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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책임 20:25~32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지도자의 모범 20:33~38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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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자신은 깨끗하다며 하나님 뜻을 다 전했다고 말합니다. 또 거짓 교사들을 주의하라며, 하나님이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은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그들을 맡기고 자신이 보여 준 모본대로 행하라고 권면한 후, 기도하고 작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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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책임 20:25~32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 뜻을 다 전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해가 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는 지도자는 자신과 양 떼를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죄에 빠지면, 양들을 바른길로 이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 발생할 위기를 경고합니다. 이단을 ‘사나운 이리’(29절)라고 표현한 것은 그 공격이 매서움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사람들을 훈계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떠나지만, 주님과 은혜의 말씀이 남은 자들을 친히 인도하시고 든든히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따라 양 떼를 섬기는 지도자는 영원한 기업을 얻습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이 장로들에게 양 떼를 위해 삼가라고 당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게 맡기신 양들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내가 삼갈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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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모범 20:33~38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범사에 본을 보였는지 설명합니다. 그는 자족하고 청렴했으며, 자비량으로 수고하면서 연약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사도로서 교회에 사역비를 요구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35절)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바울의 회고와 권면에는 말이 아닌 삶으로, 그리고 열정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장로들은 크게 울면서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앞으로 더는 바울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배에까지 전송하는 모습은 바울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보여 줍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은 재정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본을 보였나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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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본을 보이는 지도자
박양규 목사의 「중세 교회의 뒷골목 풍경」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역사는 말한다. 밀라노 칙령 이전에 기독교가 받았던 핍박보다 이후 기독교가 이교도를 박해했던 것이 훨씬 더 가혹하고 혹독했다고….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결코 성경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며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절대적으로 자신을 따르라며 예수님을 대신해 지도자의 자리에 앉으려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모릅니다. 창피한 일이지만 어떤 목회자는 교인의 참됨을 ‘나의 명령에 따르는가?’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큰 자가 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높이기 위해 섬기는 자가 되려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크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내가 섬기는 분이 높아지십니다. 흔히 말하는, 우리 삶에서 예수님만 드러나는 것은 ‘나’의 낮아짐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낮추려고 애쓰면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노예적 봉사와 굴종이 아닌, 스스로 낮아지는 섬김의 본만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 참 힘들고 아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으로 본을 보이고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저는 이 나라와 민족에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텅 빈 경건 / 김병삼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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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20장 32절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에베소 장로들을 만난 바울은, 그들을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더는 그들을 목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성도들을 맡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 주도성'을 버리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도성'을 인정할 때,
우리 신앙은 성숙해 갑니다.
자기 욕구를 채우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다. - 어윈 맥마너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게 맡기신 영혼들에게 얼마나 최선을 다해 은혜의 복음을 전했는지 돌아봅니다. 남을 탓하고 핑계를 대며 사역에 게으르고 사랑이 식어 버린 저를 용서하소서. 삶의 구석구석 말씀의 빛을 비추어 검소하고 성실하게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 가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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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내 자신을 잘 살피면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들을 잘 돌보도록 사명을 부어 주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항상 내 자신의 믿음을 잘 살피는 것이 우선임을 잊지 말고,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주님을 의뢰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자!
- 재정적인 부분에 대해 탐심을 갖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 자족할 줄 알고, 주신 것들을 더욱 더 규모 있게 사용하도록 하자
- 늘 겸손함을 잃지 말고, 나눔과 섬김을 이 땅에서 실천해 나갈 방도를 찾고, 내게 맡겨 주신 양 떼를 잘 돌보기 위해 더 신경을 쓰고, 그들의 필요들을 채울 방법들을 모색해 나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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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은 다시 못 만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근심과 슬픔으로 헤어집니다.
그러나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권면한 마지막 설교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은 바울의 사랑이 진실되며 그 사랑의 근원지가 자신의 유익이나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마지막 권면이 더욱더 슬펐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권면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는
에베소 교회를 목양하는 사역에 큰 힘과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 얼마나 멋있는 동역자의 모습인가!
