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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저 신 앙
출 25: 1-9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섬김을 받으려거든 먼저 섬기라, 먼저 남을 대접하라, 먼저 네 눈속에 들보를 빼어라,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먼저 서로 존경하라 ---." 우리에게 먼저 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무려 143번 '먼저'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하셨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망망대해를 건너 북미 대륙, 즉 오늘의 미국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바람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어도, 추위에 떨어도 좋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껏 읽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성호를 마음껏 찬양할 수만 있다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부와 번영의 복을 오늘날과 같이 부어 주셨습니다.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 즉, 스페인, 영국 사람들도 생명을 걸고 망망대해를 건너 오늘의 남미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의 바람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황금의 땅을 찾아서 배에 가득히 싣고 왔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욕만을 추구한 그들은 오늘과 같이 빈곤한 남미 대륙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두 사람들의 결과는 달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차이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 즉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를 늘 묵상하며 이 일에 진력하십시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역사의 증거대로 '하나님도,' '황금'도 풍요롭게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본문의 배경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고 있는 길위의 노정에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고 해야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지쳐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산위로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힘들고 지쳐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막짓는 일을 먼저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막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장소이며 본문 22절에는 그곳에서 너희를 1)속죄해 주겠다 2)만나 주겠다 3)일러 주겠다(가르치고 인도해 주겠다)하십니다. 바로 성막이란 그들의 죄를 씻는 장소이며, 하나님을 만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장소이고,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지시해 주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광야 길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곳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입니다.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교회는 우리의 갈 길을 보여주고, 병든자를 치유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회복의 장소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신앙을 지켜주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성전이 무너졌을 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약해질 때 성도들의 삶도 약해지고, 교회가 무너질 때 사람들의 도덕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 귀중한 성막을 하나님은 어떻게 지으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 걸까요?
1. 기쁨으로 지어야 합니다.
내게 예물을 가져오되 즐거운 마음으로 가져오라 하십니다.(2절)
'즐거운 마음으로'는 헌신의 기본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예물은 즐겨 받으시지만 인색함으로 억지로 내는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자는 많이 거두리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6-7)
귀한 간증이 있어 나누기 원합니다. 지난주에 할머니 집사님에게 심방을 갔습니다. 집사님은 단칸방에 사십니다. 집사님이 이런 부탁을 합니다."목사님 사실은 지난주 광고시간에 이번에 추수감사헌금은 목적헌금으로 한다는 소리를 듣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민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실은 내게는 10만원 가진 것이 전부입니다. 그 광고를 듣기전에 그중에서 5만원은 헌금하고 5만원은 목사님 심방오시면 한번도 식사대접 못했는데 같이 식사하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광고를 듣고나니 이 늙은이도 무엇인가를 해야겠는데 가진 것은 없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10만원을 모두 헌금하기로 했습니다. 이 늙은이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몰라요. 그런데 죄송합니다. 목사님 식사도 대접해 드리지 못해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슬픔보다는 기쁨이 솟구치더라구요. 바로 이런 할머니 집사님이 계시기에 우리교회가 되는구나. 소망이 있구나. 목회자를 생각하는 것, 교회를 아끼는 것, 목사가 뭐가 대접받을 만하며, 우리교회가 뭐가 훌륭한 교회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시니 모두가 부족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시니 예수님의 머리되신 교회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도라면 이러한 것은 안되겠습니다. 누구의 명령이나 지시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불가피하게 억지로 인색함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세는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자원해야 감사가 넘칩니다. 자원해야 기쁨이 넘칩니다. 자원해야 축복이 넘칩니다.
2. 모두가 참여해야 합니다.
3-7절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친 다양한 예물들 중에는 금,은처럼 비싼 예물도 있고 가는 베실이나 염소처럼싼 예물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자신의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알맞은 예물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는 것은 결코 예물의 질이나 양이 아닌 바치는 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1)믿음대로 2)축복대로 3)직업대로 4)은사, 재능대로 참여하여 함께 복을 누려야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가운에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낮은 울타리 11월호에서 퍼온 것인데 의미있는 글이라 소개합니다.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깍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 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 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모임을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나에게 불만을 토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래도 그가 내게 친구로 가까이 있음이 아닐까요?
