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산의 모습이 흡사 엎드려있는 거북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 반구대. 카메라를 준비하여 집을 나서면서도 반구대 앞 도로변 나무들이 걱정이었다. 그동안 거목으로 자랐을 터이고 절기가 여름으로 접어든 탓에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덮었을 것 같았다. 이미 하절기에 접어들었으니 짙은 숲이 반구대 비경을 덮어버렸을 거란 예측은 가능한데도 굳이 찾아가는 미련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장에 도착하자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덩치 큰 밤나무와 단풍나무 은행나무가 하늘을 덮었고 그 가지들 사이를 전력케이블과 통신케이블이 어지럽게 뒤엉켰으니 카메라 앵글을 들이댈 맛이 나질 않는다.
바닥엔 푸름을 거의 다 잃은 조릿대가 누렇게 군락을 이루었고 그 옆엔 번식력이 강하다고 농민들로부터 망국의 잡초로 지탄받는 망초와 개망초 꽃들이 절정을 지난 듯 말라가고 있었다. 인간들로부터 천대받는 게 측은했던지 하얀 나비들이 하늘거리며 망초꽃을 애무하고 있었다. 현직 때인 80년대 중반, 2년 가까이 울산에서 일한 덕분에 당시의 반구대를 만날 수 있었다. 울산 근무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라 내 삶에도 적지 않은 자극제가 되었을 터인데 자녀교육을 빌미로 울산은 못 가겠다고 버텼던 기억이 부끄럽다. 당시 사업소장은 내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명언을 들려주었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연전 그 선배님 영전에 마지막 잔을 올리면서 우둔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직장에서 발행하는 사보 뒷면에 나의 반구대 사진이 실렸다. 물론 흑백이었고 편집자는 그 아래에 반구대 얘기가 아닌 생뚱맞은 랭보의 시를 배치하는 바람에 비경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당시의 반구대 풍광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반구대 탐방도 중년 무렵이었다는 걸 당시 사진이 말해준다. 얼마 전 타계한 친구와 동행했는데 그의 부인과 아내가 반구대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 포즈를 취한 얼굴에선 마흔 중반 세월이 읽힌다.
90년대 중반 가을철 체육행사로 직장에서 20여 명이 반구댈 찾은 게 세 번째였다. 그날은 동료 P가 형과 함께 이곳 고향에다 지었다는 조립식 건물에서 부서 멤버 전체가 합숙한 후 가까운 치술령도 올랐었다. 세월무상이라더니 그 멤버들 중에도 이승을 등진 친구가 한둘이 아니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진 매년 찾아가고 싶은 목적지를 미리 정해 놓고 숙제하듯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는데 벌써 1년 반 넘게 집에 갇히고 말았으니 어쩌랴. 다행히 반구대는 부산에서 찾아가는 거리에 비하면 절반밖에 안 되는 지점에 지금 내가 살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흡사 여름장마처럼 열흘 가까이 흐리거나 비가 찔끔대더니 모처럼 하늘이 활짝 개어 기분마저 상쾌했다. 오후 2시에 만나자는 지역주민 민원현장이 중간지점에 있어 잠시 그곳에 들렀다가 반구대를 찾아가더라도 시간은 전혀 문제될 게 없을 터였다. ‘밀양송전선 사태’로 불리는 악몽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념에 물든 신부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수녀들까지 합세하여 사건을 키운 탓에 결국 ‘송주법’이란 게 생겨났다. 송전선로 주변 피해를 보상하는 법이다. 이렇게 지급되는 보상금은 전체 국민들이 부담하는 전기요금에 고스란히 연결된다. 오늘 민원현장은 밀양으로 가는 송전선로 중간지점이다.
765kV 송전선로 직하 200평 땅에 마을회관을 짓는데 한전에선 1억을 주기로 협약을 마쳤던 것. 민원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으면 송주법 업무를 다루는 송전부서엔 간부로부터 담당자가 수시로 바뀐다고 했다. 하나의 민원을 놓고 중간에 업무를 맡은 사람이 바뀌어 딴소릴 해대니 민원인들도 거꾸로 열을 받는단다. 재직 때 토건부장을 지낸 K후배가 이 민원을 중간에서 도우려고 했지만 송전 쪽 업무에 문외한이다 보니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일찍 직장을 떠나와 본인 고향지역에서 토목자재상으로 크게 성공한 편이었고 부부가 함께 사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현직 때도 창구로 찾아오는 민원인들로 하루해가 뜨고 졌는데 무슨 팔자를 타고 났기에 회사 떠나온지 20년 넘어서까지 이런 민원인들을 대해야 하나. 북부산지점장을 지낸 K후배 사촌동생이라는 중년남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면 바로 끝난다고 목소릴 높였고 이 건으로 지역 국회의원 Y를 만났던 얘기까지 했다. 땅을 분할해서 넘겨놓고도 땅값을 못 받고 있는 초로의 여인도 “마아, 내사 한전에 들어가가 확 뒤엎을 뿔란다”며 악을 썼다. 그 중에도 가장 점잖은 사람은 부락 이장을 지낸 후 지금은 민원인대표를 맡고 있는 인사였다. 그는 내가 묻는 사안에 대해서만 짧게 한 마디씩 답하고 있었다.
현장을 떠나오기 전 4명의 이해당사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한전에서 요구하는 토지감정평가를 받을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달라, 아까 청와대 얘기도 잠깐 나왔는데 거기에다 말했다간 될 일도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들은 초고압 전선로 밑에서 오늘 단합대회라도 벌일 양인지 육류고기에다 맥주 수박 참외를 한가득 준비해 놓고 있었다. 바로 옆으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청량했고 땅 주인이 가꾸는 농장 텃밭에는 대파와 방아 고구마 등 농작물이 여름 햇살에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반구대 찾아가는 걸 울산에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반구대를 휘돌아 흐르는 강물에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카메라를 들고 1시간 가까이 반구대에 머무는 동안 탐방객으로선 중년 여인 둘이 전부였다. 공룡화석에서 만난 그들이 요구하는 사진을 서너 컷 찍어주는데 목소리가 걸걸한 한 여인은 안하무인격이었다. 처녀 적 부끄럽고 순진했을 ‘울산큰애기’ 가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졌느냐고 물었더니 손으로 입을 막으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날 반구대를 다시 찾는다면 더욱 운치가 있을 것 같다. 내 인생 남은 날들 중에 하늘이 그런 기회를 준다면 마음을 차분히 하고 반구대를 느끼며 명상에 잠겨보고 싶었다.
첫댓글 반구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