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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사편찬사업
차 례
* 발간사 ···························································································································· 4
* 해제 : 일제의 조선역사 왜곡정책, '조선반도사'의 실체와 조선사 편찬 ············· 9
Ⅰ. 조선반도사 편찬사업 관계
1. 관련논의와 세부목차 _ 31
1) 조선반도사 편성의 요지 및 순서(1916) 31
2) 조선사 편찬의 방침(1917, 기사) 35
3) 조선반도사 편찬 개황(1938) 36
4) 반도사 편찬 관련 협의사항(1920) 39
5) 조선반도사 요항(要項) 48
6) 조선반도사 요항 세목(細目) 60
2. 조선반도사의 내용 _ 136
1) 조선반도사 1편 원고(상고 부분) 136
2) 조선반도사 2편 원고(삼국 부분) 184
3) 조선반도사 3편 원고(‘통일신라’ 부분) 268
4) 조선반도사 5편 원고(조선 중 일부) 325
5) '사료'('조선반도사' 6편 조선최근세 초고 중 일부로 추정) 412
Ⅱ. 조선사 편찬사업 관계
1. 조선사편찬위원회 _ 429
1) 조선사편찬회 조직, 위원장은 아리요시(有吉) 정무총감(기사) 429
2) 절대로 공평히 편찬(기사) 430
3) 조선사편찬위원회 상황 431
4)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 431
5) 조선사편찬위원회 의사 내규 432
6) 제1회 조선사편찬위원회 회의록(1923년 1월 8~10일) 433
7) 제2회 조선사편찬위원회 회의록(1923년 6월 12일) 447
8) 제3회 조선사편찬위원회 회의록(1924년 4월 2일) 457
9) 제4회 조선사편찬위원회 회의록(1924년 8월 5일) 463
10) 제5회 조선사편찬위원회 회의록(1924년 12월 23일) 468
2. 조선사편수회 _ 476
1) 조선사편수사업 경과 및 현상 476
2) 조선사편수회 관제 477
3) 조선사편수회 직원 임명 내신을 끝낸 자에 대한 조사 477
4) 조선사편수회 고문·위원·직원 선임 479
5) 조선사편수회 직원 채용 신청 인원 및 봉급 조사 481
6) 1925년도 조선사편찬비 예산 조사 482
7) 조선사편수회요람 483
8) 위원회의 경과 및 중요결의(제1~9차) 490
9) 조선사편수회 편찬사무의 분담과 예산, 출판 513
10) 조선사편수회의 의의(사설) 520
11) 조선사편찬계획에 대하여, 80만 엔을 유해(有害)하게 소비치마라(사설) 521
12) 아사인수(我史人修)의 슬픔, 최후의 정신적 파산(상, 하)(사설) 522
13) 조선사 문제(사설) 526
14) 나카무라 히레타카, 신간 조선사에 대해서 528
15) 나카무라 히레타카, 조선사의 편수와 조선사료의 수집-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 538
* 찾아보기 ···················································································································· 573
해제 : 일제의 조선역사 왜곡정책, '조선반도사'의 실체와 조선사 편찬
김성민(국가보훈처 연구원)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가 일반적으로 경제침탈과 군사기지의 확보를 위해 식민지를 경영하였던 것과는 달리 일제는 이에 더하여 민족말살까지 획책하였다.
일제의 한국 민족말살정책은 식민통치의 전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한국사의 왜곡과 식민사학의 부식도 이러한 식민지 통치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일제는 병탄 초기부터 식민사서의 간행을 통해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독립운동의 예봉을 꺾으려 하였다.
즉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일 종족이므로 ‘일한합방’이 자연스러운 역사적 귀결이며 한국인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임을 강조하는 역사서의 간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병탄 초기부터의 이러한 시도는 중추원의 '반도사' 편찬계획을 거쳐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간행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식민사관은 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무르익어갔다.
따라서 '조선사'로 대표되는 일제 총독부의 관찬 사서 편찬은 단순한 역사서 간행이 아니라 고도의 식민통치 책으로서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는 아편과도 같았다.
총독부가 나름대로 장기간의 계획을 세워 역사서를 편찬했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금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제 총독부의 역사서 편찬에 주목하여 관련 자료를 모아 자료집을 간행하는 것은 일제의 이러한 시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획이라 하겠다.
이 자료집이 일제 총독부의 우리 역사 왜곡의 일단을 제대로 드러내 줄 것으로 기대한다.
1. 중추원의 '반도사' 편찬 계획1)
병탄 이후 일제의 조선통치 기조는 민족동화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화정책의 수행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요구된 것이 조선사회에 대한 조사 연구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다음과 같이 조선 사회의 조사연구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2)
대화혼(大和魂)과 조선혼(朝鮮魂)을 혼합하여 우리 일본인이 저들에게 일본혼을 심어 주지 않은 채로, 저들이 우리의
문명적 시설로 인해 지능을 개발하고 널리 세계의 형세에 접하게 되는 날에 이르러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미리 일본국민의 유의를 요한다.
이것이 대개 조선 통치의 최대 난관인데 내가 조선인의 철저한 자각을 바라는 동시에 조선 연구에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믿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목전의 정치적 시설 이상으로 다시 영구적,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 연구이며 역사적 연구이다.
저들의 민족정신을 어디까지나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내선동화의 진실한 사업은 아직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 즉 조선인의 민족 심리, 정신생활에 걸쳐서 이해하는 바가 없으면 헛수고이다.
식민정책의 근본은 반드시 여기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세인이 우원(迂遠)하다고 경시하는 학술적 조사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조사의 보무(步武)를
진행시키고 있다.
즉 조선인의 정신생활, 민족심리, 역사 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일본인화 시키기 위한 동화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독부가 추진한 구관제도조사(舊慣制度調査), 사료조사(史料調査) 등은 바로 이러한 목적하에 계획되었다.
동화정책의 전제로서 추진한 이와 같은 조사 연구 활동은 곧바로 병탄의 정당성과 식민통치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역사왜곡과 이의 선전, 부식 활동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구체화한 것이 고적조사사업과 사서 편찬이었다.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된 조선고적조사사업의 경우, 발굴 대상지역을 처음부터 소위 한사군과 임나일본부가 위치했다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일선동 조론과 한국사의 타율성을 조작하기 위해 부심하였다.
한편 일제는 1911년 이후 총독부의 취조국(取調局)과 그 뒤를 이은 참사관실(參事官室)의 주도하에 ‘반도사’ 편찬을
추진 하였으나 중추원으로 소관 업무가 이관될 때까지 사서 편찬의 계획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원래 취조국과 참사관실은 입법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민사(民事), 상사(商事)의 구관조사 등 구관제도조사사업에 주력하였던 관계로 사서 편찬계획은 미처 구체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1) 본 해제의 1~3장은 졸고, 「조선사편수회의 조직과 운용」(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 1989)의 해당 부분을 중심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혀둔다.
2) 靑柳南冥, '總督政治史論', 武斷政治時代, 1928, 262~267쪽.
그 후 민사, 상사의 구관조사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1915년 참사관실의 업무가 중추원으로 이관됨에 따라 이 계획도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역사왜곡에 근저를 둔 사서 편찬을 계획하던 1915년 일제의 침략과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痛史)'가 국외는 물론 국내에까지 반입되어 민족혼을 일깨움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총독부에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이러한 사서는 그들의 식민통치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항하는 식민사서의 편찬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고, 결국 종래 거론되어 오던 '조선반도사'(이하 '반도사')의 편찬계획을 구체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16년 중추원 소속의 조선인과 도쿄제국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편찬체제를 정비하였고 동년 7월에는 편수의 지침이 되는 「조선반도사편찬요지」를 발표하였다.
일제는 이 요지에서 반도사의 편찬이 “민심훈육(民心薰育)을 통해 조선인을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들어 조선인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3) 표방함으로써 '반도사'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그 내용도,
첫째, 일선인(日鮮人)이 동족(同族)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
둘째, 상고(上古)에서 이조(李朝)에 이르는 군웅(群雄)의 흥망기복과 역대의 혁명역성(革命易姓)에 의해 중민(衆民)이
점차 피비(疲憊)하게 되고 빈약에 빠지는 실황을 서술해서 금대(今代)에 이르러 성세(聖世)의 혜택에 의해 비로소 인생의 행복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술할 것.
등을 편찬의 주안점으로 삼았다.
한편 일제는 '반도사' 편찬의 부대사업으로 '조선인명휘고(朝鮮人名彙考)'와 '일한동원사(日韓同源史)'의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일한동원사'의 경우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순전히 조선인의 동화를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목적의 '반도사'를 편찬하면서 중추원 소속의 조선인을 그들의 하수인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반도사'의 편찬사업에 참여한 조선인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 되어 있었다.
즉 15명의 중추원 찬의, 부찬의들은 조사주임으로서 자료의 수집에 종사하였을 뿐 그들이 직접 원고를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조사주임은 각기 담임 부분에 속하는 자료를 수집하여 3개월마다 이를 서기관장에게 제출하고 서기관장은 이를 편집
주임에게 교부했다.
편집주임은 이 자료에 기초하여 각기 초고를 작성한다는 것이 '반도사'의 편찬방식이었다.
결국 편수사업의 핵심을 이루는 편집주임은 중추원 서기관 오다 간지로(小田幹治郞)를 중심으로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일본인들로 구성되었다.
또한 다음에서 보듯이 집필자도 일본인 일색이었다.
3) 조선총독부, '朝鮮半島史編成ノ要旨及順序', 1916, 1~4쪽.
<표 1> '반도사'의 각 편별 집필자
시기 집필자 시기 집필자
1편(상고 삼한) 이마니시 류 4편(고려) 하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2편(삼국) 상동 5편(조선) 세노 마구마(瀨野馬熊)
3편(통일신라) 상동 6편(조선최근세사) 스기모토 쇼스케(杉本正介)
결국 사서 편찬사업에서 다수의 조선인은 일제의 지시에 따라 자료를 수집하는 역할만 담당했고 실제 반도사의 서술은 일본인들이 독점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일제는 1918년 중추원 내에 편찬과를 설치하여 '반도사'의 편찬을 전담하게 하였는데, 학무국 편집과장인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편찬과장을 겸임하며 이 사업을 주도하였다.
반도사의 편찬계획이 세워지자 총독부는 곧 자료수집에 착수하였으며 그 결과 편찬사료로 채택된 자료는 조선 측 기록 164종, 중국 측 기록 560종, 일본 측 기록 100 종, 기타 서양 측 기록 60종이었다. 한국사의 주체적 성격을 부정하고
외세에 의해 지배 받은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한국 측 기록보다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의 기록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다.
또한 '반도사'에 단군의 건국 관련 기사가 수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군 관련 기록을 사료수집의 대상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곧 민간에 산재한 단군, 기자 관계의 사료를 압수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자료의 수집과 더불어 각 편의 집필자들이 원고 작성에 착수하여 1924년에 이르기까지 1편(상고 삼한), 2편(삼국), 3편(통일 후의 신라), 5편(조선)은 초고를 완성하였으나, 4 편(고려)과 6편(조선최근세사)은 담당자의 사망, 전직 등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다.
