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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미카 예언서의 말씀 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 1,1-16.18-23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또한 오늘은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연합회>의 주보 축일입니다.
오늘 '성모 성탄 대축일'로부터 열 달을 거슬러 올라가는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위해,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들려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다윗 자손으로 메시아이심을 전해줍니다.
동시에 마리아께서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 하느님의 특별한 간택을 받으신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요,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카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됩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시고, 우리도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이처럼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으며,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어머니의 노래’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기뻐합니다.
“내 영혼이 내 구세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루카 1,46-4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2,020회 생신 축일>
이 축일은 무염시태와 직접 연관이 있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드디어 탄생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12월 8일이 아홉 달 지난 9월 8일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얘기하면 두 축일 모두 마리아를 기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를 잉태되게 하시고 탄생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축일이고, 그리고 마리아가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런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생일에 축하드림은 어머니가 태어나셨기에 내가 태어났고,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가 되어주셨기에 내가 사랑받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불행하고, 그리고 그 불행이 어머니 때문이라면 절대 어머니 생일을 축하하지 않겠지요.
욥처럼 너무 불행한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자기를 배었던 어머니의 태(胎)도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마리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은 마리아가 인류를 구원하신 분의 어머니이기 때문이지요.
저의 어머니 환갑 때 어떤 분이 실제로 그러하셨습니다.
‘신부님을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시는 것을 옆에서 들었는데, 저의 어머니가 태어나신 날에 저를 낳아 주신 것에 감사하신 것이었습니다.
저의 어머니에게는 이것보다 더 기쁘고 고마운 축하 인사가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오늘은 마리아의 2,020회 생일일 것이고, 환갑보다도 더 대단한 생일 축제일에 우리는 같은 의미의 축하를, 그러나 더 성대하고 기쁜 축하를 마리아께 드리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현대를 자기 홍보 시대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알려야 성공에 도움이 된다며 이력을 과대 포장하고, 심지어 거짓으로 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알려지는 법이고 마침내 망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으로 피알시대의 의미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떻게 든 자기를 알리고 인정을 원하며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모습에 견주어 보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그는 그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마태 1,19).
그는 법의 의도를 지키는 법대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허물을 감싸 안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친절하며 그의 성숙한 인간성이 하느님의 계명과 잘 융화되어 빛을 발합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 인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조사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약혼하고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드러났으니 요셉에게는 얼마나 큰 고뇌와 의혹, 심사숙고, 마음의 동요, 당황스런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드러내어 그녀를 수치스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바보짓이지만 그는 역시 의로운 사람으로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는 온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특권과 아이를 낳는 데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마태 1,24).
마리아는 아기를 낳고 요셉은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마태 1,21)
요셉의 마음고생 못지않게 마리아의 마음도 고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까닭입니다(루카 1,45).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 안에 항상 함께 하셨고,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기에 행복하신 분입니다.
마리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즉 육화, 구세주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모님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한 준비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못 누릴 따름입니다(차동엽).
그러므로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예수님께’ 이르게 하시는 ‘전구자’ 이십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리아처럼, 굳은 믿음과 온유함 속에 꿋꿋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주님 안에 머물면 주님께서 필요할 때 드러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묵묵히 위엄과 사랑과 믿음 안에서 피할 것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지혜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어떤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깊이 뿌리 내리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왜 성모 마리아께서 아담과 하와를 앞서시는 ‘첫 번째 피조물’이라 주장하는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성경엔 성모님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의 탄생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성모님을 통해 당신 아드님이 탄생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만큼 합당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모님은 잉태된 순간부터 그리고 오늘 탄생한 순간부터 이미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된 순결한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로마서에서 보면 성모님께서 선택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중략)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나지르인이 되게 하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부르심 – 의롭게 하심 – 영광스럽게 하심’입니다.
먼저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시며 결국엔 당신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것만 보면 ‘예정설’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이 말이 먼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
하느님은 아무나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아실 수 있으실까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예언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 아셔서 그들을 당신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랑이 없음이 죄입니다.
