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잃고 나는 (외 2편) 한혜영 나는 흰옷을 걸쳐본 지가 오래된 종려나무, 소금기에 푹 절여진 꼬리를 끌고 해안가를 어슬렁거려요 마음은 죽을 자리를 찾는 늙은 늑대 같기도 하고 조문을 다녀가는 시든 꽃 같기도 하고 찢어질 대로 찢어진 깃발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겨울을 잃은 것들은 다 그래서 혀가 포도나무 덩굴처럼 길어졌어요 살려면 닥치는 대로 생각을 잡고 올라야 해요 아니면 녹아서 줄줄 흐르니까 얼음조각처럼 잘 생긴 배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굴이 바닥에 질펀해요 뱀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혈관을 끌고 서늘한 굴을 찾아가지요 저기서 시계바늘을 휙휙 돌리는 여자! 아직도 홈쇼핑의 채널을 지키네요 세상엔 없는 계절을 파는, 소매가 긴 스웨터로 감춘다고 감췄지만 손가락을 보니 거미의 종족이에요 땀이라고는 흘릴 줄 모르는, 카펫가게의 상인처럼 공중에 척척 펼쳐놓는 상술로 하룻밤에도 무성한 계절을 팔아치우지요 늙은 테이프처럼 늘어진 시간 속으로 예고 없는 눈보라가 휘날려요 영하라는 말은 춥디추웠던 옛 연인의 이름, 나는 그리움을 코트 깃처럼 세우고 무릎이 푹푹 빠지는 이름 속으로 들어가요 라라의 노래를 들으며 닥터 지바고처럼 눈이 빨개지면서 눈보라 속에서 만났던, 네 개의 다리 중에서 겨울이 망가진 안락의자는 누가 쓰다가 버린 기호일까요 완벽하게 균형을 상실해버린, 어떤 감동도 휴식도 줄 수 없는, 저 그런데 말이에요 벽난로가 어떻게 생겼지요?
부탁
나는 어디에서 온 빗방울입니까 나뭇잎 발코니 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만, 어쩌자고 아직도 마르지 않고 태양을 견딘답니까 스스로를 깨뜨릴 수 없는 물방울을 위해 당신께서는 손가락을 빌려주십시오 닿는 순간 한 채의 눈물 누옥에 갇혀 있던 날개가 폐허를 털고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화자 언니
고향에서 올라와 차장을 하던 화자 언니가 있었어요 승객을 신문지처럼 얼마든지 구겨 넣고 아슬아슬하게 문짝에 매달려 탕탕! 버스를 두들기던, 학생이세요? 물으면 왜? 교수처럼 보이니? 킥킥거리며 들이미는 시커먼 얼굴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던 화자 언니가,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화자 언니가 탕탕! 두들기지 않아도 버스가 떠났어요 추억은 꼼짝 안 하고 시간만 미어터지라고 실은 버스는 달리기만 달렸지요 아무 곳에서나 승객을 내려주지도 않고 태워주지도 않고, 버스는 개뿔! 화자 언니가 있어야 버스지요 공짜 버스를 탔다가 딱히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서 지금까지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버스에서 늙어서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자글거려요 빨간 우체통에 편지도 넣어야 하는데, 마룻바닥에 엎드려 연필에 침 바르다가 군사우편이요! 한 마디에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가로지를 텐데 운전기사 아저씨, 버스 좀 세워주면 안 되나요? 문짝 두들겨 줄 화자 언니가 없어서 정말로 죄송하긴 한데요
—시집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제2회 선경작가상수상시집 2024.11 -------------------------- 한혜영 / 1954년 충남 서산 출생.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검정사과농장』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시조집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 등. 현재 미국에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