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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제1독서 : 지혜 1,13-15; 2,23-24
제2독서 : 2코린 8,7.9.13-15
복 음 : 마르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힘든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그런 일만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몸은 힘든 일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의대 연구팀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둘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맛난 음식, 좋은 환경, 사회적 욕구 충족의 안락함을 추구합니다.
다른 유형은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예를 들면 아이 돌보기, 치매 노인 섬기기, 인기 없고 힘들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것 등입니다.
누구의 몸이 더 건강해졌을까요?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몸 안에 염증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증가하고 항바이러스 유전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감각적 행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스트레스에 반응하며
염증을 일으키는 게놈이 더 많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몸은 힘들어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감각적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자기 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을 찾아가시지요.
그런데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죽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그리고 감각적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에게 “탈리타 쿰!”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는 그 모든 시선을 벗어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편안하고 쉬운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노력을 갖추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맑은 물 한 잔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강론을 아주 짧게 하겠습니다.
우리는 교황 주일을 맞아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냅니다.
내일모레 바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지요.’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특별히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시고 열려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지 말라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넓은 포용력은 바로 참 지혜이신 그분,
당신의 아버지와 그분의 영에 늘 열려 있고, 의탁 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1편에서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축복을 받는가? 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집회서가 말하는 지혜를 지닌 사람인데,
그 지혜를 지닌 사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사람이지요. 기도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도 글자에 매이면 곤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첫 마디에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행복하며,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라는 말씀은
강조어법을 쓰신 것이지, 실제로 자르고 빼어 던져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잔인하신 분이 됩니다.
예수님을 잔인한 분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는 복음서를 묵상할 때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읽고 우리는 늘 필요한 사람에게 물 한 잔 건넬 수 있는
따뜻한 마음,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소금을 맛을 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음에 맛을 내게 하는, 인생에 향기를 풍겨주는, 물 한 잔 건네주는 마음이고,
그것이 참 지혜임을 되새기며 박철 시인의 ‘물 한 잔’을 가만히 읊습니다.
그대에게 물 한잔
- 박철
우리가 기쁜 일이 한두 가지이겠냐마는
그중의 제일은
맑은 물 한 잔 마시는 일
맑은 물 한 잔 따라주는 일
그리고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2,23)
제1독서는 본래 인간이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합니다.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기 전에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은 존재였지요.
그리고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을 닮아가도록 섭리하신 존재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되어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인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며 고통을 겪던 한 여인이 군중 가운데 섞여 예수님 곁으로 다가갑니다.
그녀는 치유를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더 나빠지기만 하는 중이었지요.
그녀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을 겁니다.
그녀의 마음 안에 떠오른 이 강한 믿음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분의 능력에 대한 소문 덕일 수도 있고 오랜 갈망이 낳은 직관 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그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실제로 몸을 움직여 예수님 뒤로 다가갔다는 겁니다.
피를 흘리는 자체를 부정하게 보는 관습의 지배를 받는 현실에서
그런 병을 앓는 여성이 유다인 남성에게 다가가 옷에 손을 댄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지요.
행여 몹시 수치스럽고 난처한 반격을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녀는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희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사려 깊고 다정한지요!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해 주시는 것에 더해,
이 순간까지 겪은 그녀의 조마조마했던 마음까지 살펴 주십니다.
그녀는 몸과 마음 모두 치유받고 온전해집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하혈하는 여인의 일로 잠시 지체하는 사이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오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절망에 빠지려는 회당장의 믿음과 희망을 북돋워주십니다.
그와 함께 가기로 한 이상 딸의 생명은 이미 예수님의 손에 들어 있으니,
회당장은 믿기만 하면 됩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예수님께서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훗날 아버지께서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일으키신 바로 그 능력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이란 극점에서 말씀으로 죽은 이를 일으키신 그 힘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합니다.
