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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 불꽃 사르고, 그 희생양이 되다
자신의 사상에서 배태된 조선을 반대했던 세력의 정신적 지도자…
변혁의 심도가 깊었던 만큼 불행도 커졌던 비극의 주인공
▎이색 사상이 뿌리를 내린 성균관 명륜당.(사진 가운데)
성균관은 크게 학습 공간과 제사 공간으로 나눠진다. 학습 공간의 중심이 명륜당이다.
공민왕은 성균관 대사성에 이색을 임명했다.
그래서 이색은 성균관에 나가 관생들과 학문적 토론에 몰입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른 고목에 꽃이 피듯, 강력한 정신적 열정이 분출되었다.
드디어 유학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본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색은 유종(儒宗), 즉 유학의 종장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정도전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색은 온건한 토지개혁과 고려 왕실의 존속을 주장했다
이색(李穡, 1328∼1396)은 ‘유종(儒宗)’이다. 유학의 종장이란 뜻이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색의 삶은 이 한 단어로 요약된다.
‘유종’이야말로 이색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고, 역사에 남긴 위대한 족적이기 때문이다.
고려왕조가 초기부터 유종으로 인정한 사람은 설총과 최치원이다.(<고려사> 현종 11년, 13년)
9재 학당을 세운 문종 대 최충(崔冲, 984∼1068)도 유종으로 일컬어졌다.(<東國通鑑> 고려 문종 7년)
모두 한국의 정신세계에 큰 유산을 남긴 학자들이다.
하지만 울림의 크기에서 이색과 비교할 수 없다.
유학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본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색을 통해서다.
1367년(공민왕 16) 거듭된 전란으로 황폐해진 성균관이 중수되고, 학교가 다시 열렸다.
기숙사인 사서재(四書齋)와 오경재(五經齋)에 100명의 학생을 수용했다.
기숙사 이름을 보면 ‘성리학’이 새로운 성균관의 중심 학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자가 사서를 유학의 중심 텍스트로 확정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지만 당시의 집권자 신돈이 성균관 개축을 후원했다.
화엄종계 승려인 그는 이제현과 그 문생들을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
그런 그가 뜬금없이 ‘공자는 천하 만세의 스승”이라고 칭송했다.
공민왕은 성균관 대사성에 이색을 임명했다.
그래서 이색은 성균관에 나가 관생들과 학문적 토론에 몰입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른 고목에 꽃이 피듯, 강력한 정신적 열정이 분출되었다. “
이색은 성균관의 학생 정원을 더 늘리고 경술(經術)을 공부한 김구용(金九容)·
정몽주·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을 발탁해 현재 직책과 함께 교관을 겸직하게 하였다.
그 전에는 성균관 생도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이색이 부임하자 성균관 학칙을 개정해 매일 명륜당(明倫堂)에서 경전별로 수업하고,
강의가 끝난 뒤에는 토론을 벌여 지루한 것을 몰랐다.
이에 배우려는 생도들이 운집해 서로 감화를 받으니,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했다.”(<李穡傳>)
성리학, 국가의 지적 영역에서 헤게모니 장악
▎몽골 버르노르솜 초원. 원 제국은 몽골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 과거시험 자격을 부여했다
당시 김구용은 민부의랑으로 성균직강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관생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비록 휴가로 집에 있어도 질문하는 생도가 잇달았다.”(<金九容傳>)
권근의 기록에 따르면, 이색은 성균관 강의 뒤 벌어진 난상토론에서 마지막 해석자 역할을 했다.
“이때 이색은 언제나 공정한 입장에서 분석하고 판단을 내렸으며,
반드시 정자와 주자의 뜻에 맞도록 애썼다.
이리하여 우리 동방에 성리학이 크게 일어났다.”(<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그 커다란 에너지가 넘쳐흘러 조선건국과 유불교체로까지 이어졌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당시 고려사회는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 덕흥군의 난, 왜구의 발호,
그리고 거듭되는 기근과 홍수가 남긴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견 한가하게 보이는 이런 사업에 착수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당대의 여론도 그랬다. 하지만 이색은 생각이 달랐다.