한편 3·1운동 이후 새로이 '조선사' 편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중추원의 '반도사' 편찬계획은 1924년 말까지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조선사' 편찬사업과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그런데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자료 수집 결과 이미 완성된 '반도사'의 원고 중에도 많은 부분의 수정이 요구되었고 특히 담당자가 바뀐 4, 6편의 경우에는 새로운 조사 연구가 필요하였다.
더욱이 '조선사'를 편찬하기로 함에 따라 수준이 저급하다고 판단되는 반도사는 더 이상 편찬하여 출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반도사' 편찬사업은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됨에 맞추어 1924년 말 '조선사' 편찬사업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조선반도사 편찬 요지」에 잘 드러나 있는 일제의 역사왜곡 의도는 이후에도 변함없이 '조선사'의 편찬취지로
계승되어 갔다.
이러한 점에서 중추원의 '반도사' 편찬계획은 일제에 의한 관찬 사서의 시초를 이루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후의 사서 편찬에 기본방향을 설정해 준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설치와 '조선사' 편찬 계획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설치는 1921년에 이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의 발의로 계획되었다.
이때 계획된 조선사는 1921~1926년의 5개년에 걸쳐 완성할 예정이었다.
아울러 조선 사회에 대한 구관조사(舊慣調査)도 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나이토 도라지로(內藤虎次郞) 등 일본인 역사학자들과의 실무적인 협의과정에서 수정, 변경되었다.
즉 사업연한을 10년으로 늘리고 부위원장제를 폐지하였으며 조선사도 사회조사적 성격을 축소하여 전문역사서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1922년 12월 4일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이 발포되어 '조선사'의 편찬은 총독부의 산하기관인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편찬위원회는 총독부의 훈령에 의해 설치된 사서 편찬을 전담하는 특별기구였으나, 중추원 내에 설치됨으로써 사서편찬 업무가 제도적으로 중추원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선임된 직원들도 중추원 촉탁의 자격으로 편찬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편찬위원회가 중추원 내에 설치된 것은 중추원이 구한국 때의 전직 관리들로 구성되어 한국사에 관한 지식이
풍부한 한국인을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사업에 한국인을 참가시킴으로써 '조선사'가 ‘공명적확(公明的確)한 사서(史書)’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편찬위원회의 조직상 주목되는 것은 위원회의 역할이다.
'반도사' 편찬의 경우 조사주임, 편집주임, 심사위원 등 엄격한 사무 분담하에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조선사 편찬위원회는 외형상 위원회라는 기구 속에 각 위원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위원회를 사무 추진의 최고기구로 하고 위원 중에서 선임된 간사, 편찬주임 등이 편찬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쿄제대 교수인 구로이타 가쓰미가 편찬계획을 주도하였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실무책임자로서 편찬주임과 간사를 겸임하는 등 소수의 일본인이 모든 업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반도사'의 편찬사업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조선사'의 편찬을 계획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3·1운동 이후 교육열의 급격한 고조에 힘입어 한국인 사이에서는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주장되었으며 이는 곧 한국사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당연히 교육 현장인 학교에서 한국사를 독립과목으로 설정할 것과 왜곡된 한국사 교육의 시정 요구로
나타났고 이의 관철을 위해 학생들이 동맹휴교 항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사를 독립과목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해지자 일제가 이의 무마책으로 내세운 것이 '조선사' 편찬이었다. 즉 조선사 편찬을 통해 총독부가 한국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공정한 역사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한국사의 학교 교육 요구를 희석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중추원의 제반 사업 중 하나로서의 역사편찬이 아니라 이를 전담하는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이 사업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한 데에는 이러한 대외홍보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다.
아울러 사서 편찬과정에서 식민통치에 이용할 수 있는 식민사학적 요소를 뽑아 학교 교육에 반영하려는 저의도 있었다.
한편 최남선 등 역사학자들은 단군을 통해 한국사의 기원을 추적하고 한국사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한인 사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저지하여야 했고 이에 사서(史書) 편찬사업의 확충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즉 '조선사' 편찬을 통해 역사연구의 대상을 한정하고 사료를 규제함으로써 한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를 식민사학으로 유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편찬위원회의 실무책임자인 이나바 이와키치가 “별도로 서술한 바의 단군신앙은 요즈음 몇몇 사람(육당 최남선등)의
제창에 의해 급속히 발전하여, 보잘것없었던 조선사 연구는 조선인 사이에서 일대조세(潮勢)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일선동조론’ 등으로는 억제할 수 없으므로 조선총독부는 조선사 편찬을 계획하여 이러한 조세를 정당하게 이끌어 착각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바, 이는 시의적절한 것이다”라는4) 언급에서도 이러한 일제의 의도를 간취할 수 있다.
여기에 '반도사' 편찬체제와는 달리 새로운 '조선사' 편찬체제를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각종 강연회와 선전책자를 통한 정치선전을 강화하였다. 이는 3·1운동으로 고조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인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소위 한국사의 타율적·정체적 성격을 부각시켜야만 했는데, '조선사'의 편찬은 이러한 정치선전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사서편찬과정에서도 자료수집이 특히 강조되었다.
편찬위원회에서는 처음 10개년 예정으로 '조선사' 편찬을 계획하였는데, 처음의 3년은 사료 수집, 다음의 5년은 사료
수집과 편집·기고, 마지막 2년은 초고 정리에 충당하기로 하였다.
4) 稻葉岩吉, 「朝鮮史」, '역사교육' 제7권 제9호, 역사교육연구회, 1932, 522~524쪽.
그리하여 같은 해 5월에는 도지사회의에서 조선사료 보존에 관한 협의회를 개최하여 지방 관청에 소재한 관변사료의
보존 및 수집을 지시하는 한편, 「사료차입규정」을 정하여 전국에 산재한 민자자료의 채방에 주력하였다.
사료 채방의 방법은 각 위원별로 담당 지역을 설정하고 그 지방의 관청에 통보한 후 해당 관청이 미리 수집하여 놓은
사료를 담당위원이 일괄적으로 열람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시간과 경비의 절약을 기한다는 명목이었으나 그 시행과정에서는 지방의 관헌들이 강제적으로 사료를 수합케
하는 약탈적인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편찬위원이 직접 사료 소장자를 면담하여 채방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경우 군청의 직원이나 면장을 동반하였고 이들을 통해 사료 소장자와 교섭하였다.
그러나 1924년까지 민간 소재 사료의 수집은 그리 활발한 것이 못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제 관 주도의 사서 편찬에 강한 의혹을 갖고 있었다.
즉 일제의 역사서 편찬 의도가 한국인에게서 역사 관념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인에게 긍지를 심어주는 역사 자료는 되도록 몰수하려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자료수집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각지에 '조선사' 편찬의 목적을 밝히는 취지서를 배포하고 순회강연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사료 기증자에게 감사장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수집한 사료의 전람회를 열어 민간 유지들을 초대하고 편찬위원들이 지방 사료를 채방할 때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명사들의 소개장을 지참하여 사료 소장자의 의혹을 덜려고도 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사료 수집의 목적이 날로 인멸되는 자료를 보존하고 '조선사' 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조선사' 편찬은 민간소재 특수 자료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왕조실록 등 관찬사서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한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한 1927년까지 수집된 민간소재 사료는 총 수집 자료의 5분의 1에 불과한 상태였다.
이를 보아서도 사료의 수집이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한 기초 자료의 제공이라는 의미보다 일제의 식민사학에 부합되는 자료를 찾는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당시 민간 소재 사료가 주로 고래(古來)의 구가(舊家), 명가(名家)에 소장되어 있었으므로 각기 당색(黨色)을 달리하는 구가, 명가가 서로 경쟁적으로 사료를 제공케 함으로써 이들을 일제의 식민통치권으로 흡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따라서 사료 수집은 각 당파의 중심을 이루는 종가(宗家)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한국인 중에서는 총독부 부속기관에 불과한 편찬위원회에서 추진하는 사서편찬이 과연 당쟁 관련기사를 공정히 서술할 수 있는지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총독부가 각 당색의 상호 견제를 조장하여 이들 구가, 명가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편찬기관의 권위를
상승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편찬기구의 격과 편찬 담당자의 권위를 높여 이를 국가적 수사사업으로 확대함으로써 '조선사'가 일당일파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사서라는 점을 부각시켜야만 했다.
이에 따라 종래 총독부 훈령에 근거하여 총독부 부속기관으로 존재하던 편찬위원회는 칙령에 의한 총독 직할의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었다.
3. 조선사편수회로의 개편과 '조선사' 편찬
조선사편수회는 총독 직할의 독립관청으로 설치되었으며 아울러 중추원의 사무분장규정 중에서 ‘사료의 수집, 편찬’의 항목이 삭제됨으로써 '조선사' 편찬사업은 제도적으로 중추원에서 분리되었다.
그러나 실제 업무는 종래와 같이 중추원에서 취급하였다.
편찬위원회에 비해 명확히 확정된 편수회 관제에서 주목되는 것은 편수회를 총독의 직할기관으로 하고 그 직원 중 고문, 위원, 간사 등을 일본 내각에서 임명하는 것으로 하여 외형상 직제의 격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편찬위원회의 직원이 촉탁의 신분이었음에 비해 편수회에서는 수사관, 수사관보, 서기 등의 전임 직원을 두고 이들을 주임관, 판임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수사사업의 대외적 공신력을 높이려 하였다.
또한 종래 사무의 분장규정이 애매하던 편찬위원회의 관제에 비해 편수회에서는 위원과 간사 및 수사관을 분리함으로써 위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편수 업무를 간사와 수사관 중심으로 추진하였다.
아울러 새로이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수사관보로 충원하여 실질적인 편수체제에 들어갔다.
이들 전임 직원과 각 편 집필자들은 별도로 편수협의회(打合會)를 구성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편찬업무를 진행하였다.
편찬위원회가 명목상이나마 ‘위원회’ 중심체제였다면 편수회의 체제는 '조선사' 편찬의 실무진으로 구성된 이 편수협의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와 같이 편찬위원회가 편수회로 개편되었으나 일제의 '조선사' 편찬 의도가 바뀐것은 아니었다.
'조선사' 편찬의 실무 책임자인 이나바 이와키치는 “한국은 동양화란(東洋禍亂)의 원천이 되어 있었던 고로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 증진을 위하야 병합된 것이니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라”고5) 한 것에서 '조선사'가 근본적으로 '반도사'의 편찬 취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사'의 편찬은 “일본의 위대한 명목과 사명”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였다.
한편 한국인에게도 편수회의 설치는 커다란 우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는
당시 단군 성지를 철폐하고 남산에 조선신궁을 설립하는 등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
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가 '조선사'의 편찬을 기도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그들의 손에 내어줌으로써 한국인에게는 “최후의 정신적 파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5) 「조선사편찬계획에 대하야」, ꡔ동아일보ꡕ, 1925년 6월 13일.