결국 생명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의 의학과 과학 기술이 이에 협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생명을 온전히 지배할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렇다면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믿는 우리는 무엇으로 그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
제2독서에 드러난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2코린 8,14)
우리는 이처럼 상호적 기여를 통해 서로를 지탱합니다.
그저 평범하고 부족할 뿐인 우리가 생명을 일으키는
주님의 능력에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나눔과 헌신이지요.
소유와 시간과 힘과 마음을 나누는 것은 자신이 누리는 생명을 덜어내어
조금 더 채워져야 하는 부분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언젠가 우리에게 되돌아와 결국 모두를 풍요롭게 할 에너지로 남습니다.
이 주고받음의 신비를 사도는 "균형"이라 이야기하고,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정의"(지혜 1,15)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 하고 힘차게 격려하시고
또 "평안히 가거라." 하고 다정히 속삭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오신 "생명" 자체인 분이십니다.
주님을 만지기 위해 있는 힘껏 그분 곁으로 다가가 손을 뻗기를,
그리고 우리가 받은 생명을 품고 지금 결핍 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도
손을 길게 뻗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균형을 이루고,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어 갈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원도 영월에 동강이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홍수예방과 농사를 위하여 동강댐을 건설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환경단체와 국민들의 반대로 댐 건설은 취소되었습니다.
정부는 동강 일대를 생태보존지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동강은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강을 찾으면서 지친 마음에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저도 물길 따라 흐르는 아름다운 강을 보았습니다.
물은 스스로 길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물은 길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길을 만들면 물은 그 길로 흘러갑니다.
자연과 환경이라는 길이 있으면 물은 그 길로 흘러갑니다. 결정은 물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사랑하고, 물을 아끼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물길을 바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물길에는 많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라는 푸른 별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왔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머무는 공동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물길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물질과 자본이라는 물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 물길에서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상기후로 인한 재난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자본은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질과 자본은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실공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합니다.
독재와 내전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는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마약을 만들어서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물질과 자본은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물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물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물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처럼 모든 이를 품어주는 사랑의 물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용서의 물길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자비의 물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의 물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희생의 물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나눔의 물길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는 믿음의 물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물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성령의 물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고통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과 자본의 물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사랑과 자비의 물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눔과 희생의 물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난민들이 머물던 람페두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람페두사에 있던 난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티칸에 노숙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 실도 마련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백신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자고 호소하였습니다.
한국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는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국가들에게 백신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작은 기적이라도 청해야 하는 이유: 더 큰 기적을 믿기 위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두 치유의 기적을 소개합니다.
처음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아프다고 하여 치유하러 가시다가 하혈병 여인이 치유됩니다.
하혈병 여인이 치유된 이유는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치유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때 딸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칠 힘을 지니신 저분께서 죽은 사람은 살리실 수 없으실까?’
다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힘이 곧 죄를 용서하는 힘과 같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병을 고치는 힘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은 같은 원천에서 나옴을 말해줍니다.
이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믿음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이의 병을 치유해주고 죄를 사해주며
심지어 생명까지 다시 넣어주시는 힘이십니다.
이렇듯 작은 것을 보고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묵상’에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회당장 야이로는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보며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 야이로는 분명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통해
죽은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분이 영원한 생명도 주십니다.
어떤 것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는 자동차를 고칠 수 없습니다.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칠 수 있다는 말은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으면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은 작게 죽은 것이고, 망가진 것은 크게 죽은 것입니다.
작게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는 분이 크게 죽은 것도 살립니다.
우리 주위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생명의 원천도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믿음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기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루르드 성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르드에서 치유의 기적이 보고된 것은 7000여 건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기적들이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수많은 의사의 오랜 조사가 필요합니다.
이때 ‘루르드 의료국’이 소집되는데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분야의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적의 조사는 10여 년이 소요됩니다.
그렇게 루르드 의사국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 인정되고,
또 그것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초자연적 현상이라 믿어지는 기적은 현재까지 70건입니다.
