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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27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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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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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FickBmyM68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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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모든 것을 간직하시는 성모님>
젊은 시절부터 남편과 결혼생활이 무척 '팍팍'했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팍팍'한 정도를 넘어 할머니 젊은 시절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바깥으로만 맴돌던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년에 몇 번씩 얼굴을 비치더니 급기야 소식조차 알 길이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과부가 된 부인은 일찍부터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자식 교육도, 늙으신 시부모님 봉양도 혼자 몫이었습니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생활력이 강했던 부인은 그 오랜 고난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자식들은 잘 성장했고,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마련하게 됐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게 됐고, 한평생 홀로 갖은 고생을 다해온 어머니께 극진한 효심을 표했습니다.
평생 고생한 끝에 할머니는 이제야 겨우 여유있고 편안한 노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상 떴으려니 생각했던 남편이 나타난 것입니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건장한 체격, 준수한 용모는 어디가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볼품없고 꾸부정한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서성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며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러나 착한 심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계속 문 밖에 떨고 서있는 할아버지를 일단 안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천천히 할아버지는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할머니였습니다. 일단 불쌍해서 받아들였지만 아직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너무 괴로웠습니다. 용서하자고 수천번 다짐해도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습니다. '이러다 내가 죽지'하면서 마음을 바꿔먹어도 그 때뿐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웠던 할머니는 친구 할머니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친구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영감님이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늙고 병든 예수님, 추위에 떨고 있는 배고픈 아기 예수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해봐요!"
그 한 마디 말씀이 할머니 가슴에 전광석화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보석같은 한 말씀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할머니는 그날로 '할아버지=아기 예수님' 등식을 만들어가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늙고 병들어서야 찾아온 할아버지를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하시는 할머니 모습에서 온몸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산골 소녀 마리아의 향기를 느낍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예수 잉태라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과 이후 계속된 가슴 철렁 내려앉는 '별의 별' 상황 앞에서 오직 "예!"라고 순명할 줄밖에 몰랐던 마리아, 지극히 단순하고 겸손했던 마리아가 하느님 어머니가 되시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는 전 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자신 안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 잉태 이후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던 이해하지 못할 일들, 아들 예수로 인해 속끓이던 일들,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일들 앞에서 마리아는 철저하게 간직하십니다.
침묵 가운데 지속적 묵상에 전념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때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 시신을 품에 안던 순간까지 성모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침묵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 뜻을 찾아갑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가장 탁월한 신앙인이 되셨고 마침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난데없는 고통과 십자가들,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 의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겠지요. 그 순간 성모님 일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카 2,18)
지금은 비록 무엇이 진정한 하느님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혼란스럽지만 하느님 계획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굳건히 우리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이 한 해,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고통 속에서도 활짝 웃는 한 해, 십자가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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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엄마임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있는 참 엄마의 자격>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soJw8rlU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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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해 첫날이기도 하면서 전례력으로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믿을 교리로 반포하였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며 그 신성을 버리셨거나, 혹은 신성을 지키시기 위해 인성을 버린다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늘로 오르기 위해 붙잡고 나아가야 할 사다리가 될 수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로 오르는 ‘길’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길은 하늘과 땅을 맞닿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다리의 끝이 하늘에 닿아있어야 하고 또 땅에도 닿아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다리는 하나입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람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그 사다리와 같은 예수님을 낳으셨는데, 그 하나인 분을 잘라서 인간 예수의 어머니라고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왜 인간이 되셨는지를 부정하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시다고 엘리사벳이 불렀다면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요, 하느님 예수의 어머니도 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어떻게 하느님 어머니의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고 할례를 베풀고 아버지께서 주신 예수란 이름을 지어준 사실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참 부모가 아님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믿으셨기에 하느님께서 그분의 겸손을 보시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참으로 자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그 모범이 되십니다. 자녀들의 진정한 어머니가 되려면 자녀들의 참 어머니가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나의 마더’는 인류가 멸망한 직후 로봇 마더에 의해 아기가 키워진다는 설정을 담고 있습니다. 로봇 마더는 한 아기가 될 이미 저장된 태아 중 하나를 골라 가장 완벽하게 키우기 위해 보육과 교육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기는 로봇 엄마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인간을 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엄마를 닮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해 버린 존재일 뿐입니다. 마더는 완벽한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 위해 자신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이라고 말합니다. 마더는 소녀에게 훌륭한 인간이 되게 하려고 매일 교육하고 시험을 보게 합니다.
