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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과 장터 전도 17:16~21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아레오바고 설교 17:22~34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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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이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해 회당과 장터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변론합니다. 아레오바고 가운데 선 바울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전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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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과 장터 전도 17:16~21
복음 전도자는 복음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대상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덴은 종교성이 강한 도시여서 사람들이 많은 신을 섬겼습니다. 그곳에 우상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자, 바울은 깊은 분노를 느낍니다. 그는 회당 같은 장소에서는 강의로, 장터(광장) 같은 장소에서는 토론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더욱이 그는 당대 지성인들인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과 쟁론합니다.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공식 석상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자세히 들으려 한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큰 호기심을 가졌고, 바울은 이를 복음 전할 기회로 삼습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덴에서 바울이 격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의분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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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 설교 17:22~34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이방인에게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변증한 모범적 설교로 봅니다.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23절)조차 경배합니다. 이러한 종교심은 신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인류의 창조주요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모든 족속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란 하나님이 각 민족에게 품고 계시는 계획과 의도를 뜻합니다(26절). 바울은 ‘정하신 사람’(31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미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 알지 못하던 때에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지만, 이제는 그들이 회개하고 종교심을 바르게 사용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신이시기 때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까지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범사에 종교심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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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하나’의 지식
남편들 중에는 정치·경제·사회 등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다 섭렵해 놓고도 같이 사는 가족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 개의 지식도 필요하지만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하나의 지식입니다. 한재욱 목사는 「인문학을 하나님께」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낭독의 발견>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원재훈 시인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잠자리 한 마리가 사무실로 날아왔습니다. 사무실에는 아홉 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가 나가지 못하는 겁니다. 잠자리는 겹눈, 홑눈 다 합해서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 개의 눈이 다 필요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볼 수 있는 한 개의 눈만 있으면 되는데, 그 한 개의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아, 지금 나는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개가 필요한데….’”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천 개, 만 개로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 개의 지식이 있어도 결정적인 한 가지 지식이 없어 무너집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방황일 따름입니다.” 천 개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내는 결정적인 한 개의 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바람을 잡는 그대에게 / 최병락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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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30~31절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믿을 만한 증거라고 합니다. 종말에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기 행한 대로 심판받습니다(고후 5:10).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심판대 앞에서 영원한 절망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 심판받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어도 인류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의 명언
성경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 짐 피터슨
오늘의 기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놀라운 은혜로 제 인생을 이끄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 입술과 삶을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셔서 능력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변함없이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님께 마땅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14 주 우리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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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나 주시고,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으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놀라운 일들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더 잘 준비가 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각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며, 우리가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나 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어 나가고, 그 하나님을 삶 속에서 더 풍성하게 누리고 경험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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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 대한 소개)
16,17“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삼대 도시의 하나로서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서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곳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큐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했을 때 그의 기대는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은 이제 유럽의 중심지로 들어갑니다. 그의 선교지역이 점점 넓어집니다. 그의 전도지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상에 대한 분노)
그러나 아덴에는 온 성에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덴에는 시민들의 수보다 우상의 수가 더 많았습니다. 아덴에는 삼만개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우상을 숭배합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면서 고사를 지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그곳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 분노는 영적 분노였습니다. 유명한 아레오바고 메시지가 이 영적 분노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영적 분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분노입니다. 요즘에는 영적으로 분노하는 사람이 심히도 드뭅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화를 잘 내고 신경질을 잘 부립니다. 자신의 인격이 손상되면 분노합니다. 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진리에 기초해서 살지 않고 물질과 육신과 자기를 기초로 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노를 하는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경건한 사람들과 장터에서 날마나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믿도록 설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에 기초해서 사는 사람만이 영적인 분노가 생깁니다. 바울은 영적 분노가 일어나지만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아덴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음이 분하여 견딜 수 없어서 회당과 시장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에게 복음을 전함)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아덴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었습니다. 윤리적인 삶을 위해서 금욕하는 스토아학파도 있었습니다. 어떤 에피큐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과 쟁론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에피큐로스(342-270 B.C.)가 세운 학파입니다. 그는 향락 추구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향락이란 육적인 것이 아니요 정신적으로 모든 고통, 욕정, 미신적 공포에서 벗어난 심적인 향락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타락하여 신약시대에 와서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쾌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신은 존재하지만 세상을 주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감미로운 잠에 불과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먹고 인생을 즐기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우주는 원자의 우연한 운동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며, 인간의 영혼도 원자들의 합성체로서 언젠가는 소멸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유물론자들로서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제논(Zeno 340-265 BC)라는 사람이 창설한 학파로서 에피큐로스 학파와 대립됩니다. 그는 물활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을 세계의 영이라고 하며 모든 사물에는 다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우주 이성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소멸하는 불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철저히 무관심함으로써 최고의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성으로서 자기를 통제하는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범신론으로 무장한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는 모두 헬라의 2원론 사상에서 나온 학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전하는 몸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과 변론하며 복음을 심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자신이 빛으로 만난 그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종교와 다릅니다. 세상의 종교는 선을 행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혹은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신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아덴 사람들)
