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는 어떻게 다를까?
역시 김훈은 대단한 사람.
예전에 부평아트센터에서 있었던 김훈 작가와의 만남에서 그를 보았던 생각이 나고
연필로 글을 쓴다는 얘기에 깜놀했던 기억도 났어요.
그 긴 글을 연필로 쓰다니....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그러다보면 책상 가득 지우개 똥이 가득했다고....
어줍잖은 내가 소감을 말하기보다는 특이한 관점으로 풀어낸 글이 있어 옮겨와 보았습니다.
-------------------------------------------------------------------------------------------------------
영화 '남한산성'은 소설가 김훈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임진왜란과 함께 쓰라린 전쟁의 역사로 기록된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배경이다. 약소국의 비애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 영화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의 대립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조(박해일 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명길과 청의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김상헌. 그 사이에 고뇌하는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맞기까지 47일간 남한산성에서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조선의 전쟁 역사가 집중됐던 시기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만약 우리가 1575년에 태어났다면 10대에는 임진왜란(1592년 4월~ 1593년 1월), 20대에는 정유재란(1597년 1월 ~ 1598년 11월)을 겪게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50대에는 정묘호란(1627년 1월 ~ 1627년 3월), 60대는 병자호란(1636년 12월 ~ 1637년 1월)까지 한 번 겪기도 힘든 전쟁을 네 번이나 겪어야 한다.
전쟁의 무서움은 인구의 변화가 대변한다. 통계청 한국통계발전사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인구는 약 400만 명이었지만, 병자호란까지 겪은 후에는 약 15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약 70%에 육박하는 인구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총에 놀랐다면 병자호란은 '홍이포'에 속수무책이었다. 사거리가 700m인 청의 홍이포는 100m에 불과했던 조선의 조총을 압도했다. 영화 속에서도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갑자기 날아온 포격에 혼비백산하는 조선군의 모습이 담겨있다. 외래문물 수용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의 뒤쳐진 과학기술의 민낯을 보여준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당시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척화파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실리를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시대를 넘어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글'이 아닌 '길'을 제시한 최명길과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마주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국가의 앞날을 고민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승정원일기'에는 조선 시대 왕들의 질병과 처방, 예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인조의 건강상태를 보면, 늘 감기에 시달리고 설사를 자주 했다고 한다. 또한 복만이라고 해서 배만 상대적으로 빵빵해지는 증상을 보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인조는 굉장히 예민하고 추위를 많이 탔다고 한다. 소음인은 소화를 돕는 식단 조절이 중요하다. 청나라 군에 의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상태, 때는 추운 겨울, 신하들의 논쟁 등 불안정한 상황이었기에 인조는 체질학적으로 심한 고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자호란이 끝나고도 인조는 같은 증상으로 화침을 즐겨 시술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형익은 내의원 소속 의관은 아니었지만, 침을 잘 놓는다는 소문에 인조의 침 시술을 담당했다. 이때 이형익은 번침이라고 하여 침을 놓기 전 침을 달군 후 시술하는 방식을 많이 썼다고 한다. 추위를 많이 타고 한열증상이 있는 인조의 건강상태를 고려한 시술이었다.
소양인의 특징은 눈치와 손재주다. 영화 남한산성 속 또 다른 등장인물인 대장장이 서날쇠는 눈치가 빠르고 손재주에 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추위를 견디게 위해 가마니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거나, 조총의 문제점을 파악해 보완하는 등 소양인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만능 대장장이로 그려진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던 최명길 역시 소양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최명길은 강대해진 청을 등지면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하고, 융통성 있게 대화를 통한 화친을 주장했다. 반면 예의와 명분을 주장했던 김상헌에게선 태음인의 특징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김상헌도 병사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등 현실적인 모습을 보야줬지만, 이는 자신과 주변의 실상만 파악했을 뿐 시대 흐름까지 읽어내진 못했다.
<원우에서 발췌함>
첫댓글 아니 잘 나가다가 소양인 태음인이라니....
암튼 지금 이 글을 보니 지난 5년간 우리 나라가 외교를 얼마나 잘해왔는지
지금은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그래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네요.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나름 그쪽에서 자리잡고
청나라 정계와 좋은 관계를 맺자 불안해하죠. 결국 소현세자와 며느리까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암튼 모지란 인간이었어요.
광해군 시대 얘기를 쓰고 싶기는 한데...자신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는 중.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