소녀는 완벽한 인간으로 성장했습니다. 마더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어느 날 정전이 되자 마더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정전되어도 움직일 수 있는 자신과 너무 다릅니다. 소녀는 정전을 일으킨 생쥐를 마더에게 보여줍니다. 마더는 균이 있을 수 있다며 생쥐를 불에 태워버립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생명체와 마주했던 소녀는 엄마에게 조금 실망합니다.
얼마 뒤 한 낯선 여자가 외부에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세상에 인간이란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인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마더와 똑같은 기계들에 의해 총을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더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소녀는 마더를 조금씩 의심하게 됩니다. 그 여자가 말한 대로 엄마는 자신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갑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미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여 시험에 실패하면 계속 소각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봇은 최고의 엄마가 되기 위해 태아들을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딸은 낯선 여자와 벙커에서 탈출합니다.
그러나 밖에 낯선 여자의 주장대로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낯선 여자도 혼자뿐이었습니다. 사실 낯선 여자도 평생 버려진 컨테이너에서 혼자 살아왔던 것입니다. 낯선 여자는 소녀에게 이곳에서 같이 살자고 회유합니다. 낯선 여자에게도 속았다고 생각한 딸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딸은 다시 마더에게서 자라고 있는 남동생을 구하러 벙커로 돌아갑니다. 이때 마더가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 인류의 어머니가 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소녀는 남동생을 빼앗고 마더를 죽입니다. 그러나 마더의 본체는 그것 하나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실패한 마더도 더 완전해지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제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마더가 어떻게 올바른 엄마가 될 수 있는지 시험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장된 태아의 숫자가 다 소진될 때까지 한 명의 아이도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고, 로봇 마더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것 하나는 ‘자신이 그 아기의 원천도 아닌데 어머니가 되려고 하는 모든 인간 어머니들이 가진 교만의 위험성’입니다. 아기들은 배아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고 로봇 마더는 그 아기들을 최대한 완벽한 모성애로 키우려 합니다. 그렇게 완벽한 인간들이 태어나야 좋은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봇이 생명을 창조할 능력이 없습니다. 배아를 키우면서도 자신이 어머니라고 믿게 하려는 것 안에서 아이도 혼란스러워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해도 아이는 로봇에게서 인간답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드님께 할례를 베풀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지어주고 하느님께 도로 봉헌할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아이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셨습니다.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부터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아기의 부모가 하느님임을 인정했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자격을 얻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자격은 ‘겸손’입니다. 아이의 생명이 내가 아닌 주님에게서 오기에 아기는 나의 것이 아닌 그 생명의 주인의 것이어야 함을 아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아닌 당사자가 그 생명을 완벽하게 키워낼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겸손하게 아드님이 당신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주님의 것이라 인정해드렸습니다.
이런 자녀 봉헌을 가장 잘하는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할례는 물론이요, 성인식 때 이미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번 주식 동학혁명의 선봉장이라 불리는 ‘존 리’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성인식 때 5천만 원 정도를 아이에게 유산으로 주며 그것으로 경제 공부도 하며 주식도 잘 불려보도록 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역할을 내려놓고 사춘기 전에 참 부모인 하느님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공부 잘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로봇이 아무리 아이에게 주입식 공부를 시키더라도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하며 자신이 어머니란 소리를 계속 들으려고 한다면 결국 영화에서처럼 스스로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든 어머니들도 지금 테스트를 받고 있습니다. 자녀를 주님께 돌려드려 성모님처럼 테스트를 통과하여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자신이 어머니가 되려다가 결국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 것인지.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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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새해 첫 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복음: 루가 2,16-21: 여드레 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평화는 마음의 질서가 잘 잡힌 조화로운 상태이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문란하면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이 질서가 올바로 정립되어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마음의 질서의 조화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夫要生者必死요 期死者得生하리라.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여(루가 1,38 참조) 당신 자신의 신적인 모성의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신적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 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바쳐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 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 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 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 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보다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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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요즈음 세계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그리고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 말미암아 평화가 사라진 듯한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새해 첫날인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축복과 평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태어나신 주님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고 은총이며 평화입니다.
우리 주님, 성자께서 탄생하신 기쁨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강생의 신비를 통한 은총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서 이 세상에 일어나게 된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인 목자들의 이야기에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시는’ 분으로 표현되십니다.
