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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 19:1~7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회당과 서원 사역 19:8~10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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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성령을 모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자 성령이 임합니다. 3개월간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불순종하고 비방합니다. 이에 바울이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강론하니, 아시아 사람들이 다 주님 말씀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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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 19:1~7
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를 예비한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요한의 추종자들이 있었기에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만 알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해 몇몇 제자에게 ‘성령’을 받았는지 묻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계시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에 요한이 예언한 예수님을 바울이 전하자, 제자들이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들도 이제 새 언약 시대의 성도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성령은 이방 지역 에베소의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임하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 나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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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과 서원 사역 19:8~10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약 3개월간 하나님 나라를 강론합니다. 3개월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 동안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바울을 호의적으로 대하며 그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도’(道, 9절)를 비방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道)이심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구별해 그들을 대상으로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날마다 강론합니다. ‘두란노’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서원의 주인이거나 서원에서 가르쳤던 유명한 선생일 것입니다. 바울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습니다. 헌신된 한 사람의 영향력은 실로 놀랍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이 제자들을 따로 구별해 가르친 장소는 어디였나요?
믿음으로 홀로서기까지 내가 말씀으로 양육할 지체는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은 채 살아온 것은 아닌지 저의 삶을 돌아봅니다. 딱딱하게 굳은 제 마음을 성령으로 다스리셔서 온전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도 제게 맡기신 사람과 시간을 성실히 끌어안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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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라 그 땅 가운데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가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심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들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부어 주실 것임을 믿고,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잘 해 나가도록 하자
- 항상 주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면서, 늘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삶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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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특별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 때문에 죽었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백을 통하여 증거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평안과 감사가 넘쳐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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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 바울의 질문에 대한 에베소 신자들의 대답으로 성령이 있다는 사실도 듣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바울이 이 질문은 했는지 모르지만, 본문에 단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아볼로가 고린도로 가기 전 에베소에서 사역을 한 일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런 이유로 바울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를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곧장 예수의 세례를 선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정녕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은 그들은 요한의 세례도 옳게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일찍이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예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의 세례 즉, 예수의 세례를 받아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고 있지만,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는
진정 제자로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 바울의 안수로 인해 성령이 임해 그분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안수가 성령을 받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는 어떤 안수의 행위도 없이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례를 받아야 성령이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넬료와 그의 가정은 성령을 받고 난 후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어떤 조건이나 제한에 얽매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역사하실 뿐입니다. 여기서 방언과 예언은 성령의 임재를 나타내는 외적인 표징으로, 증인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해 제자들이 능력있게 복음을 전파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이 사건을 '에베소의 오순절'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거룩한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성경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원저자가 성령님이니까요. 성령이 없으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 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분이 성령님이니까요. 흔히들 성령님 하면 그분의 성품이나 은사를 연상합니다. 마치 그것들이 성령님의 모든 것인 양 알고 있지만 실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성령님은 부족한 인간에게 능력 베풀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그렇습니다. 그 전형적인 예가 사도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무엇을 할지 나약함을 보입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고 나선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켜 걷게 하고,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치는 기적도 일으킵니다. 심지어 죽어있는 여제자 다비다를 살려내기도 합니다. 그는 비록 학문이 약했을지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베드로 전후서를 써 후대에 남깁니다. 베드로가 그렇다면 우리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통치받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해야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목이 터져라 고함질러야 볼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의 임재는 우리 뜻과 의지와 상관이 없으니, 오직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다만, 있다면 성령이 누구인지를 알고, 믿음을 갖고 엎드려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리곤 그분의 역사하심을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넣고 사모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않고 우리와 생명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르지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방언이 성령이 주신 은사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기도함이 유익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할지를 모르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셔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교제는 100m 달리기가 아닙니다. 마라톤입니다. 달리다 보면 어느새 옆에서 힘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성령님을 소망하며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야 우리가 살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그분의 성품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께 사로 잡혀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열매를 보아알리라 ~ 성령의열매
성령 충만한 사람의 종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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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전에 말한대로 에베소에 다시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행18:21)
그때 열 두 사람쯤 되는 제자들을 만났는데, 요한의 세례만 알뿐 성령이 계심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나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세례 요한이 전파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전했고,
그들이 믿으니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안수할 때에 성령세례도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분명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더라도 말씀으로 양육 받지 않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어린 아이가 되어 속임수와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지금 현대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젖이나 먹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2~13)
젖이나 좋아하고 밥은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그러나 의의 말씀을 먹어야 성장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몇몇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대적하며 비방하자, 회당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여 믿음의 성숙을 이루어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 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제자 삼고 양육하는 선교 사역” 박종길 목사
아볼로가 고린도에 머물러 있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를 만나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자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바울이 묻자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합니다.