19-21절을 보십시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비고 광장으로 갔습니다. 이 새 교가 무엇인지 듣고자 바울을 붙들고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이곳 언덕에는 평평한 바위 광장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공개 강연도 했으나 주로 재판을 하였다고 합니다. 학술발표장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느냐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가강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하여 무슨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첨단을 좋아합니다. 집이나 차나 옷이나 눈썹이나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마음이 허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변덕이 많습니다. 바울이 이상한 부활을 이야기 하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은 최신 지식에 대해서 논하는 데에만 시간을 소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새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논했으나 진리를 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즐기기만 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훌륭한 지성인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지적 유희를 즐기는 천박한 내면성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전하는 바울)
22-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아덴 설교에서 성경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므로 성경을 모릅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로 설교합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칭찬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을 보면서 분노하였지만 이제는 그들을 칭찬하면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두루다니면 그들이 많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던 중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메시지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종교성이 많음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루 다니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보았는데 그 신에 대해서 알게 해 주겠다고 서두를 꺼내었습니다. 그들은 이만개의 우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짓다가 짓지 못한 신을 알지못하는 신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을 소개하여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범신론을 이용하여 유일신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지식을 자랑하는 철학자들을 앞에 앉혀 놓고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이교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로서 성경이나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함)
24,25절을 보십시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은 이들에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주관하시는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니체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자신의 손에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손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은혜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에게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종교성이 강하여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런 신들은 생명이 없기 대문에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없고 또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로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체험해야합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26,27 절을 보십시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창조주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시다고 해서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할 수 있도록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에피쿠르스 학파는 역사를 우연으로 보았는데 사도 바울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노아시대에 모두가 심판을 받은 후에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후에 인간이 나누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연대를 정하셨습니다.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는 것을 정하셨습니다. 각 사람을 인종과 민족과 거주지를 정하여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게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임)
28,2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합니다. 태양이 없이 식물이 살 수 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유물론이고 공산주의고 진화론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 시인 중에 아라투스 시인이 사람이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술품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지나 목걸이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섬겨야합니다.
바울은 신을 우상 섬기듯이 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겨야 함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시를 통해 그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하셨으므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면 더듬어 발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알기에 부족함으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메시지는 이교문화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교 문화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창세기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창세기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그 기쁘신 뜻대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천지의 주재시요,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사 친히 구원역사를 시작하시고, 그의 씨에서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말씀은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기초를 깔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양들과 말씀 공부를 할 때 창세기 말씀으로 복음의 기초를 견고하게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기를 원하심)
30,31a절을 보십시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을 눈감아 주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다시 살리사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죄사함을 주십니다. 바울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이 역사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날에는 우리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심판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31b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썩지 않는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이 부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많은 증거를 주셨습니다. 빈 무덤이 있고 부활의 증인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증인을 변화시켰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하여 세계의 역사를 비씨와 에이디를 나누었습니다. 안식일이 부활한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을 보지 않고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모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
3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죽어서 재가 되고 흙이 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조롱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다시 듣겠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나중에 다시 들어 보겠다고 하며 떠나갔습니다.
(믿은 소수의 사람들)
33,34절을 보십시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은 아덴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길가와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지만 아덴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덴 전도는 미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임을 전해야 하는 메시지)
아덴 전도가 이렇게 미미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밭의 문제도 있지만 메시지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핵심 메시지가 빠졌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지금 성령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해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둘째로, 아덴의 역사가 미미한 것은 그들의 마음밭이 좋지 않았습니다. 베뢰아는 좋은 밭이었고 데살로니카는 덜 좋은 밭이었고 아덴은 나쁜 밭이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잘 전해도 마음밭이 좋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 더하면 아덴에서는 바울의 동역자가 함께 없었습니다. 우리는 동역자와 함께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있게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8월1일 퇴근후 부천 상동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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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드러나는 우상 숭배의 모습들을 보고 격분하고 계십니까?
