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독립운동가의 청춘, 얼굴...
위종관(魏鍾琯)
2023년 장흥문화원에서 '장흥독립운동가의 청춘, 얼굴'이라는 작은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장흥위씨는 2분이 실렸습니다...
위종관(魏鍾琯)
33세 장천문중 판서공파
1909-1991 | 장흥군 유치면 단산리
위종관 선생은 1928년 일본동경신전소학교東京神田小學校를 졸업하고 1928년 명치동경신전소학교 명치부속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29년 서울중동중학교 특별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영향으로 식민지교육정책을 비판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을 당해 고향마을 유치로 귀향하였다.
야학당 1931년 농민문맹 퇴치를 위하여 자비로 마을 한문서당을 회의실 겸 야학당夜學堂로 개조, 남녀학생을 모집하여 야학을 개설하였다. 1932년 김두환, 유재성, 길인주, 길영삼, 정진수등의 권유로 합법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장흥지부, 장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장흥군에 언론기관을 만들려고 동지들과 협의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왕제일과 함께 중앙일보 장흥지국을 경영하면서 각처 동지들의 연락 및 비밀 회합장소로 이용하며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33년 10월 장흥군 곽산면 옥당리 일대에서 유재성劉載星·정진수丁瑨壽 등과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전남 운동협의회'에 가입한 후, 유치면 조직책으로 활동하며 농민조합을 조직하였다. 1934년 1월 17일 '전남 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일경에게 피체되어 장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여러번 당하였다.
1934년 6월에 기소되어 목포 형무소로 이감, 1937년 1월 예심 3년 만에 목포재판소에서 공판이 개정되어 3회에 걸친 공판 결과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1937년 1월 검사의 부대공소로 대구복심법원으로 신병身과 동시 이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유죄를 받고 그해 7월 미결통산未通算으로 출감하였다. (3년 6개월 복역). 미결몽산
1945년 해방 후 장흥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유치면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경찰 수복 후 입산했으나 생포되었고 쓸쓸한 노년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참작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위종관(魏鍾琯)
일명(一名) 귀환(貴煥)이며 호(號)는 난사(蘭史)요 순종(純宗) 무신(戊申) 1908년8월10일생이니 경오(庚午)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수상(建國勳章愛族章受賞)하다. 신미(辛未) 1991년3월12일 종(終)하니 묘(墓)는 대전국립묘지애국지사묘역27호(大田國立墓地愛國志士墓域二十七號)다. ○ 배(配)는 광산이양례(光山李良禮)며 고종(高宗) 을사(乙巳) 1905년11월8일생이니 부(父)는 진수(璡秀) 조(祖)는 승규(承奎)며 청심당후(淸心堂后)요 외조(外祖)는 청주김행렬(淸州金行烈)이며 신해(辛亥) 1971년9월7일 졸(卒)하니 묘(墓)는 대전국립묘지애국지사묘역27호합조(大田國立墓地愛國志士墓域二十七號合兆)다.
경기도 의왕시의회 초대의장 위득우가 선생의 둘째아들입니다...
자료협조 : 호산 위신복
탁마재 재치 위현동...
사족 : 책의 내용에 일부 오류가 있어 글을 정리하면서 사실확인후에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