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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굴라와 브리스길라 18:1~4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 디도 유스도 18:5~8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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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그들과 함께 천막을 만들면서 생활합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예수님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며 비방합니다. 바울이 회당 옆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자,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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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굴라와 브리스길라 18:1~4
고린도는 크고 발달된 항구 도시입니다. 고린도는 에베소와 더불어 바울의 사역에서 중요한 곳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간 머물며 복음을 전합니다. 주후 49~50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로마에서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브리스가) 부부는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합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부부와 함께 일을 하면서 지내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천막을 만드는 일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에게 힘이 되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더 깊은 복음의 진리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좋은 동역자는 고되고 험난한 사역에 힘과 위로가 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어떤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나요?
함께 일하면서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동역자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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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와 디모데, 디도 유스도 18:5~8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이 있는 고린도로 옵니다(17:14~15). 그들은 마게도냐 사람들의 후원금을 가져왔을 것입니다(빌 4:15~16).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5절) 유대인들에게 증언했다는 표현은 말씀 전파에만 전념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울을 적대시하고 비방합니다. 이에 바울이 자기 옷에서 먼지를 털며, 말씀을 거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립니다. 바울은 장소를 옮겨 이방인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 집이 회당 옆이어서 회당장의 가족을 비롯해 많은 고린도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바울의 사역이 회당 중심에서 가정 중심으로, 유대인 전도에서 이방인 전도로 바뀌어 갑니다.
● 더 깊은 묵상
이방인 디도 유스도는 박해받는 바울을 어떻게 도왔나요?
복음 전파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내가 협력하고 도울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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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간다운 삶
저는 쉰 살이 넘어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미국 신학대학에 들어가 공부했는데 언어가 서툴다 보니 필기가 부실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탁월하게 필기하는 친구를 눈여겨보았다가 수업 시간마다 그 친구 옆에 앉아서 그가 필기하는 것을 베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친구가 제게 어떤 눈총도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도리어 필기 노트를 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더 인간다워지는 길은 내게 있는 것을 기꺼이 퍼 주는 것입니다. 남에게 퍼 주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손해 보는 것 같으나, 어리석은 자 같으나 가장 인간다운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가장 탁월해지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변 사람들과의 경쟁과 비교를 넘어서서 초연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일하지만 생활에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를 작동하는 시스템이 누구보다 더 잘해야 하는, 고장 난 시스템이라 그렇습니다. 관심이 나의 성장이 아니라 남의 추락에 있으니 삶이 피곤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악순환을 끊고 선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경쟁과 비교에서 벗어나 타인을 돕고 세우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빼앗을 수 없는 비밀한 기쁨이 넘쳐 납니다.
뜻밖의 축복 / 조정민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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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18장 5절
동역자들이 오자 바울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엄숙하고도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는 복음 전파 사명에 열정을 쏟으며 전심전력합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의 사람이 명확하게 전달하는 말씀은 둔한 이성을 깨우치고, 성령에 붙잡혀 전하는 말씀은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또한 헌신과 충성으로 전하는 말씀은 굳은 심령에 성령의 불을 붙여 영혼 구원의 열매에 이르고 합니다.
혼자서 하나님 일을 다 해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세우고 그와 함께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 폴 스티븐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동역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요. 복음의 길을 함께 걷게 하신 지체들을 붙여 주셨으니 서로 깊이 신뢰하고 온전히 섬기길 원합니다. 아름다운 동행으로 십자가 사랑이 더욱 선명해지고,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11 예수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시며,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일러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복음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단계가 되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대하고, 그 길이 열리면 담대히 나아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도록 하자
-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해 나갈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 나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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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열매’가 있습니까?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열매는 어느 정도입니까?
할 일 없는 삶, 열매 없는 삶은 가장 비참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8장은 바울 일행의 2차 전도 여행 마지막 부분으로서 고린도에서의 사역과 안디옥으로 돌아간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후반부를 살펴보면서 ‘사명’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명의 약화(사람 앞에서)
바울은 세상적으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사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명’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이전에 그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성공하였고 행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삶은 결코 그에게 선한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훨씬 더 위대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잇대어져야 합니다. 사명을 알게 되어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을 따라 전도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문하는 도시에서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여 쫓겨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6절) 배척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러한 배척에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전도여행의 후반부에 돌입하면서 계속된 배척에 바울의 마음이 많이 약해졌던 것 같습니다.