동역의 중심에 사람의 이해관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동역의 관계가 많이 나오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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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을 향해 급하게 가면서도 에베소 교회를 돌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말씀을 전했는데, 그들은 바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했고,
얼굴로는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크게 울며 사랑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바울에 대한 이런 존경심과 바울의 권위는 떳떳함에 기반한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떳떳했습니다
첫째는 영적으로 떳떳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20:26~27)
오직 회개와 믿음에 대해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18~21)
둘째는 물질적으로 떳떳했습니다
누구의 은이나 금도 탐내지 않고 오직 자기 손으로 일하여 쓸 것을 충당했고,
도리어 약한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마지막 때에 이렇게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떳떳한 권위 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거짓 목자 사나운 이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20:29~30)
지금도 주를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게 하여 자기가 왕 되고 이익을 취하려는 사나운 이리 목사가 많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오직 우리 구주와 은혜의 말씀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흘러 떠내려 가지 않게 하시고,
사나운 이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의의 말씀과 구원의 말씀과 믿음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서
반드시 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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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 선교에 관한 모든 경비와 심지어 동역자들의 필요까지 스스로 감당하여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 모범을 보였다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친히 노동을 하여 생계 문제를 해결하고 사역도 합니다. 또한 동행들의 필요까지 채워주니, 그 동행자들이란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이미 세워진 교회들은 굳게 하고, 무엇보다도 복음이 없는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 때 세워진 교회들이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교회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한 재정이 어디서 충당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선교본부 같은 곳이 있어서 지원될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그런 것이 아예 없습니다. 굳이 선교본부라 한다면 예루살렘 교회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곳은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딱하게도 성경에 하나님께서 돈을 주셨다는 기사도 없으니 정말 불가사의 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답이 딱 하나 위의 본문에 있으니, 다름아닌 자신의 손으로 선교비를 충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닙니다. 자비량으로 사역하며 두란노 서원을 운영하고, 마술사들과 싸우며, 데메드리오 같은 대적 자들로부터 핍박도 받으며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3년 동안 아낌없이 주고 베푼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받으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복일까요? 받은 것은 죽을 때 갖고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는 것은 상급이 되어 하늘에 쌓이므로 갖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것은 하늘에 있게 되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미리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기억하여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명쾌하게 정의하고 본인은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과연 그는 주는 삶을 삽니다. 후대사람들은 그를 본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신약시대 그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진실로 없기 때문입니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주는 일이지요. 열심히 돈을 벌어 남을 위해 쓰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남을 위해 사용하고, 애써 조사하고 연구한 것 남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공짜로 말입니다. 대가를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복이 되지 않지요. 성경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 선행을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가 갚으시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한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친히 보인 모본입니다. 주는 사람은 또 줄 수 있습니다. 베푸는 사람은 또 베풀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도 자비량으로 하는 바울,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입니다. 진정 본받는 것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8웗10일 태풍속에 동인천지하 상가에서 5명이 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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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자신을 찾아온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입니다.
1.리더 자신을 향해(목자)
바울은 자신이 선교를 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에베소 교회의 리더들이 왔을 때 그들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행 20:28) 교회 리더가 주의해야 할 대상이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자기 자신'입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장로, 감독, 목자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호칭은 각각 다른 직분을 의미하기 보다는 교회의 리더를 부르는 다양한 이름으로 보입니댜. 장로가 유대인 사회에서부터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었다면 목자는 조금 의아한 호칭입니다.
목자는 신약 시대 때에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사기꾼의 이미지가 강하여 법정 증인으로 설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호칭이 교회의 리더에게 가장 잘 어울립니다. 양 떼를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항상 거짓 리더가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그것을 구분해야 하며, 성도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 20:29)
거짓 목자는 '이리'로 불려집니다. 그들은 양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양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거짓 선생들입니다. 교회의 리더는 성도를 돌봐야 합니다.
성도로 인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이라면 그는 거짓 리더입니다. 성도가 많으면 돌보아야 할 사람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많다고 사례비를 과도하게 받고 비싼 차를 타고 호의호식한다면 그것은 성도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리더 스스로 그것을 조심해야 하고 교회도 그런 리더가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리는 외부의 적일 때도 있지만 또한 많은 경우는 내부의 적일 수도 있습니다.
리더 자신이 타락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리더가 되고 여건이 되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본전의식이 싹이 틉니다. 그래서 교회의 리더가 이리가 됩니다. 교회의 리더가 이리가 된다면 그 죄를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2.양 떼를 향해(감독자)
하나님께서 교회의 리더를 또한 '감독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감독자는 위에서 엄히 감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 떼는 결코 그냥 믿음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리더의 감독이 있어야만 믿음의 길을 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때 감독으로서 교회 리더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2) 그가 교회를 감독할 때 기준은 성경입니다. 그의 감정이나 성격이 아니라 성경이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리더들이 세워지고 그 말씀으로 양 떼를 양육해야 합니다.