성모님의 잉태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의 삶을 성모님의 돌보심과 전구에 의탁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기도에 나오듯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고, 언제나 축복과 은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불확실하며, 어려움과 불안 그리고 고통과 실망이 얼마나 가득합니까? 또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일들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속에서 얼마나 고민합니까? 성모님과 늘 함께하고 성모님께 의지하는 삶은 우리를 하느님의 계획 안에 살 수 있게 하고, 주님의 보호와 축복이 함께하는 기쁜 신앙생활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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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 평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 군대가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이 찬미는 예수님 탄생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찬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시게 될 ‘인류 구원 활동’은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는 일이 될 것이라는 찬미입니다. 여기서 ‘평화’ 라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구원,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우리는 그 평화를 ‘참 평화’ 라고 부릅니다. ‘참 평화’를 누리는 일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됩니다.
1) ‘참 평화’를 누리려면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그 두려움은 ‘참 평화’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말은, 신앙생활과 회개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고, 그것은 또, 아직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두려움 때문에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한 신앙생활과 회개로 사랑을 완성한 사람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몸의 편안함’을 평화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화를 전쟁의 반대말로만 생각하는 것도 그런 착각입니다.) 만일에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 있다면, 몸이 편안한 상태에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 편안함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전쟁이 없더라도 긴장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면 ‘몸’ 말고, ‘마음의 편안함’은 어떨까?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이 없고, 죄책감도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마음 편하게 잘 지냅니다. 그렇게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참 평화’일까? 죄 속에서 살면서도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죄에 속하는 쾌락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거짓 평화’입니다. 신앙인은 ‘거짓 평화’가 아니라, ‘참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2) ‘참 평화’를 누리는 일은 ‘사랑의 완성’에 직결된 일인데,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참 평화’는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평화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5) 여기서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는 말은, 공동체 모두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풍요로움을 누렸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또, 바로 앞에 있는 “큰 은총을 누렸다.”라는 말과 합해서 모두가 다 ‘참 평화’를 누렸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한 마음 한뜻이 되었다는 말은, 이기심과 욕심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이기심과 욕심을 버린 것이 바로 모두가 다 ‘참 평화’를 누리게 된 비결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편안하게 지내면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도 없는 곳은 지옥일 뿐입니다. 아무리 편안하게 지내도, 지옥에서 누리는 편안함이 평화일 수는 없습니다. 실제 인간 세상을 보면 자기와 세상 사이에 높은 성벽을 쌓아놓고서 혼자서만 편안하게 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낙원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곳은 낙원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과 단절되어 있는 곳, 즉 지옥입니다.>
3) 지금 ‘영혼의 평화’(참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그 평화는 아직은 미완성 상태인 평화이고, 완성된 평화를 미리 조금 맛보는 것일 뿐입니다. (평화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고, 자만심에 빠지거나 방심하면 안 됩니다. 지상에서 누리는 평화가 아직은 미완성 상태라는 것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온갖 종류의 박해와 환난도 공격이고, 유혹도 공격입니다.) 완성된 평화,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지상에서의 현재의 삶은 지나가는 중간 경유지입니다. 인생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라 저쪽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6-18) 여기서 “나날이 새로워진다.”라는 말은, 뜻으로는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멈추어 서버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과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다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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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1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0년은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코로나19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행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소중한 일자리를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답답한 마스크를 써야 했고, 사랑하는 이웃과도 거리두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2020년에도 새 생명은 태어났습니다. 꽃은 무상으로 향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땀을 흘리는 의료진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일상으로 느끼던 삶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웃과 정답게 웃으며 식사하는 일, 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것,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정말 소중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남편 때문에 화가 난다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다툰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매일 텔레비전만 보는 남편이 싫다고 합니다. 게으른 남편이 싫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남편이 도박을 하나요?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나요? 남편이 아파서 화장실을 못 가나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나요? 남편이 돈을 함부로 쓰나요?” 자매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니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것과 조금 게으른 것 말고는 특히 나쁜 것이 없네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도박하지 않는 남편, 술을 마시지 않는 남편, 건강한 남편, 검소한 남편, 아내만 사랑하는 남편”이라 생각하면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대하면 화가 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다툴 일도 없어질 겁니다. 생각을 바꾸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화가 날 일도 사라질 겁니다. 그렇습니다. 짜증내면 짜증 날 일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걱정하면 세상은 온통 걱정덩어리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이해하면 오해는 사라집니다. 사랑하면 세상은 온통 사랑이 넘쳐납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우리가 집중하는 곳으로 흐릅니다. 어떤 단어에 힘주어 집중하면 에너지는 그곳으로 모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아픈 것이 싫어.’라고 말하면 ‘아픔’에 집중하는 것이 되고, 그때 에너지는 ‘아픔’ 쪽으로 흐릅니다. 그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방법은 ‘나는 건강한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인 상태뿐 아니라 세상 에너지의 흐름을 바꾸는 길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대신 ’평화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농약투성이의 채소나 너무 많은 육류 소비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텃밭에서 직접 기른 상추와 깻잎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하는 일이 싫어.’