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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1일 나운영은 아버지 나원정(羅元鼎),
어머니 박정순(朴貞順)의 4남1녀 중 4남으로
서울시 서대문구 천연동1)(구 의주로 1가 112번지, 현 미근동 220번지) 109번지에서 출생2)하였다.
나운영은 중학교 입학할 때만 해도
꼭 음악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브라스밴드에 들어가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실제로 악기를 다루다보니
어느덧 음악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8월 9일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 세계제패를 했다는 신문 호외를 읽어 본 나운영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나라는 없어도 개인이 우수하면 민족의 이름을 빛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음악을 통해서,
작곡을통해서, 손기정 선수처럼
민족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6월 4일 성악가 유경손과 명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에 얽힌 일화도 무척 흥미롭다.
두 사람의 인연은 5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서울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유경손은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백조합창단 지휘자로 계시는 박태현 선생을 찾아가
의논을 드린다.
선생은 일본에 가면 자신의 제자인 나운영을 찾으라고
소개장을 써 주셨으나 유경손은 모르는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낫다고 생각하여 일본에서 유
학중인 정희석 선생에게 연락을 하여 소개를 받고 일본
고등음악학교 본과 성악과에 입학한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믿던 유경손은 동경 신주쿠에
한국 사람만 다니는 교회인 신주쿠 쓰노하즈新宿角笑교회를 찾아가고 여기에서 알토 독창자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유경손은 크리스마스 축하예배 때 부를 특별찬양을
준비하였으나
그 교회반주자는 찬송가 반주 정도의 실력이어서
반주를 맡아줄 사람을 찾게 된다.
마침 당시 성가대 지휘자인 김진하 선생이
“우리 학교에 작곡과 학생으로 피아노도 아주 잘 치는 나운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참 착실한 사람이니까
내가 반주를 부탁해 보겠다.”
고 한 후 다음 주일 오후 나운영과 함께 교회로 왔다.
유경손은 ‘아. 이 사람이 박태현 선생님이 소개하신
바로 그 사람이구나’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중히 오른손으로 고동색 중절모를 벗어서 왼쪽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제가 나운영입니다.”라는 인사말 외에는 수줍은 듯 다른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반주만 아주 편안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나운영은 같은 유학생인 이동훈의 소개로 이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취임하였으나
1943년 둘 다 귀국할 때까지 피아노 연습실에서 한 번 마주친 것 외에는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만남은 없었다.
1943년 둘 다 귀국한 후 유경손이 신인음악회에 출연하였는데,
연주가 끝난 후 나운영이 무대 뒤로찾아와 잘했다고 칭찬하며
앞으로 자기 곡도 많이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번 가곡집은 모두가 1953년 피난 중
부산에서 작곡된 것뿐입니다.
그중46편은 유경손 독창회 때에 초연되었고
12, 15, 23편은 정달빈 목사님의 초청
에 의하여 해군본부교회에서,
그리고 30편은 한국 교회음악협회 음악예배 때에
역시 그에 의하여 초연되었습니다.
이 가곡집은 모두가 교회음악으로서
복음 전도를 위한 감상용으로 작곡된
것이므로 그리 새로운 스타일을 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제한된 범위 내에서 되도록 자유스러운 수법을 활용하여 보았습니다.
1962년(41세) 1월 11일 안익태 선생 지휘 교향악 연주회에
대한합창단 출연하였고 다음날 안익태 선생님과 회담을 하였다,
1월 19일『 음악형식론』(민중서관)을 출판하고
다음날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그 머리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건축을 평할 때에 설계도를, 또한 회화를 논할 때에
구도를 검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곡을 제작하거나 감상하려면 먼저 음악형식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있어야 한다.
물론 화성학의 지식만 가지고도 짤막한 악곡 쯤은 작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본격적인 대규모의 작품 -특히 기악곡-을 쓸려면 음악형식론을 반드시 이행(履行)해야 된다.
나운영에게 드디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 지긋지긋했던 연좌제가 폐지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북에 가족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운영은 그동안동경유학시절 자신을 이끌어 준 은사조차 찾아뵙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었다.
3월 3일~17일 드디어 나운영은 연세콘서트콰이어를 이끌고
그 첫 번째 해외연주여행을 일본 오사카大阪로 떠났다.
