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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솜씨에 영어도 잘 못하고 기껏 x중딩일 뿐이지만.. 한 번 글을 올려보것습니다아~
서문 따위는 제 체질도 아니거니와 글 솜씨도 부족하니 패스(...)
- 다음 카페에 이런 류의 글을 올리는 건 처음이라.. 부족한 점 있으면 많이 타일러주세요 ㅋ
≪ 존(John) ≫
신의 은총에 연원한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이며,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공작, 앙주의 백작인 존
- 마그나 카르타 첫 단락 中
⑴ '위대한 군주'
≪ 헨리 2세 (Henry II) ≫
1066년 돌출된 반도 노르망디(Normandie)를 지배하고 있던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잉글랜드 내부의 반대파를 물리치고 크리스마스 날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면서 수많은 지배자를 연이어 맞이했던 잉글랜드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윌리엄은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앵글로색슨의 왕을 패사시키고 잉글랜드를 지배하게 된 이래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고, 색슨족의 전통을 파괴하고 그들의 장원을 몰수하여 자신을 따라온 노르만 귀족들에게 이를 분배하여 거센 반발을 불렀다. 그러나 이런 잔인한 통치는 오래 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통증을 거치면서 잉글랜드에는 강력한 군주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가 뿌리내릴 수가 있었다.
이런 때문에 정복군주 윌리엄이 죽은 후에도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계속 잘 굴러갔다. 분명 1066년에는 '외부인' 의 침략에 항거하던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형제 간의 반목 끝에 최후의 승자로써 윌리엄 생전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한 헨리 1세의 시기에도 평화는 계속 되었고, 비록 그가 아들을 잃었지만 왕조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1135년 헨리가 죽자 또 한 번의 내전 끝에 윌리엄의 외손이자 헨리의 조카였던 스티븐이 기습적으로 왕위에 올라 1154년 죽을 때까지 재위하면서 잉글랜드를 지배하는데 성공하였다.
≪ 스티븐(Stephen of england) ≫
하지만 평화는 1153년 들어 깨어지고 말았다. 헨리는 아들을 잃었으나 딸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헨리 1세의 장녀인 마틸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5세와 1114년 혼인하였으며 1125년 그가 죽고 잘리에르 왕조 자체가 황권을 영원히 상실하게 되면서 영국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1128년 앙주의 백작인 제프리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anet)과 혼인하였다.
헨리 2세가 죽은 후 왕위는 당연히 그녀에게 돌아가야 했고, 그를 싫어하던 귀족들과의 내전 끝에 그녀가 1141년 즉위하게 되었지만 그녀의 금전욕과 계속 반발하는 국내 세력들의 쿠데타로 결국 대륙으로 건너오고 스티븐에게 왕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1151년 제프리가 죽자 이제 앙주의 통치권은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바로 이 사람이 존과 그 형제들의 아버지이다.
≪ 제프리 플랜태저넷 (위 사진은 묘소의 도판) ≫
헨리 2세의 아들과 딸들은 체격이 작은 편이 아니었으나(그의 딸 마틸다는 남편 하인리히보다 훨씬 키가 컸다), 그의 체격은 심히 작았으며, 짧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하고서 법식에 맞지 않게 멋대로 옷을 입고 다니던 뚱보였다. 게다가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 나서, 겉모습으로는 이 사람이 정말 그 헨리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굴었고 또 친화력도 있었으며 인품은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는 훗날 '토머스 베켓 사건' 에 휘말렸으나 그의 신심은 그 때나 젊었을 때나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그는 성격이 불과 같았고, 정사를 돌볼 때는 냉철하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한 번 심기를 건드리면 도통 앞길이 편치 못했다. 게다가 혼자서 분을 삭이다가 끝내 마치 발광하듯 하는 그의 모습은 별로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 (헨리가) 평소처럼 분노를 폭발시켰다. 모자를 내팽겨치고 허리띠를 풀고 망토와 옷을 집어 벗어 던지더니 침대에서 비단 침대보를 움켜쥐고선 잘근잘근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능력 있는 군주였다. 처음 앙주의 백작으로 있었을 때 그는 먼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통치권을 회복하는게 급선무라는 사실을 알았다. 1152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와 결혼하면서 그의 영지는 몇 배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 대신 '사랑 없는 sex는 간통과 다름 없다' 는 교리에 충실하여 아들을 낳지 못한 이 아키텐의 상속인을 소박 놓은 프랑스의 왕, 루이 7세는 8주 만에 자신의 전 부인이 매우 젊고 위험한 경쟁자와 결혼하여 그 부와 영지를 불려주는 것을 착잡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제 헨리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1150년 아버지가 죽기 전에 이미 노르망디의 공작이 되었으며 이제 거기에 앙주와 아키텐을 더하게 되었으니 잉글랜드의 국력과 비교해도 꿀릴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우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153년 헨리가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 침입하자 스티븐은 그에게 상속인의 자격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 스티븐이 사망하면서 결국 잉글랜드는 거대한 '앙주 제국' 에 편입되었다. 플랜태저넷 왕가가 브리튼 섬과 프랑스의 각각 절반을 차지하는 일종의 제국을 이룩한 셈이었다.