반복되다보면 힘이 빠지고 마음도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돈이 없어 일을 하여야 했습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3-4절)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가르쳤으나 평일에는 돈을 벌기 위해 가죽세공을 하고 텐트 천을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전도를 위해 먼 길을 왔는데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생소한 타지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바울을 지치게 하는 데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살다보면 그렇게 사명이 약해집니다.
지쳐 있는 바울을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 힘을 북돋아주십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9-10절) 사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사명에 약화될 때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시며 사명의 마음을 다시 강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명을 가지고 살면 ‘뭐든지 잘 된다’는 생각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꼭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하다가 힘들면 멈추면 됩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로서 사명을 가진 사람은 힘들다고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가진 사람은 힘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명이 없으니 “왜 그런 일을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명을 가진 사람은 고독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사명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상황으로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계십니다.
사명은 ‘사람-사람’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사람’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로하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사람에게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위로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사명의 일을 하면서 사람이 주는 영광을 탐하고, 사람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늘의 상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빠져, 세상에 지쳐 사명을 잃은 채 살고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람은 훨씬 더 위대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며 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의 강화(하나님 앞에서)
바울이 고린도에서 너무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9-10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가장 큰 것 중에 하나는 ‘환경 때문에 사명의 길을 가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은 가고 싶은데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명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항상 자신의 마음 때문입니다. 사명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장애물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다른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라도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의 부흥이 너무 어려워 목사의 길을 멈추었습니다. 그렇다면 환경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목사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목사의 길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성숙을 향한 길을 가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가야 하는 사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명은 ‘과거’가 되어버렸습니다. 옛날에 그런 것을 생각해 보았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사명의 길을 가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정을 꾸리게 되고, 회사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외적인 일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안 될 것 같으나 될 것입니다. 환경이 나를 가지 못하게 할 것 같으나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진정 사명이라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하지 못할 일을 주지는 않으시지 않겠습니까? 사명인데도 계속 막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계속 막혔습니다.
사명이라고 방향만 틀면 ‘한 걸음에 천 걸음’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의 길에도 순서가 있고 절차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수고가 동반해야 하듯이 그 일에도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명의 길을 가는 중에 힘듦이 있고 장애물을 만났을 때 멈추어 버릴 것부터 생각하지 말고 사명을 잡고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사명의 길을 갈 때 그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명의 ‘일’이 아니라 그 길을 가는 사람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꾼으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사명의 길을 갈 때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더욱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사명의 길을 갈 때도 바울의 믿음이 자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습니다. 바울은 거절과 핍박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을 훈련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갔습니다. 거절과 장애가 없이 우리의 깊은 죄와 허물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깨지고 훈련되지 않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이 더 조절되면서 사명을 부여잡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또한 일을 더 가다듬으면서 일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사명이 있는데 어찌 막히기만 하겠습니까? 그 일이 막히든 열리든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가면 분명히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사명을 붙잡고 앞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과 여건도 주십니다. ‘안 된다’말하지 말고 ‘되게’ 하십시오. 사명은 포기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있어도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이룰 수 있기에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사명의 마음.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열매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바울은 힘들어도 사명의 마음으로 그 길을 갔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해야 합니다. 사명을 알고 사명을 이루면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환경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환경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경을 초월해서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고 그 환경 안에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을 멈추게 하는 것은 결코 외부요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입니다. 사명의 마음을 가다듬어 사명의 길을 가십시오.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사명의 일을 하십시오. 열매를 많이 맺고 있습니까? 맺으십시오. 사명은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큰 역사보다 우리 자신에게 위대한 역사입니다. 사명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사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갖자가 이루어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본 마음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려다 좌절하고 멈추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소명의 일에 대해 사명을 가져야 하는데 소명이 아닌 일에 마음을 쏟다가 좌절하고, 때로는 사명의 일이라도 너무 쉽게 하려하다가 포기합니다. 일어서십시오. 내가 가야 하는 사명의 길을 알고, 그 일을 이루어 가는 삶이 되십시오. 크든 작든 사명의 일이라면 모두 위대하고 귀합니다.