바울이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자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모두 열두 사람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물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세례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능력의 세례를 말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능력, 성령의 은사, 성령 충만의 세례입니다.
어떤 사람은 각기 상황에 따라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따로 받기도 하고 동시에 받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간절한 기도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바울이 강론하는 제자 도를 비방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사모하고 받아드리려는 영혼들에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증거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삶 속에서 날마다 말씀을 등불삼아 묵상하고 배우고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성장하고 배운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 삼을 수 있는 두란노들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바르게 배워 가정과 직장과 이웃의 영혼들에게 바르게 가르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체험하는 신앙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의 역사와 은사와 열매를 맺어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중에 있는 환우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해외에 있는 한인들과 믿음의 사람들
오늘 드려지는 모든 예배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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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도행전 19장 1-사도행전 19장 20
요절 사도행전 19장 9절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오늘 말씀은 바울의 삼차 전도여행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의 삼차 전도 여행의 대부분은 에베소 교회역사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제자양성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자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베소와 소아시아 전체에 복음이 전파되게 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가 이때 개척되었습니다. 바울은 참 아들인 디모데를 에베소의 감독으로 세웠습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 역사를 통해서 제자양성의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대한 소개)
1절을 보겠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와 바울은 당시 초대교회에 영향력이 매우 큰 분들입니다. 아볼로가 에베소를 떠나서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바울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윗지방을 거쳐 에베소에 왔습니다.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의 중심지로 삼았던 에베소는 어떤 곳일까요?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해안 지방에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위치적으로는 코레소스산맥과 에게해 사이에 있었으며 교통에 요충지입니다. 이곳은 항구도시로써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도시였으며,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독자적인 자치행정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금과 은과 각종 보석상들이 즐비하게 장사를 하고 있고, 온갖 장식을 한 마차들이 거리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상품을 가득실은 무역선이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은 인구 25만의 거대한 도시로써, 외국인도 많고, 각종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해있습니다. 또한 곳곳에 아데미여신과 제우스신의 우상이 서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각처에서 상인, 예술가, 철학자, 정치인들이 몰려와서 각종 야망을 불태웠습니다. 그러한 번창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을 살펴보면 각종 미신과 이방 종교들과 사회적 병폐들이 만연해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러한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방문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아는 성도들)
2,3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에베소 교회를 찾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신앙상태가 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했고 은혜롭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고행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신앙상태에 대하여 점검해보았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물음에 에베소 성도들은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다 합니다.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요한의 세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대화를 통해 현재 에베소 교회가 안고 있는 신앙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일찍이 아볼로를 통하여 예수님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의 영향을 받아 요한의 제자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 선지자가 그들에게 가르쳤듯이, 그들은 회개하고 천국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고, 주일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1주일에 두 번씩은 금식을 하므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이곳의 성도들은 신실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거듭나지 못하였고 내면 중심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은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생활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 누구도 그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바울이 이곳에 와서 에베소교인들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이 오셨지만, 그들은 아직도 복음이 완성되기 전의 과거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이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도 아직도 숨어서 살아가던 일본 병사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야함)