현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개인 주의에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속한 교회가 좋은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면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상 숭배를 하며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선한 분함을 느끼지 못하며 그들과 복음으로 변론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울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을 품고 영혼이 죽어가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소원합니다. 마음으로 격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과 손을 움직여 믿지 않는 자들과 복음으로 변론하길 소원합니다.
전도의 방법에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도를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울처럼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격분하는 것이며 격분하는 마음이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전도에는 여러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복음의 씨를 뿌리며, 어떤 이는 물을 주며, 어떤 이는 추수하는 일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내하며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를 씨 부리는 일로 부르시거나,
물을 주는 일로 부르시거나, 추수하는 일로 부르실 것입니다.
바울의 변론으로 아덴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긴 것처럼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과 소통하는 용기와 지혜가 생기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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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서
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지나 지금 아덴에 도착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참으로 신사적인 사람들이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중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날마다 그것을 가지고 묵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장도 빨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도 잠시, 데살로니가의 극성스러운 유대인들이 베뢰아에 와서도 사람들을 선동해서 소란을 피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행복했던 베뢰아를 뒤안길로 하고 아덴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것도 실라와 디모데는 남겨두고 혼자 말입니다.
아덴에 대해서
그런데요? 이 아덴이라는 도시가 당시에 얼마나 유명했는지 모릅니다. 종교하면 예루살렘이요, 정치하면, 로마, 그리고 철학하면 아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덴은 철학의 본산지였습니다. 철학의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좀 심한 사람들은 어느 누가 철학을 연구해 보아도 당시에 헬라 철학자들이 시작해 놓은 체계 이상을 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헬라 철학의 본산지가 아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낙사고라스,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전부 이 아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문학 등등의 다 방면의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덴이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 에비구레오, 스도이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에비구레오는 에피쿠로스를, 스도이고는 스토아학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 철학을 펼친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금전욕․음욕(淫慾)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35세 전후에 아테네에서 학원을 열었습니다. 그 학원은 에피쿠로스 학원이라 불렀고, 부녀자와 노예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각자 형편에 맞는 기부금을 내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함께 우정에 넘치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문란하지 않은 생활 즉 우리가 아타락시아라고 부르는 상태의 실현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사람들은 아주 쾌락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스토아학파는 당시에 에피쿠로스와는 대조적으로 금욕주의 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학파는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학파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던 사람들입니다. 신은 자연이요 자연은 신이라는 범신론을 폈습니다. 숙명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운명을 산다는 것이지요. 아마 이것은 우리나라의 팔자소관이라는 말과 흡사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아덴이라고 하는 도시는 소위 학문을 하고 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한 철학과 학문의 본산이었습니다.
거룩한 분노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의 주인공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소위 학문을 한다하면 바울 아니겠습니까? 율법으로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또 헬라파 유대인인 부친을 둔 덕분에 많은 학문을 섭렵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헬라적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변론에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도 아덴은 언젠가 한 번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 싶었던 도시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예술하면 파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바울이 아덴에 도착해 보니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뭔가 철학을 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다를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뭔가 철학의 본산이요, 모든 문화적인 것들을 주도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해서 본 아덴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막연했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배신감을 맛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 우상이 가득한 도시를 보면서 거룩한 분노를 맛보았습니다. 바울이 왜 분노하고 있습니까? 왜 아덴을 보면서 마음이 상합니까? 다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과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이 뭐가 다릅니까?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가졌을 다른 기대를 엿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학문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뒷날 로마서를 쓰면서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이야기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이 그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분명히 보여 알 수 있지만 우상과 하나님을 바꾸고 인간의 정욕과 하나님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아덴에서의 바울은 아직 거기까지 정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덴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잘못된 방법 변론
그런데요? 문제는 그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바울은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분노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 그리고 저자, 즉 시장 통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시지요. 변론에 진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모함하고 거짓 증거 해서 스데반을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스데반은 흥분한 무리들에 의해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평소 바울은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덴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아덴은 지식의 도시입니다. 사람들이 철학적인 훈련을 받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아마 바울은 변론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과는 뭐했습니까? 쟁론했습니다. 변론과 쟁론은 뭐가 다릅니까? 변론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쪽의 뉘앙스가 더 강합니다.
