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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4년 3기 – 마가복음>
제9과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Jerusalem Controversies)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 예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데서 오는 평화가 있었다. 그분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희생당하실 장소를 향해 나아가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상한 느낌과 의심 그리고 공포가 엄습하였다. 구주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그분의 주위에 불러 모으고 전보다 더욱더 명확하게 그분이 배반당하여 고통받으실 것을 알리셨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소망, 547)
◎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기지 아니하고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 크신 지혜를 가지고 주의 깊고 친절한 태도로 하셨다. 무례하지 않고 가혹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상심케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약점을 비난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 하셨다. 그분은 외식과 불신과 불의를 단연히 견책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심한 견책을 하실 때마다 그분의 말씀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분은 사랑하는 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는데 이 성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거절하였다. 저들은 구주이신 그분을 배척했으나 그분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의 생애는 극기적이고 남을 생각하여 돌보시는 생애였다. 모든 영혼이 그분에게는 귀중했다. 그분은 몸을 언제나 위엄있게 하셨으나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각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타락한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그분 사명의 대상자임을 아셨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그분의 품성은 이러하셨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신령한 긍휼의 흐름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내려 인류에게 미친 것이다. 자애로우시고 긍휼하신 구주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딤전 3:16) 하나님이시다. (정로, 12)
◎ 봉사의 생애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노리는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추적당하셨다. 정탐꾼들은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대적할 기회를 포착하고자 그분의 말씀을 주시하였다. 나라에서 가장 영리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논쟁을 통하여 그분을 패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없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의 비천한 교사에게 패배와 수치를 당하여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사람들이 이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는 참신함과 능력이 있었다. 심지어 그분의 원수들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료, 51~52)
<8월 25일/일, 승리의 입성>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은 주일 중 첫째 날이었다. 그분을 보려고 베다니에 모였던 군중이 이제 그분이 받으실 환영을 보려는 열망으로 그분과 동행하였다. 많은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도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는데 이들도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던 군중과 합세하였다. 자연계도 모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은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그 꽃들은 대기에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과 기쁨이 백성에게 활력을 주었다. 새 왕국에 대한 희망이 다시 솟아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 타고 갈 목적으로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어 그분께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다. … 예수께서는 사람이 타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쓰기로 결정하셨다. 제자들은 기뻐 열광하며 저희 옷을 짐승 위에 펴고 주님을 그 위에 앉혔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언제나 도보로 여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지금 짐승을 타고 가기로 선택하시자 제자들은 처음에는 놀랐다. 그러나 그분께서 도성에 들어가서 친히 왕임을 선언하고 왕권을 주장하시리라는 즐거운 생각에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빛났다. 심부름을 가면서 그들은 저희의 열렬한 기대를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따라서 흥분은 원근에 널리 퍼졌고 백성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 (소망, 569~570)
◎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입성에 관한 유대인의 풍습을 따르고 계셨다. 그분이 타신 짐승은 이스라엘 왕들이 탔던 것으로 메시아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분의 나라에 임하시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자마자 승리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군중은 그분을 저희 왕 메시아로서 환호하였다. 예수께서는 지금, 전에는 결코 허락하신 적이 없었던 존경을 받으셨다. 제자들은 이것을 그분이 보좌에 오르시는 것을 봄으로 그들의 즐거운 희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군중은 해방될 시간이 이르렀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가고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독립 국가가 되는 것을 상상하였다. 모든 사람이 행복과 흥분에 도취되었고 서로 다투어서 그분께 충성을 바쳤다. … 그들은 값진 선물을 그분께 선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가시는 길에 저희 겉옷을 융단처럼 펴 놓았다. … 그들은 왕의 깃발을 가지고 승리의 행렬을 인도할 수는 없지만 자연계의 승리의 상징인 쭉쭉 뻗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높이 흔들면서 큰 환호성과 호산나를 외쳤다. (소망, 570)
I◎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은 온 우주가 경탄할 일이었다. 별에서 별로, 세계에서 세계로 다니시며 만물을 감독하고 그분의 섭리로 창조한 광대한 우주의 각계각층의 존재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그분께서 그분의 영광을 떠나 몸소 인성을 취하시기로 동의하신 것은 죄 없는 다른 세계의 지적 존재들이 이해하기를 원하는 신비였다. (부조, 69)