8월2일 동인천 상가에서 사명의길을 가는 우리모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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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함께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서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울 때에 좋은 동역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고 목숨을 나눌 수 있는 관계의 동역자를 만난 바울이 얼마나 부러운지요.
저는 성도들이 교회를 세워갈 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바울이 가졌던 좋은 동역자들을 만나길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을 나눌 수 있는 동역자 중에 한 명이 제가 되길 소원합니다.
좋은 동역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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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그렇게 열정적이며 지칠 줄 모르는 신앙을 보여주었던 사도 바울이 낙심에 빠지게 되고 영적 침체에 빠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1-4절)
아덴에서의 사역은 바울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언제나 영적인 에너지가 넘치던 바울이었습니다.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붙여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아덴! 이 흠모했던 도시에서 바울은 그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에게 있어서 어떻게 보면 가장 자신 있는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했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이 실패의 경험은 바울로 하여금 나머지 전도 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했습니다. 아덴에서 떠나온 곳이 고린도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고린도는 더욱 사도 바울을 낙심케 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덴이 지적인 타락을 의미하는 도시였다면 고린도는 몸의 타락을 보여주는 도시였습니다. 수천 명의 성창들을 지닌 비너스의 신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밤이 되면 도시를 온통 음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보다 더 어려운 대적들을 만났다는 좌절감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만 이 도시에서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뭔가를 해도 잘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목적 지향적이고 잘 움츠러들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석이나 로봇 같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뒷날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그리고 조금 뒤에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는(행19:23-41절)살 소망까지 끊어질 만큼(고후1:8절) 낙심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바울은 아덴에서 실패를 경험한 후 그만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너무 왜소해 보이고 고린도는 너무 커 보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땅입니다. 여기서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 이것이 사도 바울이 느끼는 두려움의 원천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그만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유일하게 고무적인 일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 일이었습니다. 아직 실라와 디모데를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혼자 있음으로 해서 바울은 정서적으로 더욱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만난 사람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원래 이 사람들도 글라우디오의 칙령 때문에 고린도로 이주한 사람들로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그럽니다. 아마 이것을 볼 때 이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과 함께 평일에는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부모로부터 이 기술을 전수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일이 지금 고린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교비는 바닥이 났고 영적으로는 가장 침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평일에는 장막 만드는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말씀을 전하는데 힘이 없습니다.
말씀에 붙잡혀(5-11절)
그런데요. 사도 바울은 이 영적 침체를 어떻게 벗어나고 있습니까?
본문 5절 초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이 말은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 전에는 말씀에 붙잡히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장막을 지으면서 안식일 마다 말씀을 강론했지만 온전히 말씀에 붙잡히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실한 동역자들이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자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혼자였을 때는 말씀에 붙잡힐 수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좋은 동역자들, 마음을 내 보일 수 있는 동역자들이 도착하고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다시금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영적인 힘을 회복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마게도냐 지역에서 선교헌금을 모금해서 왔습니다. 사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이 두려운 사회, 두려움을 주는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진실한 동역자! 진실한 친구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룬 교회는 바로 그런 진실한 동역자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함께 짐을 지고 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마음을 나눈 디모데와 실라와 같은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말씀에 붙잡혀
두 번째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말씀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라고 바꿔도 무방할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게 되자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고린도라는 도시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다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자신 없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말씀에 붙잡히자 그는 다시 담대해 졌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 하기 시작합니다.
4절의 권면했다는 말 ‘페이도’는 권유하다, 설득하다는 말입니다. 화해하다 진정시키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어떤 단어를 쓰고 있습니까? “밝히 증거하니” 그랬습니다. 그리고 훼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그랬습니다. 우리가 자비량 선교라고 말하는 기간에는 왜 회심 자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다시 말씀에 붙잡혀 담대함을 회복하자 회당장의 집안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을까요? 이 차이가 무엇입니까?
