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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차)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사랑도 피어나리라(춘천편)_나의 책, 나의 인문기행(현장탐방 스케치) - YouTube
2023.10. 27, 국립중앙도서관 나의 인문기행 해방공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사랑도 피어나리라
여름보다 겨울이 길고 낮보다 밤이 긴 북유럽이나 동구권 사람들의 그림에서는 다른 지역의 그림에 비해서 몽환적인 형상과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들이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또 그들의 옛날이야기나 동화들은 대단히 환상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다고 한다. 왜? 그것은 눈앞에 주어진 현실이 너무 어둡고 춥고 단조롭기 때문에, 잠보다 더 많은 꿈과 몽상 속에서 초월적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 더 많은 까닭이라고 한다.
여기 이른 봄에 왔다가(1908.2.22), 노란 동백꽃 피는 계절에 떠난(1937.3.29) 청년 작가가 있다. 그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은 있었다. 춘천 지역 토호(土豪)의 8남매 (2남 6녀) 중 7번째,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실부모한 이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그의 학창시절과 청년 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당시는 치명적 질환이었던 결핵에 걸린 이후 그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부단 애를 써야 했다.
김유정 그는 1935년, 두 곳의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로 공식 등단(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소낙비>, <노다지>로 당선 )했다. 그 이전에 그는 이미 두 편의 작품을 잡지에 발표(1933년 <산골나그네>,<총각과 맹꽁이>)한 바 있다.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바로 그 해 5월, 그는 의사로부터 결핵으로 ‘돌아오는 가을을 넘기기가 어렵다’라는 시한부 생명을 선고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연일 철야로 원고와 다투었고’, 그가 도달해야 할 ‘길’이 바로 ‘문학’이라고 확인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은 찬란한 봄날과 같은 것이기에 그는 봄을 기다렸다.
봄이 오면 날이 화창할 게고 보드라운 바람에 움이 트고 꽃도 피리라. 만물은 씩씩한 소생(蘇生)의 낙원으로 변할 것이다.
- 수필: < 행복을 등진 열정>에서-
김유정이 남긴 소설작품은 대략 30여편, 그 가운데 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11편 정도, 청춘남녀의 사랑을 다룬 작품도 7~8편 정도에 이른다. 한 작가의 작품은 그의 소망 충족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도 내밀한 고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적지 않은 봄날 배경의 소설, 그리고 사랑 소재의 작품을 썼다는 것은 작가의 행복한 사랑에 대한 동경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하게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시에서 사랑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내 눈을 감기세요 / 난 당신을 볼 수 있어요.
내 귀를 막으세요/ 난 그대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이 시작품을 읽으면 김유정 소설작품 가운데 특히 봄을 배경으로 한 청춘남녀의 사랑을 다룬 작품들이 연상된다. 김유정은 대부분의 그의 작품 말미에 퇴고일자를 밝힌 바, 이들에 따라 봄을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를 배치해보면 <봄·봄>,<산골>, <따라지>, <동백꽃> <옥토끼>의 순이 된다. 이들 외에 사랑을 다룬 것으로 여름 배경의 <총각과 맹꽁이>, 늦가을 배경의 <두꺼비>가 있다. <총각과 맹꽁이>의 주인공 김덕만은 34세 노총각으로 22세 들병이에게 하룻밤 외사랑으로 속을 끓이고, <두꺼비>에서는 고보 졸업반 학생인 이경화가 자신보다 서너 살 연상인 기생 박옥화를 대상으로 대책 없는 짝사랑에 빠져 허둥댄다.
봄을 배경으로 한 사랑 소재의 작품에 한정, 이를 농촌 배경과 도회지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농촌 배경의 사랑 이야기
<봄·봄>은 봄을 맞아 성례를 촉구하는 젊은 남녀와 이를 지연시키려는 장인영감 사이의 갈등을 그린, 한편의 코미디 영화와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 젊은이는 욕필영감(김봉필영감)의 둘째딸 점순의 데릴사위로 들어왔다. 장인은 딸의 키가 크면 성례 시켜준다고 약속했다. 이후 사위는 점순에게 장가들기 위해, 욕필 영감의 욕설과 과도한 노동요구를 감수하며 점순의 키가 자라기를 기다려왔다.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이쁜 계집애는 못 된다. 그렇다고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 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 년 아래 이니까 올에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헐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감참외가 젤 맛좋고 이쁘니까 말이다. 둥글고 커단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지쳐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나 혹혹히 먹음직 하니 좋다.