교회의 리더에게 말씀이 없다면 교회의 리더가 아닙니다. 말씀이 아닌 다른 방식의 인도는 복이 아니라 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인도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인도한 것만이 영원한 나라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리더는 말씀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성도를 말씀으로 잘 감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벗어나지 말도록 말입니다.
교회 리더가 성도를 말씀으로 엄하게 감독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행 20:33–34) 바울은 에베소에서 누구의 지원으로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힘들게 일하면서 선교를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짜 복음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리더로서 목회자는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Ac 20:35) 리더가 사례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역을 하면 많이 힘듭니다. 그렇게 힘들면 성도들이 미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의 하나로 보여집니다. 교회의 리더가 되어 그렇게 계속 희생할 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희생하며 주는 것이 복이 있으니 또한 항상 더욱더 연약한 자는 있는 법이기에 그들을 도우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복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1) 리더는 말씀에 있어는 정확해야 하고 타협하면 안 되지만 사람을 향해서는 항상 온유해야 합니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문구가 '눈물로서 훈계'입니다. 성도를 향해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말아야 합니다. 사랑해야 목사입니다.
교회의 리더(목사)가 주의해야 하는 두 가지 대상을 살펴보았습니다.
목사가 자기 자신의 영성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영성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목자와 같은 모습으로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부자나 화려한 목사는 목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직 낮은 자의 모습을 끝까지 간직해야 합니다.
항상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를 항상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말고 주고 또 주면서 수고와 긍휼의 마음으로 감독해야 합니다.
말씀과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성도를 잘 감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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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막 1:4). 븍음은 죄사함의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주제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내 마음에 누리고 죽어서 가는 나라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다시 보지 못할 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 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죽음을 이기게 합니다.
(파수꾼의 책임을 다한 바울)
26,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은 오늘 모든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의 피에 대해서 무죄하였습니다. 바울이 증언한다는 이 말은 신약에서 바울만이 자주 쓴 표현으로 중대한 선언을 할 때 사용했습니다(갈 5:3).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말한 피는 생명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뜻은 20절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곧 복음을 다 전하였으므로 그들의 생명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에스겔 33장 1 이하의 말씀을 자신에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경비를 소홀히 하여 백성에게 화가 임하면 그 피가 파수꾼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겔 33:1-7). 그러나 파수꾼의 간절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행을 거듭하면 그는 죄악 중에서 죽고 파수꾼의 생명은 보존되었습니다(겔 33:8, 9). 바울은 복음을 맡은 자로서 자기의 책무를 남김없이 수행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책임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목자가 하나님의 뜻을 다 정하지 않으면 목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졍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양들의 책임입니다.
(깨어있으라고 권면함)
2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17절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그들 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수고를 당부합니다. 장로들은 성령께서 감독자로 삼은 자들입니다.
사도시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오늘날처럼 구별이 없었습니다. 장로, 목사, 감독등의 직무가 제도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이후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감독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감독자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지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희생적 사랑을 확증합니다. 장로들은 사역자의 포괄적인 목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장로들이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았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비할 데 없는 고귀하고 그 교회의 양 무리를 맡은 자의 책임이 중차대함을 말합니다. 성령에 의하여 장로들에게 양들을 보살피는 그 임무가 위탁되었습니다. 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삼가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삼가야합니다. 계속의 의미를 내포한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근면하고 깨어 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야합니다.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철저해야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합니다. 목자가 깨어 양을 돌보듯이 그들은 양떼를 위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양들을 살피고 병든 양을 돌보아야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인천방주교회: 박보영 목사님 / 임철 목사님/ 강태훈목사님 ~~나의것은 이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누어주고 섬기는것 이왼
(이리가 나타날 것을 예언함)
9,30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감독들이 깨어 있어야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와 같은 이단의 무리가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들어온다고 에베소 교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경고합니다. 이들이 유대주의자들인지 아니면 영지주의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거짓된 교리를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양의 탈을 쓰고 침투하는 이리들에 대해 경계하셨습니다. 교회가 배교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또한 리더들 중에도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가 외부로부터 침입해서 양떼를 해칠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사단이 역사합니다. 에베소 교회 자체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써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옵니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 분열을 획책하였습니다. 니골라당은 음란한 세력이요 영지주의자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목회 서신(딤후 1:152:17)과 계시록(2:1-7)에 나타나 있습니다. 장로는 이런 사단의 무리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삼가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눈물로 각사람을 훈계한 바울)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3:35).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장로들이 정신을 차려서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깨어있는 목자로서 본을 보였습니다. 장로들은 바울이 이들에게 삼년 동안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기억하라는 모세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계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능력을 펴서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이 광야에서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인도하신 것을 기억해야합니다.(신 8:2, 1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라(신 8:1-6)고 모세가 촉구한 것과 같이 바울 자신이 삼년 동안의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기고 각 사람을 가르친 것을 기억하여 그 본을 받으라는 권면합니다. 바울은 겸손하고 인격적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언행 일치한 지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감화력 있는 교육 방법입니다. 바울은 눈물로 양들의 죄문제를 도왔습니다. 이리가 들어올 때 장로들은 바울을 본받아 눈물로 이들을 훈계해야합니다.
