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김장은 배추 열두 포기를 세 번에 나눠서 했다.
작년에만 해도 한 번에 다 했는데..... 김 여사의 기력이 급격하게 약해진 것 같아 걱정이다.
걸핏하면 ‘아이고 허리야’하며 드러눕기 일쑤다.
‘이러다가 취사며 청소, 음식 쓰레기 버리기까지 내가 손수 해야 하나’ 덜컥 걱정이 앞선다.
“아빤 엄마 건강이 염려되는 게 아니라 고작 그딴 게 걱정이 된단 말이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딸내미의 새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퇴근하고 애들 밥 차려주고 음식 쓰레기 버리는 거 제가 다 해요.”
조심스레 딸애의 말을 거드는 아들애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중고생 과외지도를 하는 며느리는 항상 바쁘다.
“그러게 우리 먹을 것 서너 포기만 하라니까.....”
“아~들은 우짜라고.....”
“아~~ 걔들이야 돈푼깨나 있는 녀석들이니까 마트 김치를 사다 먹든 백화점 김치를 사다 먹든 할 것 아냐!”
“당신은 어째 그리 인정모리가 없습니꺼!”
김 여사, 벌겋게 양념이 묻은 배추 포기를 함지박에 패대기치듯 덜퍼덕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쉬더니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당신 그 잘난 글씨, 밤늦도록 편집해가 유튜브에 올려주는 아가 당신 딸이고,
걸핏하면 컴퓨터가 잘 안된다, 핸드폰이 잘 안된다고 전화하면 우리 집으로 먼저 퇴근해서
고쳐주는 아가 당신 아들이라예.....”
"걔들은 젊고 우린 늙었잖아! 허리 아프단 소릴 말던가....”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 그만하고 예~~~저짝에 있는 카나리 액젖통이나 이짝으로 갖다 주소.
그라고...... 마트에 가가 굴이나 한 팩 사와 가,
김치보쌈해서 마누라보다 더 좋아하는 막걸리나 실컷 드세요.”
머쓱해진 나는 서둘러 잠바를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김장철이어선지 굴 값이 많이 올랐다. 엊그제 팔, 구천 원하던 게 만 원이 훌쩍 넘는다.
굴 한 팩을 사고 막걸리 한 병을 샀다. 두 병은 사지 않는다. 그래야 술을 덜 마시게 된다.
벌건 속 김치에 굴보쌈을 해서 막걸리 마실 생각에 발길이 바쁜데
과일 코너에 진열된 단감이 발목을 잡는다.
허리 아프다고 누워 있다가도 단감이라면 벌떡 일어나는 김 여사다.
다섯 개들이 한 꾸러미에 오천 원이란다. 두 개를 샀다.
하늘이 온통 뿌옇다.
오늘따라 마스크가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언제 쯤일런지....
한줄기 찬바람이 불어오자 가로수 잎이 약속이나 한 듯 우수수 떨어진다.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내려놓는 거예요'
서울시청 앞 대형 현수막 글귀가 생각났다.
'그래...거창한 계획일랑 세우지 말고 그저 '작은 바람'이나 갖자'
“누가 단감 사 오랬나! 그기 얼마고? 엄청 비쌀긴데..”
예상했던 반응이다.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된통 야단맞을 게 뻔하다.
“칠천 원! 오늘 세일 상품이래.....”
“그으래요오? 싸아네에~~~”
김 여사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다. 삼천 원의 위력이 이렇게 클줄이야.
“잘 사 왔지? 김장 얼른 끝내고 실컷 잡숴! 당신 서방님보다 더 좋아하는 단감......”
김 여사, 눈을 흘기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이제 마 다 돼 간다....이짝 소매 쪼매만 올려주이소.....
그라고 소금 한줌 넣고 굴 잘 씻어가, 요 보세기에 있는 김치에 싸 드이소.
따로 속만 빼 놨으니까네.....속이 아삭아삭 연하고 엄청시리 달다.....요번 배추가 젤 낫다.”
나는 거실 책상에 술상을 차리고 노트북을 켜고 앉아
흘러간 노래 중에 먼저 ‘하숙생’을 틀었다.
간간이 김 여사의 신청곡을 받으며 막걸리 한 병을 금방 비웠다.
싱싱한 굴에 매콤달콤, 아삭아삭한 속 김치. 내년에도 이 맛을 볼 수 있겠지.
‘김 여사 허리가 빨리 나아야 할 텐데......’
흘낏 김 여사를 보니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른다. 상체도 살짝살짝 흔들어대며.
아내가 좋아하는 패티 김의 ‘가을이 남기고 간 사랑’이다.
'당분간 음식물 쓰레기 버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첫댓글 김장 김치맛이 느껴지네요 ㅎㅎ
좋은글 재미있게 즐독했네요
김여사님께 보약이라도 해드리세요
그래야 내년에도 맛있는 김장김치맛 보시죠 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애들한테 받은 용돈으로 보약을.......
글쎄요, '웬 보약이에요! 누가 보약 사 달랬어요.....하고
앵토라질 겁니다.
@그냥저냥살아 님
원래 안사람들은 다들 그래요
살림에 보태야하니까요
그러면서도 속르로는 엄청 좋아한답니다 ㅎㅎ
안사주면 속으로 섭섭해 하실걸요 ㅎㅎ
따뜻한 밤 되시고 꿀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