라고 말하기 보다는 ‘나는 가슴 뛰는 일이 좋아.’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불행한 것이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행복한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으로 2021년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자주하는 말이 있습니다. “좋아요. 잘 했어요. 잘 될 겁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하면서 “좋아요. 잘 했어요. 잘 될 겁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도 이렇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새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출산을 통하여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으니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저희가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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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해 첫 기도>
루카 2,16-21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할례와 작명)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새해 첫 기도>
새해에는 보게 하소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있음에도 없음을 강요당하는
작은 벗들이 있을 수 있도록
새해에는 듣게 하소서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들려주시는 것을
간절한 울부짖음마저 빼앗기는
억울한 벗들이 외칠 수 있도록
새해에는 품게 하소서
내가 품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안겨주시는 것을
제 탓 없이 짓밟히고 버려지는
보잘것없는 벗들이 살 수 있도록
새해에는 새기게 하소서
내가 새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새겨주시는 것을
갈라진 세상에서 신음하는
착한 벗들이 하나 될 수 있도록
새해에는 가게 하소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당신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당신 없이는 온전히 살 수 없는
가난한 벗들이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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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새해 인사 동영상)
https://youtu.be/yTVsXOcbN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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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광근 도미니코 신부님]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
새해가 밝았습니다. 저는“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인사말 대신 “새해에 복을 많이 빌어 주십시오” 혹은“새해 복을 많이 지으십시오”라는 인사말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흔히“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새해 인사를 하는데, 다들 복을 받기만 바라는 것보다는 서로 복을 지으라고 축원해 주면 언젠가는 그 복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 대신“새해 복을 많이 지으십시오”라는 인사말이 더 좋은 인사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악업(惡業)을 많이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복(福)을 많이 지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복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남을 위해 복을 지음으로써, 도리어 그 복이 넘쳐서 저절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튼 올 한 해에도 여러분 모든 분들께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에서는 사제의 축복으로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6,24.27)
결국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시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야 말로 진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통하여 그 복을 주시마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복을 제 스스로 빈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특히 주님의 대리자인 사제들을 통해서 복을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도 새해에는 여러분들께 많은 복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복을 서로 빌어주십시오.
제2독서인 갈라티아서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점을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여러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는 그래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이 복을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에는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마리아님, 그 분은“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오래 간직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마리아님의 태도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의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금방 떠벌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는 일…. 이것이야 말로 바로 하느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도 새해에는 말도 삼가고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복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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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정훈 시몬 신부님]
오늘 우리는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는 복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를 천주(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가르쳐 준다.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만왕의 왕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신 분의 탄생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천사들의 경배나 천상 군대의 찬미소리는 물론 값진 예물을 들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도(王都)가 아닌 시골이며, 왕궁이 아닌 마구간이다.
또한 세상의 빛이신 분께서 모든 것이 고요하게 잠든 한밤중에 태어나셨다는 사실도 천상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찬란한 광채와 함께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습과 매우 다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들(작은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루카 17,2 참조)이시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의 탄생지로 누추한 시골 마구간을 택하신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이세벨에게 쫓겨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엘리야에게 새로운 힘과 사명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발현하셨을 때의 일이다.
엘리야가 체험한 하느님은 강한 바람,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다.(1열왕 19,11-12)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요란하고 현란한 방식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한밤중 시골 마구간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어 보잘것 없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낸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면 언제나 중앙에는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그 양편에는 요셉과 마리아를, 나머지 둘레에는 목동들을, 마지막으로 가장자리에는 가축들을 배치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렇게 모든 눈이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삶만이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목자들은 들에서 천사들을 만난 일과 천사들이 들려준 말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한다.(루카 2,17) 여기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벌써 널리 퍼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전한다.(루카 2,18)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이 신앙으로 발전했다는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 또는 “거참, 신기하네!” 하고 말할 정도의 일로 여겨진 듯하다.
