 유지하며 공동체의 친목과 화해 강화했다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요아킴은 먼 여행길을 떠났다. 사해에서 캔 소금 덩어리를 다메섹에 가서 팔면 가족들 일년 생계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영세했던 요아킴 일행의 여행 장비는 빈약했으며 낙타와 노새는 노쇠했다. 300km가 넘는 여행길은 어려웠다. 큰 강을 만나 떠내려갈 뻔 했고, 뜨거운 광야 길을 건널 때는 길을 잘못든 바람에 물이 고갈되어 쓰러질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를 불과 하룻 길 앞둔 어느 날, 일행은 산적떼를 만났다. 모든 것을 빼앗길 찰나였다. 그 때 어디선가 갑자기 십수명의 군인들이 나타나 극적으로 그들을 물리쳐주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마침 다메섹으로 복귀하고 있던 참이라 했다.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천군천사들이었다. 힘든 여행길을 마치고 요아킴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금도 좋은 값으로 팔아 당분간 넉넉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바칠 번제의 양과 화목제 소를 각각 한 마리 씩 고른 후 당장에 성전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여행길에서 함께 해주신 하나님,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고 친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쁨의 잔치를 베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제를 감사의 제물로 먼저 바친 후, 요아킴은 화목제를 또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제사 규례를 따라 번제의 양은 남김없이 모두 태워져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올라갔다. 이어서 화목제의 수소는 내장의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을 도려내 바친 후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는 수고하신 제사장님 몫으로 드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몸통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요아킴은 마을 사람 모두를 불러 그 화목제 짐승으로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던 친구 시므온도 초대를 받고선 기꺼이 기쁨으로 달려와 주었다. 즐겁게 고기를 삶고 구워 먹으며 요아킴은 여행길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셨는지 간증을 들려주었다. 감사가 풍성히 넘쳤다. 간증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또한 최근에 있었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나누었다. 잔치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편의 찬양을 노래했다. 그 순간 요아킴과 시므온을 비롯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고 하나가 되었다.
화목제의 특징
위험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요아킴이 바친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였다. 번제는 여러 목적으로 바쳤지만, 가장 대표적인 자원의 제사로서 감사의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흔하게 화목제가 수반되었다. 번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제물이었다면, 화목제는 하나님께 일부 바치고 나머지 대부분은 사람이 함께 나누기 위한 제물이었다. 따라서 번제가 수직적인 제사였다면 또 하나의 감사의 제물이었던 화목제는 주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수평적인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3장에서 규정된 화목제의 히브리어는 쉘라밈(shelamim)이다. 이 단어는 분명 ‘샬롬’에서 기원한 것이다. 샬롬은 평화와 친교, 다시 말해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화목제는 영어 성경에서 ‘평화의 제사’(peace offering)나 ‘친교의 제사’(fellowship offering)로 번역한다. 흔히 알고 있는 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를 감사하며 기뻐하기 위해 바친다.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경우 관계를 복원하여 ‘화목’하고 화해하기 위한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감사의 번제나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교제를 지속하고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다. 화목제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과 고기를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에 소, 양, 염소를 암수 구분 없이 화목제로 바칠 수 있었다. 비둘기는 제외되었는데 고기를 나누기에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는 아마 가족과 친족들만 초대해서 나누었던 반면, 소를 잡을 때는 마을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어느 것을 바칠 지는 자신의 형편과 감사의 정도에 따라 제사자 본인이 결정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짐승의 일부만 하나님께 바치고 나머지는 전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점이다. 이때 하나님께 바치는 부위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suet), 두 콩팥, 그리고 간엽(liver lobe)이었다. 흔히 히브리어 요테레트 카베드(yoteret kabed)를 간꺼플로 번역하는데 그런 얇은 막이 제물에 적합했을리 없다. 랍비들은 그것을 ‘간의 손가락’, 다시 말해 간의 어느 한 토막으로 번역한다. 그것은 간 중에서 ‘미상엽’이라는 부위로 알려진다. 콩팥과 간엽을 바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그 기관들이 인간의 감정이 집약되는 기관, 즉 감정의 좌소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간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간점술을 금지하기 위해 제단에 바치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콩팥은 단순히 기름 덩어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기름과 한 덩어리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화목제에서 태워지는 이 부위들을 단순히 ‘기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레 6:12; 왕상 8:64; 대하 7:7; 사 1:11). 그리고 짙은 빨간 색의 간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에게는 그 기관이 피를 만드는 기관으로 간주되어 ‘피는 곧 생명’이며 하나님께 돌려야하기 때문에 간이 요구되었다는 설명이 가
장 그럴 듯 하다.
▲ 고대 팔레스타인 양의 거대한 꼬리와 꼬리를 위한 수레
양의 경우는 특별히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를 잘라 바치라는 규정이 더해졌다(레 3:9).
꼬리가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팔레스타인 양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그런 양을 보기 힘들지만,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어떤 양은 꼬리가 너무 거대한 나머지 바퀴가 달린 수레를 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름진 꼬리는 미골을 절단하여 제단에 바쳤다(레 3:9). 그러나 염소 꼬리나 소 꼬리는 기름이 아닌 고기 덩어리이므로 제단에 바치지 않았다(레 3:3-4, 14-15).
이렇게 기름과 일부 내장을 제하고 남은 고기(아마 남은 내장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는 제사장 몫으로 일부를 떼어낸 뒤 제사자가 가져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제사장의 몫은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나머지는 모두 제사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왜 짐승의 기름을 여호와께 바쳤을까? 이에 대해서는 기름이 가장 맛있는 부위였다거나 콜레스테롤 덩어리라 인체에 해로워 제물로 바쳤다는 설이 있다. 기름에 잘 타는 부위인 만큼 제물의 소각을 도왔을 것이라는 실용적 이유를 내세우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밀그롬이 말한 대로 내장에 엉긴 지방 덩어리는 고기 위에 붙은 비계와 달리 먹을 수 없는 부위다. 또한 콜레스테롤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관점은 현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으며, 과하게 섭취하지 않는 이상 콜레스테롤은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다. 또한 해로운 것을 바치라했다는 견해는 ‘기름은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신 데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제물이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데 있어서 기름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이 부와 풍요의 상징이자 힘의 근원으로 간주되었기에 풍요와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화목제를 드리는 때
번제와 마찬가지로 화목제 역시 자발적인 제사였기에 개인은 원하면 언제든 화목제 짐승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는 월삭이나(민 10:10) 오순절 같은 일부의 절기에 공적 제의로 바쳐지는 경우를 제외하면(레 23:19) 매우 사적인 성격이 강한 제사였다. 민수기 29장 39절에 따르면 절기마다 바친 화목제는 절기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보다는 잔치를 위한 자발적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대하 7:7). 또한 특별한 행사나 국가적 행사에서도 화목제를 풍성하게 드렸다(민 7장; 삿 20:26; 삼상 11:15; 대하 7:7; 30:22; 31:2). 화목제는 레위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전수해주셔서 바쳐지던 제사였다(예, 출 18:12).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