(말씀에 부탁하는 바울)
32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장로들을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였습니다.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일 뿐 근본적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습니까?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맡기는 삶입니다.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이 다스리는 그 방법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 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부탁하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장로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 중에 기업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 나라 가기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심어야합니다.
(물질 생활에 본을 보인 바울)
33-35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이들과 있을 때에 물질 문제에서 깨끗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의 자랑으로서가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 탐욕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은, 금, 의복은 고대의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왕하 5:22).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탐하지 않았고(고전 9:4-18 고후 11:7-1212:14-18살전 3:8, 9) 오직 자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서의 그의 직무롤 마칠 때 온 이스라엘 앞에 물질 생활에 깨끗함을 고백한 말과 같습니다(삼상 12:3, 5). 바울은 항상 자신이 일하여 자신의 먹을 것을 자립하였습니다.
그는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물질로 도왔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살후 3:7-12)와 고린도(고전 9:11-15고후 11:7-12)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친히 노동을 하여 자신의 생계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습니다(18:3고전 4:12 살전 2:9). 그러나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자비량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14). 다만 바울의 경우는 당시 반대자로부터 탐욕을 위해 일한다는 어떤 빌미도 잡히지 않기 위해 평신도 목자를 고집하였습니다. 바울은 생계비를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고 손수 일했습니다. 바울이 한 일은 천막 깁는 일이며, 동행들이란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킵니다.
요즘에 많은 목회자가 물질 문제로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하여 목회자가 물질 생활에 투명하고 깨끗해야함을 배웁니다. 평신도도 목회자가 될 수 있음을 배웁니다. 평신도 목자의 모범을 봅니다. 그는 주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복옴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과 행동에 그 정신이 이미 나타났으며 또한 누가복음 6장 38과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구전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말씀이 초기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전부 다 기록되지 않고 구전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결론을 삼습니다.
그리하여 장로들은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 합니다. 약한 자는 경제적인 면에서 빈궁한 자를 가리킵니다. 병들고 신체상의 약점을 가진 가난한 자를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4장 28의 바울의 권고와도 일치합니다. 그는 자립할 뿐 아니라 주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목자는 겸손과 눈물이 있어야합니다. 목자는 섬기는 생활을 살아야합니다.
(울며 헤어진 에베소 성도들)
36-38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이 말을 하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경고하고 권고한 것의 최종적인 결론으로서 기도로 마감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으로써만 신령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알고 기도합니다. 이제 주님을 향하여 겸손히 무릎을 꿇은 바울의 태도는 하나님께 향한 간절함과 동시에 이별의 슬픈 감정을 나타냅니다. 일반적인 기도 자세로는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이었습니다(눅 18:10, 13).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인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들은 작별에 대한 깊은 아쉬움으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목을 안았다는 것은 요셉이 그 아우 베냐민과(창 45:14) 아버지 야곱에게(창 46:29) 했던 것과 같습니다. 점잖게 한번 나누는 거룩한 관례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격정에 차서 몇번이고 연거푸 입을 맞추는 것을 뜻합니다(눅 15:20). 그들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로 인하여 더욱 근심하여 배에까지 바울을 전송하였습니다.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말로 인해 깊이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정박 기간이 끝나서 이제 밀레도를 출항하려는 배에까지 전송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기술함으로써 누가는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목자와 양들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장에서 만남과 작별에 대한 내용과 그 광경이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기술된 것은 누가가 당시 바울과 함께 동행하면서 모든 현장을 목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깊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양들을 사랑한 목자 바울)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목자요 섬기는 목자 바울을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주시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도 눈물로 목회를 하였습니다.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고 음식을 섬겨주셨습니다.