영적 침체는 나도 알지만 사탄도 압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압니다. 확신 없이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에 붙잡힌 사도 바울! 그를 통해서 전해지는 복음이 타락한 도시 고린도에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 닥치고 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새 힘을 얻어서 말씀에 사로잡힌 사도 바울에게 주님의 위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주님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그러므로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문제는 우리가 그 주님을 의뢰하지 않고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에 있습니다. 아직도 그 성중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계획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유하면서 세운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인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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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는데, 생업이 같아 주중에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하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대적자들이 비방하자 옷을 털며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담대히 선포하고, 회당 옆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옮겨 말씀 가르치는 것을 쉬지 않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 회당장 온 집과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이렇게 진실하게 열정적으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행18:5)
그러나 이 세대는 주의 말씀에 붙잡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사64:7)
그러나 빛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는다면 반드시 어둠에 붙잡힐 것입니다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5~36)
그러면 다른 복음의 다른 신에게 붙잡힐 것입니다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대하7:22)
그러나 우리는 오직 말씀에 붙잡히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붙들어 주실 때에 우리가 살고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시119:116~117)
그때 주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실 줄 믿습니다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시18:16)
그리하면 넘어져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을 줄 믿습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항상 주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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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힘이 되는 동역자”
아덴에서 열정적인 사역을 마친 바울은 항구도시이며 상업이 발달한 고린도로 떠납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그들과 함께 지내며 천막 만드는 일을 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더 깊은 복음의 진리를 가르칩니다.
우리도 함께 마음을 나누며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동역자가 있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을 하며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권면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마게도냐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로 내려오자 그들과 함께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밝히며 증언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과 대적하며 비방하자 바울은 자기 옷에서 먼지를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며 말씀을 거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며 나는 깨끗하다고 말하고 이방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장소를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 집 옆에 있는 회당의 회당 장 그리스보는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를 계기로 바울의 사역이 회당 중심에서 가정 중심으로, 유대인 전도에서 이방인 전도로 바뀌어 갑니다.
오늘 하루도 위로와 힘이 되는 동역자로 말씀을 나누며 함께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고린도 사역을 통해서 동역자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도 복음의 동역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서
힌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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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 바울이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영원한 동역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생업이 같아 동역자 뿐만 아니라 동업자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돈이 목적이 아니니까 함께 일이라면서 신이 났을 것입니다. 바울과 아굴라는 흥이 나서 일하고, 브리스길라는 기쁨으로 내조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바울의 사랑하는 전우들이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실라와 디모데입니다. 실라는 빌립보에서 그리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나서 힘과 용기가 백배했을 것입니다.
더 힘이 되는 일이 생깁니다. 드디어 고린도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바울 일행을 극진히 섬깁니다. 그 집의 장점은 회당 바로 옆이라는 것입니다. 더 소망스러운 것은 고린도회당의 회당장이 주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입니다. 회당장이면 유대교로 똘똘 뭉쳐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천지개벽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옆에 든든히 서 있고, 날마다 결신자들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위로와 격려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 는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울러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사람이 되는가? 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납니다. 재미가 있습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을 만나면 있던 힘도 빠집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갖고 있던 희망도 사라집니다. 여건과 상황에 관계없습니다. 물질과 시간의 많고 적음에도 상관이 없습니다. 동일한 조건에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사람 때문이지요. 바울 주변에는 여러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서신서를 보면 정말 나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와 함께 했던 믿음의 동역자들을 봅니다. 그가 로마감옥에서 마지막 인사말을 하면서 한 말은 그들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생의 마지막 바람입니다. 평생 동역자들은 그에게 늘 위로와 격려가 된 것입니다. 일평생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받는 사람도 있고, 평생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생동안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인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동지들은 평생 바울에게 귀한 도움을 줍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처럼 살면 좋겠습니다. 대 사도 바울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평생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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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사도행전 18장 5절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60만이 넘는 거대한 신흥 항구 도시였습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물질적으로는 번영하였지만 도덕적으로는 극히 타락하여 "고린도와 같이 됨"은 방탕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 있는 유명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에는 1천명의 여사제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창녀들이었다고 합니다. 고린도 여자하면 매춘부처럼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복음역사를 이루기가 험한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어떻게 복음역사를 이루었습니까?