4-7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은 세례 요한이 말한 세례요한 뒤에 오시는 이가 예수님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왕이요 구주인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는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인으로 믿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주인으로 영접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미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베드로가 안수하자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강력으로 임하였고 그들은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12명쯤 되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바울은 에베소에서 성도들이 내주하시는 성령님,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체험하도록 도왔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은 깨끗한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 내면에 주홍같은 죄의 씨앗이 있을 때에 성령께서 내주하실 수가 없습니다. 고해성사로 죄를 고백한다고 해서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내면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성령을 존귀히 여기고 성령을 충만히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공개적으로 전하는 바울)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바울은 거듭난 사람들로 인하여 힘을 얻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공개적으로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죄사함의 복음,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신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빨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여러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곳에서 세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습니다. 여기서 강론했다는 것은 안식일날 공개적으로 설교했다는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사람들)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한참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건드리면 독기를 뿜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람 옆에 있다 보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강포합니다. 평소에 웃던 사람도 마음이 굳어지면 웃음이 사라집니다. 또한 이들은 순종치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알고 무시합니다. 회당에 이들이 들어오자 분위기가 냉각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개의치 않고 계속하여 대중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 분만의 우리를 구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한창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어떤 이들이 무리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소극적으로 앉아있는데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말씀전파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대적자 중에 수장이 외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이 사람들이 우리들을 바보로 아나, 좀 증거를 대야지 그 따위로 해서 우리가 믿으란 말이오. 증거를 되시오. 우리가 믿는 아주 실력있는 분이 계신데 그분을 믿어보는 것은 어떻겠소. 괜히 선한 사람 미혹하지 말구요, 여러분들 더 이상 바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소.’ 회당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마음이 굳고 순종치 않는 자들은 바울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일부 말씀을 청종하던 사람들까지 이러한 어수선함 속에 말씀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서서히 믿음 성장하려는 어린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장할 수 있는 양분이 필요했으나, 회당에서는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였습니다. 세 달 동안을 그렇게 말씀을 전하였으나, 매일같이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싫으면 나오지 말아야 할텐데, 오히려 회당에 나와서 비방하고 말씀 전파를 방해하였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말씀을 가르친 바울)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바울은 기존에 했던 방식으로는 이곳에 말씀을 전할 수 없음을 알고는 공개강좌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방식대로 말씀을 전해서는 시대와 환경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결국, 이 무리 중에 순종하고 배우고자하는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제자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는 자들과 구별되는 겸손히 배우고자 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순종하지 않는 자를 붙들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겸손히 순종하는 자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장소도 회당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헬라 철학자들이 수사학과 철학 또 수학도 가르치는 강의실이었습니다. 여기서 강론은 앞서 강론과 달리 디스커션입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대중설교가 아닌 토론식 말씀공부를 하였습니다. 문답식 교육을 하였습니다. 제자들과 마주 앉아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쳤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오전 11시에서 오후 네 시까지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베자 사본에는 바울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 전에는 안식일만 가르쳤지만 이제는 매일 11시부터 4시까지 지속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바울에게 물어보았고 바울은 또한 제자들에게 자상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고 있는 Man to Man 성경공부, Group Bible Study 등과 같습니다. 날마다 인격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야 말씀이 내면화됩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밤낮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밤에도 바울을 찾아오면 그들에게 좀더 자세히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집중적인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반복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알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기까지 이삼년을 도왔습니다.