우리도 가끔 매스컴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대한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때만 신기해할 뿐이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태어나신 분이 누구신지, 그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찾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났고 천상 군대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기 위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존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께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사람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마리아는 놀라움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는 데 몰입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신비는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하느님께서 직접 밝혀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마리아의 태도는 소박하고 고요하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탄생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하느님의 신비를 단숨에 알아듣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다.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깨닫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수동적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도움 안에서 그분의 신비한 뜻을 깨달으려 최선을 다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면서 그분 지혜의 비추심을 갈망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기다림을 토대로 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 분명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고요하게 기다린다.
분명 마리아는 이러한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의 눈에는 미친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먼저 보낸 불쌍한 인생 여정을 걸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를 누린 행복한 여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는’ 마리아의 신앙을 거울삼아 우리 신앙을 비춰보고 바로 세워야 한다.
“주님,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저도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세속적 사랑과 행복을 찾아 당신을 떠나 헤매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약하고 부족한 저희에게 당신과 함께하는 삶만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 유혹(돈, 쾌락, 지위, 과도한 취미생활 등)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 저희 삶을 자주 깊이 성찰하면서 당신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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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님]
<하느님의 도구>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 (루카 2,16-21)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예수님의 탄생 예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 곧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1,76-77)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리라.
시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도 ‘주님의 도구’라는 것을 복음사가는 암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첫 선포자와 그들의 역할을 전하고 있다. 그 영광을 차지한 이들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목자들’이다. 앞서 복음은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이들이라 묘사한다.(2,8 참조)
이 대목은 목자들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막중한 성탄의 선포를 보잘것 없는 이들한테 맡기신 것이다. 예수님 역시 공생활에 앞서 당신의 제자로 어부들을 선택하신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들, 갈릴래아 호수에 의지한 채 하늘이 주는 대로 거두는 순박한 이들을 뽑으신 것이다.
본당에서 연초가 되면 참으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임기가 끝난 단체장으로 누구를 새로이 임명할 것인가? 며칠씩 고심한 본당 신부의 부탁을 들어주기나 할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점점 바쁘게 돌아가며 먹고사느라 빠듯한 이들에게 섣부른 부탁을 하는 것 같아 말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거절하면서 가장 흔히 듣는 구실은 ‘아는 게 없어서’ 또는 ‘능력이 안 돼서’이다. 이런 걸 굳이 겸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도구’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능력이 있거나 우리 자신이 뽑아주십사 간청해서 쓰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예’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정말 교우들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여러모로 부족합니다만,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니 성심껏 해보겠습니다.”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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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햍타트’(חַטָּאת)라고 하며, 희랍어로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원래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상황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빗나간 삶을 말한다는 것을 이 단어의 어원에서 발견합니다.
막 입대한 뒤에 신병교육대에서 사격했을 때가 떠올려집니다. 난생처음으로 쏜 총소리는 너무나 컸습니다. 더군다나 위험해서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지요. 사격전에 사격 방법에 대해 교육을 받았음에도 막상 사격할 때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사격하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단 한 발도 과녁에 맞힐 수가 없었습니다. 과녁 자체를 보지 않았으니 과녁에서 벗어난 사격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죄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보지 않을 때 주님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죄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1년의 첫날입니다. 새해가 되면 커다란 희망을 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과 함께해야 할 목록들을 나열하곤 하지요.
이 목록의 첫 자리에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주님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즉 죄의 삶에 들어가지 않는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를 떠올려 보십시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낳으면서 겪었던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시끄럽게 세상에 떠들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만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꼭 필요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죄로 기울어지지 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제1독서의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2021년의 첫날에 독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복 받기를 원한다면, 성모님처럼 곰곰이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가 될 때, 2021년을 더욱더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 2021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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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의 용도>
“요즘 젊은이들은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지. 그런데 자네, 손수건의 진짜 용도가 뭔지 아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거라네!”
어느 영화의 대사입니다. 이 영화 대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손수건의 의미를 새기면서, 손수건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은 원래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자기 삶만을 살면서 정신없어 합니다. 나를 위해서만 손수건을 사용합니다.