나운영은 그동안 편지로만 안부를 물어 왔던 은사들을 찾아뵈었는데, 첫 번째로 5일 재능교육으로 너무나 유명한
스즈키 신이찌(松下眞一) 선생을 만나 뵈었고,
10일 남영우 선생, 아사히나다까시(朝比奈 隆) 선생을 만나 뵈었다. 13일 이수철 씨를 면회하고,
15일 은사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郞) 선생을 찾아뵈었고,
키지마(貴島) 선생도 만나 뵙고 귀국하였다.
3월 30일 연세콘서트콰이어 귀국 연주회를 가졌다.
4월 15일 <제2회 서울음악아카데미 음악회>를 서울YWCA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이 음악회 프로
그램에서 나운영은 다음과 같이 인사를 하였다.
1. 기술이 끝난 데서부터 예술은 시작된다.
2. 인격과 기술을 갖춘 음악가가 되자.
3. 세계성을 띠운 민족음악을 창조하자.
이 세 가지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정진을 거듭해 온
서울음악아카데미의 두 번째 발표회를 맞이하면서
조기교육과 종합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다만 여러분의 아낌없는 성원을 바랄 뿐입니다.
5월 8일 연세논총 9호에 논문 「제주도 민요의
작곡학적 연구 1」을 발표하였다.
6월 6일 오후 3시 서울성남교회에서 담임목사
이해영 목사의 집례로
오형범, 한경숙 장로와 함께 서울성남교회 장로 임직을 받았다.
1974년(53세) 1월 28일 메시아 합동 대 연주위원회
이사로 취임하였다.
2월 25일 한국찬송가 위원회 주최로 선명회 수양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개편찬송가의 재개편을
주장함」이란 제목으로 발제 강연하였다.
2월 26일「 교향곡 제12번 ‘남과 북’」 작곡을 착수하여 3월 6일 완성하였다. 이 곡은 현악기군을 Ordinario와
Scordatura의 2조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말하자면 Scordatura를 처음 시도한 작품인데,105) 스코르다투라(Scordatura)란 현악기의 개방현을 보통 때와 다르게 조율하는 기법으로,
나운영은 정상 조율된 현악기군과 변칙 조율된 현악기군을 대비시켜 남과 북을 묘사한 것이다.
3월 1일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에 정식으로 취임하여
첫번째 사업으로 5일『 연세음악 55년사』를
출판하고 9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나운영은 이 책에 실린 「빛나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글에서
‘우리 연세대 음악대학은 비록 18년밖에 안 되지만
이미 55년이란 뿌리가 깊게박혀버렸으니
단연 선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기에 역사와 전통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고
또 무시하려 한다고 해서 무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106) 연세음악
의 뿌리는 1918년부터임을 강조하였다.
즉 나운영은 연희전문학교 음악부(1918~1955)의 37년을
제1기 요람기로,
연희대학교 신과대학 종교음악과(1955~1964)의 9년을
제2기 태동기로,
그리고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으로 승격한 1964년부터를
제3기 개화기로 보아 1973년까지의 9년을 합쳐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역사를 55년으로 본 것
제145회 (1992년 3월) 성가의 토착화와 현대화 및
성가에 의한 교회일치운동에 관심을 가지시고
부디 참여하셔서 은혜와 기쁨을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찬송가로 하나님께 봉헌하던 것이 어느덧 성가로 바뀌고 있다.
나운영은 제1회부터 25회까지는 주로 개편찬송가, 합동찬송가,
새찬송가의 가사 중 잘 불리어지지 않는 찬송가 가사를 가지고 작
곡을 하였고, 26회부터는 한국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가지고 찬송가를 작곡하였다.
그런데 찬송가를 300곡이 넘게 작곡을 하다 보니 자신이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나타날 조짐이 생겨
났다. 나운영은 평소 자신의 곡을 자기 스스로가 표절하는 일이 생겨나서도 안 된다고 말을 하곤 했었
는데, 300곡이 넘어서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전에 발표한 찬송가와 엇비슷한 곡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이다. 찬송가 가사라는 것이 7·5절이나 7·4절로 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가사에 맞추어 작곡을 하
고, 더욱이 나운영이 평생 주창해 온 한국화성을 덧입히니
판에 박힌 듯한, 유사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운영은 이것을 피해 나가기 위해 제39회부터는 찬송가와 함께 독창곡, 합창곡 등의 성가를 포함하며
스스로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145회까지 진행하는 동안 이 봉헌예배에
기독교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특히 이해인 수녀님은 가사도 작사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수녀님들과 함께 자주 봉헌예배에 참석하였었다.
