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디어 헌터>의 메인 타이틀 <카바티나>
*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호의 뗏목>, 들라크루아의 선배이기도 한 제리코의 이 작품은 후에 들라크루아
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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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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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1798년 4월 26일 외교관 아버지 샤를을 부친으로 프랑스의 파리 근교인 샤랑통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진짜 아버지가 정치가 탈레랑(나폴레옹 시절 활약했던 유명한 정치인)라는 소문이 계속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탈레랑이 그의 화가 활동을 은밀히 후원해 주었다는 것과 닮은 외모 등으로 이런 소문이 따라 다녔던 것 같습니다. 정작 들라크루아는 단 한 번도 이런 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버지 샤를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7세 때 부친을 잃고 누나가 그를 키웠으나 이후 외숙부가 그를 키웠습니다. 부유한 외숙부의 지원으로 연극,문학작품,고대 역사 등에 심취할 수 있었고, 이후 이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호라티우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쓴 고대 작품에 깊이 빠져들었고, 단테,바이런,셰익스피어,몽테뉴 등 철학,문학,시,희곡 등을 망라하여 독파해 나갔습니다.
18세 때 에콜 데 보자르(파리 미술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았고 사교계에서는 스탕달 등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었고 동시에 연극과 오페라 관람도 빠짐없이 관람했습니다. 이런 인문학적 소양이 그의 작품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 들라크루아의 <모로코에서의 유대인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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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들라크루아는 살롱전에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첫 번째로 출품하게 됩니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시인 보들레르는 그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가 됩니다. 이후 1824년에는 동 살롱전에 <키오스 섬의 학살>을 출품함으로써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발돋음하게 됩니다.
이듬해 그는 빅토르 위고와 함께 영국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는 바이런과 월터 스콧 등 당대의 영국 문호들 뿐만 아니라 영국 풍경화가인 존 컨스터블, 윌리엄 터너 등과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와같은 영국 여행이 평생 그의 작품 소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827년,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의 절정을 이루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살롱전에 출품하였고, 낭만주의 화가들로부터 격찬을 받기에 이릅니다. 비록 지나치게 과장되었단 일부 비판도 따랐지만서도요.
1830년,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즉위한 계기가 된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여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혁명정신의 상징으로 불리우며 1831년 살롱전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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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들라크루아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32년에는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모로코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5개월 가량을 체류하면서 모로코의 역사와 북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빛 등에 크게 영감을 받고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고 이를 토대로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 <모로코 군대의 기병>, <하렘의 알제 여인들> 등의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1834년,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인 여류작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조르주 상드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상드는 피카소,빅토르 위고,리스트 등 당대의 문학가들과 예술가들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는 등 남성 편력의 대가였습니다.
*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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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특히 쇼팽의 뮤즈로도 유명했지요. 들라크루아는 쇼팽과 상드의 관계 이전에 그녀를 만났으며 얼마 후에는 쇼팽과도 친교를 맺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삼각관계였으나 쇼팽과 상드 그리고 들라크루아 이들 세 사람은 보기 드문 우정을 나눈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모로코에서 돌아온 들라크루아는 루이 필리프 정권에서도 중용되어 정부의 의뢰로 <타유부르의 전투>,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의 많은 걸작들을 그렸습니다. 1848년 루이 필리프가 실각하고 공화정이 수립된 후에도 <피톤을 죽이는 아폴론>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어린 시절부터 풍부한 인맥과 신사다운 품격, 냉철한 이성과 박식함을 갖추고 활발한 사교활동을 지속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1830년대 이후 지나치게 많은 작업을 하면서 건강을 해쳤으며 1850년이 되면서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생의 기력을 잃고 맙니다.
* 들라크루아가 말년을 살다간 파리의 아파트(현재는 그의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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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63년 8월 13일 파리의 아파트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미술에 헌신한 들라크루아의 작업량은 경이러울 정도여서, 죽은 후 남겨진 소묘, 파스텔화, 유화들만해도 9천여 점에 달했다고 합니다.
*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에 있는 그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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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감상 ]
* 키오스(싸이프러스) 섬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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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1822년에 그리스의 키오스 섬에서 일어난 대학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오스만 터키의 지배에 있던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 혁명을 도모했는데, 이를 진압하면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으로 살육한 사건이 키오스 섬의 대학살입니다.
이 사건은 자유주의를 지지하던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들라크루아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 사건을 소재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건을 대하던 프랑스인들의 정서와 달리, 정작 그림은 ‘위대한 그리스인의 해방 투쟁’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죠.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의 뗏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영향을 고스란히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정신보다도 ‘재난’이라는 상황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난에 처한 인간 군상을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한 것도 제리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알제이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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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는 1832년, 모르네 백작의 수행원으로 북아프리카로 건너갔습니다. 알제이에 도착하자, 태양은 쨍쨍 내려쬐고, 풍물은 밝고 색체는 선명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이 빛과 색깔을 몹시 기뻐했습니다. 북방의 무겁고 침침한 하늘 밑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살아 있는 색깔을 보고, 들라크루아의 색감이 타오른 것입니다. 이리하여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루아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게 되었으며, 화첩은 순식간에 스케치로 메워졌다.
