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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2024년 9월 22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7:54-60(신약 199)
요즘 기독교 관련 유튜브에서 예람 위십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예람 워십이 부르는 곡을 예배에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제기 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분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뭐가 문제인가요?’ 라는 질문을 하는데 가장 크게 논란이 되었던 곡이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오전 예배 때에 불렀던 곡이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곡이라 자주 듣기도 하고, 은혜 받는 곡인데 무슨 문제지 하고 자세히 보니까 가사에 하나님이나 주님이란 단어가 없다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사를 다시 보니까 주님이 함께 하신다거나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혼자 걷지 않는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곡의 전체적인 내용은 힘든 상황에서도 내가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내용인데 하나님이나 주님이나 성령님이란 표현이 없다는 것으로 문제를 삼는 것이었습니다.
한 동안은 우리나라 교회에서 복음 성가를 예배 시간에 불러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오직 찬송가에 있는 곡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심지어 아멘으로 끝나지 않는 곡은 찬양과 경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오직 찬송가에 있는 곡만 예배 시간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 복음성가로 분류되었던 곡들이 들어 있고 극보수적인 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회는 복음성가라고 말하던 CCM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 다룬 유튜브에 한 분이 뎃글을 달았는데 자기 남편이 교회를 안 다니는데 이 곡을 들려주었더니 감동을 받더니 교회 다니고 싶다고 하면서 가끔 예배 시간에 따라와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이 곡을 거의 매일 듣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반대 입장을 가진 분들도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찬양을 보더라도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도 있고, 자기 고통을 고백하는 것도 있고, 자기 이야기 고백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도 있지만 자기 신앙고백, 또한 위로를 받는 것, 전도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초대교회가 일곱 분의 집사님을 세우고 사역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중에 선두에 선 분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사도가 아닌 집사의 직을 맡은 분으로 그 분의 이야기가 성경에 6장의 절반과 7장 전체에 걸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처음에는 사도들 중에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고, 나중에는 거의 바울 사도의 이야기 중심으로 기록되었고, 그 외의 사도들의 이야기는 중간 중간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이야기는 자세하고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직분을 받아서 일하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직분을 어떻게 감당하는가를 보신다는 것을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직분을 받았는가 보다는 나에게 맡겨진 직분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어느 때나 첫 번째는 늘 기록에 남는 법입니다. 최초의 순교자는 사도들이 아니라 스데반 집사님이었고 그의 이름은 영원토록 주님의 복음을 위해 순교한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어 남게 되고 천국에서도 그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7장 전체가 스데반 집사님의 이야기를 채워져 있습니다. 1-53절 까지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예수님을 변증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54절부터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스데반 집사님의 변증을 듣고 분노하면서 죽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7장 전체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지만 너무 길어서 54절 이하부터만 봉독을 했고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스데반의 순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7장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말씀에 대한 스데반 집사님의 자세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분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스데반 집사님은 정통 유대인으로 율법에 대한 교육을 받으셨을 것이고 구약 성경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도 모두가 다 성경 즉 구약에 대해서 정통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6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을 모함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매수해서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고발을 해서 지금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는 상황입니다.
