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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쿰란
interview-방송 40주년 기념 특별인터뷰
세 살 딸을 교통사고로 잃을 뻔한
최선규 아나운서
“상처는 흔적이에요”
최선규 아나운서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를까? 아마도 CTS TV 간증프로그램 ‘내가 매일 기쁘게’가 생각나지 않을까? 그 프로그램을 무려 20년이나 진행했으니 그를 보면 그 프로그램이 오버랩 된다. 지금은 다른 MC가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낯선 것을 보면 그의 진행이 오래되기도 했지만, 꽤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방송인 생활을 한 그를 만나 그의 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얘기를 진하게 들어보자.
글. 최윤희 │ 사진. 이종관
그는 KBS 공채 13기 아나운서로 출발해 SBS가 개국할 때 스카우트가 돼서 ‘생방송 행복찾기’를 10년간 진행한 이력이 있다. 그리고 아나운서로는 처음으로 프리랜서 선언을 해서 지금까지 방송인으로 살아오고 있다. 40년. 말이 40년이지 한 직업으로 오랫동안 살아오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는 ‘최선규=아나운서’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섭외하려고 전화했는데 먼저 질문부터 한다. 난생처음 섭외 전화했다가 질문을 받아봤다. 참으로 희한한 경험이었다. 역시 직업병은 어쩔 수가 없구나 생각하고 인터뷰 날짜를 잡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그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장소는 경기도 광주. 차가 없으면 절대로 찾아갈 수 없는 곳에 위치한 특이한 외관을 가진 ‘오픈앨리’라는 카페였다. 다행히 사진기자 집사님과 같이 가게 돼서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인터뷰 당일 기자한테 문자를 보내왔다. “샬롬~~!! 오늘 의상은? 1. 정장 2. 세미 정장 3. 캐주얼 정해 주세요.” 역시 프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 그가 들어오는데 밤색 정장에 흰색 폴라티를 입은 키가 크고 잘생긴 분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방송 모습 그대로였다. 인사를 하고 사진을 먼저 찍었는데 얼마나 포즈를 자유자재로 잘 취하는지 놀랐다. 연예인들 촬영을 해보면 연예인들은 사진기자들이 주문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데 마치 그들처럼 잘 취했다. 알고 보니 패션모델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800장이 넘는 사진을 찍고 나서야 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아나운서가 꿈
딸 얘기가 제일 궁금했지만, 아나운서가 된 배경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것부터 물어보았다. 그는 어렸을 때 꿈이 아나운서였다고 한다. 사실 기자도 꿈이 아나운서라 KBS 아나운서 시험을 봤는데 붙었으면 그의 후배가 될 뻔했다.
“나는 아나운서가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꿈을 꿨거든요. 옛날에 라디오 시절에 나는 얼굴도 본 적도 없지만 우리한테 대선배인 이광재 아나운서라고 신화 같은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라디오를 통해서 스포츠 중계를 해외에서 하는데, 아마 필리핀 쿠알라룸푸르에서 한 아시아 농구선수권대회였던 것 같아요. 우리 보고 기뻐해 달래요. 그분이 기뻐하라고 하면 기뻐해야 하고 슬퍼하라고 하면 슬퍼해야 하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전부 그분 목소리에 따라서 웃고 울고 있더라고요. 저게 뭔가 그랬더니 그분이 아나운서인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나도 흉내 낸다고 볼펜과 연필을 마이크 삼아 중계방송하고 그랬어요. 사실은 그때부터 아나운서 꿈을 꿨는데 누구한데 대놓고 얘기를 못했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할 때 마지막 수업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한 명씩 나와서 앞으로 장래 꿈을 얘기하라고 하는 거예요. 대통령 된다는 아이, 장군 된다는 아이, 교수, 교사 등 많은 직업군이 나왔어요. 내 순서가 됐는데 내가 나가서 ‘저는 아나운서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순식간에 애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꿈을 얘기하는 사람을 처음 본 거죠. 그리고 세월이 한 40년 흘러서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는데 어떤 친구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때 꿈 얘기를 했는데 그 꿈을 이룬 사람은 우리 반에 너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나운서 시험에 세 번이나 낙방하다
기자는 그가 아나운서 시험을 한 번에 붙은 줄 알았다. 그런데 세 번 떨어지고 네 번 만에 붙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렇게 시험 봐서 붙었다는 얘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 아나운서 시험은 고시였다. 그래서 아나운서 시험 본다고 하면 고시 본다고 할 정도였다. 네 번 만에 붙은 걸 보면 아나운서가 꿈은 꿈이었나 보다. 그의 인내가 대단하다 싶었다.