이제는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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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해 첫날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명 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해는 세속적인 복을 찾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주어져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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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의 선물>
-만복의 근원이신 주님-
어제 저녁 성무일도시 한해를 마감하며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중 마지막 결론같은 기도문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가 늘 우리와 함께 있으소서, 우리는 당신께 희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2021년 새해 첫날 참 감회가 깊습니다. 신축년辛丑年으로 소띠 해라니 반갑습니다. 제가 소띠거든요. 저뿐 아니라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씨 성 둘이 뭔지 아십니까? 아무리 보고 생각해도 참 한결같고 믿음직스럽고 푸근하고 따뜻하고 넉넉한 느낌의 소와 소나무입니다.
삶의 좌표로 삼고 싶은 참 호감이 가는 동식물動植物 소와 소나무입니다. 소와 관련된 우보천리牛步千里와 호시우행虎視牛行 또한 제가 좋아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한결같이 주님과 함께 우보천리의 자세로, 늘 깨어 있는 시선視線으로 뚜벅뚜벅 호시우행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싶습니다.
2021년1월1일 오늘은 성탄 8부내 맞이하는 새해 첫날이자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주님 성탄의 축복이 2020년을 치유하고 2021년을 평화와 희망으로 가득 채우는 느낌입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께서 2021년 새해 첫날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새벽 성무일도시 축복의 하루를 연 아름다운 초대송 후렴과 찬미가 두 연을 나누고 싶습니다.
“동정이신 마리아를 공경하며 그의 아들 주 그리스도께 조배드리세.”
“빛살을 지어내신 빛의 창조주 구유도 마다않고 누워계시며
일찍이 성부함께 하늘내신분 아기로 모친품에 안기셨도다.
이제야 빛과구원 탄생하시니 어둔밤 사라지고 죽음없도다
마리아 낳은아기 하느님일세 오너라 만민들아 그를믿어라.”
이 찬미가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참 좋은 축복의 선물입니다. 눈만 열리면 주님 축복의 선물 가득한 세상임을, 우리 존재 자체도 욕망덩어리가 아닌 축복덩어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참 좋아하시는 일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일입니다. 저 또한 좋아하는 일이 강복을 주는 일입니다. 요즘은 아름다운 일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진과 더불어 전송하는 축복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인(성녀), 형제님(자매님)! 일출의 축복선물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는 주저함 없이 성인, 또는 성녀라 호칭하며 축복선물을 드리는 기분으로 아름다운 사진을 전송합니다. 고백성사후 또는 갑작스럽게 만난 반가운 분을 대하면 줄 수 있는 선물이 강복뿐이 없어 주님 축복을 선물합니다. 햇빛 가득 내리 쬐는 날 주차장에서 자동차 축복후 형제에게 강복을 줄 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저와 함께 주님도 당신 햇빛으로 동시에 강복하셨습니다!”
해마다 불렀던 오늘 대축일 미사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지 못해 참 아쉽습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가사에 곡을 붙여 흥겹게 노래하는 기쁨을 코로나19로인해 올해 처음으로 누리지 못합니다. 이 화답송 후렴을 하루 노래 기도로 바치며 지낼 작정입니다.
참으로 깊이 들여다 보면 삶은 모두가 주님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시니 우리는 저절로 복된 존재일 수 뿐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세가지 축복을 나눕니다.
첫째, 가난의 축복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를, 마음이 가난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성서의 가난한 자들인 아나뷤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와 희망을 둔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있습니까? 역설적으로 이런 가난한 자가 내적부자요 행복하고 자유로운 자들임을 깨닫습니다.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에 만족하는 가난한 자가 실상 부자입니다. 하늘나라 보물을 지녔기에 이처럼 품위있는 가난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이 마리아 성모님이 이런 축복받은 아나뷤의 후예들입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예수 아기를 찾아 뵈오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중 탄생하신 주님을 만난 축복을 누린 이들은 가난한 목자들뿐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니 찬양의 축복, 찬미의 축복을 누리는 목자들입니다. 가난으로 텅 비워진 자리에서 샘솟는 찬양과 찬미의 축복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자녀됨의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큰 최고의 축복이 하느님의 자녀됨의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죄로 손상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어 때가 차자 아드님을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정 여러분은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 자녀됨의 축복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새삼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음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의 상속자라니 축복에 축복을 더한 느낌입니다. 참으로 자녀됨의 축복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우리에게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셋째, 관상의 축복입니다.