이에 따라 당시의 언론들은 편수회에서 공정한 '조선사'를 편찬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한국인 자신에 의한 한국사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신문지상을 통해 민족주의 사가들의 저술을 연재하는 등 역사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유도하였다.
'조선사' 편찬에 대한 이와 같은 우려는 1930년대에 이르러 정인보, 안재홍 등 민족주의 사가들의 한국사 연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조선사'가 '반도사'와는 달리 ‘학술적이고 공명적확한 사서’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반도사' 편찬 당시와는 달리 편찬위원회에서는 그 직원의 구성에서 한·일의 학자들을 망라하였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반도사'를 편찬 할 때 편찬주임으로 사료의 수집을 담당했던 중추원 찬의, 부찬의 등의 한학자들을 제외하는 대신 한국인 사학자들을 증원하여 '조선사' 편찬에 외면적이마나 공정성을 부각시키려 하였다.
또한 편찬위원회는 고문직을 신설하여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등을 고문에 선임하였고 편수회에 와서는 일본의 이름
있는 사학자와 경성제대 총장을 고문직에 추가 선임하여 '조선사'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그러나 구로이타 가쓰미를 제외한 이들 고문은 단지 형식적으로 임명된 것에 불과하였고 ‘위원회’에 한번도 참가한 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음에서 편수회 참가자들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역사학에 소양이 전혀 없는 총독부 관리들이다.
편수회의 위원직에는 역대의 학무국장과 중추원 서기관장, 그리고 중추원의 일본인 서기관이 계속 임명되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 대학에서 법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한 후 문관고등시험을 거쳐 관계에 들어온 식민관료였다.
특히 중추원 서기관장이 회무촉탁으로서 총독부와 편수회의 가교역할을 수행하였다.
학무국장의 연임도 중추원 서기관장과 함께 가교적 위치에 있으면서 한국사의 학교 교육 요구를 무마하는 한편 조선사의 편찬 과정에서 식민통치에 유익한 부분을 선별하여 학교 교육에 반영시키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둘째,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지만 종래 총독부 주도의 각종 사업에 관여하여 식민정책의 수행을 도운 식민성 학자들이다.
오다 쇼고, 후지타 료사쿠,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구로이타 가쓰미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조선고적조사사업, 교과서 편찬사업 등 총독부의 한국문화 침탈과 민족의식 말살을 위한 각종 조사사업에 참여하여 식민사학의 부식에 기여한 인물들이다.
셋째, 종래 총독부의 직원이나 촉탁으로 근무하였던 한국인이다.
유맹(劉猛), 어윤적(魚允迪), 이능화(李能和), 홍희(洪憙) 등이 이에 속한다.
넷째, 대학 사학과를 갓 졸업한 신진학자들이다.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이병도, 신석호,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수사관보나 촉탁으로 편수회에 참여하여 '조선사'의 초고 작성과 이를 위한 자료 수집 등을 담당하였다.
편수회 설치 초기에는 일본의 대학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으나 1925년 경성제대가 설치된 후로는 이 대학 사학과 졸업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정규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으나 한국사에 대한 지식은 일천한 상태였다.
이상에서 볼 때 중추원 소속 행정관리들이 '조선사' 편찬의 일반 업무를 담당하였고 종래 총독부의 각종 조사사업에
참여하여 식민사학의 부식에 앞장섰던 일본 사학자들이 편찬업무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료 수집 결과 1938년까지 수집된 자료는 도서 4,950책, 사진 4,510매, 문권·화상·편액 등이 453점에 달하였으며,
16년 동안 총 975,534원의 예산이 소요되어 1932년 3월부터 1938년 3월까지 꼬박 6년간 36권의 '조선사'(총목록 1권 포함)를 간행하였다.
이후 1940 년에 총색인 1권이 추가 간행됨으로써 현존하는 조선사는 총 37권이다.
또한 수집된 자료에서 중요한 것을 선별하여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집)과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ꡕ(3권)을 출판하였는데 '조선사료총간'에 채택된 사료에는 임진왜란 관계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일제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사회의 참혹상과 정부의 무능, 부패를 왜곡, 강조함으로써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국의
역사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하여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유발케 하려는 의도였고 사료의 채방도 결국 이러한 자료의 수집에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사료집진'은 전권을 인쇄하기 곤란한 사료, 문서, 화상, 필적 등 225종을 부분 인쇄하여 해제를 붙여 출판한 것으로 인쇄 부분의 선정에 많은 취사선택이 가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편수회 참가자들은 1926년 1월 조선사학동고회(朝鮮史學同攷會)를 결성하고 '조선사학(朝鮮史學)'이라는 회지를 간행하였다.
조선사편수회 내에 위치한 조선사학동고회는 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연구기관이었으며 '조선사학'은 편수회의 기관지 역할도 하였다.
조선사학동고회는 '조선사학' 창간사에서 “(조선은) 지리상의 관계 때문에 다른 제국에 비해 사회혁명이 비교적 적어
문화의 양식은 고래로부터 커다란 변화를 겪지 않은 것이 많다. ……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사학 연구자에게 한없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 우리들이 조선사를 연구하는 것은 첫째는 국사(일본사)를 위함이오, 이미 국사의 일부가 된 조선사를 위함이다”라고6) 하였다.
이는 곧 편수회 참가자들이 일본사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사를 파악하고 한국사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공통적인 연구자세로 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편수회 소속의 학자들은 이외에도 수시로 사담회(史談會)를 개최하여 자체적인 강연과 토론을 실시하는 한편 사무 담당자의 회의를 통해 조선사 편수에 관한 토론과 공동연구도 하였다.
6) 「創刊之辭」, ꡔ朝鮮史學ꡕ 제1호, 1926년 1월 15일.
이는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를 촉진하고 '조선사' 편수에 따른 역사인식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사'가 한국사의 전 시기에 걸친 통사였으므로 종래 고대사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던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가 편수회 참가자에 의해 조선시대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편수회는 준 학술단체로서의 기능도 겸함으로써 일본인에 의한 한국사 연구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본인 중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의 편수회 직원으로 망라되어 있었고 이러한 연구자의 편중은 자연히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가 편수회 중심으로 진행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편수회를 통해 총독부는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를 관 주도의 연구체제로 흡수할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경성제대와 편수회의 임원들이 공동으로 청구학회(靑丘學會)를 조직하고 '청구학총'을 발간하였다.
이렇듯 1920년대 초까지 주로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수행하던 연구경향은 편수회와 경성제대의 설치를 기점으로 소규모 연구단체나 학회 중심체제로 전환되었다.
1938년 '조선사'의 간행이 끝나자 편수회는 그 기구를 일부 축소하고 '조선사' 편찬의 후속사업으로 갑오경장에서 경술국치에 이르는 기간의 자료수집에 착수하여 일제 패망 때까지 계속하였다.
더불어 '조선사'의 색인과 연표도 만들기 시작하여 1938년 10월에 '조선사권수총목록', 1940년에 '조선사총색인'을 각각 간행하였다.
또한 '통문관지(通文館志)',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를 '조선사료총간'의 21, 22집으로 속간하였다.
이 당시의 편수회는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이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인해 자료 수집과 같이 장기간을 요하는 사업보다 전쟁의 수행에 유익한 연구를 통한 소위 ‘연구보국(硏究報國)’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편수회는 연구논문집으로 '조선사편수회연구휘찬' 간행계획을 세우고 1944년에 제1집으로 '근대조선사연구', 제2집으로 '조선통치사논고'를 간행하였다.
또한 1945년에는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栄孝)의 주관하에 신석호, 타가와, 구로타(黑田省三), 소노다 요시로(園田庸次郞) 등이 각각 ‘일선관계사’, 조선국제정치사, 조선민족사상사, 조선동란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다 일제 패망으로 중지되었다.
편수회는 1946년 5 월 31일 해산되었다.
4. 이 책의 간행 경위 및 수록자료 개요
본 자료집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에서 수집한 '조선반도사' 원고를 중심으로 '반도사' 및 '조선사 편찬과정에 관한 사료들을 번역 수록한 것이다.
크게 반도사 편찬사업 관계자료와 조선사 편찬사업의 기구와 경과를 알려주는 자료로 구분할 수 있다.
반도사 편찬사업 관련자료는 다시 조선총독부의 '반도사' 편찬 의도를 살펴볼 수 있는 '조선반도사 편성의 요지 및 순서(朝鮮半島史編成ノ要旨及順序)'(1916년)와 실제 '반도사' 편찬과정의 작업요령과 원고 작성 시의 주의사항 등을 기록한 '반도사 편찬 관련 협의사항(半島史編纂ニ付打合事項)', 그리고 '반도사'의 목차 및 세부수록 사항을 수록한 '조선반도사요항(朝鮮半島史要項)'과 '조선반도사요항세목(朝鮮半島史要項細目)'으로 구성되었다.
이어 '반도사'의 원고 중 1, 2, 3편의 원고 전체와 5편(조선시대)의 원고 일부, 6편(조선최세근사)의 초고 일부를 수록하였다.
이상의 자료들은 거의 모두 2007년에서 2008년에 걸쳐 위원회에서 직접 원본을 발굴하여 사본 형태로 수집한 것들이다.
이들 중 '반도사 편찬 관련 협의사항'과 '조선반도사요항'·'조선반도사요항세목', '반도사' 1·2편의 원고는 2007년도에
미국 하와이대학교 헤밀튼도서관에서 수집하였다.
그리고 '반도사' 6편(조선최근세사)의 초고 중 일부로 추정되는 것은 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 한적실에서, '반도사' 1, 2, 3, 5편 원고는 진주 경상대학교 문천각(文泉閣)에서 각각 2008년도에 수집하였다.
특히 경상대 소장본은 위원회에서 이 책을 기획하여 원고 번역작업을 진행하던 중에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경상대학교 소장본과 하와이대학 소장본을 비교 분석하였다.
둘 다 당시에 나온 필사본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면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대학과 경상대학에서 어떤 경위로 '반도사' 원고를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같은 내용의 원고가 두 종류로 필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는 다른 하나를 수정 보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와이대학본과 경상대학본은 내용이나 전체 목차는 거의 유사하나 하와이대학본의 오류를 경상대학본에서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경상대학본이 더 나중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고 번역작업이 중반을 넘어선 단계라, 이 책에 수록된 번역문은 하와이대학본을 기본으로 하고 경상대학본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한 것이다.
내용 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국민대학교 소장본인 6편(조선최근세사) 초고는 하와이대학에서 수집하지 못한 3, 4, 5편 원고를 추적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반도사' 6편은 원고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원고는 다른 편들과는 달리 ‘조선반도사’라는 책명의 기재 없이 단지 표지에 '사료(史料)'라고만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목차가 '조선반도사요항'의 해당 부분 목차와 동일하여 반도사 원고의 일부임은 분명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6편 집필을 하기 위한 자료 수집과 초고작성 단계의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에 간행된『조선사'가 주로 ‘학술적이고 공명적확한 사서’라는 미명 아래 주로 사료 중심으로 편찬된 것에
비해 이들 '반도사' 원고는 통사 서술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일제가 추구했던 식민사학의 원형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매우 유용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제2부는 조선사 편찬사업의 기구와 경과를 알려주는 자료로 구성되었다.
