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昌德宮)은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궁으로,
특히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으로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창덕궁은 고려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개성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한산의 줄기인 응봉산 자락의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더 많이 쓰인 궁궐로,
임진왜란때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임금들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었다.
1902년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인정전
삼도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으나 양쪽으로 품계석이 보인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 이방원은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며,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지었다.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태종은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다.
1408년 태조 이성계도 이 궁에서 죽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창건당시 6만평에서 지금의 15만평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점차 지금의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인조25년 1647년에 재건하였는데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다.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다.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지어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예인 순종비와
일본에서 귀국한 영왕과 비 이방자, 왕세자인 구와 줄리아 비 그리고 비운의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냈다.
창덕궁 전경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를 설치하였다.
1907년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알 수없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개조·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주변에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고,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 여러 차례 화재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이 훼손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동궐도를 기준하여 오랫동안 복원기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비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조선왕조의 가장 중요한 궁궐이다.
2. 창덕궁의 배치도
① 선정전 - 평상시에 왕이 머물면서 나랏일을 보던 곳
② 금천 - 궁궐 내에 있는 하천으로 궁궐 밖으로 흘러 나가 청계천에 합류
③ 돈화문 - 창덕궁의 정문으로 평상시에는 항상 닫아 두었어요. 임금이나 외국 사신이 출입 할 때만 열었다.
현재 서울에 있는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④ 인정전 - 창덕궁의 대표 건물로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했다.
⑤ 부용정 - ‘+’ 자 모양의 정자로 연못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다.
⑥ 애련정 - 군자의 덕을 상징하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가진 작은 정자다.
3. 건축과 구조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다.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또한 풍수지리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잡고 있다.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은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의
주요 건물이 좌우 대칭의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해 궁궐의 위엄성을 강조했다.
반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자유로운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한다.
정문인 돈화문과 금천교,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두어 건물배치가 여러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산세에 의지해 지은 궁궐로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산기슭에 마을을 만들었다.
창덕궁도 이런 원리를 따랐다.
산세에 따라 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자리 잡도록
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이상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모습을 멀리서 보면 산과 중첩되어 풍광이 뛰어나다.
멀리서 본 창덕궁은 삼각산과 북한산의 산들과 중첩되어 그 조화가 아름답다
창덕궁 안에는
1.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2.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3.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과
4.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5.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다.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후원은 500년이 넘은 거목과 자연적인 지형에 꽃과 나무를 심고 연못과 정자 등을 배치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이처럼 창덕궁은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룬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참고 : 문화재청>
첫댓글 역사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