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그들의 소명을 격려하고자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보편 교회와 함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낸다(주교회의 2021년 추계 정기 총회).
본기도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제1독서
<먹고도 남을 것이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제2독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살려면 반응하라.
오늘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많은 숫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양인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히 감사로 아버지께 당신의 존재를 어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감사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가르는 시발점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절로 가지게 된 것을 잃어가기 때문에 짜증만 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을 믿는 우리는 다 잃어도 모든 것을 받은 것이기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게 됩니다.
제가 몸에서 촌충이 나온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평택 장에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약을 파는 아저씨가 저를 부르더니 약을 하나 먹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있으니 엉덩이가 간지러웠습니다. 다시 나오라고 해서 팬티를 내려보라고 했는데 이내 길고 흰 촌충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발로 밟았는데 그 안에 새끼들이 수없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내 몸에 저렇게 많은 벌레가 살며 피를 빨아 먹고 있었는데도 왜 난 저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본래 혼자 살아남으려 하는 자는 더 큰 존재에게 발각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본인이 잡아먹힙니다. 진화론은 이와 같습니다. 반응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의 세상을 지배하는 신은 파괴의 신입니다.
영화 ‘더 사일런스’(2019)에 외계 종족들이 쳐들어왔는데 그것들은 눈은 없지만, 청각이 발달하여 있습니다. 소리를 내면 바로 죽임을 당합니다.
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수들을 많이 본 박효진 장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사형수들은 결국엔 똑같이 두려움에 떨거나 오줌을 지렸다고 합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고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SBS 꼬꼬무 37화에서 ‘임신 거부증’에 걸린 한 엄마가 신생아 둘을 냉동실에 넣어 죽인 사건이 나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엄마는 임신을 거부하였고 태아들도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길쭉하게 늘여 배가 많이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마치 기생충처럼 어머니 뱃속에 머물다 나왔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두 영아를 살해하였습니다.
사실 한 몸에 기생충도 있을 수 있고 태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은 하나는 엄마가 주는 모든 것에 반응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는 하늘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믿는 하늘은 더 사일런스에 나오는 외계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아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미소 짓고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자기도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진짜 소멸의 세상에서 생성의 세상으로 넘어오는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처럼 감사의 반응을 실현할 도구는 십일조입니다.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러나 소멸의 법칙에 속한 자가 됩니다. 이 버튼은 그냥 반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기가 처음에 엄마, 아빠라고 했을 때 부모는 그동안 한 모든 고생을 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140년이 지났는데도 몸이 전혀 썩지 않고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남아있고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모님께 순종하여 그러한 생명을 지금도 얻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순종도 없습니다. 이런 현대의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주님께 반응하는 이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려면 반응하십시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뉴스에서 본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2020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주에 살던 70대 노인이 자기 반려견과 함께 호숫가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속에서 악어가 나타나 반려견을 물고 다시 호수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노인은 본능적으로 호숫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어의 입을 벌려서 반려견을 구해냈습니다.
사실 악어의 치악력, 치아의 악력 즉 무는 힘은 엄청납니다. 사자, 호랑이, 곰, 하마 등을 제치고 모든 동물 중에서 제일 강력합니다. 그런데 팔 힘만으로 악어의 입을 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어떤 분일까요? 평소 몸 관리를 잘한 보디빌더일까요? 아니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저 강아지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 노인에게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히려 도망가는 데 급급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 ‘사랑하는 마음’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자동차에 깔린 자녀를 보고서 자동차를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도 뉴스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랑의 힘이 별것 아닌가요?
주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때인데도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과 함께함으로 인해 영적으로는 충만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배고픔으로 힘든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보리 빵은 당시 가난한 이들이 먹는 아주 싼 음식이었고, ‘물고기’로 번역된 그리스 말도 조그만 물고기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가엾이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주님의 사랑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주님을 통해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기에만 급급하면서 열매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활동을 우리의 사랑 없음으로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당신으로부터 부름받기를 기다리고 있다(쥘 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