주로 조선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와 기타 조선사편수회 관련자료들이다.
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미간행의 '조선사편수회사무보고서(朝鮮史編修會事務報告書)'와 총독부가 조선사 편찬을 마친 후 그 경위를 간행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
(1938년)의 내용에서 발췌 수록한 편수 조직관련 자료와 회의록이다. 둘째, 조선사편찬위원회 및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에 관한 언론보도내용이다. 편수 담당자의 의견 등을 수록한 일제 '매일신보' 기사와 일제 주도의 한국사
서술을 우려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사설 등이다.
셋째, '조선사' 편찬의 실무자였던 나카무라 히데타카의 회고기록이다.
'조선사' 자체는 방대한 양일 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하여 일반에 보급되었으므로 이 자료집에는 수록하지 않았다.
다음에서 각 수록자료의 개요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반도사 편찬사업 관계자료
① 조선총독부, '조선반도사편성의 요지 및 순서',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반도사'의 편찬을 시작하면서 그 취지를 밝히고 사료 수집과 편찬의 요령, 사무분담자 등을 규정한 문서이다.
이에 의하면 '반도사'의 편찬 취지는 “요컨대 본 사서 편찬의 목적은 일본과 조선인이 다른 새로운 것이든 옛것이든 군서잡사(群書雜史)의 현혹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과 조선 관계의 진상을 이해시켜 그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통치의 동화방침을 원만하고 신속하게 수행, 성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인이 “오늘의 밝은 세상이 오로지 병합의 은혜에서 연유한 것임을 망각”할 우려가 있으니 조선인의 동화를 목적으로 '반도사'를 편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편찬 의도는 관찬사서 편찬의 큰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이후 '조선사' 편찬에도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결국 일제의 사서편찬 의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료수집의 범위, 편찬방식, 편찬에 참여한 중추원 소속 찬의, 부찬의 등의 명단도 수록하였다.
② '반도사 편찬의 타합사항', 1920년 4월
반도사 편찬의 실무적인 협의과정을 기록한 문서이다. 각 편별 분량, 기년법, 연표, 계도, 연혁도, 부록, 색인의 작성요령 및 담당자들을 지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반도사는 본문 900쪽, 부록 100쪽, 총 1,000쪽 분량이며 상권 450쪽, 하권 550쪽의 2권으로 간행할 예
정이었다.
또 미우라 슈코(三浦周行)와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원고 작성 시의 주의사항과 의견서가 수록되었다.
고려시대사와 조선시대사 작성 시의 개별 사실의 명칭문제, 시대구분과 작성요령의 의견이다. 이마니시 류는 “고려의 조에서 기술했듯이 대륙의 역사를 벗어난 조선의 역사는 없다”고 지적하며 중국 명, 청조와의 관련하에 조선시대사를
구분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③ '조선반도사요항', '조선반도사요항세목'
반도사의 각 편별 목차를 수록한 것이다.
'조선반도사요항'은 각 편별 목차를 기, 장, 절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조선반도사요항세목'은 이보다 더 자세하게 구분하고 있다.
즉 기, 장, 절뿐 아니라 각 절에 포함되어야 하는 세부적인 역사사실까지 자세히 기재한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 이후 1910년 병탄 시까지의 4, 5, 6편의 세부적인 목차와 주요 수록내용이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원고가 탈고되지 않은 4편(고려시대)과 6편(조선최근사)의 주요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완성된 '반도사' 원고의 목차와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다.
일례로 요항의 2편 삼국 중 제1기 ‘삼국성립시대’가 실제 반도사 원고에는 1편에 포함되어 있다. 또 1편 제2기 ‘한영토시대’가 반도사 원고에는 5장 ‘부여민족의 남하’까지이나 요항의 목차에는 4장 ‘한종족의 제국(諸國)’에서 그치고 있다. 또한 그 하부 절 목차에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요항과 세목이 계획 단계의 목차이며 실제 반도사 원고 작성과정에서 수정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④ '조선반도사' 원고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의하면 반도사의 원고는 1, 2, 3, 5편은 탈고되었으나 4, 6 편의 경우 담당자의 사망, 전직 등으로 인해 완성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본 자료집에 수록된 1, 2, 3편, 즉 상고 삼한에서 통일 후의 신라시기까지는 탈고된 원고 전체이다.
반면 5편 조선시대는 제1기 융성시대(태조 원년~명종 말년)의 원고만이 수록되었다.
제2기 외난(外難)시대, 제3기 청복속시대의 원고도 작성되었을 것이나 현재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또 6편(조선최근세사)의 원고도 제1기 청세력감퇴시기의 제3 장 일본과 조선의 수교 중 제1절 왕비의 책립과 민씨 부분만 수록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6편의 경우 원고 자체가 완성되지 않았으나 최소한 앞의 제1장 이태왕의 즉위와 대원군의 천정(擅政), 제2장 대외관계의 자료수집과 초고는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사의 1, 2, 3편은 이마니시 류, 5편은 세노 마구마, 6편은 스기모토 쇼스케가 집필하였다.
1편 집필자인 이마니시 류는 1903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조선사를 전공하였고 만철(滿鐵) 역사조사실에 참가하던 중 1914년 동경제국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그는 총독부 주도의 고적조사사업에도 참획한 바 있었다.
5편 담당자인 세노는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만철역사조사실 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1916년 10월 중추원의 '조선인명휘고(朝鮮人名彙考)' 편찬의 촉탁으로 도한(渡韓)하였으며, 1918년 2월부터 '반도사'의 원고 작성에 참여하였다.
6편 집필자인 스기모토 쇼스케는 쿄토(京都)제대에서 서양사를 전공하였으며 사학보다 어학에 능한 자였다.
통사로 계획된 '반도사'는 최종적으로 정식 간행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조선총독부 주도의 역사연구 조직으로 1923년에 설립된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의 '조선사강좌(朝鮮史講座)'와 비견된다.
1924년에 간행된 '조선사강좌'는 ‘일반사강의’와 ‘분류사강의’로 구분되었는데 일반사강의는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1927년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로 개칭 간행되었다.
조선사대계는 상세사, 중세사, 근세사, 최근세사의 4시기로 시기구분하여 각각 오다 쇼고, 세노 마구마, 스기모토 쇼스케, 오하라 도시다케(大原利武)가 집필하였다.
총독부 주도의 통사라는 점에서 향후 본서에 수록된 '반도사'와 상호 비교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2) 조선사 편찬사업 관련자료
① '조선사편수회사무보고서'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면서 편찬위원회 당시의 사업진행 상황을 정무총감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별도로 작성된 위원회의사록, '조선사편찬관계서류철' 등 조선사편찬위원회 당시에 작성된 문서류에서 주요한 사항을 뽑아 보고용으로 작성한 것이므로 편찬위원회의 활동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 조선사편찬위원회 의사내규, 조선사편찬위원회 상황 등은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설치 경과를
간략히 기술하고 운영규정 등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사 편수회사무보고서에서 가장 주목할 자료는 5회에 걸친 조선사편찬위원회 회의록이다.
1923년 1월 1회 위원회부터 1924년 12월 5회 위원회까지의 회의록이 망라되어 '조선사' 편찬을 위한 준비과정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다.
또 조선사편수회로의 관제 개편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도 있다. 「조선사편수회 직원 임명 내신을 끝낸 자에 대한 조사」, 「조선사편수회 직원 채용 신청인원 및 봉급조사」, 「1925년도 조선사편찬비 예산 조사」 등의 자료가 그것이다.
②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1938년
1937년 '조선사' 35권을 완간한 후 그동안의 편찬경과를 홍보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자료이다.
중추원의 반도사 편찬계획에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조선사편수회가 조직되어 '조선사' 편찬을 완료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수록하였다.
따라서 '조선사' 편찬과정을 알려주는 가장 종합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선사편수회 설치 이후의 편찬 논의과정을 담은 조선사편수회 위원회 회의록을 수록하였다.
1925 년 10월 제1회 위원회부터 1935년 7월 제9회 위원회까지의 회의록이다.
3차 위원회부터 참가한 최남선이 고대사의 시기구분과 단군조선의 수록문제 등을 놓고 일본인 실무자인 구로이타,
이나바 등과 설전을 벌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단지 아쉬운 것은 편수의 실무적인 운영이 편수타합회(編修打合會)를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나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편수타합회의사록(編修打合會議事錄)'이 이 책에는 포함되지 않은 점이다.
③ 신문보도 기사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에 게재된 조선사 편찬관련 보도기사와 이와는 반대로 일제 주도의 역사 편찬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사설 등이다.
일제는 '조선사'가 공명적확한 역사서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매일신보를 통해 중추원서기관장의 담화 등을 발표하는 등 '조선사' 편찬의 의의를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반면 '동아일보'는 “한국은 동양화란(東洋禍亂)의 원천이 되어 있었는고로 동양의 평화, 인민의 복지 증진을 위하야 병합된 것이니, 이 병합의 목적을 진실하게 편찬할 생각이라”는 '조선사' 편찬의 실무책임자 이나바 이와키치의 말을 인용하면서 일제 주도의 역사편찬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조선사편찬계획에 대하야」,'동아일보', 1925년 6월 13일자). 더 나아가 「아사인수(我史人修)의 애(哀)」라는 사설을 통해 우리 역사를 남이 편찬하게 된 슬픔을 토로하고 이를 최후의 정신적 파산이라고까지 통탄하였다(「아사인수의 애-최후의 정신적 파산」, '동아일보', 1925년 10월 21~22일
사설). '조선일보' 역시 '조선사'에 단군이 수록되지 않는 점 등을 들어 공정한 사서 편찬을 촉구하고 있었다(「조선사문제」, '조선일보', 1926년 8월 8일).
④ 편수 실무자인 나카무라 히데타카의 기고문
1927년 이후 1937년 '조선사' 35권의 완간 시까지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으로 재직했던 나카무라 히데타카의 기고문이다.
「신간 조선사에 대해서(新刊 朝鮮史に就いて)」는'조선사'를 간행 중이던 1932년에 총독부의 기관 잡지인 '조선'에 기고한 글이다.
또 「조선사의 편수와 조선사료의 수집(朝鮮史の編修と朝鮮史料の蒐集)」은 '조선사' 실무작업의 총책임자였던 구로이타를 기념하기 위해 나카무라가 1953년에 기고한 글이다.