그래서 설득이나 더 적극적으로는 설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쟁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논쟁하는 것입니다. encountered, 혹은 dispute입니다. 대결이고, 심각한 논쟁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그럽니다. 여기서 사용된 “말쟁이”라는 말은 스페르모로고스라는 말인데요. 스페르모는 참새라는 뜻이구요. 로고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하는 참새가 된 것이지요. 이 말이 가지는 본래적인 그림은 시장에서 ‘골라 골라, 메이커다 메이커!!!’하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은 열심히 변론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말쟁이로 취급했습니다.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덴에는 교회가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철저한 시행착오요,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4:20절에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렇게 철저하게 실패하고 간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고린도입니다. 그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변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2: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덴에서 열심히 변론해 보니까 그것이 전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유익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사변과 변론으로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보아도 소득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는 방법은 이제 버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외에는, 그리스도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한 분노는 많은 고민과 노력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열정만 가지고 분노를 표현하다가는 단군상의 목을 전기톱으로 자르는 분별력 없는 행동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복음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대를 바라보고, 공동체를 바라보고 거룩한 분노를 느끼십시오. 그러나 거룩한 분노는 기도와 사유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표출되도록 훈련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분노를 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잘 못된 것을 분별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아플 줄 알아야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거룩한 분노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기준을 흔들어 놓아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창출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분노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의 과거에 상처가 있어서 그렇지. 왜 저렇게 흥분한대...’ 하면서 우리 시대는 옳은 것을 향한 갈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증상은 교회에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이 무엇입니까? 잘못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시대가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개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이 복음 안에서 누려야할 경건의 모습, 경건의 훈련이 극도의 개인주의의 물결을 타고 빠르게 소실되어가고 기도와 경건 생활은 분주함이라는 이름에 묻혀서 하지 않는 것이 보편화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묵시적으로 금기시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너무 분주하니까...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모습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를 경험하십시오. 이 시대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분노는 감정의 폭발이나, 일시적인 논쟁이어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앞에 진실한 고민과 기도의 산물로 조심스럽게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알게 하리라(22-23절)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섰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두루 다니면서 보니까 수많은 신들도 부족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져 있는 단도 있더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접촉접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말하는데 그것을 내가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범신론적 사상에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모든 것들을 신격화 했는지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한 제단을 만들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지방 신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하나님을 전하는 일을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말씀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도 계시지만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또 어떤 분입니까? 만유, 즉 All thing입니다.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선언적으로 창세기의 앞부분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절) 그래서 태초의 사건은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主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영어 표현은 the Lord of heaven and earth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입니다.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지을 정도로 종교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충만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25절에 사도 바울이 설명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만큼 빈한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 분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믿음으로 살게 되고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만물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나 없으면 하나님이 아쉽다는 표현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26절과 27절에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본토산 흙이라고 미련한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엉터리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인류는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 혈통과 한 조상을 가진 후손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공존해 왔습니다. 스스로 자존을 선언한 인간들은 가인 문명의 계보를 이어가며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계보을 이어가며 믿음의 족속을 일궈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한 혈통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온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고 했습니다. “연대를 정하셨다”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그늘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들이 살 수 있는 공간적인 경계도 누가 정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께서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셨으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시74:17). 또한 모세도 모든 민족들의 경계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다고 신32: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이 다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시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을 주관하십니다. 경계를 정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경계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살고 있음을 기억하실 일입니다. 내가 사는 것 같고 내가 이룬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경계를 정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27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으며 사시와 연한을 나누시고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롬1:19-20절에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사람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찾도록, 발견하여서 하나님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란?(28-31절)