26세 청년의 눈에 16세 점순이의 둥글고 커단 눈, 밥술이나 먹음직스런 입, 툽툽하게 생긴 얼굴, 뭉툭한 몸 전체는 이른바 씹어도 비린내가 나지 않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입에 넣고 어적어적 씹으면 시원하고 달달한 과육물이 배어나올 감참외로 요약된다. 대상에 대한 갈망은 대상을 자신의 몸속으로 완벽하게 흡입하여 자신과 일체화를 원하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릴케의 싯귀에서 말하는, 보지 않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들리는 사랑의 정수(精髓)를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마음에 점순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작 점순 앞에서 젊은이는 어미 황새 앞의 새끼처럼 미약하다. 장인에게 성례를 촉구하는 사위는, 점순의 귀띔과 핀잔과 같은 자극적인 말을 들었을 때 충동적으로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어제 논둑에서 벌어졌던 장인과의 갈등도, 오늘 아침 서로 바짓가랑이를 당기며 육탄전으로 발전했던 갈등도 모두 점순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랑의 욕망 앞에 솔직하나 우직하고 단순하며 순직한 사위에 비해 점순은 조숙하고 당돌하고 깜찍하며 도전적, 직접적인 모사꾼이 된다. 점순은 남편감에게 ‘성례 시켜달라지 뭘 어떻게?’ 라고 조속한 성례의 방법을 알려주고, 구장님댁까지 가서도 해결을 하지 못하고 온 남자에게 쫑알대며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라고 적극적 공격방법을 제시한다.
남자와의 사랑 곧 성례를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판단이나 체신 같은 것은 무시하려는 데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흔적, 나아가 유리피데스의 ‘메데이아’까지를 연상하게 된다. 그만큼 우유부단한 남자 앞에서 딸은 아버지를 배신하고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강인함을,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뱃포와 오기 같은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작품 제목 <봄·봄>에 주목해 보아야겠다. 흔히 작품의 제목은 그 작품의 주제나 작품 전개를 암시하거나, 수수께끼처럼 독자의 시선집중을 요구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왜 ‘봄봄’이 아니고 ‘봄·봄’이라고 되어 있을까.
이 작품을 읽다보면, 과연 올가을에 데릴사위와 점순은 성례를 올리게 될까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러나 뭉태의 말처럼 장인은 첫딸이 19살이 되어 시집가기까지 10년 동안 14명의 데릴사위를 바꾸어가며 들였고, 둘째 딸 점순의 경우, 현 주인공은 3번째로 들어온 사위로 3년 7개월간 무보수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셋째 딸이 6살, 적어도 10살이 되어야 데릴사위를 들일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분리된 형태의 ‘봄·봄’은 자연의 봄·인간의 봄 > 장인의 봄·사위의 봄> 점순의 봄·사위의 봄으로 변환되면서 가운뎃점( ·)이 지닌 강력한 힘에 의해 이들 남녀의 합일(合一)의 소망은 무산(無産)될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산골>은 그 구성상 산·마을·돌·물·길로 나뉘며 ’까지는 이쁜이의 시점으로, 마지막 ‘길’에서는 이쁜이와 석숭의 시점이 혼용되면서 끝난다.
이 작품의 전개는 ‘산’에 나물 뜯으러 온 열여섯 살 이쁜이가 주인댁 학생 도련님과 배가 맞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마을’에서는 이쁜이가 도련님과의 일로 주인마님에게 매를 맞고 구메밥을 먹었으며 도련님과의 사건이 소문나서 동네총각 석숭에게 놀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돌’에서는 석숭과의 기억이 좀 더 자세히, 자신을 놀린 석숭의 정강이를 모리돌멩이로 후려친 사건을 떠올린다(마을과 돌은 모두 과거회상속에 나온 것이다).
‘물’에서는 다시 현실로 떠올라 나물바구니를 끼고 도라지를 캐다가, 도련님과 함께 갔었던 계곡 바위틈의 웅숭깊은 물구덩이, 도련님이 들려준 전설 속 장수 이야기, 작별의 정표로 도련님이 자기의 저고리 옷고름을 떼어내 준 기억, 작별하기 싫어서 도련님이 넘어가던 고갯마루까지 쫓아갔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서울 가는 대로 곧 데리러 오겠다던 도련님은 소식이 없고 이쁜이는 도련님과 함께 했었던 산이며 계곡을 찾아 다니며 그리움과 야속함의 눈물을 흘린다.
‘길’에서는 석숭이 시점과 이쁜의 시점이 혼용된다. 석숭은 이쁜이가 도련님께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주고, 이쁜이는 그 편지를 가지고 먼 고개치가 보이는 산골로 나가 어둡도록 우체부를 기다린다. 한편 석숭은 장에 가서 닭을 팔아오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장에 가기 전에 산에 올라 이쁜이를 기다리지만, 웬일인지 이쁜이는 나올 줄을 모른다.