≪ 12세기 중반 - 프랑스 내의 영국의 대륙령 ≫
1154년 헨리가 즉위한 직후에 그는 영국인으로써는 최초로 교황으로 즉위한 하드리아누스 4세의 교서를 받게 되었다. 교황은 아일랜드인들도 분명 교황 자신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훌륭하지 못한 기독교인' 이므로 '고결한' 헨리 왕이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강권하였다. 헨리는 당장은 바다 건너 섬을 치는데 모험을 걸 상황이 못 되어 침략 계획을 포기하였다.
헨리 왕은 일시적으로 아일랜드의 침략 계획을 중지했지만 제국의 팽창을 중단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들 사자심왕 리처드처럼 십자군으로 나설 여유도 마음도 없었으며, 부인의 전 남편이자 프랑스 내에선 자신보다 위에 있는 루이 7세에게 대놓고 전쟁을 벌일 생각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제국을 유지하고 팽창시킬 수 있었을까? 그가 쓴 무기는 이미 마련된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외교술과 자신의 자녀들을 동원한 혼인 정책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유럽의 주요 왕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일부 영지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그 예로, 헨리 2세는 장자(젊은 왕 헨리보다 코이티어 백작 윌리엄이 먼저 태어나긴 했으나 요절) 젊은 왕 헨리를 루이 7세의 딸과 혼인시켜 벡생(Vexin)의 통치권을 확보했으며 장녀인 마틸다는 사실상 바바롯사 프리드리히와 동급의 파워를 보이던 사자공작 하인리히와 결혼시켜 독일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들은 대표적인 예일 뿐, 이 밖에도 딸 레오노라는 카스티야의 왕비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마지막 딸인 조안은 시칠리아의 왕비가 되었다. 당연히 플랜태저넷 왕가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헨리는 내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는데도 큰 관심을 기울인 군주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의 통치 초기에 오랜 왕좌를 둘러싼 분쟁으로 무너진 잉글랜드의 통치체계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일이 이것이었음에도 그의 가족들과 벌어진 쉴 새 없는 내전들과 아들들의 독특한 통치(?)로 인해 그의 체제 정비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근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의 노력들이 빛을 발하였다.
헨리의 통치 기구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바로 추밀원이었다. 이 기구를 이루는 사람들은 저마다 달랐는데, 리처드 드 루시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먼트 같은 유력한 봉건 영주들도 있었고 엘리 주교인 나이절, 리처드 피츠닐과 그의 아들인 일체스터의 리처드 등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들보다 더욱 빛을 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훗날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 당시 대법관이었다. 헨리 2세의 친구였던 이 사람은 훗날 비운의 죽음을 맞게 되나, 11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헨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어쨌든 클래런던 헌장(The Constitutions of Clarendon , 1164)으로 대표되는 교회에 대한 헨리의 정책들은 주로 주교 임명, 빈 주교 관구의 관리 등에 대해 국왕의 세습 권리를 공개적으로 재천명한 것이었으며, 클래런던 조례(Assize of Clarendon, 1166)로 대표되는 형사 재판의 체계화는 순회재판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배심원단이 탄생하도록 만들어주었다. 1176년, 전국이 여섯 개 순회 구역으로 나뉘어지고 3년 뒤 21명의 판사들이 지방으로 파견된 것은 이런 조치들이 느리게나마 점점 현실에 반영되어 효과를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어느 정도 헨리의 치세가 본 궤도에 들어서자 이제 헨리 2세는 영국 제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태어난 곳, 그리고 그가 자라난 곳, 그가 통치하는 알짜배기 땅들은 모두 프랑스 서부지역이었고 그의 재위기간 동안 ⅔의 기간을 보낸 곳도 그 곳이었으나 그렇다하여 선대부터 진행되던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등에 대한 잉글랜드 화의 작업에 제동을 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재위 초기에 스코틀랜드의 맬컴 3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는 등 스코틀랜드 저지 지방이 영국화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으며, 정국이 안정되자 이제 몸소 칼을 들고 '원시적이며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웨일즈와 아일랜드를 정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들 지방에는 통일된 왕이 없었고 따라서 국력의 응집이 어려웠기 때문에 헨리로써는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1157년 웨일즈에 대한 정벌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웨일즈의 남부 해안과 계곡들은 윌리엄 1세 이래 왕들의 묵인을 받고 점차적으로 웨일즈로 침투해들어간 국경 지대의 귀족들에 의해 영국화가 이루어지고 잇었다. 카디프, 쳅스토우, 펌브로크 등의 유명한 성과 도시들이 건축되고 잉글랜드의 이주민들이 그 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이런 발판을 바탕으로 해서 헨리 2세는 웨일스에 충성을 강제해 표면적으로나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웨일즈의 정복은 쉽지 않았다. 헨리 2세가 1165년 보였던 잔인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웨일즈는 완전히 잉글랜드에 통합되지 못했으며, 1169년 스트롱보우(strongbow) 리처드 드 클레어의 침공을 시작으로 더못 맥머로의 요청을 받아 2년 후 헨리 2세가 진주해 형식적으로 점령한 아일랜드 또한 현지인들의 반발로 정복이 쉽지만은 않았다.