이 여행의 스케치는 500점이나 되며 이 작품은 그 대표작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날, 들라크루아는 특별한 허가를 받아서 알제이 시의 부인실을 찾아갔습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부인실에 들어가 보니, 밝은 빛 속에 젊은 여자들이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죠.
그 의상의 선명한 색깔을 보고 경탄했습니다. 일생동안 잊지 못할 그 색감에 감동한 것입니다. 그때 본 여자와 의상과 실내의 이국적 무드를 그린 것이 이 작품입니다.
*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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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때 처음으로 살롱전에 입선한 기념할만한 작품입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의 연못을 쪽배를 타고 건너려고 하는데, 망령이 몰려와서 쪽배에 기어오르려고 허덕이는 장면입니다.
중앙에, 놀라서 일어선 두 시인 주위에, 쪽배에 매달리려고 하는 망자의 군상이 삼각도법으로 처리되고, 이것들이 모진 동요의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및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육체의 표현이 있고, 극적인 구도 속에 단테가 쓴 두건의 붉은 색이 돋보이며, 이에 차가운 청색이 옷이 대응하여 야릇한 색조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심사 이전에 본 대화가 그로는 무조건 감탄하여, 자기가 직접 액자를 주문하여 살롱에 출품 시켰고, 심사 할 때는 시종 강력히 추천하여 입선시켰다고 합니다. 들라크루아는 이후 그로의 이 호의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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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 4월 14일,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4차)에 의하여 함락되고, 그때 프랑스의 총 사령관 보오드왕 백작은 군마를 타고 입성합니다. 빛나는 승리의 영광을 가슴에 안은 승리자의 둘레에는 패전 뒤의 피비린내 나는 광경뿐입니다.
그림의 왼쪽에는 항복을 외치며 한 손을 쳐든 노인, 그 앞에는 번듯하게 나자빠진 여자의 시체, 그 앞쪽에는 서로 부둥켜안고 관대한 자비를 비는 터키인 모자, 오른쪽에는 장군이 온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죽은 동포를 부둥켜안고 힘없이 엎드린 여자, 모든 것이 아수라의 거리에 휘몰아치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였습니다.
풍경에는 로마 풍의 건물의 일단이 보이고, 그 뒤쪽의 먼 곳에 보스포러스 해협이 파랗게 반짝이고, 그 위에 먹구름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장군을 중심으로 면밀하게 연구된 구도와 타오르는 색채에 의하여 원근감이 충실하고, 리드미컬한 표현이 훌륭하게 결실된 대표적인 대(大)구도입니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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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830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7월 혁명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814년의 왕정복고로 루이 16세의 동생들인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샤를르 10세가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과거의 정치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파리에서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830년 7월 27일, 시민들은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였고 군대와 시가전을 벌인 끝에 29일에는 시민들이 왕궁으로 진입하여 샤를르 10세는 결국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3일에 걸친 열띤 혁명 중 2틀째인 7월 28일의 파리 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혁명 직후인 1830년 가을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해 10월 12일에 형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나쁜 기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사라졌다…(중략)…나는 지금 바리케이드라는 현대적인 주제를 그리기 시작했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림은 1831년 5월 살롱에서 전시되었고 같은 해 프랑스 정부에 팔렸습니다.
정부는 이 그림을 7월 혁명으로 왕이 된 ‘시민왕’ 루이 필립의 궁전 알현실에 걸고자 하였으나 대신 궁전의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주제가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들라크루아에게 되돌려 보내졌습니다. 1874년 루브르에서 구입하기 전까지 이 그림은 들라크루아 본인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고전적이고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물들의 힘찬 움직임, 열정적인 색채의 사용, 시내 곳곳에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의 묘사는 들라크루아가 추구했던 낭만주의 미술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중앙에서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들고 민중을 이끌고 있는 여성의 모습은 고전적 미술에서 멀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건강하고 힘찬 모습의 여성은 과거의 그림에 주로 나타났던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으로 당시에는 ‘품위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림의 곳곳에는 혁명과 관계된 요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먼저 자유를 상징하는 여성이 들고 있는 삼색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에는 금지되었다가 7월 28일, 혁명의 상징으로 다시 한 번 거리에 등장한 것입니다.
모자를 쓰고 정장을 입은 부르주아 남성과 셔츠를 풀어헤치고 캡을 쓴 젊은 노동자, 그리고 하층 계급의 소년을 배치하여 당시의 혁명이 사회 전체적인 지지를 받았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의 발밑에는 이미 쓰러진 시민들의 시체가 쌓여있어 혁명 중에 일어났던 희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즐감! 상당히 어렵습니다.. 평소 잘 모르는 분야의 화가라 그런지.....디어 헌트는 분위기 엎!
붓타치가 전편인 다비드 그림보다 거칠고 자유분방한 느낌이 오죠? 바로 낭만주의 화풍으로
넘어가는거죠. 반듯하고 정석적인 느낌의 고전주의에서 탈피하고자하는 것이겠죠. 들라크루
아의 그림은 맨마지막 작품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통하여 문와한들한테도 많이
알려졌지만 그밖의 그림은 다소 생소할 수도...아무튼 박식하고 품격있었던 들라크루아의 생
애를 보다 구체적으로 조감해 보고 싶었는데...다음 기회에...
고박사님 수준이 청와대 변양균의 혼을 빼,,,사랑에 빠진 몽유병환자로 만든 신정아 큐레이터 보다 몇 수위 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