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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심에 대한 주님의 약속 18:9~11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약속대로 보호하심 18:12~17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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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밤에 환상 중에 주님이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시며, 그와 함께해 그를 지키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바울은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며 말씀을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법정에 끌고 가 고소하나, 총독 갈리오는 그들의 고소를 거부하고 그들을 쫓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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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심에 대한 주님의 약속 18:9~11
풍성한 전도의 열매가 있고 난 후에는 사탄의 방해가 강하게 따릅니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개종하자(18:8)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기에 더욱 심하게 바울을 박해했을 것입니다. 이에 주님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바울을 격려하십니다. 주님은 바울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도시 안에 그분의 백성이 많다고 하십니다. 이는 고린도에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으니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라는 촉구입니다. 주님의 위로와 사명 수행의 말씀을 들은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지내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도록 사역자들을 지키십니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가장 든든하고 안전한 보호책입니다.
● 더 깊은 묵상
환상 가운데 주님은 바울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나요?
작은 일로도 두려워하는 나를 주님은 어떻게 격려해 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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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보호하심 18:12~17
유대인들은 바울을 처리하지 못하던 중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해 오자 기회를 잡습니다. 새로 부임한 총독이 민심을 의식해 자신들의 간청을 들어주리라 여긴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유대의 종교적 규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바울을 고소합니다. 갈리오는 제국 내의 사회적 범법 행위에는 관여하겠지만, 유대의 종교적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주님은 이방인 갈리오 총독을 사용해 바울을 유대인들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에서 때리며 분풀이를 하는데, 이는 소스데네가 바울을 동정하는 편에 섰기 때문으로 봅니다. 주님은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을 지키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며 고소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도우셨나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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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우리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 영적 침체와 불안이 우리를 상하게 하고 불신앙의 자리로 몰아갑니다. 결국 그것을 이기지 못하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도 상황이 바뀌어도 상급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전적인 순종의 자세가 하나님의 시간을 당긴 예는 있지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질러 하나님의 때가 단축된 적은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결정권을 주님께 맡기고 평안을 누렸습니다. 삶의 결정권을 주님께 맡겨 드린 바울에게는 이제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 어떻게 주님 말씀을 전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한순간의 생각에 따라 엄청나게 비참해질 수도, 비겁해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항상 담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도 타협의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맡겨 드릴 때, 그는 두려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최고의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교회를 치유한 편지 / 김서택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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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 : 사도행전18장 9~10절
주님은 바울에게 친절히 설명하시며, 침묵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이 바울과 함께하셔서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중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막무가내의 명령이 아니라 친절한 설명으로 사명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지도자의 언행에 따듯함과 친절함이 묻어날 때, 공동체에는 사명에 대한 열정이 살아납니다.
주님이 명하신 일에 자신을 드리고 있다면, 주님의 보호를 누리는 안전함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 캐럴 메이홀
오늘의 기도
하나님, 두려움에 눌려 한 발 내딛기도 힘겨운 제게 함께하심을 약속하시니 감사합니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당혹스럽고 위협적일지라도,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머물러 가르치고 선포하게 하소서. 모든 상황에서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담대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47 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끌고 가십니다.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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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라 그 땅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가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심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들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부어 주실 것임을 믿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잘 해 나가도록 하자
- 항상 주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면서, 늘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삶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자
고린도에서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실제로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유대인 대적자들이 법정에서 바울을 고소했을 때에 총독 갈리오를 통해 보호하셨습니다 만약 총독이 유대인 대적자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면 바울의 전도는 로마 관할 아래 있는 모든 지역에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총독은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고, 헬라인들이 바울을 무고한 회당장 소스데네를 법정에서 때렸지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총독이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벌처럼 에워싸도 주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니 항상 안전할 줄 믿습니다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시118:12~13)
왜냐하면 세상 끝날까지 반드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주만 우리의 피난처 삼기 원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118:8~9)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세상 앞에 담대하기 원합니다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10:35)
또한 그 담대함으로 주께 나아가 은혜를 얻기 원합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왜냐하면 주는 우리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1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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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중에 환상 가운데 주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신다.(9)
1. 두려워 하지 말라.(9)
2. 잠잠하지 말라.(9)
3. 말을 하라(9) 라고 격려하신다.