“주상께서 바야흐로 학문을 흥기시켜 교화를 먼저하고 형명(刑名)을 뒤로했다.
그러나 유교의 효과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세상은 오히려 ‘물정에 어둡다’는 비판을 그치지 않았다.”(<送江陵道按廉金先生詩序>)
하지만 이 일은 역사를 바꾸었다.
안향 이후 유입된 성리학은 처음으로 관학의 지위를 차지했다.
국가의 지적 영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안향-백이정-이제현-이색>의 계보를 따라 개인적으로 전수되던 성리학이
하나의 집단적인 정신운동이자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운동은 고려의 사상을 교체하고, 왕조를 바꾸었다.
변혁기는 단순한 정치적 수완 이상의 것,
즉 시대를 통찰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깊은 지성이 필요하다.
14세기 말 한국의 사상과 국가의 변혁을 초래한 운동은 이색에 의해 점화되어 역사의 큰 불길로 타올랐다.
하지만 그 불길은 너무 뜨거워 이색의 개인적 삶도 완전히 불태웠다.
그는 변혁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 시도가 너무나 성공적이고, 그에 따라 변혁의 심도가 깊었던 만큼 불행도 커졌다.
“세상에서 식자로 살기 어렵네”
▎<고려사> ‘열전’ 중 이색 조.
이색의 가문은 한미했지만 23세에 과거에 급제해 입신의 길을 걸었다
조선건국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색의 역할과 의미는 양면적이다.
조선은 그의 사상에서 배태되었으나,
그 자신은 조선건국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세 개의 큰 변혁 속에서 탄생했다.
첫째는 대륙에서의 원명 교체,
둘째는 전제개혁,
셋째는 유불(儒佛) 사상교체이다.(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37쪽)
이중 이색이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유불교체다.
이색을 통해 성리학이 비로소 고려의 정치와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배출된 인물들이 조선건국의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제개혁에 반대했다. 원명교체에 따른 대외정책 변경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색의 종국적인 정치 행로는 자신의 정신적 산물과 대결하는 것이었다.
정신과 세계가 분열된 것이다.
아니, 정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세계의 변화가 더 컸던 것이다.
이색의 개인적 삶이 불행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색은 1328년(충숙왕 15),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외갓집이 있던 곳이다.
당시 세계사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대평화 아래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1349년 원 국자감에서 수학하던 22세의 이색은
“지정 기축년 그때는, 온 세상에 옷과 곡식이 풍부해서(四海富布粟),
비단 한 필 값이 고작 베 네다섯 필, 가난한 사람도 살 수 있었네.”(‘錄婦言’)라고 회상하고 있다.
하지만 파국의 먹구름이 빠르게 밀려들고 있었다.
소빙하기가 이미 시작되었고, 1331년 허베이에서 흑사병이 발생했다.
1336년 일본에서는 60년에 걸친 남북조 전란의 막이 오르고,
그 여파로 1350년 40여 년에 걸친 왜구의 준동이 시작되었다.
1351년 중국에서는 기아와 홍수, 폭정에 지친 농민이 붉은 두건을 두르고 봉기했다.
기후변화와 전염병, 기근과 전쟁이 겹치면서 무질서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대평화는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 세계사의 중심이 동에서 서로 이동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원이 멸망하고 명이 들어섰다.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일본에서도 천황 지배체제를 복구하려는 기도가 무산되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색이 살았던 때는 한마디로 격동의 시대였다.
단순한 변화기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바뀌는 대 변동기였다.
변화의 시대를 사는 것은 어렵다. 지식인의 삶은 더욱 어렵다.
인텔리겐챠는 삶에서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의미를 묻기 때문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매천 황현은 자결했다.
그가 남긴 절명시 중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 역사를 생각하니,
세상에서 식자로 살기 어렵네.”(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이색도 삶의 종국에 그렇게 한탄했을 것이다.
