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급성 골수성 백혈병) 투병 일천열한(1011) 번째 날 편지, 4(이슈-issue, 정치)-2023년 6월 14일 수요일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2023년 6월 14일 수요일이란다.
'검찰 통치(Prosecracy)'라는 말은 안병진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제안했다. 검찰(Prosecute)에 정치 체제를 의미하는 'cracy'를 붙인 말로, 검찰 통치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라네.
첫째, 검사주의 세계관, 즉 '법치'를 강조하는 윤 대통령의 스타일,
둘째, 모든 부처의 검찰화(수사 및 조사기관화),
셋째, 각 부처 검찰 출신 인사의 적극 기용이다. 이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다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정무 기능마저 수사기관을 활용한다는 점인데, 윤석열 대통령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대결적 구도'를 지향해 협치보다는 견제, 조정보다는 단죄, 소통보다는 명령으로, 이를테면 국회는 협의의 대상이 아니라 견제의 대상으로, 법안 조율은 없고, 대신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적극 활용하며, 협치 대상인 야당 대표는 아예 만나지를 않는다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 그 자체로, 검찰 동일체의 머리에 해당하는 정점 검찰총장을 지냈고, 대통령이 된 후 '법에 의한 통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사회 정화 작업에 돌입했는데, 정화 대상은 노조, 간첩, 시민단체 등이라네.
검찰은 노조, 간첩, 시민단체의 비리를 캐는걸 넘어, 국회를 견제하는 정무 기관의 역할까지도 하는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나 군과 국정원이 하던 일로, 윤 정부가 해 온 정무 활동이란 건 국회를 '범죄집단화'하는 것이었다네.
민주당사는 물론 국회 사무처, 국회의원회관을 밥 먹듯이 압수수색하는데, '빈손'이어도 상관없고, 국회를 '부패의 온상'으로 찍어 놓으면, 자동적으로 반사이익이 발생하고, 그걸 취하면, 지지율이 소폭 오르는 현상들은 꽤 빈번하게 관찰돼 왔는데, 눈앞의 작은 이익을 취하는 데 익숙해지면, 같은 방식을 계속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다네.
수사기관의 국회 견제의 정점은 최근 검찰의 한동훈 장관 인사청문 자료 유출 수사로, 이제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자료는 '국민의 알 권리'보다 상위에 위치하게 돼 앞으로 국회의원이 의정활동을 통해 확보한 인사청문 자료를 기자에게 건넬 경우, '정보 유출'이라는 '불법' 딱지를 붙이고, 수사기관을 동원해 국회의원실과 언론사 뉴스룸을 치면 된다네.
윤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이미 우린 하루에도 수많은 '불법 보도'들을 보고 있으나 검찰은 '선택적 수사'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데, 이 신비로운 방법을 이전 정권이 몰라서 안 쓴 게 아니라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고위 공직자의 인사 자료를 폭넓게 공유하는 것에서 국민이 얻을 실익이 더 많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지 않은 일들이라네.
하지만, '검찰 통치' 체제의 정부는 거침이 없는데, 곧 있으면 대대적인 '인사 청문회 정국'이 열리는데, 이걸 앞두고 '개인정보 유출'로 언론과 국회를 한꺼번에 쳐 앞으로 국회의원들은 인사청문 자료를 받아들고 '어디까지가 위법이 아닌가' 고민하고 기자들은 인사청문 자료를 보고 '보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자기 검열'을 하게 될 것이라네.
보수 정부, 진보 정부 막론하고, 주장해 왔던 '공직자 개인 문제 검증 비공개 청문회' 주장은 법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우회해서 공직자 사적 영역 검증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볼 수 있으니 더 이상 할 필요도 없고, 윤 정부의 '촉수'와 같은 기능을 하는 수사기관에는 국회를 견제하는 '정무 기능'이 추가된다네.
굉장히 영리하고, 전략적으로, 당장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설이 나오는 이동관 씨가 첫 수혜자가 될 수도 있겠는데, 나치에 부역한 독일 법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윤 정부 들어 단골로 인용된다네.
적을 만드는 정치. 적이 있어야만, 가능한 정치. 칼 슈미트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 정치를 싫어했고, 의회는 합리적이지 않고 '영원한 대화'만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그는 독재에 관한 글에서 '예외 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을 '주권자'로 봤다네.
통치권력은 예외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역설했는데, 이른바 '결단주의'로, 칼 슈미트는 의회를 싫어했고, 나치 정권의 독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이유로 학자로서 예외적으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피고석에 섰다네.
재미있는 점은 윤 대통령이 칼 슈미트를 비판했다는 것인데, 그는 후보 시절 진중권 광운대 교수와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칼 슈미트'의 이론은 언급하며, 과거 한국의 권위주의 독재 시절 선호됐던 것일 뿐 지금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취지로 평했다네.
그런 윤 대통령에게 정치학자들이 앞다퉈 '칼 슈미트'를 인용하며, '검찰 통치'를 설명하는 툴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한데, 이런 불일치와 모순도 이 정부의 큰 특징 중 하나라네.
윤 정부의 세계관은 '상상된 질서'로 이뤄져 있는데, '상상된 질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추동력이 있는데, 윤 대통령이 '낡은 이론'으로 치부한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는 여기에서 빛을 발하는데, '전광판'을 보지 않고, '지지율'은 신경 쓰지 않는 '고독한 결단'은 윤 대통령 통치 방식의 핵심으로, 이건 대통령실에서도 자랑스레 강조해 오고 있는 것이라네.
청와대 출신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정권 초, 대통령직에 일단 오르면, 대통령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진다는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인천국제공항에 불쑥 등장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명령했구나.
윤석열 대통령의 대통령 집무실을 벼락처럼 용산으로 이전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불공단 전봇대 하나를 아예 뽑아버렸다네.
정치 무대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현장과 이론을 두루 습득해 본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은 평소 교양으로 쌓아왔던 이상적 이데아를 갑자기 현장에 구현하려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자주 시도해 왔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교육 분야에서 만 5세 취학 논란, 그리고 노동 분야에서 주 69시간 논란이라네.
둘 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해프닝으로 마무리됐고, 이제 노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야당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데, 적을 만드는 행위는 무지 때문으로, 현실을 모르니 자꾸 '결단'에 의존하는 강경책이 나오고, 상대를 알고 현장을 알면 대화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강경책'으로만 치달을 수 없다네.
외교 분야도 그런데, '한미일 동맹'은 가보지 않은 길이고,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장 평화'라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한미일 군사 동맹'의 상상된 목표는 현실이라 주장한다네.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나머지 물컵의 절반을 상상으로 미리 채워 넣었고, 미중 대결,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 등 민감한 현안도 '선명한 진영론'이 확립되어 있는 상상된 세계 질서를 상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려 한다네.
윤 대통령과 참모들이 자주 하는 말이 '지지율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인데, 내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옳은 것은 인기가 없다는 신념이라, 이런 상태라면, 남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견제가 불가능한데, 합리화적 대안의 존재 가능성을 항상 의심하기 때문이라네.
검찰 통치와 결단주의, 그리고 무지에서 비롯된 상상된 질서를 향한 강한 추동력, 세 가지 키워드는 모두 연결돼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어쩌면 한국 역사상 가장 독특하게 이념화된 정권일 수 있겠구나..
사랑하는 큰아들아
오늘 기록한 오후 편지 여기서 마치니,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기 바라며, 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안녕히…….
2023년 6월 14일 수요일 오후에 혈액암 투병 중인 아빠가
휴대폰에서 들리는 배경음악-[연주곡] 연인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