성모님은 사랑이 충만하셨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어 그 후손들은 원죄를 지니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는 원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할 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로 예정되었던 분”(「구세주의 어머니」, 3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성모님은 원죄가 없기 위해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 신학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잘 받아들여 주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성모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앞서는 첫 번째 피조물임을 주장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의 법칙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상태에서 자녀를 낳았을 때 순결한 자녀가 탄생할 수 있을까요?
카인이 태어납니다.
만약 죄를 짓기 이전에 카인을 낳았다면 카인은 살인자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불륜을 저질러 자녀를 낳았다면 그 자녀가 온전할 수 있을까요?
태어나자마자 죽었습니다.
부모의 살과 피가 담기지 않은 자녀의 미래는 죽음 뿐입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마스크 걸’(2023)이란 드라마가 있습니다.
김모미는 못생긴 얼굴로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사랑 받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엄마도 이모도 모두 외모 때문에 사회에서 상처 받았지만, 그 상처를 감싸주지 못하고 그 닮은 점 때문에 더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감사로 승화 하지 못하면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모미는 또한 자살한 아빠를 닮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미는 이제 우리가 예상한 삶을 살아갑니다.
비극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인기 있는 연예인을 꿈꿉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외모가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마스크를 씁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스크 걸의 인터넷 방송을 보고 흥분합니다.
모미는 그것을 즐깁니다.
모미는 자신이 그렇게 인기 있는 사람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회사에서 인기 있는 상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회사의 현실은 인터넷과 다릅니다.
그렇게 지나친 욕망 때문에 모미는 상사를 죽음에까지 몰아갑니다.
그리고 모미를 좋아하는 또 다른 외모 콤플렉스를 앓는 주오남이 그 뒤처리를 해 줍니다.
주오남은 자신이 모미의 살인을 덮어준다는 명목으로 모미를 범합니다.
그 와중에 주오남도 죽습니다.
모미는 주오남과 자신을 통해 태어난 아기를 자신에게도 쌀쌀하게 대했던 엄마에게 맡기고 성형수술을 하여 술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원작에서 모미는 자기 엄마처럼 딸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이 딸이 있는데도 집안에 여러 남자를 들입니다.
모미는 엄마가 자기를 버릴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엄마를 증오합니다.
모미는 딸을 엄마에게 버려두고 일본으로 밀입국하려다 잡혀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 있다가 보니 성형 부작용이 생겨 그것을 해결하려고 탈옥까지 합니다.
모미의 딸 미모는 잘 자랄 수 있을까요?
마치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온 카인처럼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 죄의 굴레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피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모미가 자기를 위해 대신 희생한 친구 김춘애 때문에 드디어 사랑을 알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모미가 주오남을 죽였음을 안 엄마 김경자는 모미도 똑같은 고통을 겪어보라며 미모를 괴롭히고 죽이려 합니다.
모미는 자수하여 감옥에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는 딸을 살리기 위해 탈옥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딸을 위해 대신 죽습니다.
여기서 이 비극의 역사가 끝이 날 것입니다.
미모는 엄마의 피를 받아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어 자존감 있게 잘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의 법칙은 단순합니다.
사랑을 받아야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구걸하다 결국 망해버립니다.
이 굴레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피를 받는 것 뿐입니다.
만약 모미가 드라마에서 친구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딸을 살리려고 탈옥을 하려는 설정을 했다면 개연성이 떨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성모님께서 성인 요아킴과 안나의 사랑을 받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원죄에 물든 사랑을 받았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드릴 완전한 인성을 가질 수 있으실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첫 번째 피조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 자녀도 스스로 죄 없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피 흘림을 통해 죄가 사해지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됨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면 모든 사랑의 법칙이 무너집니다.
사랑은 받은 만큼 할 수 있고 그만큼 죄가 없는 순결한 인성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성부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딸이 되시며 또한 성령의 궁전이 되시는 이 최고의 임무와 품위를 지니고 계신다.
이 뛰어난 은총의 선물로 마리아께서는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앞서 계신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받아야 할 모든 사람과 함께 아담의 혈통 안에 결합되어 계신다.”
(「교회헌장」, 53항)
“지혜(마리아)는 창조를 위한 또 구원을 위한 중재자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첫 번째 피조물로서 자신 안에서 창조주의 원의를 발견하고 또 그 원의에 대한 합당한 응답도 함께 발견한다.