(고린도에서 아굴라를 만난 바울).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아테네 전도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본도 태생인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신약에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아굴라는 얼마 전에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로 얻었습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만큼 바울을 사랑하고 동역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기술자)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
바울은 아굴라와 생업이 서로 같으므로, 바울은 그들 집에 묵으면서,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을 벌이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을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평일에는 장막 만드는 업을 하고 있었는데 아굴라는 바울과 직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며 일을 했습니다. 포로기 이후 유대의 랍비들은 율법 공부 외에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당시 천막은 목자와 군인들과 여행자들을 위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천막을 만들면서 자연히 이들을 동역자로 얻었습니다. 우리가 직업을 가지면서 동업자를 전도하고 동역자로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비량 선교사의 좋은 본을 보였습니다. 호세안 선교사님은 같은 외교관인 파블로스타오 선교사를 동역자로 얻었습니다.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는 바울)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바울은 평일에는 직장 생활을 하며 틈틈이 복음을 전했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하루 종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평신도 선교사로서 삶에 대한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자립적인 평신도 선교사요, 자립적인 성경선생으로서 자립적인 복음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물질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나 복음을 위하여 물질의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득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동역자가 오자 말씀에 붙잡힌 바울)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울은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실라는 베리아에 머물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들이 베뢰아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고린도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오자 말씀에 잡혀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유대 사람들에게 밝히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에 있을 때 뵈리아에 있는 디모데와 실라를 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있을 때는 이들이 오지 않아서 바울은 홀로 고군분투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왔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베뢰아에서 바울이 있는 고린도에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했습니다. 동역자가 없이 외롭게 투쟁하다가 믿음의 동역자들이 와서 영적 환경을 만들어 주자 바울은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동역자가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사람은 연약합니다. 동역자가 큰 힘이 되어 말씀에 붙잡히게 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실패를 교훈 삼이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전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기 위하여)
우리는 처음에는 말씀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말씀이 나를 붙잡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어 나를 붙잡는 힘이 있습니다. 마치 처음에는 담배를 어렵게 배우지만 나중에는 담배가 나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에 고린도성도들은 물질과 쾌락에 붙잡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말씀을 암송하고 주야로 묵상해야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말씀이 나를 강권하십니다. 말씀이 나에게 에수님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게 하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바울)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서 한 일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 전도에 열매가 나타나지 않자 굳게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자 결심한 이유는 그 전도함이 자신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미사여구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질병보다 크신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문둥병도 중풍병도 치료되고 여러 가지 질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바람과 바다도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천 마리의 떼 귀신도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죽음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죽은 지 사흘이나 되는 자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뿐만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다 감당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전해야합니다. 우리는 모든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대인에게 먼지를 떤 바울)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복음역사를 훼방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옷에서 먼지를 털고서,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멸망을 받으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책임이지, 나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이방 사람에게로 가겠습니다. 바울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대적하는 것으로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방인 선교 방향을 잡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아서 심판을 받을 때 그 책임은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바로 옆집으로 옮겼습니다.
(유스도와 회당장 그리스보의 전도)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바울은 회당을 떠나서,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습니다. 디도유스도는 이방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고, 그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회당을 중심으로하지 않고 홈 센타를 마련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가정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회당장의 변화)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회당장인 그리스보는 그의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주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회당장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정과 수많은 고린도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고린도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고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든지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한 뒤 바울은 더욱 말씀 선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유대인의 반발이 심했고 바울은 그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이어 갑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 그 온 집안에 주님을 따르는 사건이 있어지고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지속되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화려하고 음란한 도시에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예비하시고
생명의 복음이 멈추지 않고 퍼져 나가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땅끝까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 복된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보다 먼저 행하시고
날마다 그 전능하신 손길로 붙들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예비된 영혼들을 만나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역사를 체험하는
주님의 제자로 걸어가는 복된 발걸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세상 가운데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주시는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찾아가 만나주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일하심에 순종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