관상의 기쁨, 관상의 행복, 관상의 아름다움입니다. 본래 인간의 모습이, 회복해야할 관상의 축복입니다. 바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체험한 가난한 목자들이 관상 축복의 모범입니다. 목자들의 관상체험을 들은 모든 이들이 놀라워할 때 이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에서 관상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로부터 듣고 본 관상적 체험을 깊이하는 마리아는 과연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모범이자 관상의 모범인 마리아입니다. 마침내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예수 이름으로 명명하니 얼마나 깊이 하느님과 통교한 신비가, 관상가 부부인지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오늘날의 불행이자 비극은 이런 신비감각을 관상의 깊이를 상실하여 본능의 욕망이 주류를 이룬 천박한 삶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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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어려움 중에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축복이 가득합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들에 살며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천사가 알려 준 대로 베들레헴으로 달려옵니다. 그들의 서두름에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과 갑자기 맞닥뜨린 신비에 대한 경외감이 뒤섞여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셉은 투박하고 거친 사내들의 방문이 갑작스러웠지만 그들이 전하는 놀라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기의 부모만 아는 탄생의 신비는 일면식 없던 목자들의 증언으로 더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를 이미 영육으로 체험한 마리아는 어쩌면 이제 세상사로는 더 놀랄 일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그동안 예수님을 품었던 자신의 존재 안에 이 모든 일을 깊숙이 품습니다.
"목자들은 ...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 20)
오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구원자를 만난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영혼으로 변모됩니다. 그들이 되돌아가는 삶의 자리가 황량한 벌판, 냄새나는 양떼 곁, 위험이 도사린 광야 그대로일지라도 이미 그들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고자 모세에게 이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민수 6,23)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중재 없이도 만물에 축복을 내리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사제 가문에게 당신의 축복을 전하라고 하시지요.
"복, 지켜주심, 주님의 얼굴, 은혜, 평화"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미 주시려고 마음먹은 은총입니다. 그저 말씀만 들어도 배가 부르고 흐뭇해지는 축복들이지요.
축복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제직을 직무로 맡은 이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불리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축복은 남녀노소,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 누구나 다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영적 선물입니다. 누군가를 축복하는 일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축복은 순환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 작정하신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후한 선물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축복을 통해 이웃과 세상으로 번져나갑니다. 이 축복은 돌고 돌며 점점 커져서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 찬양으로 다시 올려지고 이웃에게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복은 복을 부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갈라 4,7)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로 오신 이유는 율법 아래 묶인 우리를 속량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셨으니, 우리 모두가 종에 멍에를 벗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갈라 4,7)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신 아드님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거저 얻게 된 것이지요. 이 축복 앞에서 우리가 드릴 것은 감사와 찬양, 찬미뿐입니다. 오늘 복음 속 목자들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허락하신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복을 빌어 주고 복을 얻고 복을 나누며 살아가는 주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아직 전인류적인 고통과 어려움이 봉합되기 전에 맞이한 새해는 여전히 어둡고 혼란스럽지요. 그리서 우리의 선하고 진실한 축복이 더욱 절실합니다.
축복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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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진리가 땅에서 움터 나오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았도다.
사람이여,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잠자는 이여,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죽음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나는 다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죽은 채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결코 죄의 육신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이 당해야 할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생명을 다시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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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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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천주의 모친 대축일’입니다. 2021년을 여는 새해의 첫 날이며, 또한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평화의 날입니다. 새해의 첫날,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건네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시작이요, 비롯됨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난 한 해의 종이를 덮어버리고, 앞에 놓인 나날의 새로운 백지 위에 무엇인가 새롭게 색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곧 맏배, 첫 자녀, 첫 수확, 첫 봉헌 등 첫 번째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 새해의 이 첫 번째 날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첫 번째 날을 통해 1년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칩니다.
우리는 이 한 해의 첫 날에 ‘천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원, 곧 구원 생명의 시원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다름 아닌 구원자를 낳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시고,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곧 복된 은총의 하늘 문을 여신 성모님을 통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빛을 건네주신 빛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와가 잠갔던 낙원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듯, 오늘 제 안에서도 그분이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곧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구원한 신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크신 자비, 당신이 하신 일을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루카 2,19)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되새기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품고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이 새해 첫날에, 천주의 모친 축일을 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임을 상기시켜줌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살아가라는 희망의 호소요, 외침이라 할 것입니다.