아마도 바울이 두려움과 공포가운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격려하실 뿐만이 아니라 약속을 하신다.
1. 주님께서 너와 함께 있겠다 약속하신다.(10)
2.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10)
3. 이 고린도 성에 내 백성이 많이 있다(10) 라고 확인해 주신다.
사실 고린도는 항구 도시이고 교통의 중심지고 상업이 발달 한 곳으로서
매우 부도덕한 대명사로 구약이 소돔과 고모라가 꼽힌다면
신약에서는 단연 고린도가 꼽힐 정도로 음란과 죄악이 가득한 도시였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죄악이 흐르는 암흑의 거리에서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통하여 1년 6개월이나 머물면서(11)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11)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철학이 넘치던 아덴에서는 복음을 거부했지만
죄가 많은 도시 음란이 판을 치던 도시 고린도에는 복음이 꽃을 피우게 된다.
세상의 미련한 자를 택하사 지혜 있는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
약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고린도를 변화시키게 하신다. 아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에 감사한다.
대략 3년에 걸친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이 마무리 되고 있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른 바울은 뜻밖의 복음사업의 동반자이자 동역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다.
유대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하여 증거하나 오히려 대적하고 훼방하므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작심을 한다.
이 때에 밤에 주께서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격려해 주셨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아무도 너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환상중에 약속하시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 지고 있는 지의 실체를 보여 주신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이 되었을 때(12)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끌고간다.(12)
고소장의 내용이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13) 라는 내용이다.
마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 많은 유대인이 십자가에 처형한 것 처럼
칭찬 받아야 할 일로 고소를 하고 있다.
바울이 답변을 하기도 전에(14) 갈리오 총독이 간단히 정리해 버린다.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스스로 처리하라(15) 라고 재판 자체를 기각해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해 가시는 방법이다.
지난 환상 가운데 보여 주신 말씀의 응답이다.
바울이 대답하기도 전에 재판이 기각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이 있고
대적할 자가 없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고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도 경건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용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본다. .
유대인들은 소송이 기각되자 이상한 행동을 한다.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구타를 한다.(17)
괜한 분풀이를 하는 것 같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의 고린도 사역을 정리하고 고린도를 반환점으로
2차 선교여행의 정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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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생이 살아가고 있는데
, 첫째, 자기만 아는 개미와 같은 인간.
둘째, 남에게 해만 주는 거미와 같은 인간.
셋째, 남에게 유익을 주며 사는 꿀벌과 같은 인간이 있다”고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서 이렇게 획일화 시켜서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분은 우리에게 어떤 성찰을 주기 때문에 도움이 됩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나름대로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그 사람의 현재의 삶을 정당화시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강제로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경영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좋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좋은 것을 추종할 수 있는 이성과 지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좋지 않은 곳으로 끌고 간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몰아갔다든지, 혹은 다른 상처나, 환경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 삶의 자세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갈리오 형 인간 - 신사적인 이기주의자
첫 번째 유형은 갈리오형 인간입니다. 갈리오 형 인간은 대단히 좋은 사람 같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의 일에는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유익이 없는 일에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냉랭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베이컨의 분류에 따르면 개미 형 인간이 될 것입니다. 사실 개미형 인간은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성실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 성실하면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산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할 때를 같이해서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제거할 소요를 일으킨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부임한 사람이 다수의 사람들이 바울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판단이 서질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고소가 다른 지능적인 사두개인들과는 좀 다릅니다. 13절입니다.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그랬습니다. 쉽게 말해서 율법을 어긴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율법과 갈리오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갈리오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갈리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고소를 들은 갈리오는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일이라면 내가 고소를 들어주는 것이 가하지만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없다고 한마디로 기각해 버립니다. 그런 일에 재판장 되라고 내가 파견된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전도 여행에서 갈리오와 같은 로마 관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비교적 공정한 로마 관리 때문에 바울은 전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갈리오 형의 인간이 좋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선 좀 더 관찰해 보겠습니다. 자신들의 고소가 기각 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게 된 상황 앞에서 유대인들은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 소스데네를 집단 구타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법정에서 집단 폭력이 행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소스데네에게 분풀이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소스데네가 이 일의 주동이었고 추진위원 이었던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틀림없이 이렇게 하면 바울을 잡아들일 수 있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기각되고 기독교는 더 좋은 위치를 점하게 되자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리오는 그 광경을 보면서 방관했습니다. 쓸데없는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인품이 뛰어나고 많은 학문을 가지고 있었던 갈리오였지만 그는 방관자였습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은 모른 체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해도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이 갈리오입니다. 바울을 잡아들이지 않고 너희 문제는 너희끼리 해결하라고 했다고 해서 그가 기독교에 호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만 방관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대인들의 모습이 갈리오 형과 닮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갈리오 형의 인간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나와 관계된 일이 아니면 철저하게 방관하는 세상!!!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저 역시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라는 마음으로부터의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일에는 성실한데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형입니다. 그래서 성실하고 나무랄데 없지만 왠지 정이가지 않는 사람이 갈리오형 인간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갈리오에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힘이 듭니다. 어떻게 더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유대인 형 인간 - 잘못된 신념 형 인간