세어보면 얼마나 많이 감사할 일들이 있는지 몰라요?
복 주신대로 힘에 맞게 자원하여 드려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요구대로 식양을 따라 지어야 합니다.
'식양'은 원본이란 뜻으로 천국의 모형을 의미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이신 것(9절 '네게 보이는 대로...')도 하늘에 있는 천국의 모형과 그림자(히8:5)였습니다.
즉, 우리 마음대로, 우리 방법대로, 형편대로 지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요구)에 맞게 ,하나님의 방법 지시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다들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나의 감정이요, 제 마음입니다. 제 마음이라면 오히려 나누어 드리고 싶고 보태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방법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도 제 마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축복 받기 전에 해야할 먼저라는 조건입니다. 이삭은 축복의 값으로 먼저 별미인 팥죽을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하여 나로 죽기전에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 27:4)
어디 그뿐입니까? 엘리야는 궁색하기 짝이 업는 시돈땅 사르밧 과부모자의 마지막 빵을 축복의 대가로 먼저 거의 빼앗다시피 받아내고서야 축복해줬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우리에게서 먼저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몸 버려 피 흘려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교회'를 담는 그릇-성전을 온전히 이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어서 광야 같은 세상 길을 통과할 때에 하나님이 늘 머무르시며 가르쳐 주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복을 받고 후손에게도 좋은 신앙의 유산과 축복을 물려주도록 합시다.
교회의 시작은
성경본문 출애굽기 25: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4.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5.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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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합성교회가 이 땅에 시작된 것은 1952년 10월 5일 의창군 내서면 합성리 성터 위에서 였습니다. 내년이면 50주년을 맞는 해가 되었습니다. 50주년을 앞두고 우리 교회의 시작에 대한 성서적 확신을 말씀을 통하여 다지고,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구속사의 표준인 출애굽기를 보면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가져야 할 몇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실천할 때,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은혜와 축복이 될 줄로 압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볼 때 430년간 지내온 삶의 터전인 애굽을 버리고 모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을 가야했던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상 줄을 끊지 못한 채 성경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떠나기는 했으나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한 섞인 무리들 때문에 그들이 40년을 광야에서 헤매다가 광야에서 장사지낸 기록도 있습니다. 장정이 60만이나 떠날 때, 그들의 앞에는 홍해의 시련, 목마름과 배고픔의 시련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 유독 선동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섞인 무리' 라고 표현합니다. 어느 곳이나 섞인 무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떠나기는 했으나 아직 정신적으로 의식적으로 완전히 애굽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앉아 있으되 생각은 아직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떠난 자가 갈 수 있는 길을 분명히 일러 주셨습니다. 떠난 자가 가야할 길이 분명히 있는데 이 길을 잘 걸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애굽 땅을 떠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모세로 하여금 시내산에 올라오게 하셔서 말씀을 돌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삶의 나침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셨는데 그 말씀이 말씀되게 할 만한 훈련의 장소가 필요했기에 성막의 모형도인 청사진을 모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전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느 한 쪽만으로는 안됩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목적 삼고 가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말씀되게 하는 터전, 즉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교회의 시작은 '여호와께서 산에서 보여주신 대로 성막을 지'은 데서부터입니다. 이 성막은 말씀 받은 자들이 말씀을 훈련받는 장소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이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야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소금의 역할을 하라하면 결국 창피만 당하고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빛을 발하려면 자기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지으라 하신 성막은 하나님께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한 모세에게 보여주신 청사진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인간이 노력하고 힘써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사도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선이며 이상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누가 성막을 볼 수 있으며, 누가 교회를 교회로 인식할 수 있습니까? 산에 오른 자입니다. 구속사의 큰 일을 해놓고 그들을 이끌어가기 위해 회의하고 의논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산아래 내려놓고 산 위에 올라가 40일을 단식하며 기도할 수 있는 그 사람의 눈에 성막의 모형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교회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 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보다 산적해 있는 그 일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그 사람의 눈에 교회와 성전의 참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찾아가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만남 덕분에 이사야는 27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할 일 없는 사람이 모여 노닥거리는 일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 갖는 모임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 시간 예배하는 여러분의 정체성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을 젖혀놓고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고자 하는 분들이 예배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젖혀놓고 먼저 한 일은 예배였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유월절의 감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시내산을 찾은 일이었습니다. 