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역에서 만나는 조선의 성군 성종대왕
서울 지하철 2호선에 선릉역宣陵驛이 있다. 왜 이름이 선릉역일까? 아는 사람은 안다. 조선의 9대 임금이며,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임금의 능이 있어서 선릉역이라는 것을,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궁금증도 없이 그냥 ‘선릉역’일 테지 하면서 지나치고 또 지나치는 곳이 선릉역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현대식 빌딩의 숲에 자리 잡은 삼릉공원 안에 자리 잡은 곳에 선정릉이 있다. 선릉은 성종과 제2계비인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宣陵)과 아들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 이 두 개의 능을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 선정릉(宣靖陵)이다.
이 부근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서학당동이었는데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현재의 소재지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능지로 선정된 것은 1495년(연산군 1)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뒤 1530년(중종 25)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 윤씨가 죽자 이 능에 안장하였다.
오백 년 조선 역사상, 세종대왕 다음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문학을 좋아했던 성종임금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많은 책에 실려 있다.
찬성 손순효孫舜孝가 성종 때에 충성스럽고 소박하며 정직하기로 이름이 났었다. 임금도 몹시 그를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임금께서 늦은 오후에 두 사람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남산 기슭에 두어 사람이 수풀 사이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손순효가 맞을 것이라고 짐작한 임금이 사람을 시켜 가보라고 하였다. 과연 손찬성이 두 사람의 손님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 위에 누런 오이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임금께서 바로 말 한 필에다가 술과 고기를 잔뜩 실어다 주게 하고 이어 경계 시키기를 “ 내일 고맙다고 말하는 일이 없다고 해라. 다른 신학 알면 반드시 내가 공을 편애한다고 싫어할 것이다.” 하였다.
손순효와 손님들이 머리를 숙이고 감사하게 여긴 후 넘치도록 배불리 먹고 취하였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에 또한 감사를 표하러 들어갔다. 임금께서 불러 어제 당부한 그 경계를 지키지 않은 것을 나무라자 손순효가 울면서 대답하였다.
“신은 다만 은덕에 감사하려는 것 뿐이옵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사랑하는 신하가 보인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가보라고 하니 술을 마시는데 안주가 오이 한개 밖에 없다. 임금은 술과 안주를 보내고 신하는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기고, 감복해 한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인연인가. 신하 사랑하기를 이렇듯 동기간을 사랑하듯 하고 그 은혜를 감격해 할 줄 아는 신하가 있었으니...
성종임금에 대한 또 하나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온다.
성희안이 한 번은 옥당玉堂에서 숙직을 하면서 임금이 불어 밤에 들어가 뵈니, 성종이 술과 과일을 하사下賜하심에 성희안이 귤 여남은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그 뒤 술이 취하여 엎드려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더니 그만 소매 속의 귤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임금께서 다음날 귤을 다시 한번 내리시며 하교 하시기를, “어제 저녁 희안의 소매 속에 귤을 어버이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니, 그 때문에 다시 주는 것이다.” 하여서, 공公이 뼈에 새기고 임금을 위하여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김안로가 지은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실린 글이다.
이렇듯 신하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성종의 원래 이름은 혈奊이다. 세조의 손자이며, 덕종德宗(세조의 長子로 追尊)의 둘째 아들인 성종은 세조 2년인 1457년 7월 30일 경복궁의 세자궁에서 태어났다.
성종의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로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성종이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부친인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을 하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다.
성종은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났고, 도량이 넓었다. 특히 활을 잘 쏘았고, 서화에도 능해서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성종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성종이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그 뒤 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서 임금에 오르고 성종은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예종이 임금에 오른 지 1년 만에 승하하자, 그 아들은 아직 어렸고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병중이었다. 세조 비인 정희대비(貞熹大妃)가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한 결과 성종을 임금으로 낙점했고,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1469년(기축년) 11월 28일, 그때 성종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임금이 나이가 어리므로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고, 7년이 지난 1476년에야 성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1474년에 아버지 덕종을 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한 성종은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숙의淑儀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 성종보다 12살이 더 많았다고 알려진 윤씨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이다. 성종의 후궁으로 입궐하여 원자인 연산군을 낳은 뒤부터 질투가 심해졌다. ‘여자는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도 질투를 한다.‘ 는 말이 전해오는 것처럼 규방(閨房)의 일로 물의를 일으켰고, 심지어 임금에게까지 불손해지자 폐비 윤씨 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일으키게까지 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성종이 후궁의 침소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가 소동을 부리고서, 급기야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일까지 벌어지자 인수대비가 크게 노하였다. 결국 1479년에 왕비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3년이 지난 1482년에는 사약을 받고(賜死) 세상을 떠났다.
이때 성종이 죽음을 내리는 전지傳旨에 쓴 글의 일부를 보자.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이 패역함이 많았다. 전일 궁중에 있을 때, 포학이 날로 심하여 이미 삼전(三殿. 정희왕후, 생모인 소혜왕후, 양모인 안순왕후)에게 공손하지 못하고, 또 나에게도 행패를 부리며 노예처럼 대우하여 발자국까지 깎아버리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역대 모후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독한 약을 품속에 지니기도 하고,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다만 그가 시기하는 사람만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고, 장차 나에게도 이롭지 못한 것이다.”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사약을 내린 이 사건이 훗날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원인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바람이 불게 될 줄을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성종이 재임했던 시기는 조선이 건국한 지가 오래되었고, 태평성세가 지속됨에 따라 퇴폐의 풍이 싹트고 임금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뇌물도 성행하였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조선 역사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으며, 나라에서 경작자들에게 직접 세금(租)을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로 녹봉을 지급하였다.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차례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한 뒤 반포하였고, 1492년에는 이극증(李克增)·어세겸(魚世謙) 등에 명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 통치의 기반이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신정일의 <왕릉 가는 길> 중에서 쌤앤 파커스 출판사
서른 여덟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성종의 능인 선릉의 입구 제실 뒤에 노란 은행나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며칠 사이 바람결에 떨어졌을 그 은행나무가
2025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