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깡패 이야기
처음 묵호에 온 것은 사춘기의 중심에서 방황하던 시기였다.
나의 사춘기는 너무나 지독했다. 그것에 대한 충격과 영향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화석처럼 남아 있고, 그 경험이 내가 일본에 유학을 가서 논문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뛰고 있었다. 뒤에는 놈들이 소리치며 쫓아오고 있었다.
"서어! 서어! xxx야!"
"저 xx 잡앗!"
그날, 햇살 좋았던 가을 날에 나는 묵호 삼거리를 마치 마라톤 선수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휴일 날 지나 가던 사람들은, 관중이 되어 달려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정처 없이 맑았다. 햇살의 파편들이 내 눈에 뛰어 들어 따가울 정도였다. 방파제에 나갔다가, 앞 묵호 깡패 새끼들을 만난 것이 실수였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강릉고에서 전학 온 내가 괜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놈들은 나에게 복종을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를 묵살했고, 나의 선방에 싸움은 시작되었다.
도저히 놈들의 떼거리를 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도망을 친 것이다.
삼거리에 다달았을 때, 앞에서 놈들의 다른 일행들이 길을 막았다. 도망 칠 수가 없었다. 독 안에 든 쥐였다.
뒤에는 놈들이 숨을 헐떡이며 사냥개 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앞에서 발길질 했던 한 놈의 발을 잡아 삼거리 양복점 쇼윈도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대형 유리창은 박살이 났고, 나는 잽싸게 유리 조각 두 개를 잡았다.
소리쳤다.
"덤벼! 덤벼! 덤비란 말이야! xxx들아!"
놈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관중들의 표정도 경악을 하는 모습이었다.
내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하얀 그림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갑자기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나는 애써 눈물을 참고 다시 소리쳤다.
놈들에게 약점을 보이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빨리 덤벼 xxx들아!"
그러면서 나는 유리 조각 두개를 양손에 들고 놈들에게 다가갔다.
놈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관중들도 하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역시, 시골 날깡패새끼들은 순진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나는 안묵호 깡패새끼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서울 학원가로 도망갈 때까지 놈들과 술이나 빨면서 지낼 수 있었다.
1978 어느 햇살 좋았던 가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장면은 마치 영화의 정지된 화면 처럼 나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그 가을 날의 햇살의 파편과, 나를 쫓아왔던 묵호시내 날깡패 새끼들의 욕설과,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관중들과, 하늘을 날았던 비행기의 하얀그림, 그리고 피가 흐르는 줄 도 모르고 유리 조각을 들고 서 있었던 내 모습과, 그때 흘렸던 눈물.......
그때, 나는 강릉고에서 묵호의 고등학교로 전학을 간 상태였다.
지금은 북평과 묵호가 통합되어 동해시로 되어, 시내 중심이 천곡동으로 옮겨갔지만, 그 당시는 기차역 굴다리를 빠져나와 묵호 삼거리가 중심지였다.
묵호는 영동선 기차역의 중요 정차역이었고, 동해안의 유명한 어항이었고, 외국 사람이 들락거렸던 국제항이었다.
대낮에도 묵호 극장은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로 시끄러울 정도였고, 안 묵호 목욕탕과 미용실도 그녀들이 없으면 장사를 못 할 정도였다.
밤이면 삼거리의 카바레는 외항선 탄 남편을 둔, 바람 난 유부녀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굴다리 위 기찻길을 석탄을 실었던 기차가 지나가면, 바람에 까만 먼지가 날아오르곤 했다. 그래서, 그 당시 묵호는 석탄의 검은색과 술집 아가씨의 빨간 루즈 색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도시였고, 바람 난 유부녀들과 니나노집 한복 아가씨들의 싸구려 향수 냄새와 어판장의 고기 썩은 냄새가 기가 막히게 섞여서, 강한 자극을 주던 도시였다.
어판장의 아줌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것이 일상이었고, 항구 위의 달동네에서는 아이들이, 그 밑의 니나노 집에서 쓰레기통에서 뒤진 콘돔을 풍선으로 불면서 노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오징어 배가 들어오는 날에는 온 도시가 흥청거렸다. 지나가는 개새끼들 조차 돈을 물고 다닌다고도 했다. 비린 내 나는 돈은 온 도시를 점령했다.
심지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아이들도 그 당시 학생으로서는 만지기 힘들었던 천원짜리 돈으로 짤짤이를 했고, 그런 돈으로 고등학생이 시내 호프집을 돌아다녀도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때 순진했던 깡패새끼들이 그립다. 얼띠기 사춘기 소년의 유리조각과 내가 흘렸던 빨간 피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박한 권력마저 순순히 내주었다.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작은 권력으로 나를 내리누르려 했지만, 나는 그 당시 그들의 작은 권력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
어판장의 고기 썩은 냄새와 기차역에서 번져나왔던 까만 석탄가루, 술집 아가씨들의 껌 씹는 소리가 정답게 다가온다.
콘돔을 불고 놀았던 아이들과 악다구니 싸움을 했던 어판장 아줌마들이 사랑스럽다.
분명, 1978 년 그 당시의 묵호의 표정은 십 대 후반의 고등학생에게는 좋지 않는 교육환경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때의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다녔던 강릉고에서의 기억에 대한 억한 심정일 지도 모른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학교는 대학이 전부였다. 네모난 공간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 새벽부터 밤까지 감시를 하며 채찍질 했다.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은 전혀 자율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참지 못하면 문제아가 되었다. 나는 그것에 반항을 하며 뛰쳐나왔다. 그것은 거대한 폭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의 힘이 아이들을 내리누루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대학을 가야지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교육이었다.
박정희의 파시즘이 교실에도 지배하고 있었다. 깡패 새끼들의 작은 권력은 그에 비하면 어설픈 것이었다. 차라리 그 당시 묵호 시내의 천박한 표정이 강릉고의 타율적으로 포장된 네모난 공간보다 인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