이색의 아버지는 이곡(李穀, 1298∼1351)이다.
아들 이색보다는 못하지만, 그 역시 일세의 명사였다.
<고려사>에 부자가 별도의 열전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이곡과 이색은 그런 경우다.
이색 가문의 성장을 보면 권보(權溥), 이제현의 아버지 이전(李瑱)과 흡사하다.
지방의 세습 아전가문에서 과거 급제를 통해 급격한 신분 상승을 이룬 것이다.
역사학에서는 이들을 ‘신흥사대부’라고 부른다. 정치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지방에서 부가 축적되고, 그 부를 바탕으로 지식을 습득한 계층이 발생하고,
그들에게 문을 열어준 정치사회 제도로서 과거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인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거의 한 세대 만에 자신의 가문을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런 일은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힘든 일이다.
이를 보면 원 지배기의 고려사회가 사회적 이동성이 매우 높은 열린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원나라 과거 제과에 도전했던 이곡
▎경북 안동의 고산서원. 이색의 15대 손 대산 이상정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 건립됐다
이색의 가문도 원래 한미했다.
아버지 이곡은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 타곤 했다.”(<稼亭集> ‘借馬說’)
서른 살 되던 해 이곡의 인생길이 막힌 적이 있었다.
그는 과거 동기생(同年)에게
“한미한 가문, 시골 출신의 선비는 자기 힘만으로는 현달할 수 없다”
(寒門窮巷之士 固不能自達, <稼亭集> ‘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며, 관직을 구걸하는 편지를 썼다.
과거에 합격해 재능을 인정받았어도, 추천하고 끌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이자성(李自成)을 포함한 이색의 조상은 대대로 한산(韓山, 현 충청도 서천군)의 군리(郡吏)였다.
이곡은 13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공부에 매진하여 20세인 1317년 국자감시에 합격했고,
3년 뒤 1320년 과거에 급제했다. 그때의 시관이 바로 이제현이었다.
당시 원의 수도 연경(燕京=北京) 만권당에서 충선왕을 모시고 있던 이제현은
시험을 주관하기 위해 잠시 고려에 돌아왔다.
그 시험에서 이름 없는 집안 출신의 이곡을 선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현-이곡-이색’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 사상운동의 계보가 탄생했다.
급제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이곡의 꿈은 더 원대했다.
그는 원나라 과거시험인 제과(制科)에 도전했다.
원의 과거제는 인종(仁宗) 대인 1315년부터 시작되었다.
원은 개방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몽골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과거시험 자격을 부여했다.
최종 선발 인원은 몽골·색목인 50인, 한인(漢人)·남인(南人) 50인으로 총 100명이었다.
민족 성원에 따른 성적별 인원은 제1갑 3인, 제2갑 15인, 제3갑 32인이었다.
(<元統元年進士錄>; 이익주, <이색의 삶과 생각>, 290쪽) 시험자격은 평등했지만, 경쟁은 불평등했다.
인구 비율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1등 신민인 몽고인·색목인은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했다.
한인은 금나라 지배를 받던 북부 중국인, 여진인, 거란인, 고려인으로 총 20%였다.
남인은 남송의 유민으로 78%나 됐다.
이런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남인들은 이를 높이 평가했다.
1334년 이곡이 고려에 돌아올 때 송별의 글을 써준 진려(陳旅, 1288∼1343)는
타이완을 마주보고 있는 복건성 포전(莆田) 사람으로 남인이다.
그는 당대의 거유 우집(虞集)의 지기였으며,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조세연(趙世延)의 강력한 추천으로 북경에 올라와
국자조교(國子助教)의 직임을 맡았다. ‘민중(閩中)의 명인(名人)’으로 불린 그는 이곡에게 말했다.
“그대가 돌아가서 나라 사람과 친구들을 보거든 다음과 같이 말하라.