“사실 꿈 얘기할 때 한 번에 딱 붙으면 얼마나 좋아요. 세 번이나 떨어졌어요. 그리고 네 번째 만에 합격을 한 거죠. 그렇게 해서 1986년 KBS 공채 13기 아나운서가 됐어요. 그런데 나는 우리 선배들한테 인정을 못 받았어요. (왜요?) 뉴스를 못한다고. 나는 뉴스 하러 들어온 게 아니거든요. 나는 뉴스 하기 싫었어요. 나는 MC 하고 싶었어요. 사람들하고 토크하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자꾸 뉴스만 시키면서 방송 못한다고 하고 얼마나 구박하는지 풀이 죽어서 그 어렵게 들어간 아나운서를 내가 6개월 만에 그만두려고 했다니까요.
그런데 몇몇 우리 스타 선배들이 내 자질을 알아보고 격려해 줘서 다시 일어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정말 좋은 프로그램을 하나 만났는데 그때부터 나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거예요. 이름하여 ‘열전 달리는 일요일.’ 입사한 지 무려 4년 만에 맡은 거예요. 한참 걸렸죠. 그동안 저는 칠판 지웠어요. 아나운서실에 들어오면 온통 한쪽 벽면이 다 칠판이에요. 거기에 무슨 지시 사항이라든지 그날그날 배정 뉴스라든지 이런 걸 다 적어야 되거든요. 제가 글씨를 잘 써요. 게다가 키도 크니까 그 일을 하기에 딱 맞잖아요. 게다가 방송은 없고 출근은 하고 월급은 받고 할 일은 없으니까, 우리 부장님이 매일 ‘칠판 담당’을 시켰어요. 그러니 얼마나 서러웠겠어요?” 정말 그랬겠다.
교만해지다
그러다가 그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그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 프로그램이 사랑받는 프로그램이 되니까 제작진에서 안 쓸 수가 없는 거다. 그러면서 그에게 팬들이 붙기 시작했다. 결혼하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열전 달리는 일요일’ MC를 하면서 그때부터는 방송국에서 나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시청자들이 나를 평가하고 시청자들이 나를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작진에서 나를 안 쓸 수가 없는 거죠. 그때부터는 내가 프로그램을 고르고 잘난 척을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데요.
그때는 예수도 모르고 교회 근처도 못 갔던 사람이니까 얼마나 교만했겠어요. 칠판 지우던 놈이 두 날개를 달았잖아요. 종이학 아시죠? 팬들이 그걸 접어서 이만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오기도 하고 팬레터도 무진장 많이 받았어요. 그때 나는 이미 결혼해서 애가 둘이었는데 사람들은 모르니까 결혼하자는 편지도 받았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하와이에 살던 어떤 교민이 편지를 해서 결혼하러 들어오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KBS에서 5년 동안 근무하다가 SBS가 개국하면서 저를 스카우트해서 그곳에서 3년간 월급쟁이 생활하다가 제1호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지금까지 40년 동안 방송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본가 외가 처가 다 불교 집안
사실 지금이야 1년에 40개 교회를 다니면서 간증 집회를 하고 있는 그이지만, 대학교 때까지 그는 불교 집안이었다. 심지어 그의 집에는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불교 집안이었다.
“친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5살 때 없어지셨대요. 그때 당시 별의별 말들이 많았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밀항했다, 장군님 따라갔다는 등.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지셔서 어떻게 된 사연인지 모르셨대요. 그런데 되게 가난했대요. 성주산 산골짜기에서 밭떼기 논뙈기 없는 집에서 산나물 캐 먹고 사는 집이었으니까요. 그런 집에서 할아버지까지 없어졌으니 더 어려워졌을 거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 위로 누님이 두 분 계셨대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고모님들이죠. 그때 당시 우리 고모님들이 14살, 15살이었는데 집이 너무 어려우니까 시집을 보냈대요. 한입이라도 더느라고 보낸 건데 완전 식모로 보낸 거죠. 그 정도로 가난했대요. 그러다가 친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외아들이었는데 혼자 키우다가 군대를 보냈는데 전쟁이 났대요. 6•25전쟁. 우리 할머니 입장에서는 외아들이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쟁하고 있는데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정화수 떠 놓고 나무 아래 앉아서 천지신명께 비나이다를 외친 거예요. 이게 우리 집안 신앙이에요.”