대제사장은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님에 대해서 고발한 내용이 사실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고발한 것은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즉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고발한 것과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즉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과 모세의 규례를 예수님이 고친다고 했다는 증언에 대해서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서 스데반 집사님은 2절에서부터 길게 대답을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가나안에 오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애굽으로 간 이야기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으로 와서 정착하게 된 이야기까지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요약을 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까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에 대해서 요약해서 설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과 성전에 대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47-51절까지를 보면
7: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7: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스데반 집사님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하나님이 이 성전에만 거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지을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성전은 너희가 생각한 것처럼 완전하게 거룩한 곳이 아니라는 의미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너희는 오직 전통에 얽매여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함으로 성령을 거스리고 있다고 강력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야 하는데 너희는 성령을 거부하고, 오직 전통과 규례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왜곡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사도들처럼 담대하게 성령 충만한 가운데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변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스데반 집사님은
2.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종교재판을 통해서 사형을 언도하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총독이 사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회에게 자치권을 허용하면서 종교 재판을 통한 사형까지 묵인해 주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산헤드린 공회를 통해서 종교재판을 열고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서 돌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산헤드린 공회가 자신들의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게 할 수 있지만 총독에게 넘겨서 정치적으로 처리하면서 로마법을 위반한 사형수로 만들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했지만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고 즉시로 사형을 판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 집사님은 핍박자들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52-53절을 보면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 집사님은 거기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보면 우리의 조상들 중에 선지자를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지 않았느냐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 조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에 박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박해한 것처럼 그분을 너희가 죽였다고 강력하게 지적을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강력하게 너희는 너희 조상들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지적하면서 너희는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즉 의로우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죽게 만든 살인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스데반 집사님은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지만 실재로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형식만 따르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이렇게 말한 것 궁극적인 목적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죽게 만든 책임이 있다고 지적을 한 것은 그 이야기를 들은 공회원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받았을 때 베드로가 설교할 때도 비슷하게 너희가 죽였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역시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공회원들에게 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게 전해야 합니다. 공회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알면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스데반 집사님이 책망한 것입니다.
3. 무리들의 반응
스데반 집사님이 아브라함의 부름을 받은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시리라 예언하신 그리스도가 오셨지만 너희는 예수님을 잡아서 넘겨 주었고 죽게 만들었다고 지적하지 공회에 있던 사람들은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보면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습니다. 54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공회원들의 이런 반응은 베드로 사도가 설교할 때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습니다.
2:37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평범하면서 종교적인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스데반 집사님의 변증을 들은 무리들은 종교 지도자들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의 찔림 받고 우리가 어쩌할꼬 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갈았다는 것은 극심한 분노를 표출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데반 집사를 정죄하기 위해서 재판을 열었는데 오히려 스데반 집사님에게 자신들의 죄를 지적받게 되자 찔림을 받았지만 분노하면서 이를 갈았습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으면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를 생각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 잘 못을 지적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분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를 향해서 말씀으로 지적하는 것에 대해 찔림을 받고 회개해야 합니다.
찔림을 받는 그들은 이를 갈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습니다. 57절을 보면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그들이 큰소리를 지른 것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고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귀를 막고 극도로 분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어야 할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위치에 오르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열왕기하를 살펴보고 있는데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던 왕들이 왕권을 강화하고 힘을 얻게 되면 선지자들을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젊은 성도들이 힘들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른들이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말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고 어른들의 말만 자꾸 젊은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 성도들도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귀를 막고 내 말만 큰소리로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분노한 그들은 스데반 집사님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58절을 보면 “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공회원들은 다른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자는 율법에 규정한대로 증인을 세워서 증언하게 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공회는 스데반 집사님을 신성모독과 율법을 어긴자라고 정죄하고 성 밖으로 끌고가서 사람들과 함께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사울도 지도자들의 충동을 받은 무리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고 오히려 신성모독을 하는 사람을 율법대로 처단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 순교 당하는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
이렇게 돌에 맞아 순교하시는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보았습니다. 55-56절을 보면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를 눈앞에 눈 상황에서 성령 충만한 상황에서 하늘을 보았는데 영의 눈이 열려서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아서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교 직전에 스데반 집사님의 눈을 열어서 하늘을 보게 하셨고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예수님이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 직전의 상황에서 성령 충만한 가운데 하늘을 보게 됨으로 기쁨과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돌에 맞아 순교하는 스데반 집사님은 기도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기도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59절을 보면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상에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스데반 집사님도 마지막 순간에 영혼을 예수님께서 받아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영혼이 가야 할 곳이 주님 품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생애 마지막 순간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또는 주님께서 받아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60절을 보면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도 눅23:34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스데반 집사님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죄를 짓는 것이니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기 말고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그들의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용서 받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님처럼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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