이 참된 응답의 모습이 신구약을 아우르는 참된 지혜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지혜는 응답하고 그 응답은 하느님과 함께 마치 소꿉친구처럼, 애인처럼 하느님 가까이 머문다.”
(요셉 라칭거, 시온의 딸, Jaca book, Milano 2006, 25)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끊임없이 관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 탄생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 여정, 하나하나 짚어나가 보니 참으로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의 잉태 이후 성모님은 당혹해하는 부모와 맞서야 했고,난감해하는 약혼자 요셉과 맞서야 했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 맞서야 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성모님께서는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그뿐입니까?
정녕 있을 수 없는 마굿간 탄생, 헤로데 박해를 피하기 위한 이집트로의 피신, 때로 이해하기 힘든 아들 예수님의 돌출 발언, 결국 아들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성모님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우리에 앞서 때로 힘들고, 때로 외롭고, 때로 시련 투성이의 가시밭길을 용감히 걸어가셨습니다.
때로 밀려오는 외로움에 돌아서서 울었습니다.
때로 가야 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주저앉고만 싶었습니다.
때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 몸으로 떨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모님은 기다림의 달인, 견뎌냄의 달인이셨습니다.
희망의 달인, 믿음의 달인이셨습니다.
철저하게도 ‘Yes woman'이셨습니다.
그 바탕에는 다름 아닌 단순함, 소박함, 가난함, 겸손함의 덕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 앞으로 닥쳐오는 비관적인 상황 앞에서도 성모님은 단 한번도 No라고 하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Yes라고 외치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Yes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거룩한 생명의 잔, 하느님의 거처인 지성소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이 위대하신 이유는 그분의 신앙이 한 자리에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해나간 것입니다.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의 마리아가 지녔던 믿음은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고, 그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시선을 항상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즉 관상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상처도 입으셨고, 이해하지 못할 일도 겪으셨지만, 늘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기도 안에서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의 신앙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을 거듭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이 있는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겸손하고 순종적인 마리아를 총애하시고, 하늘의 어머니로 품위를 격상시켜주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의 생애>
성경에는 성모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는데, 그래도 성모님의 생애를 연상하게 하는, 또는 복음서 저자들이 성모님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6-37)
한나가 남편과 같이 살았던 기간이 짧았다는 것,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는 것,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는 것 등이 모두 성모님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모님은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살아 있는 성전이신 예수님’을 떠나는 일 없이 끝까지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님 승천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 분입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 1,14)
‘렙톤 두 닢’을 봉헌한 어떤 과부의 이야기에서도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1-44)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혹시 그 가난한 과부가 성모님이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루카 9,58), 성모님도 물질적으로는 늘 궁핍한 생활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모두 다 봉헌하셨습니다.
당신의 생애 전체를 하느님께 바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그 마음을 보셨기 때문인데, 아마도 그 과부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봉헌한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봉헌을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마주치신 과부의 모습에서도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루카 7,11-15)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수님도 외아들이셨고 성모님도 과부셨습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때,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 성모님이 겪게 되실 ‘비통한 심정’을 미리 보셨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울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성모님께도 하신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젊은이를 살리신 일은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하고,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죽은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사건이지만, 그래도 성모님께 가장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은(요한 19,26-27), 어쩌면 ‘나인’ 고을의 과부의 모습을 기억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는 것은 창조 이전부터 성모님을 협력자로 뽑으시고, 성모님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구원사업을 시작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페 1,3-5)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과 ‘탄생’과 ‘승천’은 모두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귀한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성모님을 본받아서, 성모님처럼 그 선택과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축!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 -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하세.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그분이 낳으셨네.”
오늘 축일 입당송이 마음을 환하게 밝힙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만세오창에 오늘은 만세육창을 했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순교자 성월 9월에 맞이하는 반갑고 고마운 축일입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하신 날,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성경에 성모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으나 성모 신심의 뿌리는 깊습니다.
동방과 서방 로마 교회는 6세기와 7세기부터 마리아의 탄생을 축하해 왔습니다.