기적중의 단 1%만 이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마지막 70번째 공식적 기적은 2018년에 공인된, 하반신 마비가 치유된 한 수녀님의 사례입니다.
‘베르나데트 모리오’ 수녀는 허리 신경근이 압박을 받아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허리 통증과 하반신 마비 증상은 그가 27살이던 1966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4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1980년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한쪽 다리는 완전히 뒤틀려 보조기구를 착용해야 했으며 휠체어에 의존해 이동했습니다.
또한, 통증을 참기 위해 상당량의 모르핀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2008년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순례했습니다.
당시 순례를 “은총의 원천”이라고 회상한 수녀는
“신기하게도 성모 동굴에서 성모와 성녀 베르나데트를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녀는 순례 동안 고해성사를 하고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수녀는 “당시 나는 치유를 바라지 않았다.”라면서
“그저 회심하길 바랐고 환자로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보베에 있는 수녀원에 돌아온 수녀는
특이하게도 몸이 편안해지며 전체적으로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녀는 한쪽 다리를 고정했던 보조기구를 풀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이를 풀었으며,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했던 신경자극기도 뗐습니다.
이후 수녀는 어떤 기구의 도움 없이도 걷기 시작했습니다.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루르드 의료국은 모리오 수녀의 치유 사례를 2009년과 2013년, 2016년 3차례에 걸쳐
면밀히 조사했으며,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에 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는 수녀의 치유가
“현재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베노아-고닝 주교는
“모리오 수녀가 이렇게 갑자기 완전히 상태가 호전된 것은 기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며
이 사례를 기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사례 중 특이한 것은 63번째로 공식 인정된 기적입니다.
주인공은 비또리오 미켈리(Vittorio Micheli)라는 이태리 사람입니다.
그는 군복무 중인 22세 때에 좌측 골반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검사를 거친 후 그해 6월 4일에 그의 병명은 치명적인 악성 종양으로 밝혀졌습니다.
일 년가량 군 병원에 머물며 종양으로 잠식된 엉덩뼈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관절은 냉혹하게도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루르드에 순례를 하러 갈 때도 골반에서 발까지 석고 붕대를 하여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샘물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태리로 돌아왔을 땐 외관상 상태가 호전된 것으로 보였고
군인의 신분이었기에 그는 트렌토의 군 병원에 다시 입원하였습니다.
군 병원에서 여러 번 X선 사진을 찍었지만 제대로 판독을 못 해서
의료진은 그의 상태가 이전과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그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여
통증이 없어졌으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료진은 “그의 골반이 뚜렷하게 복구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루르드를 방문했고 루르드 의료국에 의해
“이러한 치유에 대해선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어졌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지 13년이 지난 1976년 5월 26일에
트렌토의 알렉산드로 고따르디 대주교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으로 특별히 중재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잃었던 시력이 회복되고 암 덩이가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큰 기적입니다.
모리오 수녀 같은 경우처럼 40년 동안 휠체어를 타던 분이
연세가 들어서 두 발로 가뿐히 걷게 된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런데 비토리오 미켈리 같은 경우 암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요,
그것 때문에 잘렸던 뼈가 다시 생겨나 다리 길이가 같아졌다는 것은 더 기적입니다.
우리 주위엔 크고 작은 기적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신자들의 기도로 죽었던 사람까지 다시 생명이 되돌아온 예도 주위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묵상하다 보면 믿음이 더 강해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이 세상을 마치 여행하는 것처럼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면 이 세상도 즐기지 못하고
나를 해칠까 봐 사람을 평생 두려워하며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러 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아
시간을 빼앗은 하혈병 여인 때문에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 때문에 믿음이 더 증가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 만드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망가진 것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분명 다시 만드실 능력도 있는 분이십니다.
작은 치유라도 바랍시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부활을 바라는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망가진 묵주를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회복 불가능일 때
다시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