전자가 편수의 중간과정에서 점검 및 홍보의 차원에서 작성한 것이라면 후자는 '조선사' 편찬의 구체적인 실무과정을
회고한 글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사료수집의 구체적인 경위와 중요한 수집 자료를 비롯하여 '조선사' 편찬과정과 편찬 이후 편수회의 해체 시까지의 경과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볼 수 없는 편찬의 이면사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카무라는 조선사 편찬 당시 이나바 이와키치, 홍희와 더불어 세 명에 불과한 수사관 중의 한 명이었고 장기간 이 업무에 종사했다는 점에서 그의 회고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조선반도사'의 목차로 본 식민사학적 특징
'조선반도사요항'과 '조선반도사요항세목'을 통해 확인되는 '반도사'의 시기구분은 다음 <표 2>와 같다.
<표 2> '반도사'의 시기구분
제1편 상고 삼한(三韓)
제1기 원시시대
제2기 한(漢)영토시대
제2편 삼국(고구려·신라·백제)
제1기 삼국성립시대
제2기 삼국 및 가라(加羅)시대
(일본의 보증(保證)시대)
제3기 삼국정립시대
제3편 통일 후의 신라(당에의 복속시대)
제1기 신라융성시대
제2기 쇠퇴시대
제4편 고려
제1기 흥융시대
제2기 요번부(遼藩附)시대
제3기 무신전권시대
제4기 원(元)복속시대
제5편 조선
제1기 흥융시대
제2기 외란시대
제3기 청복속시대
제6편 조선 최근세사
제1기 청세력감퇴시대
제2기 독립시대
제3기 일본보호정치시대
앞의 표에서 보듯이 제1편은 ‘상고 삼한’으로 설정하였으나 단군조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여 이 시기를 원시시대로 구분하였다.
기자 조선조차 전설로 치부하여 이 시기는 중국인과 조선인이 혼재하여 거주하던 부락적 소국의 시기였고 고조선은
위씨 조선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반면 본격적인 역사시대를 ‘한영토시대’부터로 설정하여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와 그 영역, 문화까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제2편에서 ‘삼국 및 가라시대’라는 항목에는 ‘일본의 보증시대’라는 부제까지 붙임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키려 하였다.
작성된 '반도사' 원고의 제2편에는 ‘일본의 보증시대’라는 부제가 생략되었으나 실제 내용상으로는 이 시기를 일본의
보증에 의해 유지된 시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4편 고려시대 역시 제2기는 요번부시대, 제4기는 원복속시대로, 제5편 조선시대도 제2기 외난시대, 제3기 청복속시대로 시기구분하였다.
고려 성종에서 인종까지의 150년 간을 요번부시대로 구분하여 거란 및 여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려시대를 기술하고
있다.
제4기 원복속시대 역시 원나라 지배하의 고려 왕실의 변천과 일본정벌 등으로 그 내용을 채우고 있다.
조선시대의 제2기 ‘외란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임진왜란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이상과 정명(征明)의 의지’ 등을 세부 기술내용으로 하였고 ‘의병의
약탈’, ‘의병과 토적(土賊)’ 등의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병자호란 역시 일방적인 패퇴의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조선인의 주체적인 저항활동의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또 제3기 ‘청복속시대’는 온통 당쟁과 외척의 발호만으로 구성되어졌다.
결국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한국민의 내재적 발전역량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각 시기 마다 외세에 의한 지배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한민족은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사의 타율성(他律性)을 부각시키려는 집요한 의도가 한국사 전시기에 걸쳐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었다.
이렇듯 외세에 의한 복속의 역사는 제6편 조선최근세사에서 ‘일본 보호정치시대’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제4장 일한병합, 제5장 문명적 시설의 유입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조선반도사요항' 및 '조선반도사요항세목' 상의 목차와 실제 완성된 반도사 원고의 목차 중 하위 장, 절의 경우
차이가 나타나기도 하나, 각 왕조 내에서의 특징적인 시대구분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6. '조선반도사' 고대편의 식민사학적 특징
현재 '반도사'는 고대편만이 탈고된 형태로 남아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반도사'의 고대편인 1, 2, 3편을 중심으로 그 내용은 살펴볼 수밖에 없는데 그 서술이 소위 일선동조론과 한국사의 타율성을 입증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동족임을 주장하는 일선동조론과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한 일본의 한(韓) 종족 보호라는 시혜론(施惠論)이 강조되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전설로 치부하였으며 기자조선 시기는 부락적 소국 형태로 보았다.
또 위만조선은 중국에서 이주해온 한(漢) 민족이 세운 국가로 그 백성은 대부분 한 민족이라고 하였다. 개국신인(開國神人)인 단군의 전설은 본래 한민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민족 고유의 개국 전설은 신라와 가락국의 개국전설이 온전한 것이며 이는 일본민족의 개국전설과 흡사하다고 한다. 한민족과 일본민족은 태고에 같은 민족을 이루어 같은 지역에 거주하다가 대 이주의 결과 나뉘어 한민족과 일본민족의 구별이 생겼으나 종족이 달라지지는 않았다고 강변한다.
반면 부여와 고구려의 예맥족(濊貊族)은 모두 만주족이라고 하여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三韓) 만의 한종(韓種)과 구분하고 있다.
즉 고구려는 부여민족에서 파생된 국가이므로 조선민족의 역사 요소가 아니지만 지역적으로 조선민족의 역사와 관련을 맺고 있어서 이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의 역사를 반도의 역사로 국한하려는 의도로서, 이 때문에 제목도 '조선반도사'였다.
그런데 순수한 의미의 한(韓) 종족인 삼한과 여기서 발전한 백제, 신라, 가야의 경우 모두 일본의 보호 아래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고대사 1, 2, 3편 서술의 주요골자였다.
조선반도의 북반구에서 만주에 걸쳐 국가를 형성한 고구려가 남쪽에서 뜻을 얻지 못한 것은 일본이 삼국을 보호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시대에 일본의 보호가 없었고 강대한 일본이 없었다면 마한, 변한 종족뿐만 아니라 진한을 포함한 모든 한(韓) 종족은 북방 민족의 혼종(混種)인 막강한 고구려 민족에게 유린당해 지금의 조선민족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4세기의 삼한은 일본의 강력한 지원에 의해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구황후(神功皇后), 오우진천황(應神天皇)은 성무지인(聖武至仁)으로 남한의 풍요롭고 비옥한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아낌없이 백제 근초고왕에게 하사하여 마한을 통일하고 북방의 강적에 대응토록 하였고 이후 백제는 조공뿐 아니라
인질을 보내 일본의 속국(屬國)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진구황후 시기의 가야는 일본 보호 하의 자치지역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조세공물을 징수하여 일본의 미야케(宮家)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제 역시 일본의 미야케였다는 것이다.
특히 가야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일본 조정의 직할지가 있었고 각 직할지에는 일본 조정에서 파견된 미코토모치(宰)가 있어 인근 국가의 정치와 공물 징수를 감독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유력한 장군을 파견하여 이를 통감(統監)토록 하였는데 이러한 장군의 주재소를 일본부(日本府)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군은 가야의 각국에 수시로 주재하였는데 특히 일본과 교통이 편한 임나국에 있었으므로 임나일본부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신라 역시 일본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일본의 위세를 빌려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 병합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과 한(韓) 종족은 그 본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하므로 만약 이 시대에 신라인에게 종족의 관념이 있었다면 일본과 한(韓)이 규슈(九州)지방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조정하에 통일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1,600년 전에 조선 반도와 섬에 걸친 대제국을 형성하여 대륙에 문화국을 출현시켜 끊임없이 행복과
영예를 향유하였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한 종족은 대륙 국가의 일본에 대한 번병(藩屛)이 되어 일본을 배신하였고 그 결과 항상 대륙에 있는 국가들의 흥망이 있을 때마다 병화(兵火)를 겪었으며, 백성은 우마와 함께 살육, 약탈을 당했는데 이는 함께 해야 하는 자와 함께 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 화(禍)라는 것이다.
총독부의 '조선반도사편찬요지'에서 드러나듯이 반도사 편찬의 취지는 한민족과 일본민족이 동일한 종족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식민통치의 역사적 당위성을 구하는 데 있었다.
또한 한국인이 빈약에 빠지는 상황을 서술하여 ‘일한합방’에 의해 비로소 행복을 얻게 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간행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반도사'는 이러한 총독부의 편찬 취지를 충실히 수행한 어용 관찬의 식민사서였고
이에 참가한 학자들의 역사인식은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선사편수회를 거치면서 더욱 식민사관으로 강화되어갔다.
이런 점에서 '반도사'는 일제 관 주도 식민사학의 시초를 마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해제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나 일부 내용은 본 위원회의 취지와 다를 수 있음.
Ⅰ. 조선반도사 편찬사업 관계
1. 관련논의와 세부목차
1) 조선반도사 편성의 요지 및 순서(1916)
1. '조선반도사' 편성의 요지
백반(百般)의 제도를 쇄신하여 혼돈스러운 구태를 이혁(釐革)1)하고 여러 종류의 산업을 진흥시켜 빈약한 민중을 구제하는 것은 조선의 시정상(施政上) 당면한 급무라고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 경영에 힘을 쏟음과 동시에 교화, 풍기, 자선, 의료 등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민중들의 지능과 덕성을 계발함으로써 이들을 충량한 제국신민(帝國臣民)에 부끄럽지 않은 지위로 이끌 것을 기대한다.
이번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의 편찬을 실시하라고 한 것 또한 민심의 훈육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을 담당하는 취지 이외는 없다.
일반 식민지의 통치를 개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새로 편입한 인민을 교육하여 그 지식을 넓히는 것은 잘못하면 모국에 충량한 사상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이나 반항의 기풍을 조장하는 결과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이다.
지금 조선인들로 하여금 조선 고래(古來)의 역사를 읽고 조사하게 하는 것(繙閲)은 옛것을 그리워하는 자료를 제공하
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구미의 보통 식민지로서 조선을 재단하는 편견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국과 식민지는 지형적으로 다르고 인종 또한 근본적으로 상이하여 영구히 종속하지 못하고 도저히 동화 융합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따라서 모국은 식민지의 권리를 챙기기에 급급하여 그 행복을 꾀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식민지도 또한 모국에 대해 경조사나 화복(禍福)을 동일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정을 낳게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본제국과 조선과의 관계는 서구의 그것과는 달리 지역적으로 서로 이웃해있고 인종도 서로 동종(同種)이며 또한 그 제도도 양분할 수 없어, 혼연일체의 제국영토를 구성하여 서로 이해관계와 행복과 불행(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인을 방임하여 새로운 세계로의 진보가 늦어지는 것을 돌보지 않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바가 아니다.
하물며 그들을 무지와 몽매한 상태로 억제시키는 것은 오늘날의 시세(時世)로 보아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어디까지나 그들을 교화시켜 인문(人文)의 영역으로 나아가 서로 합동하여 힘을 합침으로써 제국의 앞날의 융성함을 꾀하는 것이 만세(萬世)의 좋은 계획이며, 한일병합의 큰 뜻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규칙·제도 등을 뜯어 고쳐 정리함.
