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한글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한글과컴퓨터’의 김상철(61) 회장은 요즘 ‘도선비기(道詵秘記)’와 같은 한국 전통사상의 보존과 활성화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도선비기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도선대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풍수서를 말한다.
김 회장을 향해 “첨단 기업을 이끄는 사업가가 왜 풍수를 운운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지난 12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왕판교로에 있는 한글과컴퓨터 본사 11층에서 만난 김 회장은 ‘왜 전통문화와 사상이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지’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그는 “우리 DNA에 흐르는 전통의 맥을 바로 세워야 한국인의 정신과 의식이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오른팔을 다쳐 보조기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김 회장이 언급한 도선비기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제에 의해 원본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 등 우리 역사서 곳곳에 도선비기의 흔적은 남아 있다. 요즘은 풍수학을 미신이나 잡학으로 치부하나 여전히 국내 일각에서 도선비기를 명리학과 함께 우리 전통의 고유사상 중 하나로 여기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의 풍수학은 우리와 달리 크게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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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소재 한글과컴퓨터 본사에서 만난 김상철 회장.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 회장은 전통문화의 재해석을 기업 사회공헌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는 한글과컴퓨터 등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금 일부를 출연해 지난해 10월 (사)우리문화지킴이(이하 우문지)를 발족했다. 해외반출 문화재 환수를 위해 조직된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스님과 함께 우문지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김 회장은 우문지를 통해 전통문화 체험학습 프로그램, 토정비결을 활용한 게임 개발, 문화 콘텐츠를 사고파는 쇼핑몰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이어져온 동양사상의 뿌리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피폐해졌다. 일본은 문화재 약탈뿐 아니라 도선비기와 명리학 같은 한국 정신문화의 한 축을 뭉개버렸다. 이런 문화를 뺏어가 자국에서 더 크게 발전시켰다. 사상적인 면을 포함해 한국 고유의 문화를 다시 조명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우문지를 만들었다.”
김 회장은 고유의 전통문화를 콘셉트로 하는 상품개발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일본은 사쿠라 하나만으로도 관광상품 등 다양한 산업을 일으켰다. 한국인은 무궁화를 갖고 사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국인에겐 찬란한 문화가 있는데, 요즘도 유명 사찰에 가면 효자손과 지팡이를 기념품이라고 사들고 온다. 우문지의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풍화작용이 일 듯 아주 서서히 전통문화를 살리는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김 회장은 평소 역사서와 물리학에 심취해 관련 서적을 다독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불교계 인사는 물론 동양사상에 밝은 학계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는 일이 그의 생활이 돼버렸다. 김 회장과 뜻을 같이하는 30여명의 경제계 인사들은 사단법인 형태의 우문지가 생기기 전부터 별도 모임을 갖고 전통문화 전승사업을 후원해왔다.
지난 10월 26일 서울 목멱산 대천제를 김 회장이 후원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에는 조선 왕조의 태동을 상징하는 국사당이 있었다. 조선 건국에 깊이 관여한 무학대사가 ‘국태민안’을 비는 천제를 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이 사당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선바위 아래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남산 국사당 자리에 신사를 짓고 국사당 건물과 자료들을 폐기했는데, 이를 일부 무속인들이 가져와 인왕산 자락에 복원한 것이다.
“남산에는 지금도 묫자리가 하나도 없다. 태조 이성계는 500년의 수도를 지키기 위한 배꼽점이었던 남산을 그만큼 중시했다. 남산의 기운은 남달라서 과거 이곳에 우남정을 지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개인 사당을 세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이 모두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이곳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국사의 기운이 서려 있다.” 올해로 20회를 맞은 목멱산 대천제는 목멱산사랑회(대표 김재연)라는 단체가 행사를 주관하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김재연씨는 일명 ‘남산도깨비’로 불리는 유명 예언가 중 한 명이다. 김 회장은 “정치권과 학계에서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글창제, 성리학의 이기(理氣)설 같은 조선시대의 전통적 가치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문지가 첫 번째 사업으로, “훈민정음을 국보(國寶) 1호로 만들자”는 운동을 추진하는 건 한국의 역사적 가치와 정신을 재정립하자는 김 회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현재 국보 1호인 숭례문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지정된 것으로, 한국인의 뜻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한양으로 진입할 때 통과한 문이라는 이유로 국보 1호가 됐다는 연구자료가 있다. 이런 이유로 김영삼·노무현 정부 때 국보 1호의 해지 논의가 있었다. 게다가 2008년 방화로 소실된 숭례문이 복원됐으나 각종 비리가 드러나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더 이상 국보 1호로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의 얼과 자부심이 담긴 한글이야말로 앞으로도 수천 년 동안 한국인의 삶을 지배한다고 볼 때 국보로서 가치가 월등히 높다.”