인간은 죄악됩니다.
자신이 잘못을 알면서도 그 잘못을 고칠 줄을 모릅니다.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겸손과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눈물의 목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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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3차 선교여행 중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하게 돌아가는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초청하여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장면 가운데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겸손과 눈물로 인내하며 꺼리낌 없이 가르치고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고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에는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라고 고백했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 장로님들에게 몇 가지를 권면하고 계신다.
1. 삼가하라(28)
2. 기억하라(31)
3. 부탁한다(32)
4. 모범을 보였다.(35) 라고 고백하며 당부하며 권면하고 있다.
먼저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하라(28)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너희를 장로로 감독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다.(28)
감독자 장로 직분은 누가 세우는가? 성령님이 세우시는 구나.
왜 감독자를 세우는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기 위해서 이다.(28)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삼가하라는 말씀인가? 두 가지이다.
1. 외부에서 오는 위험이 있다.
바울이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 온다는 경고이다.(29)
2.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있다.
너희 중에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30)
예나 지금이나 거짓 목자들 삯군 목자들 흉악한 이리같은
거짓교사들이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럼 참 목자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인가?
흉악한 이리로 부터 양 떼를 지켜야 한다.
양 떼를 지키기만 해서도 안된다. 풍성한 꼴을 배부르게 먹여야 한다.
성령님께서 책임 맡기신 양들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 하셨으니
자신의 영혼을 돌아 볼 뿐만이 아니라 양떼를 잘 돌보는 일
장로들에게 맡기신 사명이로구나.
이런 좋음 목자 선한 목자 만나는 축복이 있게 하옵소서.
또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씀인가?
너희가 일깨어 내가 지난 3년이나 밤 낮 쉬지않고 눈물로 너희를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바울이 부탁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하신다.(32)
바울은 지난 몇 년간 믿는 제자들을 따로 모아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고
교회가 매우 부흥을 했다.
본인이 떠나면 후계자를 세워야 했다. 자기 아들을 세우든지...
그러나 바울은 수석 부목사도 세우지 않았고, 수석 장로도 세우지 않았고
주와 은혜의 말씀에 위임해 버리고 떠난다.
내가 개척한 내 교회라는 생각이 있으니 후계자를 내가 세워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지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후계자의 문제로 여러가지 잡음도 나고 말도 많은데
성경적인 모델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바울이로구나.
그리스도의 말씀 만이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고 (32)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는 구나(32)
마지막으로 바울이 보인 모범은 무엇인가?
범사에 모범을 보였다.(35)
일생을 이런 말로 마무리 할 수 있는 인생이면 얼마나 좋을까?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35)
일생동안 텐트를 만들어 자비량 선교를 하면서도 남을 도왔는가 보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있다 하심을 기억하라신다.(35)
마지막 장로들과 헤어짐의 장면도 참 감동적이다.
1. 무릎을 꿇고 함께 중보기도 한다.(36)
2.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37)
3. 배에까지 가서 전송을 한다.(38)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적인 인생에서 이런 헤어짐을
이런 사랑의 교제와 중보기도와 석별의 정을 나누는 모습 참 아름답다.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있는 인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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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께(행 20:28-38절)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고별 설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특히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는 부분은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보게 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오늘 묵상은 31절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우선 기억하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입니까? 피 값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말 할 정도로 속 시원하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밤낮 3년이나 눈물로 쉬지 않고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말씀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원리들을 삶으로 실천해 내는 것입니다. 그 원리들이 내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할 수 있는 원리들이 되도록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깨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일깨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그레고레이트(grhgorei'te)로서 영적으로 각성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는 깨어 있어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깨어 있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어느 경점에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깨어 있음과 관련해서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24장에서 주님은 노아의 홍수 때를 예로 드십니다. 그러면서 그 때도 사람들이 홍수가 나기 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인자가 어느 경점에 올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열 처녀 비유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의 문제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신랑이 예상보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시간보다 늦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문제를 다시 깨어 있음과 연결시키십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여분의 기름은 인자가 어느 경점에 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말씀 안에서 깨달은 것들을 바로 고쳐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신앙습관, 잘못된 행실을 그냥 놓아두어서 종래에는 기둥과 서까래가 다 썩어버리도록 살아가는 사람들은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깨달은 말씀을 가지고 오늘 고쳐나가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깨닫고 이해한 만큼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삶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요? 사도 바울은 깨어 있음의 문제를 어디하고 연결시킵니까? 흉악한 이리하고 연결시킵니다.