산아래 있던 자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광란을 하던 그 때도 그들을 내버려두고 산 위에 올라가서 말씀 듣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돌판에 말씀을 새겨 주신다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중요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바쁘고 급한 세상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필요한 일과 꼭 필요한 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필요한 것과 꼭 필요한 일을 구분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여러분과 나에게 화급을 요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모세는 화급을 요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 앞에 찾아와서 예배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민심을 다스리기도 전에 섞인 무리들을 통하여 온갖 불평이 터져나오던 그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우선으로 알았기에 급한 일을 모두 젖혀두고 무릎 꿇을 수 있었습니다. 성막의 모형도를 산에 오른 자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누가 성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도움은 경력과 관록 때문에 오는 것이 결코 아니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에게 21세기가 열렸습니다. 먼저 생각하고 찾고 돌보아야 할 일이 어디에 있는 무엇입니까?
모세는 시내산을 찾았습니다. 이런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귀한 시간에 주 앞에 나와서 먼저 해야할 일을 결단하지 못하면 수십번, 수백 번을 다닌다해도 성전이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인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모세에게 보여준 성막은 산 아래 있는 사람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에 오른 자에게만 보여준 것입니다.
21세기를 시작하며 산에 오른 자에게 모세와 같은 결단이 있으면 여러분의 눈앞에도 교회가 교회답게 보여지며 성전이 성전답게, 말씀이 말씀답게 보여지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성막의 모형도를 보여준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막의 모형도를 본 것으로 끝나선 안되고 본 것을 본대로 지어야 합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25:40)고 기록했습니다. 산 위에서 보여준 그대로 지은 성막은 훌륭하게 완성됩니다. 아무에게나 교회가 교회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전파하는 자리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레 목사님이 18세기 영국을 구원한 것은 보았다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요, 본대로 실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본대로 실천하는 능력은 결심이 아니요 신앙심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했습니다. 능력 주시는 그 분 안에 들어와야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산에서 한 번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 본 그대로 지었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보았다는 것보다도 되어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생활이 따라오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는데 이것은 지식이나 경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과 꿈과 환상이 있어야 천국이 내 것이 될 줄 믿습니다.
또한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출25:2)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성막을 땅에 지으려 할 때 하나님의 지시대로 본 것을 실천할 수 있는 동조자가 필요해서 백성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가져오라' 했습니다. 이 물건들은 모두 고귀한 것들이었습니다.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는 말은 높이 들어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열왕기서의 기록에 보면 요아서가 왕이 되어서 성전을 지을 때 자원하는 예물과 함께 인두세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예물이 이들에게 있었던 이유는 야곱이 요셉에게 많은 보물을 보냈고, 또 요셉이 총리로 지내던 시절의 보물이 있었을 것이요, 출애굽 당시에 애굽사람들이 귀한 물건들을 주었을 것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아말렉과 전투할 때의 전략물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때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들이 성막을 건축하기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막이나 성전,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 가운데 잘못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막을 지을 자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습니다. 부사렐과 오홀리압이란 사람을 하나님이 준비하셨는데 그들은 지혜와 총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지혜와 총명은 학문이나 경험, 경륜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일은 지혜와 총명으로 하는 것이지 경험과 관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린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있는 사람이 성전을 지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성막의 모형도를 보여준 것도 중요하지만 성도들의 자원하는 예물이 있었기에 성막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또 성막을 성막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성막이 만들어졌습니다.
합성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성도들의 헌신과 도움이 있어왔듯이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 재능을 가진 지혜와 총명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부사렐과 오홀리압의 헌신으로 성막이 완성되었듯이 여러분의 땀흘림과 희생과 사랑이 있을 때 21세기의 구원사역을 감당하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