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王家衛) 외 1편
전인식
장르와 상관없이 모두가 멜로드라마
칼싸움도 사랑이 되지
사랑이지만 사랑 아니게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상당히 시(詩)적이라는 말
은근 고수? 사실일 거야
펜 말고 카메라로 시를 쓸 수 있지
참 디카시도 있지 않니
그래 영화 아니었다면 시인이 되었겠지
근데 왜 이야기는 늘 1962년부터 시작하지
58년 개띠 형인데 왜
뭐 때문에?
낡고 갑갑한 아파트 통로
여차하면 가슴 맞닿을 좁은 공간
그만큼 삶의 밀착일 수도 있겠네
색감이 곧 오감(五感)이라 했던가
장만옥이 입었던 치파오 색상은 무슨 색이었더라?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은 언제나 포커페이스
섣부른 표정은 짓질 않지
설명이 되니까
말로 하는 이별은 진부하지
눈물은 따분하기만 하지
그냥 손짓 하나면 돼
에라 그냥 음악이나 듣자
아님 맘보춤이라도 출까
California Dreamin'
Quizas, Quizas, Quizas
maria elena
Take My Breath Away
왠지 판돌이 출신 같다 나처럼
노랠 잘 섞어 버무릴 줄 안다 맛깔스럽게
삶도 마찬가지일 테지
등장하는 사람들은 여럿이어도
모두 한 사람
사람은 고독해지면 똑같아지니까
떠난 것들, 없는 것들, 잃어버린 것들
등을 돌린 것들에게 말을 참 잘 걸지
가끔 먼저 등을 돌릴 때도 있지만
짹각 짹각
시침이 돌아가는 짧은 1분은
발 없는 새가 허공을 나는 영원의 시간
뭐 뭐 뭐라고요?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라 네 마음이라고요?
아니 영화에 왠 육조단경을!
그 말
- 최승자 시인
오늘은 만날 수 있을까
장날 모퉁이에서 소주 마시는 그녀를 보았다는
바람에 떠도는 말 듣고 난 뒤
심심하면 안강장에 간다
딱히 살 것 없어도 사람들 흥정하는 소리만 듣고 와도
반 본전은 하는 곳
‘니네들은 시 같은 거 쓰지 마’
강남구 논현동 한국문학학교 수업 시간
시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시 가르치러 온 그녀의 첫마디
아직도 귓속 맴돌며 나를 다스리고 있는데
그 말, 함부로 쓰지 말라는
그 말, 대충 쓰지 말라는
그 말, 피 끓는 치열함 없이 쓰지 말라는
그 말, 다시 듣고 싶어 찾아가는
4일, 9일 안강 장날
그녀는 오늘도 없다
‘니네들은 시 같은 거 쓰지 마’
그 말, 허공에 흩어지는
그 말, 바람과 새들만 알아듣는
그 말, 낱낱이 시가 되는
그 말
전인식
1997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8년 불교문예 신인상.
시집 모란꽃 무늬 이불속, 검은 해를 보았네 외.
제5회 불교문예 작가상, 제11회 한국꽃문학상 대상, 제1회 통일문학 상 대상 외. 현, 계간 불교문예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