두 번째 인간형은 유대인형 인간형입니다. 이들은 남에게 주로 해를 끼치는 인간형입니다. 유대인 형 인간들은 잘못된 확신과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적극적으로 사회를 망치는 인간들입니다.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면서도 항상 큰소리치는 사람들.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런 인간들이 많은 사회는 늘 시끄럽고 소란스럽습니다. 다툼이 많습니다.
교회나 사회에 가장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잘못된 신념, 잘못된 확신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절대로 남의 말을 들어주는 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다 보면 공동체성을 깨트리기가 다반사입니다. 다툼이 많습니다.
기왕에 예수를 믿으려면 바른 기독교 세계관에, 바른 성경 관에 서 있는 기독교를 믿으십시오. 기독교와 자신의 세계관을 혼합한, 기독교와 우리나라의 전래 종교를 혼합한 기독교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독교를 온전한 기독교로 혼동하는 순간 우리는 유대인형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인간형 - 생명을 살리는 인간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끼친 가장 위대한 유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생명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갖은 고통과 핍박과 어려움 속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그 복음을 전한 것에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기 전에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니까 그것이 나실인의 서원과 관계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서원이 무엇이었는지 단서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머리를 깎는 것은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머리를 깎습니다. 축복을 받았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셨구나 하고 느꼈을 때 머리를 깎습니다. 왜요? 제 2의 인생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욱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나실인과 같은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경우는 서원이 있을 때 머리를 깎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이 있습니다. 앞으로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어떤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보겠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2차 전도여행이 끝나가는 시점에 바울은 지난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서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9절에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에베소에 잠깐 들렀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들러서 무엇 합니까? 또 복음 전합니다. 생명의 소식입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값진 일입니다. 한 번 생명을 걸어볼 만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때 브리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숙소에 머물러 두고 자신만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핍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자신 혼자만 당하겠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생명을 살리는 인간형으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했던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간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훨씬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일생을 드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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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그런데 어느 날 밤에 환상 가운데 주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바울과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도 바울에게 손을 대서 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도시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나의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자 사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의 극심한 핍박이 계속되자 바울의 마음 가운데 큰 두려움이 생긴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2:3절을 보면 바울이 그들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드러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심령이 위축되고 전신이 마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갖고 기도한 것 같습니다. 밤에 기도할 때 환상 중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바울을 친히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아무도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습니다. 또한 잠잠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이 심해지자 더 이상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고 잠잠히 있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또 그동안 너무 말씀을 열심히 전하여 입이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말씀의 종이 가만히 있게 되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피곤한 생각이 들고 잠잠히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든지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고린도 지역에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13:48)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다(고린도전서1장21).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기록함)
11절을 보시시오.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기간에 이렇게 오래 머물기는 처음입니다. 바울은 내 백성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린도에서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때로는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무엇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제자양성의 결과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나타난 놀라운 병의 치료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머물러 쉬고 생각을 정리하며 제자양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과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때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내서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핍박을 많이 받고 재림 신앙에 문제가 있었다는 걱을 알게 되고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머무는 그 기간에 데살로니가서를 기록하면서 핍박에 대한 정리와 놀라운 재림신앙에 대한 정리를 하게 하십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들고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합니다. 하지만 디도데가 돌아온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신앙에 들떠서 일도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교회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그 서신으로 인한 오해마저 발생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두 번째로 서신을 보냅니다. 그 시기는 고린도 사역 말기 쯤 A.D. 51년 말-52년 초순으로 보입니다.