외할머니는 무당
게다가 외할머니는 무당이었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가 굿만 한 게 아니라 절을 세웠어요. 3개를 세웠는데 용인에 1호점, 수원에 2호점, 독산동 외갓집을 개조해서 만든 3호점. 그러니까 절은 할머니가 세우고 관리는 큰딸 되는 우리 어머니가 하셨어요. 그러니까 내가 대학생 때까지 불교 학생회장을 오래도록 할 수 있는 백그라운드가 거기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어렸을 때 나는 교회 가는 거를 아예 생각지도 못했어요. 환경이 그랬으니까. 그리고 우리 할머니가 정말 무서웠거든요. 어렸을 때 교회 가면 다리 몽둥이 부러뜨린다고 하셨어요.”
장모님은 보살
그렇다면 처가는 어땠을까?
“처가의 경우는 제가 KBS 아나운서로 입사하고 나서 6개월 만에 광주 KBS로 1년 파견을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일주일 만에 아내를 만났어요. 그러면서 몰래 데이트가 시작된 거죠. 솔직히 처녀•총각이 만나서 데이트하는 거는 죄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사내 연애한다고 하면 막 뭐라고 할 때라 절대로 비밀로 했고, 밖에서만 만났어요. 그러다가 국장님이 서울분이신데 3개월 뒤에 부르더라고요. 그러면서 ‘선규야, 너 서울 본사로 다시 가야 될 것 같아’라는 거예요. 서울로 가서 전국노래자랑 진행해야 한다고 해요. 1년 있기로 해서 간 건데 3개월 만에 저를 다시 서울로 가라고 했으니 9개월 남은 거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안 간다고 했어요.
서울에서는 내 존재감도 없고 칠판만 지우던 사람인데 광주 오니까 텔레비전 뉴스도 시켜주고 라디오도 하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나 서울 안 간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국장님이 나보고 미친놈이래요. 그리고 어떻게 서울을 가요. 여자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두고 가요. 그러니까 우리 장모님이 비상이 걸린 거예요. 내가 가버리면 딸은 어떻게 해요. 그러더니 장모님이 급하셨는지 초대를 해서 처음 집을 가게 됐는데 그때 월급이 32만 원이었어요. 세금 떼면 29만 원이었고요. 수령액이 삼성전자보다 1만 원인가 2만 원 더 많았어요. 초대를 받았으니 빈손으로 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5만 원어치 과일을 샀어요. 박스로 세 박스를 주는데 난 도저히 못 들고 갈 무게인 거라. 그래서 주인아저씨께 배달해달라고 했다니까요.
그래서 갔더니 우리 장모님이 ‘회색 몸빼 바지’를 입고 계시는 거예요. (회색 몸빼 바지요?) 보살들이 입는 회색 몸빼 바지 말이에요. 난 장모님이 보살이라는 걸 전혀 몰랐어요. 집안을 둘러보니까 집안에 방 하나를 미니 절간을 해놨어요. 왜 석가모니가 앉아 있고 제사상이 차려있는 미니 절간 말이에요. 그 정도니까 우리 집하고 똑같았던 거죠. 그러고 나서 3개월 뒤에 결혼했어요. 그래서 우리 집안은 누구 하나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던 집안이라니까요.”
딸이 교통사고를 당하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다. 두 살 터울이다. 딸 혜원이는 남자들만 득실득실한 그의 집안에 35년 만에 처음 얻은 공주이다. 그러니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겠는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딸이 크게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1992년 9월 26일 토요일 아침 9시 50분인데 내가 그 당시 SBS에서 탤런트 김창숙 씨하고 생방송 ‘행복찾기’라는 프로그램을 오전 10시부터 진행하고 있었어요. 두 시간 생방송 진행을 마치고 스튜디오 문을 열고 나왔더니 글쎄 우리 후배 여자 아나운서가 울면서 나한테 달려오더니 쪽지 하나를 줘요. 큰일 났다고 그러면서요. 거기에는 열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어요.