이미 이들을 교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상 처음부터 그 귀와 눈을 덮어버리는 방책으로 나오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더욱 교화의 본래 취지를 선명하게 제시하여야 한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의 야만적 반미개의 민족과 달라 독서와 문장에 있어서 문명인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래의 사서(史書)가 많이 존재하고 또한 신서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자는 독립시대의 저술인지라 현대와의 관계가 부족하여 한갓 독립국의 지나간 꿈을 추상(追想)시켜 버리는
폐해가 있다.
후자는 근대 조선에 있어서 일청(日淸), 일러(日露)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말하거나 혹은 '한국통사(韓国痛史)'라 칭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이 일의 진상을 연구하지 않은 채 함부로 망설을 풀고 있다.
이러한 사적(史籍)의 인심을 유혹하는 해독이 진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절멸(絶滅)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고 노력을 많이 해도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악서를 널리
전파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옛 사서의 금지와 억압에 대신하여 공명하고 정확한 사서를 준비하는 것이 첩경이며 그 효과를 두드러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필요로 하는 주된 이유인 것이다.
만약 이 저서의 편찬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조선인은 병합과 관련이 없는 고사(古史) 혹은 병합을 저주하는 서적을 읽는 것에 그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세상이 바로 병합의 은혜에 연유한 것을 망각하고 오로지 옛날을 회상하며 오히려 개진의 기력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
이렇게 하여 어떻게 조선인 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랴.
'조선반도사'의 주안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족(同族)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것.
둘째, 상고(上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는 군웅의 흥망기복과 역대의 역성혁명에 의한 민중의 점진적 피폐와 빈약에 빠진 실황(實況)을 서술하고 지금시대에 이르러 성왕의 치세(聖世)의 혜택에 의해 비로소 인생의 행복을 완성하게 된 사실을 상세하게 기술할 것.
셋째, 편성(編成)은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을 기초로 할 것.
'조선반도사'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서술한 많은 서적 중 표준 근거를 이루고 동시에 일본 전체 역사의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반 학교의 역사 교과서로서는 따로 일본에서 사용하는 보통의 일본 역사를 가지고 이에 충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는 요컨대 본 사서 편찬의 목적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다른 새로운 것이든 옛것이든 군서잡사(群書雜史)의 현혹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본과 조선 관계의 진상을 이해시켜 그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통치의 동화방침을 원만하고 신속하게 수행, 성취하는 편리함을 꾀하는 것에 있다.
조선반도사의 편찬에 관여하는 자는 이상과 같은 취지를 명심하여 그 서술의 방침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2. '조선반도사' 편찬의 순서
1) 1916년 1월부터 1918년 12월에 이르는 3년 동안 앞에서 기술한 요지에 따라 간명 정확한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것.
2) 지면 수는 보통 활판본(活版本, 34자 14행)의 1천 페이지 내외로 할 것.
3) 편찬 형식은 연도에 따라 기술하는데 시작을 상고시대부터 하며 병합을 마지막으로 할 것.
4) 조사사항은 원시주민의 분포, 인종 및 민족, 건국 및 그에 관한 신화, 사실(史實)과 관련한 전설, 강역, 제도, 정치,
교육, 학문, 예술, 종교, 사조(思潮), 교통, 경제, 산업, 사회, 풍속, 전란(戰亂), 사변(事變) 그 외의 주요한 사실을 망라하여 상세하고 간략하며 편리함에 따를 것.
5) 기술(記述)상의 자료는 주로 조선, 중국, 일본의 사서, 지리서, 기록, 수필 등을 활용하고 고문서(古文書), 금석문,
유물, 유적 그 이외의 다른 참고자료를 대조하고 또한 구미(歐美)의 문서도 참고할 것.
6) 자료의 수집은 시기를 상고(원주민시대, 단군 및 기자), 삼한(마한, 진한, 변한 및 위만, 한사군 병립당시의 각국),
삼국(신라, 고구려, 백제), 신라(신라통일시대), 고려, 이씨조선 등 6기로 크게 나누고 나아가 삼국을 3기로, 신라를 2기로, 고려를 4기로, 이씨조선을 7기로 구분할 것.
7) 조사주임은 각각의 그 담임 부분에 속하는 자료를 수집하여 3개월마다 이를 서기관장(書記官長)에게 제출하고, 서기관장은 이를 편집주임에게 교부할 것.
8) 편집주임은 앞항 자료에 기초하여 각 1기의 기초(起草)를 끝내고 끝낼 때마다 이를 서기관장에게 제출한다.
서기관장은 이를 등사(謄寫)하여 심사위원에게 회부하여 의견을 수렴할 것.
9) 심사위원의 의견은 그 사항 사항마다 부전(附箋)으로 적어두고 그것을 표시할 것.
10) 앞항의 의견은 서기관장이 편집 주임 및 심사위원의 협의회에 부의하여 채택의 가부를 결정하고 마지막 안(案)을
작성할 것.
11) 마지막 성안(成案)은 의장 및 총독의 결의를 거쳐 확정할 것.
사무 분담
조사주임
찬의(贊議) 남규희(南奎熙)
동(同) 유정수(柳正秀)
동 이건춘(李建春)
동 정인흥(鄭寅興)
부찬의(副贊議) 어윤적(魚允迪)
동 조병건(趙秉健)
동 홍운표(洪運杓)
동 박제헌(朴齊瓛)
동 이도익(李度翼)
동 오재풍(吳在豊)
동 나수연(羅壽淵)
동 송지헌(宋之憲)
동 박희양(朴熙陽)
동 유흥세(柳興世)
동 이만규(李晩奎)
편집주임
서기관 오다 간지로(小田幹治郎)
촉탁 미우라 슈코(三浦周行)
동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
동 이마니시 류(今西龍)
동 1명 미정
심사위원
부의장 이완용(李完用)
고문 조중응(趙重應)
동 이용직(李容稙)
동 권중현(權重顯)
동 이하영(李夏榮)
동 이근택(李根澤)
동 임선준(任善準)
동 이재곤(李載崑)
동 이근상(李根湘)
동 민영기(閔泳綺)
동 한창수(韓昌洙)
동 장석주(張錫周)
<출전 : '朝鮮半島史編成ノ要旨及順序', 朝鮮總督府, 1916년>
2) 조선사 편찬의 방침(1917, 기사)
조선사편찬의 방침
-구로이타(黒板) 박사가 말하다
만주방면으로부터 23일 평양에 온 총독부 촉탁 문학박사 구로이타(黒板勝美) 씨를 도청 2부장실로 가 방문했더니, 마침 도미나가(富永) 2부장과 회담 중이던 박사는 부장과 기자에게 번갈아가면서 응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직 하등의 조사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만주는 오랫동안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들어오는 길에
바로 도정(道程)을 만주로 잡았던 것이다. 이제부터 경성으로 가서 1주일 정도 체류하면서 이런저런 회합을 하고, 다시 남선(南鮮)으로 가서 경남 구포에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신라시대의 유적을 조사할 터이다.
ꋼ 조선사 편찬은 지금 총독부에서 다니이(谷井) 문학박사가 맡고 있는데, 그 방침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삼한시대부터 서술하고, 기자(箕子)나 단군(檀君)시대는 일종의 전설로서 별론(別論)에서 다룰 작정이다.
ꋼ 1~2년 안에 성취하여야 하기 때문에 충분히 완전을 기할 수는 없지만, 재료는 비교적 많이 수집할 수 있기 때문에
이후의 조선 연구는 사정이 매우 좋아질 것이다.
ꋼ 단군, 기자는 하나의 전설이지만, 그 전설에서는 일종의 힘을 느끼게 된다.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데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결국 믿을 수 있다고 본다.
ꋼ 기자설은 같은 전설이라 하더라도 훨씬 후대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정치 상황으로부터 상상할 때,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사대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도 있고, 아울러 순수한 전설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도 있다.
ꋼ 대동강 부근의 사적은 작년 이맘때 조사했는데, 대체로 한족(漢族)의 반도 이입은 이 부근에서부터 이루어진 듯하다.
ꋼ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만 아직 확정적이고 통일적인 논거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다.
<출전 : 朝鮮史編纂の方針, 黒板博士を語る, '朝鮮新聞', 1917년 8월 28일>
3) 조선반도사 편찬 개황(1938)
(상략)
제2장.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의 편찬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은 비록 옛날부터 이합친소(離合親疏)의 변천을 거듭해 왔지만, 역사상 언제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마침내 일한병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아직까지 고금(古今)에 걸쳐 정확하고 간명하게 기록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공정한 사료에 근거한,
관민 일반에게 참고가 될 만한 조선반도사를 편찬할 필요성이 인정되어 1915년 7월 중추원에서 편찬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조선에서의 역사편찬사업의 제일보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16년 1월 중추원 찬의 유정수(柳正秀) 이하
15명의 찬의와 부찬의에게 편사사무를 전담시키고, 3월에는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学) 교수 미우라(三浦周行),
동 대학 강사 이마니시 류(今西竜) 및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조교수 구로이타 가츠미(黒板勝美) 3인을 촉탁으로 삼고 동년 7월에 다음과 같이 편찬의 요지를 확정하고 당국의 취지를 밝혔다.
조선반도사 편찬 요지
백반(百般)의 제도를 쇄신(刷新)하여 혼란스러운 구태(旧態)를 개혁하고 각종의 산업을 진흥하여 빈약한 민중을 구제하는 일은 조선의 시정상 당면한 급무이긴 하지만, 이들 물질적인 경영에 노력함과 동시에 교화·풍기·자선·의료 등에 관해 적절한 조치를 집행하며, 조선 백성의 지능과 덕성을 계발함으로써 이들을 충량한 제국신민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번에 중추원에 명하여 조선반도사를 편찬하게 한 것 또한 민심훈육(民心薫育)을 위한 목적을 달성코자 하는 데 그
취지가 있다 할 것이다.
무릇 식민지의 통치를 개론(概論)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식민지 인민을 교육하고 그들의 식견을 향상시켜 주는 일은 모국에 대한 그들의 충성된 사상을 함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반항(不平反抗)의 기풍을 조장하는 결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상례라고 한다.
지금 그들이 조선 고래(古来)의 역사를 읽는 데 편의를 제공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를 이러한 사업은 자칫하면 그로 인하여 그 구태를 회상하고 그 일에 연연케 할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과거에 구미의 여러 식민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례를 들어 조선의 경우를 논하려는 편견일 뿐이다.
저들의 경우, 모국과 식민지와는 지세(地勢)가 아주 상이하고 인종 또한 근본적으로 상이하며 도저히 동화, 융합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국은 식민지의 이익을 거둬들이는 일에만 급급하고 그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일에는 등한한 것이다.
식민지 또한 모국에 대해 경조화복(慶弔禍福)을 함께하려는 정의(情誼)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임은 자연의 형세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제국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강역이 인접하여 있고 인종이 서로 같고 그 제도 또한 쌍방이 비슷하여, 혼연(渾然)한 일대 영토를 구성하고 상호간에 이해휴척(利害休戚)을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을 방치하여 그들이 일진월보(日進月歩)의 대열에서 낙오케 됨을 돌보지 않는 일은 처음부터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려는 바가 못 되는 것이다.