이제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을 설명하고 난 다음에 이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 가를 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 아래서 그분으로부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젖줄을 통해서 자라나듯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자라난 존재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갈등하는 이유가 내 인생은 내가 사는데 왜 간섭하느냐는 식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태아가 혼자 존재할 수 있습니까? 어머니로부터 생명의 영양분을 먹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먹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성과 자기의 지성을 이야기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이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존재이며,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28절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며 기동하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할 때 헬라시인의 말을 빌어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란 신의 소산물이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나온 존재다”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목소리를 높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허물치 않으셨지만 이제는 너희가 알았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소속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회색지대에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아! 내 삶의 방향이 틀렸구나! 아! 내가 죄악 투성이인 인간이구나. 무력한 존재이구나. 세상이 사탄의 통치 가운데 있구나. 나는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고,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덴 사람들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삶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안타까운 아덴 사람들(32-34절)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으로 그들의 가진 지식이 그들을 망치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들의 논리가 그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했습니다. 헬라철학에 푹 젖어 있었던 아덴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마음을 주셨지만 그것을 인간의 죄악 때문에 가리고 스스로 지옥을 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뭔가가 부족하고 패배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는 종교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가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신에게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부분은 조롱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바울은 아주 속상한 심정으로, 약간은 아픈 가슴을 안고 아레오바고를 떠나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믿었던 몇 사람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든지 초기의 사역에서처럼 성령을 받았다는 기록 없이 그냥 친하여 믿으니 그랬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덴 사람들을 향해서 선포된 복음은 값싼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입니다.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시와 연대를 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돈이 없는 것도, 결혼을 못한 것도,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 것들은 행, 불행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었어도 그 복음을 받아들일 가슴이 없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시간을 정하시고 인생을 경영하시고 계시지만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인생! 이것이 얼마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도 그렇게 살다가 종국에는 지옥을 상속 받게 될 것이 아니니까? 많이 배웠다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가졌다고 구원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논쟁은 얻는 것이 없습니다.
아덴에서 사도 바울은 배운 사람이고 싶었고, 아덴에서 사도 바울은 논리적인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논리와 학문으로 전달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말쟁이라는 말을 듣고 고린도 사역의 방향을 바꾼 것은 이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명절이 다가옵니다. 말쟁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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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1.풍요속의 빈곤
바울이 아덴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 17:16) 아덴은 주전 4-5세기의 영광은 없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로마 시대에도 여전히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아덴은 사람보다 신상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신들에 대한 이야기와 성상들로 가득하였습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21) 그들은 시간, 지식, 재물 모든 것에 있어 풍요로웠습니다.
특별히 지식적인 차원에서 그러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였던 에피쿠로스 학파는 물질적인 행복이 아니라 정신적인 행복을 찾았고, 스토아 철학자는 파괴적인 감정들을 피하고 세상의 조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지식명품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에 새로 나오는 지식(철학)이 있으면 재빨리 듣고 그것을 논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우아하고 고상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상한 풍요로움 안에는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Ac 17:23) 도시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재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신들을 찾고 섬겼지만 자신들이 무지하여 모르고 있는 신이 있을까봐 걱정스러워 그렇게 이름을 모르는 신을 향한 재단을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명품일지는 모르지만 '지존'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치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 지식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절대적 지식은 다른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상대적 지식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절대적 지식 하나만 못합니다. 그들은 상대적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나 절대적인 것 하나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음으로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야했고 모르는 신에 대한 걱정을 가져야 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식으로 풍요로우면 때로는 더 허무합니다.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았을 때는 채워자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채워졌는데도 행복하지 않으니 깊은 곳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분명 웃어야 하는데 울음이 나옵니다. 풍요속의 빈곤입니다.
2.절대적 진리를 찾아
바울은 수많은 신들로 둘러쌓여 있는 그들에게 수많은 신이 아니라 절대자 대신 하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Ac 17:24) 창조주는 한 분이요 다른 것은 피조물입니다. 주는 한 분이요 다른 것은 종일 뿐입니다. 그 절대자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8) 사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로 인하여 살아가고 있고, 움직이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벌고 그것으로 필요한 것을 구입합니다. 그렇게 구입하는 것을 자신의 힘이라 결코 할 수 없지만 자신의 힘이라 여겨준다 하여도 나머지를 보십시오. 매일의 태양과 그가 마시는 공기와 움직이는 자기 자신의 몸과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것은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분명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내가 만들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을뿐입니다.
