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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4일(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마가복음 2:13~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네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어떤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죄 사함을 선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6).”
예수님께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서기관들을 향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땅에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단지 우리 육신의 질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질병과 함께 우리의 죄까지도 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중풍병자의 치료와 관련하여, 예수님과 서기관들 사이에 첫 번째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마가복음 2장 13절 이하의 본문에는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와 세 번째 논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논쟁은 예수께서 길을 지나가실 때 벌어졌습니다. 1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본문은 마태복음 9장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레위’가 아니라 ‘마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세리 마태’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마가복음 2장의 레위를 마태복음 9장의 마태와 동일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랬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안드레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는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막 1:18~20).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부로서 소중히 여기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도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리 레위는 어떠했을까요? 세리 레위가 앉아 있던 세관은 사람들에게 통행료와 관세를 받던 곳이었습니다. 레위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을 때, 이 행동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버린 다른 제자들의 행동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레위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는 다른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을 이 식사자리에 초대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 잡수시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두 번째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를 창기와 동일한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거룩하신 분이 더러운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7절).”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을 더욱 구별하여, 자신의 정결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율법의 문자적 계명들을 더욱 잘 지킬수록 자신은 더 의로워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러한 사람은 율법에서 더럽다고 규정된 것들로부터 멀리할수록 자신이 더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은 결국 은혜에서 더욱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 앞에 서 계신 영광의 주님을 보고도, 교만으로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의 정체를 잘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병든 자임을 고백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야말로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용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떠한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김용준 목사님의 「미리 보는 기쁨」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연말이니 거국적으로 모여 ‘주(酒)님’을 섬기자는 거였죠. 어둠에 빠져 있는 저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피어올랐습니다. 약속한 날, 한 상 거하게 주문하려는 친구들을 말리며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했으면 좋겠다.”
친구들은 진지하게 제 말을 들어 주었어요. 예전의 저는 절대 신앙이나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한 달 만에 완전히 바뀐 거죠. 그런데 그중 딱 한 사람,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이러는 거예요.
“네 이야기 잘 들었다. 너무 좋은 이야기네. 그런데 우리 다들 시간 내어 이렇게 모였으니 딱 한 잔만 하고 가자.”
맞는 말 같았어요. 그러자고 했죠.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밤새 술을 마시고 말았어요. 전도 대상자들이랑 밤새 술판을 벌인 거예요. 술에 잔뜩 취에 집에 들어간 때가 다음 날 새벽 네 시였어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정말 기분이 참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전 정말 안 되는 놈이에요. 솔직히 저 술 담배 못 끊겠어요. 죄송해요. 그래도 교회는 다닐게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도였죠. 그때 제 신앙이 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던 거죠.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제 기도에 저처럼 반응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저지른 죄악들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지 않습니다. 거기 집중하면 “이 죄인 놈아!”라고 정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대신 하나님은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미래의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장차 점점 더 좋아질 것을 미리 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을 품으시고, 꿈을 주시며, 복 주겠노라 약속하시는 겁니다.
-출처: 김용준, 「미리 보는 기쁨」(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17);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19년 1월호), p. 57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이 병든 자임을 고백하고,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세 번째 논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 다 함께 18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있었나봅니다. 세례 요한은 경건한 삶을 위해 금식을 강조했고, 바리새인들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번씩이나 금식을 했습니다.
그에비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로 삼아 금식 논쟁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예수님은 먼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9~20절).”
예수님의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혼인집 손님들은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는 것같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를 것인데, 그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장차 당할 고난과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는 생 베 조각과 새 포도주의 비유입니다.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게 되면, 새것이 낡은 것을 당기어 오히려 더 해어짐이 심하게 됩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결국 포도주와 부대 모두를 버리게 됩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과연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생 베 조각’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낡은 옷’은 ‘형식적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참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형식적 율법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마치 낡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형식적 율법주의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낡은 가죽 부대'는 '형식적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이 또한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그에 맞는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맞는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형식적 율법주의가 아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과연 율법의 근본정신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율법의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 즉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신명기 6장 4~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금식하지 않으냐고 물었던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형식적 율법주의, 즉 율법의 조항들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경건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과연 참된 금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8장에는 참된 금식의 의미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않으시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십니까?(3절)”
이에 하나님은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참된 금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된 금식이란 자기 의를 드러내는 형식적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참된 경건입니까?
야고보서 1장 2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참된 경건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형식적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경건은 환난 중에 빠진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오래 전 뉴욕의 한 거리에서 풍선 장수가 풍선을 팔고 있었습니다. 장사가 안 될 때면 그는 풍선을 하나씩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풍선이 하늘로 떠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잠시 동안은 장사가 잘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매번 다른 색깔의 풍선을 날려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하얀색, 다음에는 빨간색, 그리고 노란색의 풍선을 날려 보냈습니다.
잠시 후 한 흑인 소년이 풍선 장수를 올려다보며 질문했습니다. “아저씨, 검은색 풍선도 하늘로 날아갈 수 있나요?”
풍선 장수는 따뜻한 눈길로 어린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얘야, 풍선이 떠오르고 안 떠오르고는 색깔이 아니라 풍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거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소년은 자신의 피부색보다 자기 안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중요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오느냐로 결정됩니다.
-출처: 강준민, 「자람의 법칙」, (서울: 두란노, 2004): 「생명의 삶」 (서울: 두란노, 2019년 1월호), p. 8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차가운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더구나 여러분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지도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형식적 율법주의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 없고,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나와 타인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 사진 설명: 대전예술고 복도 한곳을 3년 간 지켰던 둘째 딸의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