<8월 26일/월, 저주받은 나무와 깨끗해진 성전>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분의 사명 말기에 그분은 또다시 성전을 찾아오셨는데 여전히 더럽혀져 있음을 발견하셨다. … 성전의 성직자들이 스스로 사고팔고 돈 바꾸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이득을 위한 탐욕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도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
다시 예수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신성성이 더럽혀진 성전의 뜰을 훑어보셨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분에게 쏠렸다. 제사장들과 관원들,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저희 앞에 하늘 왕의 존엄으로 서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마치 큰 폭풍우처럼 백성을 뒤흔드는 능력으로 말씀하셨다. …
그분의 권위에 대하여 감히 물어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은 저희 가축들을 몰고 그분 앞에서 도망하였다. (소망, 589~592)
◎ 잎이 나기 전에 익은 열매가 나오는 것이 무화과나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잘 익은 열매가 있음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외모는 기만적이었다. 제일 낮은 가지로부터 제일 높은 가지까지 다 찾아보셨으나 예수께서는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셨다. 그것은 가식적인 무성한 잎사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무에 말라 죽게 하는 저주를 발하셨다. … 다음 날 아침 구주와 제자들이 다시 그 도시로 들어가는 도중에 시든 가지들과 떨어지는 잎들이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 베드로가 말하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하였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리스도의 행위는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그분의 방법과 행위와는 다른 것처럼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그분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 얻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인자는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느니라”(눅 9:56/KJV)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분의 놀라운 행위들은 회복을 위한 것이었지 결코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그분을 회복시키는 자, 곧 치료자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행위는 사뭇 달랐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의아해하였다. (소망, 581~582)
◎ 우리 백성이 더 많은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공언하지마는 그것을 실천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은 믿음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 만일 정신이 하나님께 고정되고 진리가 성화시키는 영향을 마음에 미치면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질 것이다. …
[많은 사람]은 진리의 이론은 가지고 있지만 심령 속에 있는 그 힘을 느끼지 못한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거짓 가지들을 자랑했다. 그러나 구주께서 열매를 찾으셨을 때,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교회로서 그대들을 위해 철저한 사업이 이룩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저주는 그 열매 없는 나무에 떨어진 것처럼 분명히 그대들에게 내릴 것이다. (4증언, 613~614)
<8월 27일/화,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제사장들은 어떤 궤변을 가지고도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그들이 빠진 사실을 알았다. 만일 그들이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모순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 만일 제사장들이 요한의 증언을 믿었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메시아 되심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요한의 봉사가 사람에게서 왔다는 그들의 진정한 소신을 선언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폭풍과 같은 분노를 자초할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까닭이었다.
큰 관심을 가지고 군중은 결정을 기다렸다. 군중은 제사장들이 요한의 봉사를 받아들인다고 공언했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요한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의심 없이 승인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비밀리에 다 같이 협의한 후에 제사장들은 언질을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짐짓 알지 못함을 공언하면서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소망, 593-594)
◎ 당황하고 실망하여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서서 감히 그리스도께 더 질문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겁함과 우유부단함으로 그들은 그들 곁에 서서 이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백성의 존경심을 크게 상실하였다. …
예수께서 하신 질문의 결과를 근심스럽게 기다렸던 자들 중 많은 사람이 그 많은 일이 있었던 날에 처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이끌려서 마침내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성전 마당에서 일어난 장면은 그들의 마음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말을 주고받을 때 예수님과 대제사장 사이의 대조는 너무도 현저했다. 거만한 성전의 성직자는 화려하고 값진 옷을 입고 있었다. … 이 존귀한 사람 앞에 하늘의 폐하(陛下)께서 장식이나 치장 없이 서 계셨다. 그분의 옷은 여행으로 더럽혀졌으며 그분의 얼굴은 창백하고 침착한 비애가 표현되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거만하고 자신 있고 분노한 모습과는 이상하게 대조되는 존귀와 자비심이 보였다. 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목격한 많은 사람이 그때부터 저희 마음에 그분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모시게 되었다. (소망, 594)
◎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번영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였다. 그는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으랴”(사 5:4)라고 말하였다. … 그러나 농부들이 주인이 실과를 받기 위하여 그들에게 보낸 종들을 죽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도록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다. … [이제] 포도원 주인이 그의 불순종하는 종들에게 최후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었는데 그들이 잡아서 죽인 그 사랑하는 아들 속에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임박한 운명의 분명한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이미 아버지께서 마지막 호소로서 그들에게 보내신 그분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은혜를 모르는 농부들에게 가해진 보응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죽음에 처하게 할 자들의 운명이 묘사되었다. (소망, 596-597)
