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에서 역으로 (외 3편)
감태준
공원 벤치는 자고 나는 간다.
레일을 따라 아득한 세월 속으로
투덜대는 바퀴를 달래며
긴 짐칸을 끌고
간다.
잘 있거라, 거리여
심심한 가로등 불빛이여
남은 불빛 창 꺼트리며
막막히 서 있는 빌딩들이여,
축복하자, 구불구불한 레일에
구불구불 따라오는 저 바퀴자국을,
달아나는 택시에게 삿대질하는 저 취객을,
이 밤에 가야할 길 붙잡고 포옹하는
저 뜨거운 연인을,
나는 보면서 잊어버리고 간다.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 않는
까만 눈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잊으려고 해도 악착같이 옆에 와서 팔짱 끼는
내일을 끼고
가다가
어제 쉬어 갔던 커피 집
불 꺼진 간판 보고 싱겁게 웃는다,
여주인 시계 차고 달아난 아가씨를 생각하고.
웃지 않으면?
구불거리지 않으면?
나는 레일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짐칸에 실은 궤짝 단단히 묶고
욕망의 키만큼 긴 그림자를 끌고 간다,
집으로 아득한 세월 속으로.
자판기 커피
커피 속에 종이컵 바닥이 어른거린다.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맛에
커피 주는 줄 몰랐구나.
자판기 커피가 일생의 거울인 줄 몰랐구나.
반품 안 되고 리필 안 되는
딱 한 컵의 생애,
마지막 한 모금 삼키고 나면
누구든지, 그냥 빈 종이컵 하나.
아들에게
떠날 때가 왔다.
이 집에서 가장 먼 곳에
너의 집을 지어라.
새는 둥지를 떠날 때 빛나고
사람은 먼 길을 떠날 때 빛난다.
외투를 입어라.
바람이 차다.
길 곳곳이 얼음판이다.
겁 없이 미끄러지고
외투에 흙 남기지 마라.
외투란 먼지만 묻어도 누더기다.
앞이 어둡고 한기 들 땐
사람의 집을 찾아라.
마음이 불어가는 쪽에 있다.
마음이 불어가지 않으면
마음에 들어가 쉬어라.
길은 시련 속에 있다.
이제 도도히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
너의 집을 지어라.
홍방울새
금세 돌아올 것 같더니
가서는
가물가물 기억에만 비치는
홍방울새,
왜 꿈에만 오나.
고향 가서 아주 묻히겠다
그 사람 가던 날,
천변 나뭇가지에 앉아
혼자 울어쌓더니
그때 다 울지 못한 것을
마저 울고 싶어서 오나.
뜬금없이 꿈에 왔다 가면서
널따란 하늘이나 하나 더
펼쳐놓을 것이면
그 사람하고 같이 오지.
금세 돌아올 것 같더니
꿈에만 오는
홍방울새.
—시집『역에서 역으로』(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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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태준 / 경남 마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양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 박사과정 졸업. 한양여대와 중앙대 교수 역임. 1974~1996년 《현대문학》편집장 및 주간 역임. 1972년《월간문학》신인상 시 당선. 시집『몸 바뀐 사람들』『마음이 불어가는 쪽』『마음의 집 한 채』육필시집『사람의 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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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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