‘황상은 문명(文明)한 덕을 지니신 분으로,
유능한 인재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시기 때문에 원방(遠方)의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선비는 자기가 쓰이기에 적합하지 못할까 걱정해야지
중국이 자기를 쓰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稼亭集> ‘送李中父使征東行省序’)
진려와 함께 이곡에게 송별시를 써준 게해사(揭傒斯, 1274∼1344) 역시 강소성 풍성(城丰) 출신 남인이다.
원대 4대 시인으로 알려진 그도 제과의 개방성이 원의 위대함이라고 보았다.
“적임자는 본래 출신을 따지지 않고(立賢本無方), 인재를 뽑는 것도 법도가 있으니,
중국의 위대함을 이를 통해 알고서(始識中國大), 만방이 이를 본받으려고 하네.
”(<稼亭集> ‘送李中父使征東行省序’)
2등, 3등 신민에게도 경
▎목은 이색을 모신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
오른쪽 아래의 건물이 위패를 모신 사당인 효정사이며 효정사 앞 건물이 유생들을 가르치던 진수당이다.
고려에서도 의견이 같다. 1321년(충숙왕 8) 제과에 급제한 최해(崔瀣, 1287∼1340)는
“우리 거룩한 원나라에서는 천하의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며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인재를 등용할 때에도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있다”고 평했다.
당송대에도 빈공과(賓貢科)가 있어 신라, 고려인 급제자가 많았지만,
이는 “본래 과거를 거행할 때마다 별도로 치르는 시험으로서 급제자 명단의 끄트머리에
이름을 덧붙일 뿐 정식으로 급제한 사람 축에 끼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제수하는 것을 보더라도 낮고 한산한 관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어떤 때는 관직도 없이 그냥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稼亭集> ‘送奉使李中父還朝序’) 개방성과 포용성이야말로 제국의 필수 덕목이다.
몽골은 제한적이지만 타민족이 지배계층에 오르는 길을 완전히 막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몽골족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 처음 몽골을 통일했을 때 몽골 인구는 70만∼100만 정도였다.
쿠빌라이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몽골 제국 전체 유목민 수가 425만 정도였다.
그중 5분의 1만 쿠빌라이 휘하 내몽골에 거주했다.(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159쪽)
정복한 중국인이 1억 명 정도였으니, 100만이 1억을 통치해야 했다.
따라서 유라시아에 걸친 방대한 제국을 통치하자면 협력자를 구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이 때문에 2등, 3등 신민에게도 경쟁의 기회를 준 것이다.
몽골제국의 큰 특징인 포용성은 유목민의 관습이자 그런 현실적 필요성에서 나왔다.
1326년 29세의 이곡은 정동행성 향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향시는 과거 예비시험이다. 원제국 전체 선발 인원 300명 중, 고려의 쿼터는 3명이었다.
향시 합격 뒤에는 원에 가서 2, 3차 시험인 회시(會試)와 전시(殿試)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곡은 1327년 회시에 실패했다.
고려의 과거에 급제했을 때 그는 안동의 복주사록참군(福州司錄參軍)이라는 지방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방을 벗어나려고 노력한 듯하다.
하지만 아무 배경도 없는 시골뜨기 한사(寒士)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봄이 와 모든 꽃이 천홍백자(千紅百紫)로 활짝 피었는데,
뒤 그늘에는 가지 하나가 여전히 푸른 채 남아 있다.(背陰一枝 依舊靑靑)
이곡의 글에 묘사된 가지 하나(一枝), 그게 자신의 모습이었다.(‘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
청운의 꿈을 품은 그도 기가 죽었다.
청탁을 위해 고관의 집에 이르면 집 앞에 함정이 있는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높은 관모를 보면 귀신처럼 보여, 감히 머리를 들 수 없었다.
한동안 그는 인생은 운수가 있다고 믿으면서 초연한 척 지냈다.