<8월 28일/수, 이 땅의 의무와 하늘의 상급>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사람의 학설과 이론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할 수 없다. 철학을 안다고 하는 자들은 지식의 보고를 열어젖히고 이단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저희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거짓 학설과 이단을 교회 안에 끌어들인 것은 바로 이러한 설명이다. …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 자신의 주견에 따라 해설하면서도 저희는 교사로서 큰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하여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막 12:24)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막 7:7)친 잘못을 책망하셨다. 비록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그 말씀을 행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사탄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로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실물, 110)
◎ 그리스도의 모든 기적은 이 유력한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며 돕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행해졌다. 그리고 그분은 회복자요 위대한 의사였기 때문에 [평민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분의 모든 은총은 하늘에서 온 빛이었다. 그분은 모든 선한 일을 통해 그들이 그분을 개인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하셨다. 그분의 삶은 향기롭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삶의 향기였다. 그분은 마음과 가정에 햇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들은 슬퍼하며 그분께 왔고, 찬양의 노래와 즐거운 기쁨을 가지고 그분을 떠났다. 그분은 그들이 그분께 마음속에 집을 드릴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주셨다.
그러나 그들[유대 지도자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행위로는 그것을 부인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의 불결함, 더럽혀진 삶의 관행, 이기심, 시기, 질투, 악한 추측,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하면서도 범하는 행위는 그들의 품성에 대한 끊임없는 증거가 되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진정한 품성을 드러내셨다. (This Day With God, 275).
◎ 사람이 죽을 때 의인은 상급을 받고 악인은 형벌을 받는다는 말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부조들과 선지자들도 그런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그런 일에 대하여 암시조차 하지 않았다. 성경은 사람들이 죽는 즉시 승천하지 않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부활할 때까지 잠자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살전 4:14; 욥 14:10~12 참조).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는 바로 그날에 그 사람의 생각은 없어진다(전 12:6 참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은 침묵 가운데 있다. 그들은 해 아래서 행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피곤한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복된 휴식이 아닌가! 그들에게 시간은 길건 짧건 간에 단지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고 깨어 일어나 영광스러운 불멸을 입을 것이다. (쟁투, 549~550)
<8월 29일/목, 가장 큰 계명>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예수님께 질문한 서기관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는 예수께서 그처럼 심오하고 완전한 성경 지식을 나타내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 거룩한 계명들의 근간이 되는 원칙에 대하여 넓은 식견을 얻었다. 모인 제사장들과 관원들 앞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바로 해석하셨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리스도의 지혜로운 대답은 서기관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였다. 서기관은 유대인의 종교가 내적 경건보다는 외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죄를 속하는 데 단순한 의식적인 제물과 신앙심 없는 피 흘림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람에게 이기심 없이 대하는 것이 이 모든 의식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논증의 올바름을 인정한 이 사람의 신속성과 백성 앞에서 보여준 그의 결정적이며 신속한 대답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을 나타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사장들의 찌푸린 얼굴과 관원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대히 마음의 확신을 말한 이 정직한 서기관을 동정하셨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라고 하셨다. (소망, 607~608)
◎ 하나님의 계명들은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 몇 자 안 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31).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 율법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그 높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라고 선언하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라는 말씀이다. … 많은 사람이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헤아려 볼 수 있으며 우리끼리 서로 비교해 보고 우리는 이 사람만큼 혹은 저 사람만큼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심판에 응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높은 하늘의 주장들을 감당하고 있는가? 거룩한 표준에 도달하고 있는가? 우리의 심령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1기별, 320~321)
<8월 3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언의 신 보충자료
◎ “마음의 성결”(This Day With God, 146)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기록될 때 그것은 순수하고 거룩한 삶으로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죽은 문자가 아니다. 그것은 영과 생명이며, 상상력과 생각까지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게 한다. 그 계명이 기록된 마음은 부지런히 지켜야 하는데, 이는 그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은 악의 모습도 피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요 받기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모본을 따라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만심을 느끼지 않고 오직 죄와 불결함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실 수 있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둘러싼 분위기는 순결하며, 그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키지 않을 것이다. 공의롭게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다.