창조주로서 초월자이며 또한 통치자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임재하시는 분인 그 분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무엇이 그 분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Ac 17:30)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Ac 17:31) 독생자의 오심과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가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헬라 철학에서 사람이 죽으면 영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여러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땅에 썩은 욕신이 부활한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증거가 됩니다. 말도 안되는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 증인입니다.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상대적 진리는 모든 사람이 우호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는 사람을 나눕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17:32) 조롱하는 이들이 있었고, 아직 판단을 못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풍요속의 빈곤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상대적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절대진리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결핍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상대적인 것들 곧 세상의 것은 아무리 많아도 먼지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아덴의 수많은 신을 섬겼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자랑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적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로는 그들이 가진 믿음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 진리로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절대적 진리가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절대적 진리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또 다른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적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절대적 진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절대적 진리를 알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시119:53) 보통 언제 격분할까요? 자기 기분이 상했을 때, 자기 이익이 침해당했을 때,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았을 때, 자기의 일로 격분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일로 격분합니다 바울의 하나님 사랑의 크기가 격분의 크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선교여행이라고 가서 많은 우상들을 보고 저들의 문화니 존중해야 한다 하고 기념사진 찍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격분하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격분은 뭘까요? 슬픔입니다 슬픔이 작으면 짜증으로 크면 분노로 가장 크면 격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시119:158),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6)
누가 이마에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입니까?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겔9:4)
저들의 불법 때문에 애통하는 이마에 인 받은 우리를 건지실 줄 믿습니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2:7)
그러나 의로운 격분은 결코 폭력이 아닙니다 도리어 온유와 겸손의 증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상을 타파하겠다며 우상을 부수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무례하고 질서를 깨드리는 자라 하여 아무도 그의 증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순 것을 다시 더 높이 세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수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세워진 사망 권세의 견고한 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온유함과 간절함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들 속 마귀의 진이 깨어졌고, 믿음으로 생명 얻게 되었습니다 "가까이하여 믿으니"(행17:34)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자기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로 격분하는 자, 그래서 온유와 겸손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자, 하나님도 알아 주실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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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 당시 아덴(아테네)은 알렉산드리아, 다소와 더불어 세계 3대 대학도시 중 하나입니다. 일찍이 민주주의 꽃을 피웠던 아덴은, 필레폰네소스 전쟁과 마케도냐의 싸움에서 패배해 정치적인 힘을 잃지만, 철학, 문학, 예술 등 헬라문명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는 여전합니다. 시민들은 그 자부심으로 충만했는데 본문에 그것을 단적으로 소개하는 글이 있습니다.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즉, 아덴 사람들은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여 만물의 근원을 밝히는 명실공히 학문을 숭상하는 일등 국민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지식은 화려한 의복과 같지만 실은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때마다 갈아입고는 전 지식은 미련 없이 버리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종교 사상 곧 교리에 열광하다가도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을 때는 이내 식상해 버립니다. 그래서 B.C.5세기의 ‘클레온’이라는 정치가는 ‘아덴사람들은 소위 새로운 것이라고만 하면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의 새로운 종교를 보고는 일시적으로 관심을 갖지만 이내 낡은 것으로 여겨 버립니다. 바울이 열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했건만 극히 적은 결신자만 나온 것은 바로 그 때문으로, 결코 사역에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그 설교에는 구원의 메시지가 보물처럼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철학적 강변이 아닙니다.
그들처럼 영적인 지식을 지속해서 추구하다 보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마치 신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과 종교는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구 유럽의 일부 목사는 신학 전공자들로 국가의 고위적 공무원에 채용되어 높은 봉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담임하는 교회에 주일 날 예배드리는 신자들은 거의 없고, 또한 강조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종교인일 뿐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성경지식을 아무리 알아도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종교의 옷만 입고 있는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성경 지식과 삶의 일치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청년들의 생각을 오염시켰다는 ‘청년타락죄’와 ‘신에 대한 불경죄’로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곳이 바로 ‘아레오바고’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아덴사람들이 믿지 않는 다른 신을 믿으라고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곳은 한 사람을 국가모독죄와 풍기문란죄로 처형할 권한이 있던 법정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복음과 부활을 외치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차고 넘치는 지식을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전한 복음입니다. 행함으로 인하여 그 진리가 생명이 된 것입니다.
두뇌의 지시를 따르는 손과 발을 가진 사람이 정상인입니다. 두뇌의 지시를 손과 발이 따르지 않는 사람을 환자라고 합니다. 바울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차고 넘치는 지식을 손과 발로 표현하는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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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을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성실히 잘 감당해 나가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흔들림 없이 달려갈 수 있도록 능력과 끈기, 인내를 부어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그렇기에 주님을 더 의지하고,
주님을 더 의뢰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의 증인으로,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