“나는 일찍이 사람의 빈궁과 영달은 운수가 있는 것이니,
그것을 구한 것도 운수요, 구하지 못한 것도 또한 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구하다 얻지 못하여 무안해하는 것보다는 구하지 않고 얻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
운수가 있으니 이리저리 분답을 떨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쓰며 분경(奔競: 지지 않으려고
몹시 다툼)하는 친구들이 다 잘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단엄·강직하여 사람들이 존경했던 부친 이곡
▎매년 3월 성균관대학교 대성전에서 열리는 춘기 석전대제.
석전대제는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집에는 늙은 어머니가 있었다. 옛사람도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한데도 벼슬하지 않음은 불효라고 했다.” 아기도 태어났다.
이색이다. 이제 누추해지는 것을 어찌 부끄러워하랴.
이곡은 얼굴을 붉히며 옛 친구에게 청탁의 편지를 썼다.
그렇게 쓴 편지건만 아무 효험이 없었다.
궁벽한사가 과거 급제에 만족하지 않고 제과까지 도전했으니,
개경 명문세가 사람들은 그가 분수를 모른다고 생각했음직하다.
어쩔 수 없게 된 그는 어린 이색을 안고 고향 한산으로 낙향했다.
자부심 높은 선비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는 것은 죽음만큼 고통스럽다.
환로의 길은 멀다.
1331년(충혜왕 1) 이곡은 비로소 정9품 예문검열직을 받아 경관(京官)이 되었다.
과거에 합격한지 이미 10년이 넘었지만, 그나마 천행이었다.
충혜왕은 암군(暗君)이었다. 하지만 이곡에게는 구세주였다.
그런데 이런 신산을 겪으면서도, 이곡은 오랜 꿈을 버리지 않았다.
1333년 마침내 제과에 최종 합격한 것이다.
한인·남인 제2갑 15인 중 제8명으로 합격했으니, 합격자 중 상위 22%에 들었다.
다시 진려의 말을 들어보자. “원통(元統) 원년(1333)에 천자가 친히 책문(策問)으로 진사를 뽑을 적에,
내가 외람되게 염내(簾內)의 신분으로 시권(試券)을 검토하였는데,
고려의 이곡이 답한 대책문이 독권관(讀券官)의
인정을 크게 받아 을과로 뛰어올라 급제하였다.”(<稼亭集> ‘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
염내란 시험성적을 매기는 사람이다. 염외(簾外)는 감독관이다.
제과에 도전한 지 8년 만이었으니, 이곡이 강인한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성품은 “단엄하고 강직하여 사람들이 존경했다”(性端嚴剛直 人皆敬之, <李穀傳>)고 한다.
흐트러짐이 조금도 없고 굳세고 곧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 둥그스름하고 덤덤한 이색의 초상화로는 아버지 이곡의 이런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높은 성적으로 합격한 덕분에 원 정부는 정7품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그를 임명했다.
황제의 사명(詞命)을 짓고 역사를 기록하는 직책이니, 학문과 문장을 인정받은 것이다.
“글을 지으매 붓을 들면 곧 이루어져 문사(文辭)가 엄하고 뜻이 깊으며
전아(典雅)하고 고고(高古)하여 감히 외국인으로 취급할 수 없었던 것이다.”(<李穀傳>)
이곡은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듯하다.
“재화(才華)는 한림원에 입직함이 적격이요,
언어는 통역관과 대화해도 무방하리.(話言何妨象胥通)”(<稼亭集> ‘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
상서(象胥)는 통역관이다.
그 이전에는 고려 사람이 “비록 제과에 합격하였어도 대개 하열(下列)을 차지했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은 독권관(讀券官)의 칭찬을 크게 받아 제2갑(第二甲)에 두어졌다.”(<고려사>
충숙왕 후2년) 진려에 따르면, 이전의 고려인 제과합격자는
“대부분 말단으로 급제하는 대열에 끼이곤 하였으므로 정동행성의 재속(宰屬)에 임명되거나
가까운 주군(州郡)에서 벼슬하거나 하였는데,
일단 귀국하고 나면 곧바로 그 나라의 현관(顯官)이 되었을 뿐
다시 서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수레 타신 사신을 향인(鄕人)이 모두 알아보리”
▎경북 영덕 영해면 괴시리의 영양 남씨 집성촌. 이색이 태어난 외갓집이 있었던 곳이다.