이 마지막 날을 사는 사람들 앞에 놓인 위험은 순수한 종교의 부재, 마음의 거룩함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회심시키는 능력이 그들의 성품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유대 민족처럼 신성한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진리를 실천하지 않음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지하다. 하나님율법의 능력과 영향력은 주변에 있지만, 참된 거룩함으로 영혼을 새롭게 하도록 영혼 안에 있지 않다. …
하나님께서는 성경 교사가 그의 품성과 가정생활에서 동료들에게 가르치는 진리의 원칙의 표본이 되기를 원하신다.
사람은 그의 사람됨이 그가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 조용하고 일관된 경건한 삶은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살아있는 편지이다. 사람은 천사처럼 말하고 쓸지 모르나 그의 행위는 타락한 악마와 비슷할 수 있다. … 참된 품성은 외부에서 만들어지거나 덧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참된 선함, 순결, 온유, 겸손, 공평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그 사실이 품성에 반영될 것이며, 그런 품성은 힘이 충만하다.
◎ “논쟁” (소망, 601–609).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리스도의 날카로운 질책을 잠잠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그분의 책망을 논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층 더 단호하게 결심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꾼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끔 만나신 일이 있는 나이 든 바리새인들을 보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아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열심 있는 젊은 버아새인들을 보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심문할 때 그분에 대하여 적대적인 증언을 하려고 하는 어떤 헤롯 당원들이 이들과 동행하였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서로 큰 원수였지만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인들의 가혹한 과세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세금을 바치는 일은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된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 올무를 놓을 기회를 잡았다. 정탐꾼들이 예수께 와서 겉으로는 신실한 체하며 그들의 의무를 알기 원하는 것처럼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나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라고 한 말은 그들이 진실되었다면 경이로운 고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속이기 위하여 말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저들은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 이 질문을 한 자들은 저희 목적을 충분히 위장하였다고 생각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저희 마음을 펼친 책처럼 읽으시고 저희 위선을 경고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은 그들이 감추고 있는 목적을 읽고 계심을 나타내심으로 그들이 요구하지 않은 표적을 주셨다. 예수께서 “셋돈을 내게 보이라”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더욱더 당황하였다. 그들은 동전을 가져왔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라고 물으셨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동전에 새겨진 형상을 가리키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다.
정탐꾼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질문에 이쪽 혹은 저쪽이라고 직접 대답할 것을 기대하였다. 만일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부당하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분은 로마 관원에게 보고되어 반란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실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정당하다고 선언하실 경우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한다고 그분을 백성에게 고발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저희의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느꼈다. 그들의 계획들은 혼란해졌다. 요점(要點)을 답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회피가 아니라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이었다. 가이사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진 로마의 돈을 손에 들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로마 권세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이상 그들은 이 권세를 유지하기에 요구되는 것만큼 세금을 바칠 것이며, 이것이 더욱 높은 의무와 상충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하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국가의 율법에 온화하게 복종하는 한편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먼저 충성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구주의 말씀은 음모를 꾸미는 유대인들에게 한 혹독한 책망이었다. 만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충실히 실행하였더라면 그들의 국가가 분열되고 외국의 권세에 복종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깃발이 예루살렘에 휘날리지 않았을 것이며 로마의 보초병이 저희의 문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요 로마 총독이 저희의 성안에서 다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대 민족은 그 당시 하나님을 배반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대답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위선과 무례를 책망하셨으며 이 일을 행하심으로 세상 정부에 대한 사람의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 위대한 원칙을 선언하셨다. 많은 사람이 결말이 나지 않았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그때 이후로 그들은 올바른 원칙을 굳게 고수하였다. 비록 많은 사람이 불만을 품은 채 떠나갔지만 그들은 그 질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원칙이 분명히 제시된 것을 보았고 또 그리스도의 선견지명이 있는 분별력에 놀랐다.