하물며 그들을 무지몽매한 지경에 묶어 놓으려 함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전연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
오히려 끝까지 그들을 교화하여 인문(人文)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고 일치합동의 단합된 힘으로 제국일본의 앞날의
융성을 도모케 함은 만세(万世)의 양책(良策)으로서, 병합의 큰 뜻이 실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조선의 인민을 교화함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以上)은 처음부터 그들의 이목을 가리는 계책으로 나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교화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밝혀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의 야만미개한 민족과 달라서, 독서와 문장(文章)에 있어 조금도 문명인에 뒤떨어질 바 없는 민족이다.
고래로 사서(史書)가 많고, 또 새로이 저작(著作)에 착수된 것도 적지 않다.
그리하여 전자는 독립시대(獨立時代: 합방이전)의 저술로서 현대와의 관계를 결여하고 있어 헛되이 독립국 시절의 옛 꿈에 연연케 하는 폐단이 있다.
후자는 근대조선에 있어서의 일러(日露)·일청(日清) 간의 세력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나아갈 바를 설파(説破)하고,
혹은 ‘한국통사(韓國痛史)’라고 일컫는, 한 재외(在外) 조선인의 저서 같은 것의 진상을 규명하지는 않고 함부로 망설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史籍)들이 인심을 현혹시키는 해독, 또한 참으로 큰 것임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절멸(絶滅)시킬 방책만을 강구한다는 것은 헛수고에 그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혹은 그 전파를 장려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구사(旧史)의 금압 대신 공명적확(公明的確)한 사서로써 대처하는 것이 첩경이고, 또한 효과가 더욱 클 것이다. 이 점을 조선반도사 편찬의 주된 이유로 삼으려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서적의 편찬이 없다면 조선인은 무심코 병합과 관련 없는 고사(古史), 또는 병합을 저주하는 서적만을 읽는 일에 그칠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세월이 흐르다 보면 눈앞에 다가 오는 당면사에만 익숙해져 오늘의 밝은 세상이 오로지 병합의 은혜에서 연유한 것임을 망각하고 부질없이 구태만을 회상하여 도리어 진보에의 기력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조선인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취지에서 반도사의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 요지는 이후의 편사사업(編史事業)의 근본 신이 되는 것으로서 특히 주의를 요한다.
이러한 의도하에 1917년에는 오로지 사료의 수집에만 전력하고, 1918년 1월에는 사업의 경과에 발맞추어 특별히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함으로써 반도사의 편찬에 한층 더 권위를 부여하여 사업을 담당케 하였다. 반도사 편찬에 있어서는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편찬의 골자가 될 장(章)·절·(節)의 세목(細目)을 작성하고 그 다음에 원고 성에 착수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여, 각 분야의 담당자에게 각각 사료를 연찬토의(研鑽討議)하게 한 결과 전편(全篇)을 상고삼한·삼국·통일 후의 신라·고려·조선·조선최근세사의 6편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장·절로 나누어 각 절마다 세목을 붙여 초고를 작성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1918년 말에 이르기까지 주로 자료수집에만 노력했는데, 새로 발견된 것이 예상외로 많아 예정된 편찬계획대로 일을 진척시킬 수 없기 때문에 연한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고삼한·삼국·통일 후의 신라와 조선, 이상의 4편에 대해서는 일단 탈고했지만, 고려·조선최근세사, 이상의 2편은 탈고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 사이 직원의 전출·사망 등이 있었고, 그 후임을 쉽게 구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1922年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반도사 편찬사업은 일단 중지하는 것으로 되었다.
<출전 :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 朝鮮總督府 朝鮮史編修會, 1938년, 4~7쪽>
4) 반도사 편찬 관련 협의사항(1920)
1920년 4월
반도사 편찬과 관련한 협의 사항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의 할당 쪽수
- 서론(緖論): 상고(上古) 삼한(三韓) 70
- 삼국(三國)·신라통일(新羅統一) 180
- 왕씨고려(王氏高麗) 250
- 이씨조선(李氏朝鮮) 400
(최근세 100 이내)
- 부록(계도(系圖) 연대(年代) 색인(索引) 등) 100
합계 1,000
위와 같이 저술하면 30자 원고 14행 오두(鼇頭)를 포함해, 2권 중 상권 약 450쪽, 하권약 550쪽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반도사에 사용된 기년법(紀年法)
1. 각 시기마다 무슨 왕 몇 년으로 기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일본연호나 중국 연호를 주기한다.
건양(建陽) 원년(元年) 이후는 조선의 연호를 기본으로 하고 일본 연호를 주기하거나, 필요에 따라 중국 연호, 서기 몇 년으로 주기한다.
단, 황기(皇紀) 및 서기(西紀) 몇 년으로 기록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예에 따른다.
황기 2508년
서기 1830년
2. 각 시기 각 왕의 기년은 신라 멸망 이전의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 연표를 따르고, 고려시대는 고려사 연표를 따르며, 이조시대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따른다.
조선반도사 관련 연표·계도·연혁도(沿革圖) 등
1. 정확한 연표 제작 방침 및 담당자
2. 각 왕조 계보의 제작(왕휘(王諱)·혈족 관계·부모·재위 연수·사망한 해년(薨年)·능침(陵寢, 명칭·소재지)·복벽(復辟))
조선인 촉탁 중에서 선정하여 담당하게 한다.
3. 각 왕조 계도의 제작 방침 및 담당자 제2항의 계보를 완성한 다음 각 시대 담당자가 제작한다.
4. 각 시대 연혁도의 제작 방침 및 담당자 부(附) 유명한 진군로(進軍路) 및 교통로 등 각 시대 담당자에게 제작하게 한다.
5. 삽입할 도화(圖畵)의 선택 방침 및 담당자 위와 같다.
6. 조선반도사를 위한 가나(假名) 사용법(「인명휘고(人名彙考)」도 이에 따른다) 별책(別冊)대로 한다.
조선반도사 부록 및 색인
1. 부록으로 첨부해야 하는 여러 가지 표
ㄱ. 중대사 연표(일본·조선·중국·서양을 대조)
ㄴ. 각 왕조의 계도(조선인 촉탁 담당)
ㄷ. 역대 조정의 직관표(職官表)(조선인 촉탁 담당)
ㄹ. 행정구획 연혁표(각 시대)
2. 색인
ㄱ. 지명
ㄴ. 인명
ㄷ. 역사적 명사(名辭)
미우라(三浦) 촉탁의 주의 사항
- 이조 시대의 명칭은 어떠한가.
(이마니시(今西) 씨와 협의하여 굳이 고칠 필요가 있는지 총독부의 다른 예 등을 참조할 것)
- 임진란·정유란·왜인(倭人)·왜구(倭寇) 등의 명칭은 어떠한가.
(임진란은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정유란은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왜인· 왜구 등의 명칭은 피해야 한다.
왜구는 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단, 중국·조선과 관련해서는 왜구라는 명칭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
- 시대 구분을 할 때 주된 사실에 주안점을 두지 않고 역대 왕의 치세에 지나치게 계속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무슨 왕의 업적 등을 한 절로 구성하는 것은 어떠한가.
(시대 구분은 ‘초신래(稍臣來)’의 경우와 같은 형식에 빠지는 경향이 있어 바람직하지 않으니, 이마니시 씨의 별지 의견서에 따라 협의를 거친 다음 약간 정정을 하여 별지에 실린 대로 정한다. 또한 왕의 업적을 한 절로 구성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어쩔 수 없다).
- 풍속·외교·숭불 기사 등 문화사와 관련한 내용은 각 시기를 정리하여 별장(別章)으로 구성하는 문제.
(대체로 원안대로 하도록 한다).
- 고려사(高麗史)의 제1장은 전 시대에 들어가야 할 기사가 많아 제4절을 주된 내용으로 할 것(이와 같다).
- 이조사(李朝史)의 제2장은 이씨(李氏)의 선조부터 기술해야 한다.
(3) 압록(鴨綠)의 4군(四軍) 중에는 고려사에 들어가야 할 부분이 많다.(적당하게 정리할 것).
- 당쟁과 관련한 삼간(三奸)·삼흉(三兇) 등의 명칭을 생략할 것.(정리할 것).
고려사(高麗史)의 요강(要綱)에 대해서
(이마니시 촉탁 의견서)
1. 시대별
고려사의 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 제1기 : 태조왕(太祖王)부터 의종왕(毅宗王)까지
이 시기는 왕실이 융성하여 문물을 일으킨 특별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다시 전후 두 시기로 나눈다.
전기 : 태조왕 때부터 성종왕(成宗王) 말년까지.
이 시기는 중국 송(宋) 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으며(대개 이렇게 말한다. 태조·혜종(惠宗) 시대는 중국의 ‘오대(五代)’ 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송나라의 문물을 수입하여, 신라왕조 시대에 수입된 당(唐)나라의 문물과 함께 조선 반도에 당송 문화를 형성한 시대이다.
후기 : 성종왕 말년부터 의종왕 대에 이르기까지.
북방에 요(遼)·금(金)나라가 발흥하여 고려는 이들을 복속시켰으며 당송 문화를 반항적인 □□□□을 유지한 시대이다.
제1기의 전후 두 시기에 일본과는 평화적으로 왕래를 해왔다. 그러나 이는 드문 경우였다.
○ 제2기 : 명종왕(明宗王)부터 고종왕(高宗王)까지.
무신전권시대(武臣專權時代)로, ‘영공(令公)’이 출현하여 일본의 무가(武家)와 비슷한것이 생겨났다.
○ 제3기 : 원종왕(元宗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몽고복속시대(蒙古服屬時代)로, 원(元)나라의 보호에 따라 고려 왕실은 멸망을 피할수 있었으며, 백성 또한 원나라의 보호 및 감시 아래 이전 시대보다 양정(良政)을 누릴수 있었다.
문화 측면에서 원조(元朝) 지배하에 있는 중국인의 문화 즉 후송(後宋)에서 전해진 존왕양이적(尊王攘夷的) 요소가 고려에 들어와 이조사상(李朝思想)의 근저 및 문화의 기초를 이루었다.
○ 제4기 : 고려쇠망시대. 우왕(禑王) 이후를 말한다.
고려 왕실은 벗어나서는 안 되는 원 나라에서 벗어나서 멸망의 길만이 남았다.
제2기, 제3기, 제4기의 일본과의 관계는 침략적이었다.
조선의 역사 연대는 대륙 방면에서 떠나 독립적으로 전개되기 어려웠다는 점을 주의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려사 사실과 관련한 주의 사항
제1장에서
신라의 지방 제도는 당제(唐制)를 도입한 듯한데, 당제 그대로는 아니었다.
이조처럼 잘 정비된 중앙집권제는 아니었다.
고려조(高麗朝)도 초기에는 외관(外官)에 해당하는 조직이 없어서 고려가 발현한 개성(開城)은 지금의 개성 서쪽에 있던 ‘토성(土城)’ 및 ‘영안성(永安城)’이라는 점에 주의하고, 상업지 및 교통 항으로서의 예성강(禮成江)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고려의 개국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관계에 대해서는 1916년의 유적유물 조사 보고서에 기술해 두었으므로 다시 기술하지 않는다.