‘딸 교통사고 생명 위독 강남성심병원 응급실.’ 이게 뭐냐고 그랬더니 오전 9시 50분에 연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방송이 10시니까 저하고 연결이 안 된 거죠. 난 벌써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아버지 집에 전화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막 펑펑 우시는 거예요. 우리 딸 혜원이가 그냥 딸이 아니고 우리 집안 전체 통틀어서 4촌 6촌 할 것 없이 35년 만에 태어난 아주 귀한 공주니까요.”
그런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감히 어느 누가 그의 심정을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사고 얘기를 들어보니까 2.5톤 타이탄 트럭이 뒤로 후진하다가 애를 발견 못하고 뒷바퀴로 깔고 넘어간 거예요. 그때 우리 혜원이가 3살 때였어요. 3살이면 기저귀 차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 제일 예쁠 때예요. 나중에 남부경찰서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조서에 사인을 해야 한대요. 조서를 보니까 기사 아저씨가 후진하다가 덜컹하고 넘어가서 뭐가 꼈나 하고 앞으로 또 한 번 넘어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번을 깔아버린 거예요. 그러니 애가 어떻게 됐겠어요? 너무 많은 피를 흘린 거죠. 현장에서 죽은 거예요. 그래서 애를 아내가 건져내서 대림동 삼거리에 있는 강남성심병원 응급실에 데려다 놓은 상태였고 나한테는 나중에 연락이 된 거였어요.”
실감이 안 나다
35년 만에 얻은 귀한 공주가 교통사고를 당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쪽지만 받은 상태로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는 어떻게 운전을 해서 갔을까? 기자도 엄마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차를 몰고 나왔을 때 주위에서 운전할 수 있느냐고 걱정을 했는데 그는 그 정도가 아니지 않나.
“그때 나는 여의도에서 방송을 하고 우리 딸은 대림동 병원에 있었는데 차가 안 밀리면 영등포 로터리 지나가고 신길동 지나서 병원이 바로예요. 한 10분이면 가는 거리예요. 그런데 영등포 로터리를 지나가야 되잖아요. 그때 영등포 로터리 생각하면 다섯 군데서 이렇게 차들이 나와서 한 바퀴 돌고 나가는 거거든요. 그리고 가운데 큰 분수대 있던 거 기억나세요? (아니요.) 그런데 차가 얼마나 밀리는지 거기가 그 지역의 교통지옥 구간이거든요. 차가 꽉 밀려서 영등포 로터리 근처도 못 온 거예요. 그러니까 막 가슴이 터지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때부터 생긴 버릇이 하나 있어요. 내가 영등포 로터리를 지금도 못 지나다녀요. 그때 그 트라우마가 있어서. 이제는 그쪽으로 가야 될 일이 있으면 찬양을 크게 틀어요. 요즘은 좀 괜찮은데 한동안 그랬어요. 그렇게 차가 안 갔어요.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두 손 두 발이 꽁꽁 묶여 있는데 정말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너무너무 무서운 거예요. 내 평생에 그렇게 무서웠던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하나님”이 튀어나오다
본가 외가 처가가 다 불교 집안인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단어가 “하나님”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대학생 때까지 불교학생회장을 하고 제등행렬도 열 번씩 참석해서 자존감이 대단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말 한마디 때문에 교회 문 앞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인데 그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니...
“그때 내 입술로 내 혀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튀어나왔어요. 그런데 내가 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내가 불교 학생회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고, 제등행렬도 열 번씩이나 참석했던 사람인데 왜 하나님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만약에 내 문제였다면 하나님 단어가 안 나왔을 거예요. 우리 부모님 일이었어도 내가 하나님 단어가 안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내 자식 문제가 딱 걸리니까 튀어나온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는 내리사랑이 강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걸 치고 들어오신 거예요. 예를 들어서 다른 걸 나한테 치고 들어오셨더라면 난 지금 하나님 일 안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단 얘기죠. 내가 그 영등포 로터리에서 ‘하나님, 우리 혜원이 이제 3살밖에 안 됐는데 얘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살려주세요.’ 절규를 했어요. 그리고 조건을 걸어요. ‘우리 딸 살려주시고 저 데려가세요. 제가 죄인입니다. 저하고 바꿔주세요.’ 하나님이 나한테 그 소리를 듣길 원하셨고 너 두 손 두 발 다 들어 빨리, 이러길 원하셨겠죠. 그러니까 혜원이를 치고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우리 딸 한 번만 살려주시면 당신이 시키는 거 다 하겠습니다’라고 울며불며 기도했어요.”