1334년 이곡은 황제의 ‘흥학조(興學詔)’를 받들고 고려에 파견되었다.
단순한 사신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
진려는 “황상(皇上)이 크게 학교를 일으킬 적에, 이중보(이곡)가
제서(制書)를 받들고 동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에 조정에서 인정을 받은 것을 가지고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림은 물론이요,
나아가 향당까지 영광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썼다.
제과에 합격한 뒤 처음으로 돌아오는 금의환향의 길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입신이자 부모의 기쁨이요, 고향 한산의 영광이었다. 원 정부는 이런 점을 다 고려한 것이다.
그래서 원나라 지인과 동년들이 이곡을 위해 송별시를 짓고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진려(陳旅)가 서문을 썼다.
그 글이 <가정집(稼亭集)>에 실린
“이중보가 정동행성에 사신으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문”(‘送李中父使征東行省序’)이다.
송본(宋本, 1281∼1334)의 송시(送詩)를 보자.
“수레 타신 사신을 향인(鄕人)이 모두 알아보리,
압록강 머리에서 그 옛날 기수(棄繻)한 그분임을.”
기수란 비단으로 만든 부신(符信)인 수(繻)를 버린다는 뜻으로,
웅지를 품고 서울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이곡은 연경을 향해 압록강을 건너며, 청운의 꿈을 이루지 않으면 다시 이 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을 것이다. 이제 그 꿈이 이루어져 황명을 받든 사신으로 수레를 타고
‘선홍빛 조복(袍色猩紅)’을 입고 압록강을 향하고 있다.
길거리에 나와 사신행차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전 압록강을 건너던 그 사람이 사신임을 알고 크게 찬탄한다.
수레에 탄 사신도 어깨가 절로 으쓱해진다. 계속되는 시를 보자.
“중국 조정에서 고선(高選)하고 귀가하는 분을 보면, 섬궁(蟾宮)의 계자(桂子) 향기가 특별히 풍긴다네.
동국 출신으로 등과한 여섯 번째 사람, 아름다운 그 자취 금림(禁林)의 봄을 독점했네.
모쪼록 원통(元統)의 임금님 은혜(君恩)가 막중하다고,
고당(高堂)에 계신 백발의 모친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중국 과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선발되어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달나라 궁전의 계수나무 향기가 풍긴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것을 “달 속의 계수나무를 꺾었다(月中折桂)”든가
혹은 “달나라 궁전의 계수나무를 꺾었다(蟾宮折桂)”라고 한다.
가을 시험이 음력 8월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으로서 여섯 번째로 제과에 합격한 이곡은 그 뛰어난 자질로
황궁에서 열린 그해 봄 과거시험의 영광을 독차지했다.
원통은 원 순제의 연호로, 이곡이 과거에 합격한 1333년이 원년이다. 순
제의 은혜가 무거움을 고향에 계신 백발의 노모에게 전해주시오.
말이 전언이지 어머니에게 그만큼 기쁜 소식이 어디 있으리오.
수레를 타고 금의환향하는 분위기를 시간에 따라 가장 잘 묘사한 것이 게해사(揭傒斯)의 송시다.
“멀리서 그리워했던 압록강 동쪽의 땅, 갈수록 눈에 보이리 고향의 푸르른 산.
조서가 왔다는 말을 국왕이 들으면, 예의를 갖추어 교외에서 맞을 것이요.
하늘은 맑고 바다엔 파도가 없는지라, 부로들도 지팡이 짚고 경청하리니.
덕화가 성함을 거듭 보고서는, 온 천하가 황령을 우러르리라.”
귀국하는 이곡을 맞이하기 위해 왕까지 출영했다. “환영하는 소리가 도성을 진동한다.”(郭嘉)
공식 일정이 끝나면 고향 한산에 간다. 정겸(程謙)의 송시를 보자.