흉악한 이리는 양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기 위해서 어그러진 말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어그러진 말이라는 것이 우리가 다 알만한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언이설입니다. 공교한 말입니다.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이 나쁜 말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내 비위를 맞추는 달콤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깨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압니다. 들은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서 흉악한 이리를 넉넉히 분별해 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눈물로 전한 말씀, 최선을 다해서 증거 되어진 말씀을 기억하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사도 바울이 유언으로 말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무게를 가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다른 복음이 난무하는 시대에 일깨어 기억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약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는 복음이 편만한 시대 같지만 오히려 복음의 깊이와 넓이가 없는 유사 친근감의 시대라고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어렴풋이 들어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들어본 것 같다는 복음은 생활에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흉악한 이리를 이겨낼 공격용 무기가 말씀입니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아는 복음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확실한 성경의 원리들을 정리하고 그 말씀에 입각해서 살아가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삼가라(28절)
또 하나 중요한 권면이 있습니다. 이 권면들은 기본적으로 에베소의 장로들(17절), 다시 말해 감독들(28절)에게 한 것입니다.
감독이라는 말 에피스코포스(ejpiskovpou")는 돌아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앞의 17절의 장로들과 같은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장로라는 말 프레스뷔테로스(presbuvtero")는 연장자나 손윗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 혹은 감독자들은 에베소 교회의 어른들로서 성도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할 때 “친다”는 말은 목양한다는 말입니다.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양떼를 돌보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목사나 장로는 공히 양떼를 돌보는 목양의 의무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입니다.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는 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감독을 누가 임명합니까? 본문은 성령께서 임명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리로 바르게 정리해서 세우신 장로님들을 배나 존경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어른이 된 사람들은 스스로 삼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양떼를 위해서 삼가라는 것입니다. 삼간다는 말은 주의하라, 유의하라는 말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자유를 가졌지만 스스로를 위해서 또 양떼를 위해서 스스로 그 자유를 제한한다는 말입니다. 절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삼가는 일은 지도자들만의 몫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의 마땅한 바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생각해서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깨어있는 것, 들은 말씀을 기억하는 것, 스스로 삼가서 자신과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은혜의 말씀께(행20:32-38절)
깨어 있어서 삼가고 들은 말씀을 기억하라고 권면했던 사도 바울은 이제 그들은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
지금까지 바울은 이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여러 가지 부탁과 권면을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부탁하는데 “내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여러 장로님들에게 부탁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보여 주었던 본과 지도자들의 깨어 있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뢰의 대상,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 가는 데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근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바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불완전하고 변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만이 불변하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을 온전히 세워갈 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는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그럽니다. 이때 요한복음을 바울이 알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구전을 통해서 접하고 있었을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요1:1-3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은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은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너희를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그럽니다.
여기서 능히 든든히 세운다고 할 때 이 말은 집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엡2:19-22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때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건물”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의 건물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처럼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워줍니다
.말씀은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말씀의 능력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변한다고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말씀만이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기억할 일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은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도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영생!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 기업은 지금도 받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업은 자식이 마땅히 받아야 할 재산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천국을 향한 순례길을 걸어갈 때 말씀은 우리를 붙잡아 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현재적인 기업을 누리게 합니다.