기적이 일어나다
차 안에서 그렇게 한 번도 외쳐보지 못하던 하나님을 외치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결국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께로 오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여튼 병원에 도착했더니 하얀 천으로 아기가 덮여 있는 거예요. 하얀 천을 젖혀 보니까 아침에 봤던 우리 혜원이 모습 그대로인 거예요. 그래서 무조건 안았어요. 그리고 ‘너한테 일찍 오고 싶었는데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아빠가 미안하다’ 그랬어요. 그리고 ‘집에 가자’고 했어요. ‘네 자리 아닌데 왜 여기서 자. 혜원아, 집에 가자.’ 완전히 미친 사람인 거죠. 내가 정신이 나간 거예요. 혼이 나간 거예요.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혼자서 중얼중얼 얼빠진 사람처럼 1시간 넘게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아무 반응이 없어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저한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내가 요즘 그 말을 잘 써요. ‘선불 은혜.’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써먹으려니까 미리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미리 주시는 거예요. 갑자기 애가 뜨끈뜨끈해져요. 따뜻해져요. 그러더니 애가 꼼지락꼼지락해요. 안 죽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막 의사, 간호사들을 부르고 막 난리를 쳤죠. 그런데 아무도 안 와요. 그때 응급실에 대형 사고가 나서 교통사고 환자들이 대거 밀려 들어와서 바빴던 것 같아요. 응급실이 난리가 났으니까,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그런데 우리 혜원이가 눈은 감은 채로 좀 이따 켁 그래요. 목에 뭐가 걸린 거 같아서 입을 벌려서 내가 손가락으로 집어냈더니 밤톨 크기만한 핏덩어리가 내 와이셔츠에 확 튀는 거예요. 그다음에 호흡이 돌아왔어요. 눈을 감은 채로 그때부터 모든 검사실을 내 품에 안고 다니면서 검사를 다 받았어요.”
복음을 접하다
죽은 줄 알고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혜원이를 안고 다녔더니 하나님이 1시간 만에 아이를 살려주셨다. 하나님도 조금만 일찍 깨어나게 하시지 사람 마음 한참 졸여놓고 살려놓으시다니...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실 줄 아는 분이시다.
“첫날부터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2년간 병원 생활이 시작됐죠.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때는 몰라요.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어요.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서울 시내 5개 대형 교회에서 전도폭발훈련 받은 성도님들이 목사님들하고 필드교육순방을 했어요. 요일마다 교회가 달라요. 이분들이 2년 동안 병원에 왔는데 처음에는 거부했어요. 그렇지만 나중에는 전하는 복음을 다 듣게 만드셨어요.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기록해 놓았냐 하면, 주의 일을 할 때 가장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했어요. 그냥 마구잡이로 가면 안 돼요. 이분들이 교육을 이제 막 받고 나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품위와 교양과 질서가 아주 몸에 뱄어요. 그러니까 안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무조건 전도지 들고 와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게 아니라 내가 미안할 정도로 청소, 정리 이런 걸 다 해주면서 전도를 해줬어요. 그렇게 2년 동안 하나님이 저를 병원에 가둬 놓은 거예요. 내가 도망 다니면 복음을 듣겠어요? 그러니까 도망도 못가. 그래서 우리 가족들이 병원에 있은 2년 동안 들은 복음으로 다 하나님을 믿게 됐다니까요.”
온 집안이 구원받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신다. 그만큼 우리들을 너무 잘 아시니까 우리 성품에 맞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거다. 그래도 어떨 때는 너무하다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을 안 들으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무나 사랑하는 자식을 엄격하게 훈련을 시키면서까지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거다.
“우리 어머니가 제일 늦게 믿으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절 관리하느라고 그랬는지 한 1년 뒤에 믿으셨어요. 그러더니 절 3개도 그 이후로 싹 없애버렸어요. 용인 절은 불났죠. 수원 절은 아파트 단지로 묶여서 보상금을 받고 팔았죠. 독산동 절은 알고 보니까 무허가 건물이어서 민원 들어오니까 6개월 뒤에 포크레인이 와서 싹 정리를 해줬죠.”