헨리 2세는 주요한 왕들의 복종을 받고 아일랜드의 왕 행세를 하였으며,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워터퍼드와 더블린 등의 주요 항구들을 차지하였지만 그들의 마음까지는 차지하지 못하였다. 여하튼 이런 헨리의 공적에 대해 교황 알렉산드르 3세는 아일랜드의 성직자에게 '야만스럽고 무지한 자들의 비합법적 행위가 줄어든다는 소식을 들어 즐겁다' 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었고, 헨리는 1177년 아들 존을 아일랜드의 영주에 봉하고 이를 교황에게 승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교황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 일대는 존이 가졌던 최초의 정치적 지배지로써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 1200년 경의 아일랜드 (헨리 2세의 정벌 포함) ≫
'이는 태곳적부터 향유해온 아일랜드인의 자유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로마에도 정복당하지 않았으나 이제 잉글랜드의 왕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 뉴버그의 윌리엄(william of Newburgh)
이처럼 피도 별로 흘리지 않고(적의 피를 수 없이 보았을지언정) 거둔 큰 성과들 덕분에 헨리 2세는 1160년대 인생의 절정을 누릴 수 있었다. 부부 사이의 관계도 정치욕이 강한 기질이 알맞았던 것인지 '침대의 하모니' 의 결과로 엘레오노르는 8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마지막으로 낳은 자식이 바로 1166년(혹은 116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옥스퍼드 버몬트 왕궁에서 태어난 훗날 잉글랜드의 왕, 존이었다.
비록 1170년 그의 정치적인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던 '토머스 베켓 사건' 이 벌어지긴 하였으나 그 이전이나 이후나 그의 부와 권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헨리는 명목상 프랑스 왕의 하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리처드의 약혼자였던 루이 7세의 딸인 앨리스를 1169년부터 사실상 구금하며 힘 없는 카페 왕가의 루이 7세를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자랑했고 또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다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보다도 그는 더 많은 군대와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의 정권은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베켓이 죽었던 그 해는(베켓이 죽을 때보다 앞선 때이지만), 영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실험이 이루어진 때이기도 하였으니, 바로 헨리 2세가 장남 젊은 왕 헨리를 잉글랜드의 군주로써 자신의 공동 통치자로 지명한 것이다.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배분하고 자신이 구축한 자산을 공평히 나누려 했지만 막내 존에 대한 애착과 실질적인 권력까지는 내놓지 않으려는 헨리 자신의 의도는 결국 화를 야기했다.
결국 1173년, 젊은 왕 헨리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형제들, 심지어 부인인 엘레오노르까지 한 편이 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소위 '1173~1174년의 반란(Revolt of 1173~1174)' 의 시작이었다.
'위대한 군주' 헨리의 20년 치세에 이제 종언이 다가오는 듯 했다.
첫댓글 언제보아도 아름다운 영국령 프랑스...... 와아..근데 중학생분의 학식에 감탄이네요. 넷상에서 나이 따지는게 좀 뭣하긴합니다만...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다음편 기대되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영국령 프랑스..ㅋ 헨리의 자식들이 못나서 결국 모두 프랑스에 넘겨버렸다죠.ㅋ
"토탈워 카페는 넓고 인재는 넘쳐난다....." 다음 글 기대됩니다. ^^
아.......왜 Mr. John Man을 생각하고 들어온거지 ㅡㅡ;; 그러고 보면 다른 이들보다 유독 영국왕 이름 중에 John이 없네. 영국에선 흔한 이름인 거 같은데.... 아, 미국에도 없네
번역짜집기라도 중학생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도 건필하십쇼! 우왕 ㅋ 굳 ㅋ
오~ 중딩이시면서도 환빠에 물들지 않은 이런 상콤한 지식을~~ 우왕 ㅋ 굳 ㅋ
ㅋㅋㅋㅋㅋㅋ 너굴공은 일부러 중딩이란걸 밝히는 센수?
허접한 글에 달려올 태클이 두려워 미리 방지책으로.. ㅠ.ㅠ;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 헨리 2세도 초상화로 보면 꽤 준수해 보이는데요? 하하
존하고 헨리 2세는 잘 나왔는데... 스티븐은 좀 안습...;;
Johannes Dei gracia rex Anglie, Dominus Hibernie, dux Normannie, Aquitannie et comes Andegravie.
중딩이 썼다고 보기 힘든 글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