“황궁에서 조서를 삼가 받들고 나와, 진사의 신분으로 금의환향하시는 분.
자개상에 맛있는 해물 한껏 차려 올리면, 백발의 어머니도
안색이 기쁘게 펴지시리라.(白髮慈親顔色喜)” 또 이듬해
이곡을 송별하는 백문보의 송시를 보자.
“황명으로 부모를 뵙는 것(歸覲)을 허락받았나니, 휘황하게 빛나는 사신의 행차여,
은전(寵典)이 부모님에게까지 미쳐, 두 분을 봉한 교지(兩封芝牒)가 향기로우니,
구천의 아버님도 물론 감격하시겠지만, 살아 계신 어머님 기쁨이 또 어떠하리오,
고당에서 색동옷 입고 춤을 추면서,
정성을 기울여 축수의 술잔을 바쳤다오.”(<稼亭集> ‘送奉使李中父還朝序’)
양친께 황제가 은전을 내렸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감격했을 것이고,
살아계신 어머니의 기쁨은 한량없었을 것이다.
그 어머니를 모시고 집안에서 잔치하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아이가 되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께 오래오래 사시라는 축수의 술잔을 올렸다.
“짚신 삼는 어머니의 노고가 항상 부끄러웠다”
이곡은 13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는 홀몸으로 이곡을 키웠다.
그런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의 큰 기쁨이다.
하지만 그 후 이곡은 자신의 꿈을 좇아 이역만리로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지난 고생을 회상하며 이곡은 상념에 젖었다.
1345년 무렵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형에게 사모곡(思母曲)을 보냈다.
“어버이 하직하고 또다시 연경(燕京)의 나그네 신세,
모친 봉양에 애쓰시는 형님이 못내 그리워라.
소싯적에 고생하면서 송도(松都)에 우거할 적에, 짚신 삼는 어머니의 노고가 항상 부끄러웠소.
다행히 풍운(風雲)의 시대에 중국의 수도에 들어와서,
뜻을 봉양(養志)하며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 은혜에 보답하려 하였소만,
어머니는 점점 늙어가고 형제들과도 떨어져 있으니,
단란하게 함께 웃고 얘기하는 것이 훨씬 낫겠소.
리 멀리 고향 산천 오래도록 소식 없어, 늙
고 병든 나머지 꿈속엔 언제나 어머님. 이별하고 해 넘기며 그저 글만 부쳤으니,
아우의 머리 남김없이 흰 것을 아실 리야.”(<稼亭集> ‘次韻答家兄’)
송도에서 공부할 때 어머니는 온갖 고생을 하셨다. 그게 마음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이제 황제의 지우를 받아 중국 수도에서 근무하고 있다.
풍운이란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준말로, 임금과 신하의 좋은 만남을 말한다.
성공했으니, 이제 어머니의 육신만 아니라 뜻까지 받들면서 지극한 효성을 다하고 싶다.
꿈꾸면 언제나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늙으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모르시겠지만,
이 자식도 벌써 머리가 백발이다.
하지만 해 넘기며 달랑 편지 한 장 부쳤을 뿐이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 걸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이런 내용의 편지다.
1335년 고려 정부는 그를 종4품직에 임명했다.
불과 5년 만에 아홉 계단을 뛰어넘은 것이다.
제과 합격 한 번으로 그는 숙명 같은 출신의 굴레를 모두 벗었다.
다시 진려(陳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질이 우수한 고려의 인재들이 고려의 과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경사(京師: 燕京)에 와서 응시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나라에서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조정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훨씬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록 말단으로 급제하여 시시한 관직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 나라에서는 매우 영광스럽게 여기는 터인데,
더군다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화려한 근시(近侍)의 직책을 차지함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영예로 여기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稼亭集> ‘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
부자 간에 걸친 구양현과의 깊은 인연
이곡이 제과에 합격한 것은 36세의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이곡이 처음 귀국할 때 구양현(歐陽玄, 1283∼1357)이 준 송시를 보자.