(눈물로 훈계한 바울)
10절을 보십시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은 이년을 가르쳤습니다. 나중에 회상을 보면 거의 삼년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를 가르쳤습니다. 가장 오래있었던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는 무려 삼년이나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순종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순종하기까지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각자 가정에서 삶을 나누게 도왔습니다. 서로 사랑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삶이 점점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흉악한 이리와 같은 거짓 사상이 만연한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눈물로써 훈계하였습니다. 흉악한 사상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 순종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를 바울은 회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도왔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버리며 도왔습니다. 우리도 죄악된 양들을 도우려면 많은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바울은 눈물과 훈계로써 에베소교인들을 순종하기까지 훈련시켰습니다. 무려 이년 육 개월을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말씀이 우리 삶 속에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일은 바로 순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장차 소아시아와 세계선교에 주역으로 쓰일 것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을 때 그들이 주변에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선생이 되어 바울을 동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은 영적 사관학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두란노 서원의 제자들처럼 영적 성경선생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두란노서원에서 제자들이 장차 장로가 되어 교회를 감독하고 보살피는 목자들로 성장하기까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목자로서 바울과 같이 자신을 희생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러한 말씀공부를 통해 에베소에 변화의 역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에베소 교회개척뿐 아니라 골로새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계1:11). 11절에서 20절까지는 에베소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이때 갈라디아서를 집필하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이 분명합니다.(고전16:8) 그는 아주 절대적인 자세로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과 타협치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복음을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있습니다.
8월5일 인천역 사도행전을 이어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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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 중이다.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학 학자 아볼로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오늘은 다시 바울로 중심인물이 돌아왔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난다.(1)
에베소교회 계시록에서는 교리와 말씀은 잘 지켰지만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지적받는 그 교회이다.
사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에 아시아를 방문 하려고 했으나 성령이 막으심으로
에베소를 방문하지 못했던 아픔(?)이 있는 곳이 에베소 일 것이다.(행16:6)
이번 3차 전도 여행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바울의 선교 여행 전체 중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땅 에베소를 방문하게 된다.
에베소에는 바울 보다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이자 동업자인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먼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고(행18:19)
그 이후에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다. (행18:24)
이번에는 바울까지 에베소에 와서(1) 두란노 서원에서 머물면서 날마다 강론을 하니(9)
에베소교회가 초대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것 같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에베소에 사역자를 집중적으로 파송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같은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가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교회로 나아오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기도하고 눈물흘리고 중보했던 지체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일까?
아무쪼록 성령님이 막으셨던 아시아 지역에 있는 에베소
많은 사역자를 반복적으로 보내심이 특별히 눈에 들어 온다.
나도 보내심을 받아 반복적으로 고구마를 익었는지 찔러 보듯이 찔러 봐야겠다.
바울이 어떤 제자를 만나서 나눈 대화가 재미있다.
바울 :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2)
제자들 :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다.(2)
바울 :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
제자들 : 요한의 세례라.(3)
바울 :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4)
제자들 :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5)
바울이 두가지 중요한 질문을했다.
1. 성령을 받았느냐? 2. 세례를 받았느냐?
이 두 질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믿는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으며,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세례 받은 신자는 성령을 받은 것이 분명하고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고전12:3)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이 이상하다.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일까? 이들이 진짜 제자들 맞어?
성령님은 구약에도 많이 언급되어 계시는 분이시다.
이들이 구약성경을 몰랐을리가 없을텐데 참 이상하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사건을 이들은 모르고 있었을까?
바울이 이 12명쯤 되는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세례 요한이 말한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다 라고 가르치고(4)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5) 그들에게 안수했다.(6)
오순절과 비슷한 축소판이 벌어진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방언도하고 예언도 한다.(6)
오순절 때에는 기도할 때에 성령이 임했는데
에베소에서는 안수를 할 때에 성령이 임했다.(6) 아멘.
성령님 나에게도 충만히 임하시옵소서.
기름부으시옵소서. 거룩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할렐루야.
바울은 3달 동안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한다.(8)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이 도를 비방한다.(9)
바울이 이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한다.(9)
유명한 두란노 서원이 여기서 나온다.
제자들을 따로 세워서 제자 훈련하는 선교센타와 같은 훈련장소이다.
