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독립군의 씨를 말리게 했던 자유시 참변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시 참변은 소련 적군파에 속아 무장 독립운동의 뿌리를 말살시킨 사건으로 그 배경은 이렇다. 1920년 6월 6일, 7일 만주 봉오동 에서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부대가 일본의 정규군과 벌인 전투로 독립군은 일본군을 유인 봉오동 일대에서 120여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에 분노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 작전을 벌인다. 하지만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김좌진,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10여회의 전투끝에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하고 독립군측도 100여명이 전사했다. 이에 광분한 일본군은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이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을 간도지역에 있는 조선인들로 봤다. 비슷한 시기 10월 2일 중국 마적 두목 창창하오가 훈춘을 공격해 중국인 70여명, 조선인 7명, 일본인 수명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불질른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은 이 훈춘 사건을 구실로 3개 사단을 출동사켰다. 그러던중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했으니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가차없이 만주일대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3~4개월동안 수많은 조선인들의 마을이 불타고 재산과 식량은 약탈되었다. 특히 장암동 교회에 마을 주민을 집합시키더니 남자 33명을 가둔후 불을 질러 학살하기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간도참변이라 하는데 이 때 학살된 조선인들은 확인된 숫자만 3,469명이었다. 아마도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은 수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인해 독립군은 결국 자신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던 조선인들이 피해를 입게되자 심각한 활동에 제한을 받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독립군들은 상해의 고려 공산당을 이끄는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게 된다. 레닌과 비밀협약을 체결하고 소련 적군파 공산당에 자금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 이동휘는 곤경에 청한 독립군에게 병력을 모아 레닌의 극동공화국 자유시로 가면 무기와 식량을 주고 재편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유혹했다. 이동휘와 레닌의 밀약을 모르고 있던 독립군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게된다. 하지만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 반대 이유는 이만시에서 자유시로 이동시 적군은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는데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생각한 김좌진은 무장해제를 요구한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생각하고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김좌진과 홍범도는 그렇게 갈라섰다. 반면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 이동하여 우수리강주를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그리고 거기서 이동 독립운동사의 비극이 벌어지는 자유시에 도착했다. 당시 소련은 황제를 따르는 왕당파 백군과 공산주의 혁명을 따르는 적군과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적군파는 독립군들을 적군에 편입 공산주의 혁명 전쟁에 투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자유시로 간 독립군은 적군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극렬하게 대립하게 된다. 찬성하는 쪽은 대세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반대하는 쪽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대한의 독립을 위한 것이지 적군파 군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반대하는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으나 사할린 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는 사망 36명 · 도망자34명, 익사 60명을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포로가 된 독립군은 장교 72명은 이르쿠츠크로 이송 군사재판으로 처, 428명 포로는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강제노역당함했다. 자유시 참변에서 적군에 편입에 찬성하여 살아남은 한인 독립군 1745명은 7월 5일 고려혁명군 여단에 소속시켜 이르쿠츠크로 끌고가 적군 제 5군단 휘하로 예속시켜버렸다. 이로인해 독립 무장운동은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영화 봉오동 전투보고 감동 받은 젊은 이들이 많은데 홍범도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영화로 역사를 배우지 말것을 권한다. 홍범도가 한 일을 알면 그 환상이 깨질 것이다. 홍범도는 김좌진과 달리 지휘관으로서 잘못된 판단을 하여 독립군을 사지로 결국 몰아 넣은 사람이다. 또한 홍범도는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체로 열린 극동제 민족대회가 끝난뒤 레닌과 단독면담을 했고 레닌은 홍범도에게 적군이 되어 혁명정권에 적극 협조해 감사하다는 뜻으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모젤권총을 하사했다. 홍범도는 레닌과 면담 후 레닌, 트로츠크등 붉은혁명(볼세비키)의 주역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그후 그 권총을 항상 자랑스럽게 차고 다녔다. 그러던 중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자유시 참변에 대한 추궁을 하기 위해 불시에 동료 독립군 2명이 공격하며 거칠게 항의하자 홍범도는 레닌에게 하사받은 권총으로 독립운동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할린부대 출신 생존자 독립군 김창수, 김오남을 사살했다. 