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휴가를 떠난 시기라서 거리가 한산해졌다. 늘 만원이던 출근길의 지하철도 요즘은 헐렁해서 좋다. 날도 더운데 해마다 휴가철은 나에게 이렇게 복을 내린다.
덥다. 진짜 덥다. 특히 열대야로 인해 밤이 더 힘들다. 나는 워낙 더위를 타는 체질이라 유월 여름 입구에서 절반쯤 겁을 먹고 시작한다. 올 여름은 어떻게 견디나..
60킬로가 안 되는 마른 체형인데도 더위를 심하게 탄다. 울 엄니에게 받은 유전이다. 그렇다고 여름을 아무것도 안 하고 건너뛸 수도 없고, 나는 주로 여름에 늙는다.
이렇게 삶을 듯이 무더운 복날이 있어 곡식이 여물고 과일들이 살을 찐다. 나는 괴롭지만 열매를 맺는 식물들에게는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다.
해마다 복더위가 필요한 이유다. 여름엔 머리 벗길 듯 덥고 겨울엔 코 베갈 듯 추운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살면서도 계절마다의 황홀함을 잘 모를 때가 있다.
봄은 꽃이 피어서 좋고, 여름은 싱그러운 신록이 있어 좋고, 가을은 만산홍엽의 풍경에 눈물겹고, 겨울은 순백의 계절이라 좋다.
그래도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나는 가을, 봄, 겨울, 여름 순이다. 갈수록 여름 나기가 힘들다. 추운 것은 거뜬히 방어를 하겠는데 더운 것은 정말 대책이 없다.
여름 겨울 호불호도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누구는 추운 것보다는 그래도 더운 게 낫다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입추가 코앞이고 말복 낀 주까지 한 2주만 견디면 멀리서 가을이 올 채비를 할 것이다. 이렇게 복날은 간다. 이런 복날 또한 지나고 나면 그리워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예전에 감동적으로 봤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생각난다. 본방이 방영될 때는 보지 못했고 종영 한참 후 어떤 계기로 한꺼번에 몰아서 본 연속극이다.
하나뿐인 아들은 다리가 불편해 평생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첫사랑의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살다 치매에 걸린 한 여인의 일대기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종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어느 날 치매에서 잠시 놓여난 시어머니가 말한다. 내가 무슨 복이 있어 이렇게 착한 며느리를 얻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다가, 혀를 차기도 하고, 때론 눈물도 찍으면서 봤다. 먼 데 가서 오지 않는 울 엄니 생각도 나고,, 나는 요즘 여성호르몬 분비가 늘어나는지 점점 아줌마 닮아간다.
아래 줄부터는 그 연속극 마지막에 나왔던 혜자 나레이션이다. 냉장고 문짝이나 변기 앞에 붙여 놓고 싶은 문장이다. 막바지 복날을 보내며 이런 문구로 위로를 받는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 아빠였고, 누이였고, 형제였고. 딸 아들이였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첫댓글 살아가는데 조금씩 찾아 들어오는 내가 잘 살아가야하는 이유~들
감사합니다 ~^^
'지하철이 헐렁해서 좋다.'
표현이 좋습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붉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명구절입니다.
저도 만으로 66년을 위와 같은 명구절처럼
살아왔습니다.
참한 찐한감동으로
닥아오는 글입니다
정금같은 현덕님이 있어서
세상이 더 아름답습니다
내 삶을 돌이켜 보면 전혀 건져 올릴게 없는 맹탕인데
어찌 살면 그리 살까 싶다 자식이 뭔지 오직 자식에게
전부를 걸고 살아서 그런가 싶기도 ]
지금도 자식과 다투면 연이 끊어 질까 두려워
내가 참고 만다 자식 한테만 그런다
남에게는 지기 싫어하고
다정하지 않은 내가
현덕님 글 잘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