2년동안 가르쳤는데 아시아에 있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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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도 능한 사람 아볼로, 지금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현직 목사가 이름도 없고 타관에서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권면을 받아들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배웠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어디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와서 별 이야기를 다 한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을까를 상상해 봅니다. 아마 학식이 있어 보이는 외모를 하지는 않았던 듯이 보입니다. 반면 아볼로는 학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화려한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상황을 이렇게 봅니다. 정말 진지하게 복음 앞에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가를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그 부분이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면 배우고 싶어 합니다.
아마 아볼로가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복음에 진지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요한의 세례까지를 전하고는 있었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비록 외모는 그렇게 흠모할 만하게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복음의 비밀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아볼로가 무조건 이들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설명을 듣고 자신이 고민하던 부분에, 혹은 자신이 가진 한계를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는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 아볼로는 본래 가지고 있던 그 좋은 학문성과 배경에 요한의 세례를 뛰어 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식의 지평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찌 보면 사소해 보이는 부분입니다. 살다보면 우리가 흔히 노출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이냐는 도전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은 우리가 이런 상황에 노출될 때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하면서 살았는지, 또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배움의 많고 적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 즉 내 한계를 바르게 인식하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관찰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볼로가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믿음의 지평, 신학의 성숙을 가져온 것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의 개인적인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에게 전한 것은 복음입니다. 따라서 아볼로는 복음 앞에 자신의 생각, 자신의 삶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도, 체면이 깎이는 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복음 앞에 내가 가진 생각, 내가 가진 세계관, 내가 가진 습관들을 내려놓을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옵니다.
에베소에 임한 성령(행 19:1-7절)
사실 이 부분은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루 묵상에 묶어 놓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독립적인 주제로 묵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과 브루기아 지방을 돌아서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3차전도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아볼로는 아직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해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바로 이 제자들이 어떤 제자냐는 것에 있습니다. 이 자칭 제자들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들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에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답변합니다. 이어서 바울이 그럼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전후 정황으로 볼 때 요한은 이미 죽은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떤 제자들과 아볼로가 연관되었을 개연성은 아주 많습니다. 왜냐하면 행 18:24-25절에 의하면 에베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는 아직 구약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볼로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길라부부는 복음의 진리를 잘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던 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 비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 뭐했습니까?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언제요? 요한의 세례밖에 모를 때 말입니다.
그런데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친 제자들입니까? 아마 아볼로가 가르친 제자들일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사용해온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들은 아직 구약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배우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런데 아마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즉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답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게 된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이들이 요한의 세례밖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주님을 부인할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령 세례를 부인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들은 요한의 세례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 단추가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 아느냐의 문제, 즉 요한의 세례로 상징되는 아주 표면적이고 가벼운 성경 지식으로 살아가느냐 말씀의 더 깊은 세계를 경험하고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훌륭하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람들! 즉 아볼로에게 배워서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성경은 너무 쉽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변화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그랬습니다. 이 사람들이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요한의 세례까지 밖에 모르고 있으며 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알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자신이 알았던 세계를 포기하고 지평을 넓히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바꾸고 넓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에베소의 자칭 제자들에게서 세 가지를 점검하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첫째는 나는 신앙의 첫 단추를 바르게 끼웠는가? 두 번째는 혹시 잘못 끼웠더라도 바르게 끼울 용기가 내게 있는가? 세 번째는 무엇이 바른 복음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이 내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질문해 보시고 바른 성경적 세계관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 반듯하게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안수로 성령 받음에 대하여
자, 그런데요? 이렇게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이 사람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아직 구약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안수 했더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구절로 취급되었습니다. 일부 은사주의에 심취해서 성경을 보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 보아라. 여기 분명하게 성경에 말씀하고 있지 않느냐. 사도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도 목사가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과 성령 받는 시점이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못 받았다는 것입니까?