(바울을 고소하는 사람들)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2-17절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또 핍박을 받는 사건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왔을 때입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으며 로마 총독이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갈리오가 주후 51년 6월경에 아가야 지방의 새 총독으로 임명받아 그 해 여름에 고린도로 부임하여 약 1년 동안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장차 황제가 될 네로의 가정교사였던 철학자 세네카(주전 4년-주후 65년)의 형이요 유능한 로마의 정치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에 많은 제자가 서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일제히 일어나서 바울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고소하였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한다는 유대인의 종교적인 문제로 고소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대교 신앙으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율법주의는 은혜 신앙을 핍박합니다.
(재판하기를 원치 않는 갈리오)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바울이 막 입을 열어 총독에게 자신이 아는 복음을 변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변명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갈리오가 유대 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인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관련된 일이면, 내가 여러분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여러분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면, 여러분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합니다. 나는 이런 사건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으니 자치권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갈리오는 그들의 고소 내용을 듣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일 줄 알고 기각시켜 버렸습니다. 갈리오는 바울의 메시지가 유대교에 대해 허용했던 로마법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판결 덕택으로 로마법이 유대교에 부여했던 보호를 기독교도 10년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 소스데네의 변화)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총독은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지 못하자 예수를 믿은 회당장 소스데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너를 해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 바울을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재판정 앞에서 때렸습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 일에 조금도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소스데네는 동족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참고 견디어 바울의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고전1:1).
18장 18절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뢰아 아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며 이차 전도여행을 합니다. 이제는 이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다시 안디옥에 가서 잠시 쉼을 얻고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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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9-10절) 바울은 자기 자신도 힘들었고 고린도는 그냥 지나쳐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백 번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에는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시는 백성이 많이 있었습니다. 안 된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지 않고 안 된다고 말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함만 보고, 안 되는 이유만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약함만 보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주저앉기만 하지는 않았습니까? 주저앉느라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약하다고 주저앚지 마십시오. 약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작할 때 가장 연약하였던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가장 길고 강력한 사역이 되었고, 가장 위대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모든 문이 닫혔다고 느낄 때 하늘 문이 열립니다. 내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하나님의 힘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때입니다.
약할 때 강함되시는 놀라운 하나님을 바울은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러하기를 기도합니다. 약할 때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약할 때 조금 더 인내하십시오. 조금 더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1.하나님 홀로 하시는 역사
우리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일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인데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진행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해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린도에서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과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라는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그 당시 아가야는 갈리오라는 사람이 총독이었습니다. 바울이 세상 법정에 고소되었을 때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갈리오라는 사람의 마음에 의해 기독교의 운명이 좌우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리오는 놀라운 판결을 내립니다.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본 것입니다.