이 전례의 기원은 6세기 성 안나 대성당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교회의 봉헌에서 유래합니다.
7세기 동방 수도자들이 이 축제를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교황 성 비오 10세의 전례 개혁에 따라 축일은 단순한 8부 축일로, 이어 1955년 교황 비오 12세는 8부 축일도 완전히 폐지함으로써 9월8일 축일만 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12월8일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를 축하하는 대축일은 후에 마리아 탄생 9개월 전으로 설정되었습니다.
동방교회에서 마리아의 탄생일은 12대 전례 중 하나로 기념합니다.
동방 전례의 제목은 “하느님의 탄생자이시며 영원한 동정 마리아이시며 우리의 고귀한 여왕의 탄생”입니다.
마리아 탄생 축일의 유래를 간략히 살펴 봤습니다.
결국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마리아를 통한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출현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은 그 아득한 예전 미카 예언서를 통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몰라서 우연이지 알고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마리아 성모님을 통한 구세주 탄생이 예고되고 있으며, 다음 묘사되는 예언은 완전히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업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말마디가 떠오릅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기나긴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겸손를 엿볼 수 있는 족보입니다.
하느님은 사람 하나하나 모두를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이용하십니다.
하느님께 쓸모 없다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바, 구약의 네 이방 여인, 다말, 라합, 룻, 바쎄바입니다.
하느님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흠많은 이 여인들을 당신 구원 도구로 활용함으로 예수님은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는 마태오 복음 사가입니다.
마침내 불가사의의 극치는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사건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오묘합니다.
예수님의 긴 족보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마리아의 결정적 역할이 다음처럼 묘사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
바로 여기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심이 마리아 탄생의 유래가 됨을 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축일을 기념함은 하느님의 위업을 찬미하는 데 있습니다.
다음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리아의 역할이 빛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어지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예언은 마리아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뜻이다.
구원자 예수님 탄생에 마리아 성모님의 결정적 역할을 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심모원려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눈밝으신 하느님은 당신의 도구로 마리아를 택하셨으며, 마리아를 통해 임마누엘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순종하신 믿음의 어머니, 성모님 덕분에 우리는 임마누엘 구원자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성모님 탄생 축일을 경축하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임마누엘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합시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교회는 마리아의 탄생을 경축하며, 성경이 말하지 않는 마리아 탄생 일화 대신 예수님 잉태에 얽힌 후일담을 전합니다.
미사의 말씀은 기나긴 다윗 가문 족보 안에서 이어진 구원 역사가 예수님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열매를 맺었는지 들려 주지요.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미카 5,1)
먼저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가문에서 탄생하실 구세주에 대해 미카 예언서의 한 구절을 들려 줍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예수님 족보의 요약인 셈입니다.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보잘것없는" 신분의 여인들을 통해 맥이 이어져 온 역사임이 오늘 마태복음 첫머리의 족보에서 드러나니까요.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다윗 가문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은 하나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이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양갓집 규수들의 조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 조상인 그녀들의 근본과 이력, 신원에 대해 포장하거나 덧칠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족보는 이스라엘 구원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 역사를 담고 있는 자취가 되기도 합니다.
세대를 거쳐 우리를 품어온 태, 우리와 연결된 핏줄 역시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고, 그 덕에 지금 여기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태 1,19)
약혼녀의 임신은 혼인을 기다리는 신랑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입니다.
배반한 여성에게 어떤 조처를 취해도 율법과 관습이 눈감아 주고 편들어 줄 처지일 겁니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 요셉은 마리아를 위해 물러나 주기로 합니다.
사랑과 겸손 위에 자라난 그의 "의로움"은 결국 순종의 열매로 완성될 것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마태 1,23)
복음사가는 예언서의 한 대목을 들어(이사 7,14 참조) 요셉의 결정을 숨죽여 바라보는 우리까지도 이해시키고자 합니다.
인간적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신비를 믿음으로 껴안아야 한다고 요셉과 함께 우리에게도 말을 건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 대목에서 사건의 서술 안에만 등장하는 마리아나 그 사건 앞에서 고뇌하는 요셉은 족보 속에 등장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박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입니다.