새해의 첫 번째 날,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웃에게 축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소명을 거듭거듭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축복을 빌어주면, 그렇게 축복을 베풀어주시리라는 약속도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새해 인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복을 빌어주면, 복이 흘러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새해 첫 아침!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어둠을 가르고 첫 새벽을 달려와 구세주를 찬양하였듯이, 기쁨과 희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기쁨과 희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축복을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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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해가 갈수록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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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아빠, 나의 주님께 내맡기는 기도>
아빠, 나의 주 나의 전부시여!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 당신 하나뿐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바람과 지향과 뜻, 저의 믿음과 의탁, 저의 사랑과 앎,
저의 모든 것을 드리오니, 당신 뜻을 따라 살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께 의탁하오니,
당신이 바라시면 저도 바라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지 않으시면 저도 바라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가져가시면 가져가시게 하고,
당신이 주시면 거절하지 않게 하소서.
저의 고독과 고통과 죽음, 저의 모자람과 무능과 보잘 것 없음,
모순과 부조화, 열등과 두려움, 허약과 불순, 상처와 부끄러움,
저의 모든 조건과 상황, 현실의 일체의 것 안에서 당신의 일하심에 의탁하게 하소서.
아빠, 주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오로지 당신의 뜻과 활동, 당신 섭리와 이끄심을 따라 살게 하소서.
저의 불신과 벗어남마저도 당신 손길은 마다하지 않으시니,
저를 온전히 당신의 믿음에 맡깁니다.
저의 미움과 배반마저도 당신 섭리로 이끄시니,
저를 온전히 당신 선의의 뜻에 맡깁니다.
자유의지와 저의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소유하시고 저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저는 당신의 소유이오니, 소유하시는 당신이 되나이다.
저는 단지 당신 안에서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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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20)
다사다난 했던 2020년 경자년을 뒤로 하고, 새로운 한 해인 신축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부족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늘 함께 해주시면서 나를 지켜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아론의 축복이 충만히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에게 더 복을 내려주시고 지켜주시길,
새해에는 더 여러분에게 하느님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새해에는 더 여러분에게 하느님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새해의 첫날인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억하는 의무대축일'입니다.
"예!" 라는 순종을 시작으로 끝까지 당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신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본받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아빠! 아버지!"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지지 않는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평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219항)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는 공동선과 공동이익의 가치 추구로부터 얻어지는 평화이며,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결코 소외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두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평화가 2021년 신축년 새해에는 더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려준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로 태어나시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 안에 더 머물도록 합시다!
그 사랑 안에서 '소의 해'를 맞아 소처럼 우직하고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뚜뻑뚜뻑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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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golYOMycs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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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 16)
하늘의 진리는
어머니를 통해
전달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신뢰하듯
어머니를 믿고
어머니에게서
탄생하신다.
믿음이란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사랑이
서로를
살린다.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어머니를 통해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구원이다.
구원은
내려오심의
신비이다.
하느님께서
어머니의
품안에
안기신다.
모든 신비는
하느님
중심으로
펼쳐지는
낮아짐의
신비이다.
생명의 신비는
이렇듯
사랑의 신비이다.
어머니와 함께
희망찬
은총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은총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맡기는
사랑의
신비이다.
은총을 통해
2021년의
삶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과 은총의
관계로
새로워진다.
사랑이
은총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의 놀라운
힘을 믿는다.
사랑으로
어머니가 되듯
사랑은
모든 아픔을
치유시켜 준다.
사랑이
시작되었다.
사랑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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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루카 2, 16)
우리에겐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가 계셔
우리 삶은 아직
희망의 연속입니다.
어머니는 끝까지
자식들과 함께 하십니다.
진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삶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잃어버린 모성을
되찾아주십니다.
어머니의 손길에서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자녀들의
관계처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이곳에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마리아는 믿는 것을
삶으로 실천합니다.
사람의 삶이란
믿음의 삶임을
보여주십니다.
믿음의 길을
되새기고 되새기며
걸어가십니다.
믿음의 길은
순명의 길이었습니다.
순명의 길은
구원을 탄생시키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처럼 하느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은총 가득한
나날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매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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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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