이로인해 홍범도는 감옥에 갇혔지만 레닌의 증명서 덕분에 곧 석방되엇다 [군사대로 : 독립군 영웅 홍범도의 인생 최대 오점은 자유시 참변 뉴시스 2021년 8월 22일자참조]. 왜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 않고 봉오동 전투 영화처럼 그를 영웅시할까? 육군사관학교에는 왜 홍범도 흉상을 세우려 애를 썼던가? 영화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영화가 편향되어 국민들의 눈을 가리고 우상화 하는것으로 활용되면 안된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후세들에게 알려야 다시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일들이 안 벌어질까? 대한민국에 하이닉스의 LCD 사업부였던 **하이디스(Hydis)**는 한때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의 핵심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이었지만, 여러 차례의 매각과 구조조정을 거치며 안타까운 역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원래 하이디스는 현대전자의 LCD 사업부로 시작해, 이후 하이닉스반도체의 일부가 되었다. 그 기술력, 특히 광시야각 기술(FFS)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삼성과 LG도 이 기술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2년 하이닉스는 심각한 경영난을 격게된다. 이때 중국의 BOE가 돕겠다고 나선다. 이에 하이닉스는 비 핵심 사업 정리차원에서 3억 8천만 달러에 하이디스를 BOE에 매각하게 된다. 그런데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간 BOE가 한 행태는 경영 효율화라는 이름하에 IT전산망과 서버를 통합하고 한국의 엔지니어들을 중국으로 파견하기 시작하더니 약속했던 한국 투자는 계속 미뤄졌다. 뭔가 잘못되 가는 것 처럼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있을 무렵인 2006년 중국의 BOE는 하이디스의 4300여 건의 기술문서와 200여건읜 핵심 기술과 핵심인력을 중국으로 을 이동시킨후 2006년 돌연 하이닉스를 부도 처리해버린다. 하이디스는 2008년 대만 이잉크(E-Ink)에 인수되었지만 기술 투자 없이 방치하다 2015년 경기도 이천의 하이디스 공장이 폐쇄당하고 대부분 직원은 해고되었다. 그렇게 핵심 기술과 인력을 빼돌린 BOE는 삼성과 에플에 LCD와 OLED를 납품하며 잘나가고 있다고 한다.
자유시 참변과 하이디스 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어떤 아랍권 학생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시나요? 아니면 이스라엘을 지지하시나요? 그 질문속에서 아랍 학생들이나 이동휘와 BOE에 속아넘어간 한국인이 느끼는 감정이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감성에 의존하면 안된다. 나는 아랍학생들에게 말했다. 내가 만약 하마스 지도자라면 지금 하마스처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도자의 역활은 팔레스타인 국민들과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첫째 임무이다. 그들이 잘살고 행복하게 하는것이 주 임무가 되어야 한다. 하마스처럼 이스라엘에게 쨉을 한두번 날리고 천여명을 죽였다며 춤추며 승리했다고 SNS에 자랑했지만 지금 그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 무엇이 남았는가? 폐허가 된 도시에서 SNS에 도와주세요 하며 밀가루 한 포를 얻기 위해 바가지 들고 구호품을 얻고자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이 그들이 원하는 결과 였던가? 팔레스타인이 옳다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아무리 외쳐도 원하는 그런 날이 쉽게 오지 않는다. 내가 만약 팔레스타인 리더라면 그러한 어려운 역경속에서 어떻게 전략적으로 이스라엘을 이길 것인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들은 팔레스타인 보다 더 혹독한 환경에서 나라를 건국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들은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외교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보다, 그들의 노력을 폄훼하는 자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이러한 역사를 이루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주자성리학을 따르며 친구 따라 강남가던 것이 대세였던 조선시대, 10%도 안되는 양반만 잘사던 시대, 누가 양반, 상놈, 노비, 백정, 관노 신분을 없앴는가? 철저한 왕정 신분사회를 없애고 우리가 우리의 대표를 뽑는 제도를 누가 만들었는가? 종이 애를 나면 아이도 종이되는 사회, 누가 언년이 말년이를 없애고 이름다운 이름을 주었는가? 누가 여자들에게 학교를 보내고 참정권을 주었던가? 문맹율이 70%가 넘는 조선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시골마을 산골짜기까지 교사를 파견해 문맹율을 해소했던가? 누가 미소공동위원회의 그 막강한 권력으로 한반도를 에치슨 라인으로 폐기처분하려던 것을 막았던가? 누가 6.25의 피비린내 나는 마지막 낙동강 전선에서 내가 뒤로 물러나면 나를 먼저 쏘라 외쳤던가? 누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하며 경제 발전을 추진했던가? 역사를 잊은 민족은 희망이 없다. 역사가 무엇인가? 역사는 History, His story 곧 주님의 일기장과 같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위해 역사를 변조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뉴스와 신문과 선동가들과 영화를 통해서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는 말했다. 더이상 노릇 하여 속지 말라고 말이다. 그가 인용한 성경구절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는 더이상 종이 아니다. 어찌 그리 우리민족은 거짓에 잘 속아 넘어가는지.... 순진하다 할까요? 미련하다 할까요? 더 이상 종 놈, 노비가 되어 속고 속이고 뒤통수 치고 배반하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하는 행동은 결코 거부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날에도 사탄은 계속 속인다.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이요 주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 공부를 하자. 역사를 공부하자. 진리를 알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란 주의 말씀을 기억하자. 더이상 속지 말자. 무더운 여름 날 주말 주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