신앙의 기초를 말씀 위에 놓으십시오. 복음 위에 놓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게 놓으십시오. 분위기나 목사에게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시대가 바뀌어도 영원합니다.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계속해서 도도하게 빛을 발하며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33-35절)
그리고 마지막 권면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기 전에 몇 가지 덧 붙여 놓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특히 부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품으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사는 곳의 분위기가 이러면 그것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부자들, 명품 브랜드로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고 수고해서 자신과 동행들의 먹고 쓸 것을 조달했습니다. 그러면서 약한 사람을 돕고 열심히 일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34절에 의하면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일했고 빵을 얻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하였습니다. 때로 바울은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줄여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최초 선교사로 살아갔던 사도 바울이 오늘날 선교사들처럼 후원과 사랑, 관심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사도 바울이 처했던 환경과 흡사한 오지의 선교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도 바울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이 배운 사람입니까? 좋은 언변과 많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일했다면 그는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최소한의 생필품을 공급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선교 현지에서도 안디옥 교회에서도 원만한 후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선교라는 말이 무색한 때였기 때문에 아쉬운 소리를 할 수 도 없습니다. 그래서 빵을 얻어야만 했을 때 바울은 수공업으로 자신의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벌 수 있는 두뇌와 언변을 구비했지만 자신의 생필품을 조달한 것은 그의 두 손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에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봅니다. 여러분! 이 삶에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알고, 경험하고 믿은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전하기 위해서는 조금도 누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으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일하면서도 남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절약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35절에는 이 일에 대해 '내가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말씀을 하면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인용합니다. 사실 주님은 직접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 여러 곳에 베푸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25장 31절 이하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양과 염소로 상징되는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의 차이를 일상적인 삶에서의 베풂, 즉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 고아들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게 베풀었던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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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나눔, 혹은 베풂의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저는 생활에서의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품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생각의 방향이 바뀌어가는 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마지막에는 결국 내 시간, 내 소유, 내 재능을 쪼개서 나누는 삶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서 우리에게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부분이 잘 되지 않고 나만의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주님이 의도하셨던 기독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더구나 부의 복음, 나만 잘살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복음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도 문제는 있습니다. 어디까지 살고 어디까지 나눠야 하는가? 그건 역시 개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눈물의 이별(36-38절)
이제 설교가 다 끝나고 장로들과 사도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서로 중보하며 기도했습니다. 함께 기도하노라니까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함께 목을 끌어나고 웁니다. 이 말씀을 논리적으로 보지 마시고 감성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말씀으로 교회를 섬겼던 지도자와 이제 남아서 교회를 섬겨야할 바울의 제자들이면서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어져 있습니까?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3년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깊은 사랑은 30년을 뛰어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만남과 이별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끈끈하게 결속되어진 모습, 서로 만남을 사모하며 헤어짐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모습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되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우리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에는 부작용이 없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은 성도가 외면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오늘도 은혜의 말씀에 우리 삶의 기초를 놓고 나누고 베푸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베풀고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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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준비된 자가 되어야 할 이유
종종 많은 선교지를 다녀 보면서 언어의 중요성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자신이 히브리 방언을 잘 함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 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하여 준비되어진 사람을 크게 사용하십니다. 종종 우리는 신앙적인 객관성을 잊어 버리고 은혜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영적인 은혜와 그 은혜를 올바르 게 전파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준비되어 질때 더 크게 사용되어 진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특히 선교를 행할 자들은 더욱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질 때 더욱 더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묵상하기
나는 복음을 위한 준비에 애쓰고 있는가?
2.복음 전달의 전문성을 가진 바울
만약 우리에게 10분의 시간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면 그 시 간동안 정말 정확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지금 천부장에게 끌려 가는 자리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자신의 영적경험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 께서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저함이 없이 자신에게 역사 하심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살아계심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 게 담대하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많이 강조하면서도 실제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지 못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와 같이 어떠한 경우 에도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전도의 능력을 갖추는 그리스도인이 되 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복음 전달의 전문성을 갖기 위해 힘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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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바리새인이었고 가말 리 엘의 문하에서 최고의 학력과 지식, 권력을 자랑하며 남부럽지 않게 세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엘리트 유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로 인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로 내어주는 일에 일생을 충성했고 에베소에서도 삶을 통해 그 장로들 앞에서 증거하였습니다.
스스로 주는 것이 더 복 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권면하며 무릎을 꿇고 그들 앞에서 마지막 유언과 같은 이별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다시 오지 못할 에베소 교회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 남은 사명들을 그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며 바울은 더 큰 고난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의 나아가길을 인도하시는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고 허락된 것을 맡겨주신 이들에게 베풀고 예수 그리스도 참 생명을 전하며 살아가는 복된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의 앞길을 밝히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그 손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의지하는 성령의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론 고난과 핍박의 길이 우리의 삶에
더 큰 축복과 은혜가 됨을 깨닫는 지혜로
주신 사명에 죽도록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오늘의 삶 살기 원합니다.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기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 발길을 축복하시고
그 삶과 사역, 가정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인해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주님을 따라 맡겨주신
사명 넉넉히 감당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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