“과거급제 늦었다고 걱정할 것 뭐 있으랴, 높이 뛰어올라 이미 티끌세상 벗어난걸.
공작과 난새도 문채를 빌리려 할 것이요, 봉황도 이웃 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리.
역마 타고 어버이 뵈러 돌아가면서, 조칙 받들고 높이 날아가누나.
중국의 상서로움(中國瑞)이 이미 되었으니,
이제는 고향 사람(故鄕人)을 빛내 주셔야지.” 늦은 나이에 급제했지만,
일거에 일반 세상을 뛰어넘었다.
공작과 난새 같은 귀조(貴鳥)도 그 아름다움을 빌리고 싶어 하고,
봉황 같은 서조(瑞鳥)도 친구로 허여한다.
이제 조정의 마차를 타고 성근(省覲)하러 가면서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간다.
중국에서는 이미 충분히 빛났으니, 이제 고향에 가서 옛 벗들을 영광스럽게 해주게.
구양현은 호남성(湖南省) 사람으로, 역시 남인이다.
원에서 과거제가 시작된 1315년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대제(翰林待制)에 임명되었다.
이곡이 제과에 합격한 1333년은 ‘한림원직학사(翰林院直学士)’로 봉직하고 있었다.
당시 한림원은 원 제국 최고의 문사(文士)들이 모인 곳이었다.
구양현 역시 시와 역사에 정통한 대학자이자 치국의 방책에도 조예가 깊은 경세가였다.
성호 이색은 그런 구양현의 문집을 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원사(元史)>에도 ‘구양현의 글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歐陽玄之文何可得也)라고 하여,
그를 칭찬함이 이 같은데도 그의 유집(遺集)을 얻어 볼 수 없으니 한스럽다.”(<星湖僿說> 10권, ‘人事門’)
구양현과 이곡 일가의 인연은 깊다.
1354년(공민왕 3) 아들 이색이 제과에 응시했을 때
시험을 주관한 독권관 중 한 사람이 바로 구양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색의 대책문을 보고 “크게 칭찬했다(大加稱賞)”고 한다.(<李穡傳>)
또한 의발(衣鉢)이 해외로 전해졌다고 말했다.
이색의 시에 나온다. “의발이 해외로 전해질 줄 누가 알았으랴(衣鉢誰知海外傳),
규재의 한 마디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齋一語尙琅然)”(<牧隱集> ‘紀事’, <東史綱目>
공민왕 3년 3월) 이색의 문장이 중국인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뜻이다.
규재는 구양현의 호아다. 의발 이란 승려의 가사와 바릿대로, 불교에서 진리를 전하는 징표이다.
그런데 이 말이 세월이 지나면서 확대 해석되었다.
구양현이 이색에게 학문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허균에 따르면, 구양현은 탄식하며,
“나의 의발은 마땅히 해외의 그대에게 전하겠다.”(吾衣鉢當從海外傳之於君)고 말했다 한다.
(<惺所覆瓿稿> ‘惺叟詩話’중 ‘李穡見稱於中國而遭時不淑’)
좀 과장된 해석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색은 부자간에 걸친 구양현과의 깊은 인연과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이색이 태어난 외갓집 영덕에 괴시리(槐市里)가 있다.
이곳은 동해로 흐르는 송천이 있고 늪과 호수가 있어 원래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이었는데,
이색이 괴시리로 고쳤다고 한다. 구양현의 고향이 괴시였기 때문이다.
구양현의 고향은 호남성 유양(瀏陽)이다.
중국 최고의 절경으로 유명한 동정호가 있는 곳으로, 회나무 혹은 홰나무(槐木)가 많았던 모양이다.
회나무의 한자는 귀신 귀자가 들어 있는 형성 문자로,
회나무는 귀신을 쫓는다고 한다. 그래서 궁궐이나 서원, 향교 앞마당에 많이 심었다.
군자나무라고도 하는데, 수백 년 된 거목이 많다.
다음에는 이곡의 나머지 생애와 청년 이색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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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해어름' 님.
좋은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