혜원이의 근황
사고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은 깜빡깜빡하고 눈물도 나는데 왼쪽 눈은 신경이 덜 풀려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던 혜원이. 그래서 혜원이의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까지의 별명이 ‘찌그리’였다. 유치원 때 아이들은 뭘 모르니까 혜원이를 마구 놀려댔다. 그래서 부부는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캐나나 밴쿠버 시골에 있는 기독교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혜원이가 대학교 때 성악을 전공했는데 교회에서 찬양대 리더를 하면서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 혜원이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당연히 얼굴 불편한 거 풀어주시는 거. 혜원이는 결국 하나님이 고쳐주셔서 지금은 캐나다의 ‘웨스트제트’라는 민간항공사의 직원으로 입사해서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고 잘 살고 있다.
상처란?
그에게 상처란 단어는 남다르게 들리지 않을까? 혜원이를 경험했으니까. 그가 생각하는 상처가 궁금했다.
“상처는 이제는 다 극복이 됐는데 내가 우리 혜원이한테 빚졌잖아요. 우리 혜원이 사건은 우리 혜원이를 세우려는 게 아니었어요. 나를 세우는 과정이었어요. 내가 그때 죄를 많이 졌거든요. 나한테 건강을 뺏어 가면 나중에 건강 회복하면 되고 돈을 뺏어 가면 다시 벌면 되잖아요. 그런데 자식을 크게 치고 들어오니까 내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평생을 우리 혜원이한테 내가 빚진 자가 된 거죠. 흔적이라고 아세요? 하나님은요. 당신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봐 흔적을 반드시 남깁니다.
내가 이런 얘기 웬만해서 잘 안 하는데 우리 혜원이가 누가 봐도 다 몰라요. 혜원이 얼굴에 흔적이 있어요. 날이 춥거나 기온이 완전히 떨어지면 얼굴의 불편함이 보여요. 아직도 불편함이 좀 있는데 딴 사람은 몰라요. 남편도 몰랐대요. ‘혜원이한테 그런 게 있어요? 어디 봐요. 안 보이는데요?’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너 다행이다. 하나님이 네 눈에 뭔가 씌어주셨구나.’
그런데 나하고 내 아내는 그게 보여요. 그게 흔적이에요. 까불지 말라고 하는 흔적이에요. 하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너 까불지 마라. 나 아직 살아있다. 혜원이 흔적 너하고 네 아내만 보여줄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까부는 게 아니에요.”
최선규 아나운서하고 딱 1시간만 인터뷰하고 밥을 먹기로 했는데 거의 2시간을 인터뷰했다. 그의 스토리도 많았지만, 그가 만난 하나님 얘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뜨겁다. 벌써 얘기할 때 흥분하면서 얘기한다. 안타까운 얘기가 나오면 얼굴이 발개지면서 그 주제에 대해 열을 올리며 말을 한다. 그가 그랬다.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거는 그가 집회가면 하는 퀴즈가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굴까요?”이다. 우리는 보통 “예수 안 믿고 지옥 가는 사람이요”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그는 “교회를 30년, 40년을 다니고 직분을 받아도 그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이 그분들을 인정해 줄까 싶어서 말이다. 그렇다. 우리도 이런 얘기 들으면 무섭지 않나. 반드시 우리의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그는 현재 1년에 40개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었다. 간증가면 30분짜리 간증을 2시간짜리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전하고 온다. 일반 간증자들과 달리 자신의 얘기만 하고 내려오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전하는 간증을 하고 내려온다. 한때는 신학 공부를 하려고도 했지만, 그가 다녔던 사랑의교회 고 옥한흠 목사님의 만류(?)로 포기를 했다. 이제는 그 정도까지 되었다.
그와 인터뷰를 끝내고 고깃집으로 가서 갈매기살, 막창, 항정살, 그리고 묵밥을 먹으면서 오랜 시간 얘기를 했는데 그는 예수님 냄새가 많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권위적이지도 않아서 반찬을 다 나르고 고기까지 구워주면서 사람 냄새 많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좋은 사람과 만나서 인터뷰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거 같다.
기사는 계간 ‘치유’ 15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