실제로 성왕 다윗도 자신에 대해 "나처럼 가난하고 천한 몸"(1사무 18,23 참조)이라 일컬었고, 후일 불리울 마니피캇에서 마리아 역시 "그분께서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루카 1,48 참조)다고 고백하지요.
주님 앞에 선 인간의 가난함과 비천함은 적나라한 실존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것이니까요.
사람은 태생이나 가문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곧 자기 가문이나 집안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만큼 부질없고 민구스런 일도 없다는 뜻도 되지요.
이미 자기 집안의 역사를 보아서 알지만, 흠결 없이 완벽히 고귀한 족보는 희망사항이나 은폐의 증거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있게 한 집안 역사의 흠 많은 자취들에 대해서 솔직해도, 당당해도 괜찮습니다.
구세주를 일으킨 "보잘것없는" 집안의 족보가 말해주듯, 비록 가난하고 비천한 죄인인 바로 우리가 구원 역사의 한 줄기, 한 토막을 끗꿋이 연결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연민하고 사랑하며 겸손히 순종하는 우리를 통해 인류에게 이루실 주님의 구원이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가는 중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신앙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은 마리아와 함께 구원의 신비와 우리 삶을 잇는 견고한 허브처럼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구원의 핏줄은 이렇게 믿는 우리 모두를 통해 오늘도 면면히 흘러간답니다.
마리아를 닮은 벗님은 복되십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되신 마리아의 탄신을 축하합니다.
그 구원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벗님의 탄생도 더불어 축하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9월 10일은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으니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 팬데믹 중이어서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뉴욕에서 교우들과 함께 연도를 바쳤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저의 어머니도 저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첫 본당에서 저는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40도가 넘는 고열로 중환실로 갔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병원에서 제가 퇴원할 때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분들의 도움이 컸지만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간호로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제가 가야 할 본당이 정해지면 어머니는 저보다 먼저 본당으로 가서 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주임신부가 되어서 간 본당은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이 100명가량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3년 동안 저를 위해서 식사를 준비해주었고, 청소와 세탁도 기꺼이 해 주었습니다.
본당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덕분에 아버님은 3년 동안 혼자서 지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동생 수녀님과 저는 건강하게 수도자와 성직자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저와 동생 수녀님을 위해서 기도하실 것입니다.
올해는 기일이 주일입니다.
교우들과 함께 연도를 바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생일’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었던 성모님은 9월 8일에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성모님도 예수님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성모님은 신앙인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은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모님은 ‘배려와 헤아림’이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려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전구를 구하면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랬듯이 우리들의 청을 예수님께 말할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모자(母子)가 만났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숨지신 예수님을 품에 앉았습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기도인 성모찬송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을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을 마련해 주셨나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오니 저희가 그 가르침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신용카드를 내면 직접 직원이 받아서 결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 후에는 단말기에 소비자가 직접 긁어서 결재합니다.
그런데 돈은 그냥 주고받지요.
여기서 의문점이 듭니다.
돈이 더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하지 않을까요?
바이러스는 지폐보다 신용카드에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바이러스에 노출된 지폐에서는 바이러스가 30분 뒤에 자동으로 사라지지만, 신용카드에서는 48시간 뒤에도 바이러스가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용카드에서 변기보다 두 배 많은 세균이 검출되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물론 지폐도 깨끗하지는 않습니다.
1달러 지폐에서 약 3천 여종의 박테리아, 세균, 곰팡이가 검출되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글쎄 미생물이 그 안에서 자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셀 때 침을 묻히는 것은 아주 안 좋으며, 예기치 않은 돈이 들어왔다면서 돈에 입맞춤하는 것도 매우 비위생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비위생적인 지폐이고 신용카드였습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만 진리라며 착각 속에 매여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께서는 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사셨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사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노력에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모님의 탄생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성모님의 탄생을 경축하였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탄생으로 인해 하와의 죄악으로 생긴 죽음의 저주가 없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구세주의 탄생과 아주 가깝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의 탄생이 없다면 구세주의 탄생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알리는 서곡’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강생을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잉태를 준비하셨고, 성모님의 탄생으로 옛 죄의 저주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갈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우리 곁에서 항상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늘 힘써주십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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