못 받았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언제 받습니까? 안수할 때 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 받음이 제 2의 체험이 됩니다. 목회자의 권한이 천정부지로 올라갑니다. 더구나 믿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안수 받아서 성령 받을 때 방언을 한다든지 뭔가 신비적인 체험을 한다면 이 에베소 사람들의 사건은 확고한 교리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안수 했더니 성령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바로 성령을 받을 것이지 왜 사도 바울이 안수하매 성령을 받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때가 아닌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즉 카톨릭 사람들이나 일부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은 쾌재를 부릅니다. “봐라! 분명한 증거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성경은 모든 경우에 안수해서 성령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경우가 아주 희소하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이 사건은 특별한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정상이고 오늘 사건은 특별한 경우라는 견해
자, 그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밖에는 알지 못했다면 이들이 믿었다는 그 믿음도 요한에 대한 믿음이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지요. 자신들은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구세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8장에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파견되어서 저희를 위해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했을 때 성령 받았던 사건을 살피고 지나왔습니다. 그 때에도 안수를 통해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정리할 때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와 유대인들 간의 오랜 반목을 비로소 성령시대를 맞이하면서 해소시켜주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오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바른 복음을 믿게 되자 그 가시적인 표현으로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에베소의 성령 강림 혹은 제 2의 오순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음의 표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사도행전에서는 성령 받음이 방언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성령 받음은 곧 방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방언을 해도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바꾸고, 성품과 기질을 바꾸시는 우리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성령 받음의 표지는 은사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의 은사, 즉 선물과 성령의 열매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성령 받음의 표지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은사는 우리의 정서와 잘 맞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뭔가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우리를 흥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바뀌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가 성령 받았음의 진정한 표지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 온유와 자비 양선, 충성과 절제의 열매! 이런 것들은 절대로 저절로 열리는 열매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 성령과 동행하면서 조금씩 열리게 되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뭔가 초자연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오래된 숙원입니다. 그러나 일회적인 초자연적인 체험보다 계속되는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닮기 위해서 애쓰는 인격과 성품의 변화야 말로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는 내 속에 주님을 닮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이 있는가에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방언을 하지 않으면 무슨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성령은 방언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와 충성과 절제입니다. 내 속에 성령께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더 잘 참고 잘 베풀어야 할 텐데. 예배에 빠지면 안 되는데.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닌데... 등등으로 생각을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자꾸만 신접한 여인이 강신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생각해서 뭔가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죽은 사람을 일으키시는 초자연적인 이적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을 안수해서 눈을 뜨게 한 아나니아는 그렇게 주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계속해서 아나니아가 눈만 뜨게 하는 전문가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를 그리스도가 아닌 뭔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이끌고 가는 잘못된 단추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실 귀신들린 강신 술사들이 더 잘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의 생명을 이런 현상들로 치부하는 것은 보석을 돌멩이로 취급하는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에베소에 임한 성령 역시 오순절 성령 강림이나 사마리아 고넬료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이 주어지고 세례를 주고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함으로 구약 시대의 종언을 알린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신앙적 헌신, 아볼로의 수용성, 에베소에 임한 성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가 핵심입니다. 아볼로처럼 에베소의 사람들처럼 복음을 올바르게 듣고 믿고 반응하는 사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며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이 땅에 복음의 맑은 물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아덴과 빌립보, 고린도 지역을 전도했습니다. 이 지역들은 전략상 모두 중요한 도시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로마 영토에 있는 가장 큰 도시들이었다는 말입니다. 특히 아덴과 고린도가 가지는 비중은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유럽 쪽에서 아덴과 고린도라면 아시아에서 로마 령의 큰 도시는 에베소입니다. 현재 아시아의 터키 서해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곳은 매우 거대한 항구로서 아시아 무역 항로의 종착지였으며, 로마에서 출발한 배들이 다 정박할 수 있는 자연적인 항구였습니다. 오늘날 이 도시에는 거주자가 없습니다. 바다도 약 10km나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에는 25000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극장과 목욕탕, 도서관, 시장(아고라)과 포장도로들이 있었습니다. BC 1세기경 이 도시의 인구는 약 30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아데미(다이아나)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는데, 이는 AD 263년 고트족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동물의 모습을 한 신상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이라고 여기며 섬기고 있었습니다(행19:35절). 그래서 19장 후반부에는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아데미의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과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8:22절과 23절 사이에 2차 전도 여행이 끝나고 사도 바울의 세 번째 전도여행이 시작된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참 대단한 열정이며 놀라운 체력입니다. 