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하다보면 사역지를 옮겨도 이따금 생각나는 성도가 있다. 두 부류이다. 한 부류는 적응하는데 유난히 힘들어하거나 형편과 처지가 어려운 성도이다. 적응은 잘 하고 있나, 형편은 좀 나아졌나 싶어 생각이 나는 것이다. 또 한 부류는 믿음이 남달리 좋은 성도이다.
정 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전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집사님이다. 정 집사 부부는 믿음이 남달라 늘 생각나는 부부이다. 집사님은 지방에서 근무를 하다 지금은 서울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서울로 발령을 받은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승진을 하게 되었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부장님이 인사기록카드를 살펴보고서 왜 여태 승진이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승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생각지도 않게 승진을 했다는 것이다.
함께 신앙생활을 할 때에 그 집사님 부인이 무슨 말 끝에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돈을 써 승진을 하는데 정 집사(남편)는 그렇지 않아 아직 승진을 못하고 있어요.”하나님께서 정 집사의 믿음을 보시고 양심 있는 직장상사를 만나게 하여 승진을 시켜주신 것인지 아니면 그 직장 상사가 바른 분이어서 바르게 일을 처리하여 승진을 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정 집사는 그렇게 승진을 했다.
사업이나 직장생활을 해본 성도라면 누구나, 교회 내에서는 혹 몰라도 교회 밖의 사회에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 부부는 십 수 년을 보아오지만 세상 정신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 부부는 주변 사람 중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 돕는 일까지 한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위해 십의 2조 이상을 사용한다. 십의 1조는 본 교회에 하고 또 십의 1조 이상은 직접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는 은퇴 후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어느 은퇴 목사님을 매달 돕다가 그 목사님이 소천하시자 다른 사람을 돕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 부부가 대궐 같은 집을 지니고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발령이 나 서울로 올라간 후 전세 자금도 부족하여 은행에서 전세대출을 받아 전세로 살아가고 있다. 돈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항상 빠듯한 법,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까지 하니 분명 힘들 것임에도 자신들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승진 문제도 그렇다. 후배들이 돈을 써 자신보다 먼저 승진을 하게 되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 부부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아니, 감수한다는 단어는 그 부부에게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 같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일까?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지적하였듯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다양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다, 자연 재해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건강을 유지한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집, 나은 가정, 나은 직장을 갖는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명성을 얻는다, 높은 지위와 권세를 얻는다. 등등.
그리스도인 중에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 삶의 목적을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런 성도를 가리켜 육신적 성도라고 부른다. 육신적 성도들은 주된 관심사가 현실 문제의 해결이니만큼 그 일이 최우선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는 일 역시 그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다.
반면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거룩한 삶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 정 집사 부부와 같은 성도들이다. 성경은 그런 성도를 가리켜 신령한 성도라고 부른다. 신령한 성도의 삶의 목적과 방식은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승진도, 사업도 하나님 방식으로 할뿐 아니라 잠시 맡겨준 부나 재능, 권세 등의 사용도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들과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서도 사용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하는 목적도 바로 거룩을 위해서요, 기도 하는 것도 거룩을 위해서다.
나는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대화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웃음을 금치 못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어느 때냐고 여쭙는다. 제자들의 말뜻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식민지 생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살고 있었는데 성령님이 오시면 언제 해방을 시켜주어 좀 평안하게 살게 해주실 것이냐는 뜻이다.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목적을 완전히 오해하여 동문서답을 하는 모습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원수의 나라 로마로부터 해방되어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므로 하나님의 때에 맡겨드리고 너희는 오직 성령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하늘나라를 건설하라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얼마나 부하게 살 것인지, 어떤 권세를 가질 것인지 등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너희는 오직 하늘나라를 건설하면서 거룩하게 사는데 진력하라는 것이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삶의 문제를 손수 해결하려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한과 때에 맡겨드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아처럼 직접 생존을 해결하며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세상 사람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불안하고, 조마조마하지 않겠는가. 마치 매사를 직접 챙기는 사장이 어느 날 유능하다고 소문난 친구가 찾아와 ‘이제부터 내가 도와줄 테니 너는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바르게만 일처리를 해라. 그러면 내가 모든 것을 잘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당장 완전히 믿고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많은 이익을 내며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자기만 바르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이익이 덜 나는데 어찌 회의가 생기지 않겠는가. 거기에다가 가난한 이웃들까지 도우라고 하니 그 말 믿었다가 정말 쪽박 차는 것 아닐까. 혹 사람들에게 ‘병신, 혼자 거룩한 체 하다가 승진도 못하고, 사업 다 말아 먹고’ 비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나만 바보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찌 들지 않겠는가.
만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보면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사울 왕과 같은 사람보다 삶의 목적을 거룩에 두며 살아간 신령한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인도해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존경하는 요셉이요, 다니엘이요, 다니엘의 세 친구요, 다윗왕이요, 모르드개요, 모세요, 느헤미아요, 아사왕이요, 아사왕의 아들 여호사밧왕이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인 룻 등등이다. 설령 그리 아니하신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늘의 영광스런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삶의 목적을 거룩에 두며 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따라 전에 고락을 함께 한 여러 성도들이 더욱 그립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