견훤(甄萱)의 두 글자를 분리하지 말 것. 견(甄)이라는 성(姓)은 중국에 있는 성이지만 견훤의 두 글자를 성과 이름으로 보는 것은 다소 의문이 있다.
이 인물이 일본과 교통했는지의 여부, 일본에 대한 태도에 주의를 해야 한다.
훈요 10조(訓要十條)는 위작(僞作)이다('동양학보(東洋學報)' 권1에 실린 ‘신라승(新羅僧) 도선(道詵)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졸고(拙稿)를 참고하기 바람).
고려의 국호를 기록할 때에는 국가 계승 사상에 주의해야 한다.
왕건(王建)의 두 글자를 분리하도록 한다.
신라 삼보(三寶) 문답은 사실이 아니며 또한 무용(無用)한 것이다.
발해인의 왕래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발해 문화의 성질에 주의하고, 고려 문화에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 고찰해야 한다.
'정계(政誡)', '계백료서전(誡百寮書傳)' 등과 훈요 10조는 위작이다.
태조의 치국(治國) 방침은 포착하기 쉽지 않다. 훈요로 해석한다면 커다란 오류이다.
고려의 정치는 매우 간단하였으며 법령이 있어 실행한 것은 아니다. 송나라 서긍(徐兢)의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기사를 참고해야 한다.
이모매(異母妹)를 왕후로 맞이하는 것은 외척의 권력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라 이후 지속되던 풍습이다.
제2장에서
김치양(金致陽)과 태후(太后)의 관계는 당시의 풍속에 비추어 볼 때, 윤리상 큰 범죄가 아니었다.
강조(康兆)의 거동은 오늘날 전해지는 기사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러한 시역(弑逆)의 대죄를 패배자인 강조에게 모두 전가하는 감이 든다.
거란의 침략에 대해서는 주의를 해야 한다. 침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죄(問罪)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3장에서
순종(順宗)부터 고종(高宗) 6년까지를 권신전권시대(權臣專權時代)라고 할 수 없다.
이자겸(李資謙)에게는 계승되었지만 계속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권신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영공(令公)의 멸망은 사실 원종(元宗) 11년에 있었다.
권신전권시대가 고종 6년에 끝났다고 하면 고려가 강화도에서 나와 조선 반도가 몽고군에게 많은 고통을 받은 일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적어도 고종 말년까지를 권신전권시대에 넣어야 한다.
영가(盈歌)의 조상을 고려인으로 보는 것은 고려의 속설로, '금사(金史)'는 고려의 자료에 따라 기술한 것 같다.
여진족의 침략에 대해서, 그리고 도이(刀伊)의 침략에 대해서 주의하여 기술해야 한다.
무신(武臣)이 문신(文臣)을 학살한 일은 충돌이 아니라 폭발이었다.
금산(金山)·금시(金始)는 내구(來寇)가 아니라 민족의 이주로 기술해야 한다.
제4장에서
원 억압 시대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원의 전횡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는다.
원종(元宗)·공민왕(恭愍王)의 치세 동안 고려는 원의 한 번왕국(藩王國)이었으며, 고려왕실은 원 제실(帝室)의 한 종실(宗室)이었다.
원의 양정(良政)에 주의해야 한다.
최씨 정권 멸망도 이를 대신하는 영공(令公)이 있었음에 주의해야 한다. 고려가 원 나라를 위해 일본에 출병하였는데도 비교적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원 나라의 감시가 있어 어느 정도 양정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5장에서
대륙 방면에서 민족의 이주가 있었다는 점에 주의하여, 홍두군(紅頭軍)2)이 들어온 것을 설명한다.3)
전정(田政)의 문란은 멸망의 한 원인이었다. 우왕과 창왕(昌王)을 신씨(辛氏)로 보는것은 이조의 사관(史官)뿐이다.
재야의 사가(史家)는 이들을 왕씨(王氏)로 인정하고 있다.
신흠(申欽)·안정복(安鼎福) 등 그 밖의 의견을 살펴보니 이조 시대의 사가들에 이러한 의견이 있다.
오늘날 두 왕을 신씨로 보는 것은 고려사를 맹종하는 것이다.
우왕과 창왕, 두 왕에게서 신(辛)이라는 성(姓)을 삭제해야 한다.
원 나라의 멸망이 고려 왕실을 멸망시켰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고려 말기의 고려사는 곡필(曲筆)이 거듭 이어졌다.
왜구라는 용어를 사용할지 여부는 심의를 필요로 한다. 왜구에 대해서는 조선에서 과장하여 전한 것이다.4)
2) 홍건적.
3) 침략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들어온다(入)’라고 표현하였다.
4) 같은 쪽, 상단에 ‘이조시대(李朝時代)라는 명칭에 대한 조사’라고 쓰여 있음.
이씨조선의 시대 구분에 대해서 고려의 조(條)에서 기술하였듯이,
대륙의 역사를 벗어난 조선의 역사는 없다.
따라서 이조사(李朝史)의 시대 구분도 대부분 대륙의 시대 구분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전기(前期)는 명조 시대(明朝時代), 후기(後期)는 청조 시대(淸朝時代)가 된다.
청조의 세력이 실추하여 조선이 쇠망 시대를 맞이하였으며, 또한 명(明)·청(淸) 남북의 두 세력이 조선 반도에서 성쇠해 가면서 외국의 침략이 있던 시대이다.
이조 왕실의 정통 왕실이라는 명의(名義)는 중화정통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번왕(藩王)이라는 점에 있다.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이러한 의의가 소멸되려 하자 존왕양이를 국시(國是)로 삼으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존왕양이 정신은 강희(康熙)·건륭(乾隆) 시대의 광휘(光輝)로 소멸하였다.
타락하여 사대(事大)만 남았을 뿐이다.
왕실은 그 창설 의의를 잃고 멸망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조사는 모든 점을 통해 살펴볼 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제1기 : 태조부터 선조(宣祖) 중엽까지
제1기를 전후 두 시기로 나눈다.
전기 : 태조부터 성종(成宗). 융성하던 시대이다.
후기 : 연산군 때부터 명종(明宗)까지. 화옥(禍獄) 시대이다.
제1기는 종주국인 명나라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어 조선은 이에 복속하던 시대이며, 후기에 이르러 명나라 황제의 세력이 쇠퇴하자 조선 왕실을 보호할 힘을 잃어갔다.
왕실의 나약함은 신하에 대해 시기(猜忌)를 일으켜 화옥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왜구는 왕실이 강력한 시대에는 크게 번졌으나, 이후 왜구는 명나라 쪽으로 향하였으므로, 조선 쪽은 다소 안정을 찾았으며, 일본의 제후(諸侯)들과 평화적으로 교통을 할 수 있었다.
○ 제2기 : 선조 중엽부터 인조(仁祖) 때까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일본군이 조선 반도로 들어왔다. 이어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상 만주군(滿洲軍)이 조선 반도로 들어왔다. 조선은 만주에 복속되기에 이르렀다.
○ 제3기 : 인조 말년부터 철종(哲宗) 때까지
이 시기는 전후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존왕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결속을 하였으나 조선 왕실은 의지할 만한
종주국이 없었다.
왕실은 약화되어 자연히 당쟁(黨爭)이 발생하였다.
이왕가(李王家)가 권신(權臣)을 낳지 않고 찬탈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쟁 덕분이었다.
이러한 왕실이 존재하는 이상 당쟁의 참화는 면할 수 없다.
존왕양이 사상은 정조(正祖) 이후부터 쇠락하였고 청조(淸朝)를 숭상하여 사대의 의의는 순조(純祖) 이후부터 변화하였다.
영조(英祖)·정조의 부흥시대는 강희·건륭의 영광이 미친 일종의 부자연스러운 부흥이었으며, 이어서 피폐하고 어려운
시대를 맞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4기5)
이조사 사실과 관련한 주의 사항
제2장에서 창업시대(創業時代)라는 장을 설정한다면, 태조부터 태종까지는 반드시 그 안에 넣어야 한다.
태조의 겸퇴(謙退) 또는 문학에 능통하였다는 등의 문구는 사관(史官)이 사용하는 문구로 채택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원명(元明) 이당(二黨)에 대해서는 역설할 필요가 있어 당시 유학자의 사상을 주의해야 한다.
고려조의 기사와 중복을 피해야 한다.
우왕과 창왕, 두 왕은 신씨로 보아서는 안 된다. 두 왕을 살해한 일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해였다.
부조현(不朝峴, 신왕조인 조선이 건국된 뒤, 고려의 유신들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며 조선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데서 이름이 유래)·두문동(杜門洞, 조선 조정에서 과거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개성에 있던 고려 유신들이 대문을 걸어 닫고 두문불출한 데서 유래)에 대한 일이 사실이 아님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의 책봉은 이씨에게 중대한 의의가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일본과 관련한 조(條)에 유항(誘降) 또는 귀순책 등의 용어는 총독부의 편찬서로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명분(名分)과 관련된 것은 철저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무학(無學)의 연대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제3장에서
수성시대(守成時代)의 장(章)을 설정한다면, 세종(世宗) 때부터 성종(成宗) 때까지를 장 안에 넣어야 한다.
교초(交鈔) 발행과 조선통보(朝鮮通寶) 주출(鑄出)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5) 같은 쪽 상단에 ‘순조·철종의 외척관계는 제4기 앞에서 서술할 예정’이라 쓰여 있음.
제4장에서
왕위를 찬탈한 중종(中宗)은 왕위를 찬탈당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이것은 화옥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팔현(八賢)·삼간(三奸)·삼흉(三兇) 등의 명칭은 유생(儒生)들이 제멋대로 붙인 것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팔현이라고 운운했다든지 삼흉이라고 운운했다는 기사는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다.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참괵(斬馘)을 바쳤다 등 조선인이 사용하는 어법(語法)을 피해야 한다.
제6장에서
종계변무(宗系弁誣)는 왜 이조의 대사건이 되었는지 주의하여 밝혀야 한다.
두 능묘 발굴은 조선인이 하였다는 설은 그 당시부터 있었던 듯하다.
이 일을 회피해 기술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조선이 명나라 군에게 고통을 받은 점, 의병에 도적들이 많았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한다.
제7장에서
만주에 대해서는 나이토(內藤)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광해군(光海君)에 대해서는 동정의 여지가 많다.
외난시대(外難時代)와 당쟁시대에는 중복되는 시대가 있다.
시대를 두 시대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광해군의 즉위는 ‘명(明)’나라 입장에서 승인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음에 주의를 해야 한다.
제10장에서
‘고증학(考證學)의 부진(不振)’은 ‘고증학의 발흥’의 오류이다.
천주교 신자로 보이는 자들 중에는 비주자학자, 기타 등등이 있었다.
<출전 : '半島史編纂ニ付打合事項', 1920년 4월, 미국 하와이대학 헤밀튼도서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