바리새인들이 침묵을 당하게 되자 사두개인들이 교활한 질문을 들고 나왔다. 두 교파는 서로 크게 대적하는 입장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엄격하게 유전(遺傳)을 고수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외형적 의식에 엄격하였고 씻고 금식하고 긴 기도를 드리는 데 부지런하였으며 구제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헛되게 한다고 선언하셨다. 한 계급로서 그들은 완강하고 위선적이었지만 저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가 된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의 대부분을 믿으며 이것을 행위의 법칙으로 삼는다고 공언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자들이며 유물론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교리와 또 그 보상과 형벌을 부인하였다. 이 모든 점에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았다. 부활은 특별히 이 두 교파 사이에 논쟁의 주제였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굳게 믿고 있었으나 이 논의에서 미래의 상태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혼란을 가중할 뿐이었다. 죽음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되었다. 사두개인들의 논증에 맞설 수 없는 그들의 무능함은 계속적인 노여움을 일으켰다. 두 교파 사이의 논의는 대체로 성난 언쟁을 초래했으며, 그들을 전보다 더 멀어지게 하였다.
수효에 있어서는 사두개인들이 상대측보다 훨씬 적었으며 일반 백성을 굳게 장악하지 못했으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부자였으며 그들은 부(富)가 주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 계층에 대부분의 제사장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대제사장은 흔히 그들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들의 회의적 견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명백한 약정으로 그렇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수효가 많고 인망이 있는 까닭에 사두개인들은 어떤 제사장 직분이든지 유지할 때는 외형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교리를 용인할 필요가 있었으나 그와 같은 직분이 그들의 오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거절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와 같이 스스로 드러나는 어떤 정신에 반응하셨다. 하나님과 내세에 관한 그분의 가르치심은 그들의 교리에 반대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류보다 높으신 유일한 존재자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하는 섭리와 하나님의 예지는 인류에게서 자유로운 도덕적 기능을 빼앗아 사람을 노예의 위치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류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더욱 큰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였다. 그들은 인류가 스스로 생애를 지배하고 세상의 사건들을 계획할 자유가 있으며 인류의 운명은 사람의 손에 놓여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의 힘과 자연의 법칙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능력을 적당하게 활용함으로 인류는 향상하고 계몽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엄격한 강요를 통하여 그의 생애가 순결하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개념이 자신들의 품성을 꼴 지웠다. 그들의 견해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들도 상호 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 가운데 연합이란 거의 없었다. 인간의 행동에 끼치는 성령의 감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저희 생애에는 그분의 능력이 부족하였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천적인 권리와 율법의 요구를 엄격히 지키는 일을 크게 자랑하였으나 그들에게 율법의 참정신과 아브라함의 믿음과 자비심은 없었다. 자연적인 동정심은 좁은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생애의 위안과 축복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저희 마음은 다른 사람의 궁핍과 고통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행위로 초자연적 결과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과 현세 저편의 내세와 인간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항상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와 동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나타내셨는데 이것이 사두개인들의 이기적 배타심을 질책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현세적 유익과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음을 움직이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품성의 변화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루려는 과오를 보여주셨다.
사두개인들은 이 가르침을 믿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님과 논쟁하면 그들은 그분을 정죄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님의 평판을 떨어뜨릴 자신이 있다고 느꼈다. 부활은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로 선택한 문제였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동의하신다면 그분은 바리새인들을 더욱 크게 화나게 할 것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반대하신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조롱하기로 그들은 계획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만일 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처럼 불멸의 상태에서도 동일한 물질의 분자(分子)로 구성되었다면 죽음에서 살아났을 때도 살과 피가 있어야 하며 지상에서 중단된 생명이 영원한 세계에서 계속되어야 한다고 추론하였다. 그럴 경우 세상에서의 관계가 계속될 것이며 남편과 아내는 다시 연합되어 부부 생활이 계속되고 모든 일이 죽기 전과 똑같이 되어 나가고 금생의 약점과 격정이 내세에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심으로 예수께서는 내세를 가린 베일을 거두셨다. 예수께서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두개인들의 신조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셨다. 그들의 전제는 잘못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부언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것처럼 위선 때문이 아니라 신조의 오류에 대하여 그들을 책망하셨다.