우문지는 지난 11월 11일부터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을 위한 1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내년 1월 11일에는 이 서명자료를 문화재청에 접수하고 국민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김 회장은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 운동이 한글과컴퓨터라는 회사의 이익과 연계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설사 그렇게 보더라도 훈민정음의 가치가 적어도 남대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김 회장은 도선비기나 명리학을 일종의 미신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그건 미신이 아니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라고 대답했다. “일본은 심지어 먹을거리조차 풍수지리의 이치에 따라 명명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를 지관이라거나 관상쟁이 정도로 멸시하는 측면이 있다. 전통문화를 무조건 배척하는 분위기를 조금 바꿔 보고 싶다. 자녀를 출가시킬 때 궁합을 따져 보지 않는 집안이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밀접한 문화를 우리는 왜 음성적으로만 이용하려는지 모르겠다.”
김 회장은 명리학에 조예가 느껴질 정도로 전문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사주는 생년, 월, 일, 시간 등 4개의 기둥을 말한다. 사주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게 된다. 이 위에 풍수지리인 오행, 즉 화수목금토가 돌아간다. 사주와 오행이 어떻게 잘 합쳐지느냐를 보는 게 궁합이다. 동양사상의 기초 중 하나인 황금비율도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운명이 70%, 기운이 30%라는 말로 해석된다. 우리 몸의 70%가 물이고 한반도의 산이 차지하는 비율도 70%다. 기업도 70%는 숙명, 30%는 기운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는다.”
김 회장은 업계에서 기업 인수합병(M&A)의 귀재로 통한다. 김 회장은 5차례 이상의 M&A에서 모두 성공했다. 예컨대 그가 지난 2010년 인수한 한글과컴퓨터는 4년 만에 인수 당시보다 2배 이상 매출이 늘었다. 그에게 기업을 선택하는 특별한 선구안이 있는 걸까.
“돈을 벌기 위해 M&A를 하지 않았다. 기업이 생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인수합병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도 MDS테크놀러지를 인수했고 앞으로도 매년 1~2개 회사를 인수할 계획이다. 기업은 오늘 판 우물을 내일까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요구된다. 인수합병에서 나는 흐름과 감을 믿는다. 영업맨으로 출발해 지금의 기업을 이룰 때까지 쌓아온 논리성이 담긴 흐름과 감이 내겐 굉장히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한글과컴퓨터그룹은 한컴을 주축으로 임베디드 토털 솔루션 기업인 MDS테크놀러지, 소프트포럼, 다윈텍, 두레콤, APS코리아 등의 6개 계열사가 있으며, 그룹 총매출은 연간 3000억원대에 이르는 중견기업이다. 김 회장은 독특한 경영철학을 가진 인물이다. 철저하게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1997년 금호전기의 계측기 사업부를 떼어내 사업을 시작한 그는 기업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M&A를 전문으로 배운 적이 없다. 컴맹인 그가 국내 최고의 IT기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건 전문성을 가진 다양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요즘은 삼국지에 나오는 것처럼 뛰어난 장수 한 명이 있다고 해서 성공하는 시절이 아니다. 전체적인 판을 읽고 이를 잘 운용할 줄 아는 엔터테이너 기질의 경영자가 더 요구된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을 잘못 써서 기업이 망하는 경우는 없다. 기업이 망하는 것은 경영진이 스스로를 낮추지 못하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했다. “회사가 커지면 경쟁이 치열해지고 일부에서 해코지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신경쓰지 않고 앞만 보고 간다. 내가 유리한 위치에 있어도 맞대응하지 않는다. 우리 임직원들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며 비전을 키워 나가는 게 내가 원하는 기업경영의 방침이다.” 김 회장은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하며 회사의 사훈을 ‘오늘을 이기고 내일을 생각하는 우리’로 지어 사옥 입구 큰 돌에 새겨 놨다.
김 회장은 비교적 여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묻는 질문에는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고생을 자랑 삼아 얘기하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그 시절 고생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겠나. 나 또는 우리 기업이 강한지, 약한지는 시간이 말해준다.”
김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노자의 무위자연설을 거론하며 성공한 사업가에게 필요한 자질로 ‘초연한 자세’, 즉 인내심을 꼽았다.
“물리학을 좋아한다. 성경이나 코란, 물리학과 명리학 등이 추구하는 학문의 끝은 노자의 사상과 맞물려 있다. 학문의 끝을 좇아가다 보면 해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그건 안타까움으로 이어진다고 노자가 말했다. 강한 밀도의 입자, 즉 블랙홀을 통과하면 사람도 우주로 흩어져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듯 모든 것에 적절히 초연해지는 자세가 기업가에게 필요하다. 조조가 유비와 제갈공명의 머리싸움을 극복한 건 인내하고 숙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