이 당시 로마는 로마의 태양신과 유대인의 유대교를 포함한 중요한 몇 종교만 종교로 인정하고 다른 종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갈리오가 어떻게 판결하냐는 아주 중요하였습니다. 갈리오가 내린 판결은 사실 정확한 판결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가 아닙니다. 후에 로마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독교를 박해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고린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서는 갈리오의 판결로 인하여 한동안 기독교는 법의 보호를 받고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이 어려웠었습니다. 모든 조건이 너무 취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법적인 부분을 만지셔서 기독교인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이나 다른 사람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미리 준비하시고 인도하셨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피할 수 없는 힘든 길은 우리가 아무 한 일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미리 방지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분이 아시는 방법으로 그 분이 행하시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찬양을 해야 합니다.
2.하나님의 일꾼
고린도에서 바울은 고군분투를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18절)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서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원이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하면서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이 기간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먼저 헌신하는 것이며, 또한 한나처럼 그 간구가 이루어졌을 때 어떻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원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일방적으로 간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낮추며 스스로 삼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그것을 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거룩한 약속을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고린도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서원하였던 것입니다.
고린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바울이라는 거룩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바울을 일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홀로 다 하지 않으시고 때로는 그 일꾼을 사용하십니다. 그 일꾼의 거룩한 헌신을 사용하십니다. 그 일꾼의 서원을 사용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의 일꾼이 자신의 헌신과 희생없이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어떤 희생을 하고 있습니까?
서원을 해 본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서원하며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 치는 바울의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작은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더 감사하십시오. 정직한 헌신(또하나의 욕심이 동반된 헌신이 아니라. 정직한 헌신은 승패에 개의치 않음. 헌신은 그 자체로 이미 받아진 것이기에)을 통해 우리의 작은 몸부림이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8월3일 동인천상가와 북광장 프르지오 아파트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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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 아가야 지역의 신임총독인 갈리오에게 그곳의 유대인들이 일치단결하여 바울을 법정에 고소했다는 말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원래 하나님 신앙으로 똘똘 뭉쳐진 자들로, 오직 율법에 살고 율법에 죽는 모세오경의 신봉자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바울은 눈의 가시 같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던 하나님을 바울도 전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하나님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해 그들에게만 구원을 주는 분입니다. 이방인을 제외하는 매우 협소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은 온 우주, 온 세계의 하나님이었건만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그러나 결코 잘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틀 안에 가둔 하나님만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바울을 고발합니다. 영적인 일을 세상 공권력에 호소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존심 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세상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그것도 고린도의 전 유대인들이 동맹하니, 오직 한 사람 바울을 위해서입니다. 마치 예수그리스도를 제거하기 위하여 온 유대 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왕까지 연합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시기, 질투, 미움과 살인 등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 마귀의 것, 세상 것들이지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그렇게도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막상 속에는 하나님 대신 사악한 세력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늘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더라도, 능력 있는 은사자일지라도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선한 것들이 들어 있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죄 성으로 인해 우리 마음속에는 악독한 것들이 잔존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거룩한 영으로 우리 몸을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영이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육신이 우리를 곧장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유대인들이 세상 권력에 고발한 사건입니다. 그리스인들도 사람인지라 서로 섭섭한 일도, 다툴 일도, 억울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고소고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고 또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에 너무나 어긋나는 것들이라 그렇습니다.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를 단칼에 일축하고 그들을 쫓아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부끄러워야 하며 자존심 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사람보고 판단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상 재판관으로부터 그 문제는 아예 재판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요즈음도 교회 재정과 성도의 명예 및 이권개입 등으로 법정 싸움이 있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고소고발한다면 갈리오의 후예들이 이렇게 판결하지 모릅니다. 일사부재리! 왜 2,000년 전의 일을 반복하여 어지럽게 하냐고…… 한번 재판한 것은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으니 당장 이 신성한 법정에서 나가라! 그렇게 빈축을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천사를 종으로 부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신분에 먹칠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보다 먼저 행하시고
날마다 그 전능하신 손길로 붙들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예비된 영혼들을 만나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역사를 체험하는
주님의 제자로 걸어가는 복된 발걸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이끄시고
세상 가운데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주시는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찾아가 만나주시고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일하심에 순종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