사두개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가장 굳게 고수한다고 자랑해 왔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 말씀의 참뜻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 지식은 성령님의 비추심으로 마음에 깊이 확신 되어야 한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그들의 무지가 믿음의 혼란과 심령의 어둠을 가져온 요인이라고 예수께서는 선언하셨다. 그들은 그들의 유한한 추리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해력을 넓혀 주고 힘 있게 할 이 거룩한 진리에 저희 심령을 열도록 초청하셨다. 그들의 유한한 지력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이 무신론자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타난 경이로운 거룩한 능력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이와 같은 능력의 증거를 거절하며 그것을 그들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자연 작용에 돌린다. 우리 주위에 있는 신비를 여는 유일한 열쇠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임재와 능력을 승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명령하고 실행하는 분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넓은 견해와 그분의 섭리의 신비를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저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성경이 쓸데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청중에게 선언하셨다. 그분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신다. 그분은 시작부터 끝을 아시며 그분의 사업의 결과를 그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 같이 보신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맨 마지막에 죽는 성도에 이르기까지 죽은 고귀한 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와 불멸의 생명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부활한 성도들은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가 될 것이다. 그분의 목적 가운데 예기되어 있는 이 상태를 그분은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보신다. 죽은 자가 그분에게는 산 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사두개인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답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정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백성의 멸시밖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책잡는 데 사용할 말을 하도록 그분을 추궁하는 일을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학식 있는 서기관을 설복시켜 율법의 열 가지 교훈 가운데 가장 크고 중대한 것이 어느 것인지 예수님께 질문하도록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창조주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지적한 첫 네 계명을 그의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람의 의무로 밝힌 나머지 여섯 계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높였다. 그 결과 그들은 실제적 경건을 이루는 데 크게 실패하였다. 예수께서는 백성에게 그들의 큰 결점을 보여주신 다음에 그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선한 행실의 필요를 가르치셨다. 이런 이유로 그분은 나머지 여섯 계명을 처음 네 계명 이상으로 높인다는 비난을 받으셨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접근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직접적이며 힘이 있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는 둘째도 첫째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것이 첫째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하나의 큰 계명으로 요약된다. 나머지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른 계명 가운데 포함된다. 이 두 계명이 다 사랑의 원칙의 표현이다. 둘째 계명을 범하면서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첫째 부분을 범하면서 둘째 부분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보좌에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때 우리 이웃에게도 바른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만 우리 이웃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다.
모든 계명이 사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어 있으므로 이 원칙을 범하지 않고는 한 계명도 어길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것은 크게 중요하고 다른 어떤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할지라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분리된 계율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청중에게 가르치셨다. 우리 주님은 처음 네 계명이나 나머지 여섯 계명을 다 거룩하고 완전한 것으로 나타내시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께 질문한 서기관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는 예수께서 그처럼 심오하고 완전한 성경 지식을 나타내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 거룩한 계명들의 근간이 되는 원칙에 대하여 넓은 식견을 얻었다. 모인 제사장들과 관원들 앞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바로 해석하셨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리스도의 지혜로운 대답은 서기관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였다. 서기관은 유대인의 종교가 내적 경건보다는 외적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죄를 속하는 데 단순한 의식적 제사의 무가치함과 믿음 없는 피 흘림이 무가치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람에게 이기심 없이 대하는 것이 이 모든 의식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도의 논증이 옳음을 인정한 이 사람의 신속함과 백성 앞에서 보여준 그의 결정적이며 기민한 대답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을 나타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사장들의 찌푸린 얼굴과 관원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담대히 마음의 확신을 말한 이 정직한 서기관을 동정하셨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하셨다.
이 서기관은 번제물과 제물보다 의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더욱 받으실 만한 것임을 깨달았으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의 사업을 행할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산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 한 의식적인 희생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심지어 도덕적 율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주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아버지 율법에는 단지 권위적인 명령 이상의 더 깊은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주셨다. 율법 가운데는 복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원칙이 구현되어 있다. 율법은 사람의 의무를 지적하며 그의 죄를 보여준다. 사람은 그리스도께 용서와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
예수께서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가까이 모여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라고 질문하셨다. 이 질문은 메시아에 관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하여, 즉 그분을 단순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무리는 음성을 합하여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메시아에게 예언된 칭호였다. 예수께서 능력 있는 기적들로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셨을 때, 그분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셨을 때 백성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뇨” 하고 그들 가운데서 서로 물었다.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와 다른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라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분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라는 즐거운 부르짖음의 만세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날 성전에서는 어린이들이 그 즐거운 찬송을 되뇌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많은 사람이 그분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대답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의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셨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분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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