나운영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에는
구교나 신교의 구분은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 봉헌예배를 통해 교회일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Mass(Kyrie-Gloria-Agnus
Dei-Sanctus-Benedictus-Credo로 구성된 미사곡) No.1~3을 작곡하였다.
나운영의 생각은 1992년 1월 제143회 봉헌예배에서 발표된 김경수 작시 「하나 되게 하소서」에 잘
나타나 있는 듯해 여기에 일부를 소개한다.
주 예수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계의 모든 교회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교파를 초월하여 인종차별을 넘어서서
온갖 벽을 허물어 하나의 마음 하나의 교회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 모두 하나 되게 하소서 (후략)
10월 21일 오전 나운영은 집에서부터 자신의 서재가 있는 가락동 운경유치원을 향해 혼자 걸어가다가 길에서
급작스런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급히 경찰병원으로 옮겼으나
소179 내 손의 피가 마를 때까지
생치 못하고 소천하였다.
평소 100살까지 살 거라면서 건강을 자신했던 그였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어쩔 수 없었다.
나운영은 소천하기 하루 전날 밤 수요예배를 드리러 가는 차 안에서 느닷없이 유경손에게 물었다.
“나도 천당에 갈 수 있을까?”
“물론이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1,105곡이나 작곡했는데 당신이 못 가면 누가 가요?”하고
유경손이 답하자,
“그럴까?” 하고 말했다고 한다.127)
나운영은 평소 가족들에게 “난 아프면 안 돼”라는 말을 자주 해 왔다.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
프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기 기운이 조금만 있어도
콘택 600을 먹고 이불을 뒤집어쓸 정도로
자신의 몸을 아껴왔다. 더욱이 항상 걸어 다녔기 때문에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할 수있었고,
식사도 소식小食을 하였으며,
수면습관은 ‘눕자마자 코를 드르렁’ 하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나운영 자신은 그날 무언가
를 느꼈었나보다.
나운영은 이 해 1월 시드니에서 만난 크리스챤 리뷰 편집국장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79년 9월부터 1990년까지의 12년은 나의 창작의 공백기가 절대로 아니라 창작의 모색기(실험기)였다.
1993년부터는 소신껏 나의 제4기가 시작된다.”
그렇다. 나운영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지칠 줄 모르는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던것이다.
1979년 9월이라면 그가 한국찬송가 작곡을 결심하고
실행한 해이다. 한국찬송가 작곡에 매달
려 다른 작품 활동은 별로 하지 못했던 그 세월을 나운영은 창작의 모색기라 하고 있다.
실제 그의 메모를 보면 구상 작시의 ‘나사렛 예수’를 기반으로 한「 교향곡 제14번」과 김경수 작시의
‘해방의 노래’를 기반으로 한 「교향곡 제15번」을 구상하는 등, 제4의 창작기를 위해 준비한 흔적들이
남아 있고, ‘한국양악 100년사’와 ‘난파의 생애와 예술’을 집필하고자 자료를 모아온 봉투들이 캐비넷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운영을 부르셨다.
1,105곡의 한국찬송가면 충분하다고 하신 듯….
127) 유경손 자서전 301쪽.
180 내 손의 피가 마를 때까지
나운영은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대로 ‘그의 손의 피가 마를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작품을
남기다가’ 조용히 하나님 품에 안겼다.
나운영이 소천한 그 날은 오전에는 날씨가 아주
쾌청했었는데, 정오경 거짓말처럼 갑자기 어둠이
내리며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기상이변이라 생각되던 그 시각,
집에서 자신의 서재를 향해 걸어가던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나운영의 몸은 식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영은 뜨겁게 불타며 하나님 곁으로 올라갔고,
그의예술혼은 그의 작품으로 남아 영원히 우리 곁에있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집안 내력대로 나장裸葬(관을 쓰지 않는 장례법)으로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대전공원묘원(충남 연기군) 양지바른 곳에 안치되었다. 무덤 앞 비석에는
“한국음악의 선토착화 후현대화의 굳은
신념으로 일평생 많은 연구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하나님 품에 안기다”라
고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펼쳐진 악보처럼 깎아서 만든 상석이 놓여 있는데,
이 상석에는 나운영의 친필을 그대로 새겨 만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악보 일부분이 조각되어 있다. 128)
그가 하나님 품에 안긴 다음 해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예술인으로서는 최고의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금관문화훈장은 문화 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5단계의 훈장 중 가장 등급이 높은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