3차 전도여행은 다시 갈라디아 지역과 브르기아 지역으로 1차 전도여행지를 돌아 굳게 하려고 했던 것이니다. 그러다가 에베소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첫 번째 바울의 사역은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성령세례를 받도록 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얼마나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까?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에베소의 본격적인 사역에 대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그랬습니다. 특별히 “담대히”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담대히”라는 말은 헬라말로 에파르레시아제토(ejparrhsiavzeto)입니다. 헬라어에는 미완료시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완료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에베소 사역에 계속되는 용기가 필요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심약해져서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얼마나 사람들 만나는 것이 두려웠는지 다른 곳에서 매일 하던 전도를 중지하고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사도 바울이 생계문제 때문에 장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다른 일에 눈을 돌린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에베소의 바울! 즉 고린도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힘 있게 사역했던 바울은 달라져 있습니다. 고린도를 극복하고 담대해졌습니다. 이 담대함은 자기최면이나 만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의지해서 담대한 것은 만용일 수 있습니다.
사실 아덴과 고린도의 실패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온 학문을 욕심껏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담대했다는 말은 성령 충만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어느 때보다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는 현장에 사도 바울은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이 일은 사도 바울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베소 사역에 힘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지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내 재능, 내 능력, 내 힘을 의지하는 담대함은 성경적인 담대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적인 담대함입니다. 그러나 내게서 출발한 담대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 때문에 담대한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그 담대함을 가지고 증거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가를 증거한 것입니다. 이 땅에 어떻게 천국이 도래했으며 그 천국이 어떻게 확장되어 가고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말하려면 주님이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선포하셨던 말씀을 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래서 천국을 이야기하려면 회개를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회개는 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지금까지의 국적! 세상에서의 국적을 포기하고 백기를 들고 하나님 나라로 투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내 능력 의지하지 않고 살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여기 임했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자세히 더 깊이 공부해야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불행한 사람들
잠27:2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 찌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련한 사람은 마음을 잘 바꾸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잠1:7절은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 미련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막고 교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다시없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것이 보화인줄, 값진 진주인줄을 알지 못해서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이 굳어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마음이 굳어 있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굳게 닫힌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삶 자체가 전투적입니다. 상한 마음입니다. 원래 이 말은 완고하고 고집이 세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 고집을 세웁니다. 그래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본문을 보십시오.
9절입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이 도를 비방했습니다. 이게 마음이 굳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수군수군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는 불행합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으로 있는 가정은 억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마음이 굳어서 비방이나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서 먼지를 털고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음이 굳은 사람들에게서 떠났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불행이라고 봅니다. 일생에 다시없는 기회를 차 버린 것입니다. 왜요? 다른 것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사도 바울은 과감하게 그들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집중 양육했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열심 있는 일꾼들을 날마다 양육했습니다. 여러분! 9절 하반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얼마동안 했습니까? 2년 동안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양육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뒷날 옥중 서신인 에베소서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강론이라는 말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풀어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바울이 말씀을 전했지만 본문에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말씀이 능력이 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다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입,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손과 발이 된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에베소에서 전했던 하나님 나라와 두란노에서 강론했던 말씀은 서로 다른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방꺼리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물어 오시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의 말씀으로 들어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필요에 넘치도록 채우시고
곳곳에 하나님의 손길로 덮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이미 일하시고 모든 만남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는 하나님의 나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기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기름 부어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위로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손길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그 손길에 온전히 맡기는 거룩한 증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