(작품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씨종의 딸이 주인댁 학생도련님과 정분이 나고, 들통이 나고, 서울 간 도련님은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나고, 도련님을 잊지 못해 하는 이쁜이는 애를 태우는데, 평소 이쁜이를 좋아하던 석숭은 이쁜이를 위해서 온갖 정성을 바치는 이야기다).
<산골>에서는 양반댁 도련님과 씨종의 딸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곧 신분차이에서 오는 사랑의 장애(障碍)를 다루고 있어, ‘춘향전’의 한 단면을 본다. 동시에 겨드랑이에 날개 달린 장수가 신들의 연못에서 목욕했다가 날개가 물에 녹아 결국 관군에게 잡히고 만다는 ‘아기장수 설화’ 모티브를 보게 된다.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옛날이야기의 흔적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친숙감을 느끼게 해준다.
작품 속 도련님은 흔히 부잣집 아들들이 갖고 있는 책임감 없는 바람둥이, 구제불능의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이쁜이는 예쁘고 다정다감하고 부지런하고 귀여운 여성이나, 도련님과의 인연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약삭빠른 모습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이쁜이의 상처받은 사랑 이야기면서도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 데에는 석숭의 역할이 크다. 비록 이쁜이는 도련님에게 배신 당했지만, 석숭이가 이쁜이를 위한 견실(堅實)한 보호자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숭이는 이쁜이가 도련님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음을 알면서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무조건 이쁜이를 좋아하고 아끼고 도우며 염려해준다.
일찍이 문학비평가 김문집은 김유정의 작품 가운데서 <산골>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산골>만큼 ‘예술적 흥취를 느끼게 하는 작품’을 본적이 없으니 김유정의 소설 문장에서는 ‘농후한 개성과 전통미가 홍수를 이루고 있을뿐더러 일종 수줍은 고전미를 느낀다고 했다. ( 독자들은 <산골>을 읽을 때에 그 문장에 주목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동백꽃>의 주인공인 일인칭 화자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다만 점순에게 ‘얘’ 혹은 ‘너’로 불리며, 때로는 ‘바보녀석’ ‘ 배내병신’ ‘이놈’ ‘이 자식’으로 불리는 17세의 총각이다. 총각도 화가 났을 때에는 점순을 ‘고놈의 계집애’ ‘망아지 만한 계집애’‘이놈의 계집애’, ‘이년, 저년, 요년’ 등으로 부른다.
< 동백꽃>의 구성은 오늘 점심 먹은 이후 나무 하러 가면서 닭싸움 현장을 목격하고 이후 그의 기억 속에서 나흘 전 감자쪼간 사건을 떠올린다. 사흘 전, 점순이는 제집 봉당에서 총각네의 암탉을 때리며 총각에게 욕설로 도발했고, 이후 틈틈이 총각네 닭을 꼬여다가 제 집 닭과 싸움을 붙였다. 이를 참다못한 총각은 이틀 전, 자기 집 닭에게 고추장을 먹여서 점순네 닭과 싸움을 붙였으나 실패, 그래서 닭에게 고추장을 좀더 먹이다가 닭이 실신하여 홰에 가두었다. 그런데 오늘 낮, 점순이가 또 닭싸움을 붙여놓았다는 데까지 이어진다. 오늘 산 위에서 삭정이를 따면서 점순을 만나면 그년 ‘등줄기를 후려갈기리라고’ 생각, 나무지게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데 호들기 소리 가운데 들려오는 닭싸움 소리, 총각은 지게막대기로 단매에 점순네 닭을 때려눕히고, 점순과 격한 갈등 관계, ‘뭐 이 자식아! 누집 닭인데?’ 순간 상황 판단을 한 총각의 울음, 점순의 뭔지 모를 제안과 이에 대한 총각의 응락, 불시에 점순은 떠다밀린 듯 총각에게 쓰러지고 두 사람은 몸이 겹쳐진 채로 동백꽃 속으로 파묻히면서 모든 갈등은 해소된다. 시간의 순서에 따른 이야기 전개가 ABC의 유형이라면 <산골>의 진행은 CABC 유형에 속한다. 자칫 단조로운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을 작가는 사건 배치에 재미와 변화를 주었던 것이다.
<동백꽃>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에는 열일곱 동갑내기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올된(조숙한) 처녀애와 눈치 없고 늦된(만숙한) 총각의 오해에서 비롯된 티격태격, 이때 그들이 서로를 향해 던지는 말주머니에 있었다. 처음 점순이가 총각에게 주려던 군감자는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 구애의 일종이었으나 눈치 없는 총각은 이를 오해하고 거절했다. 다음 날부터 점순이가 닭싸움으로 도전해온 것은 총각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 또한 총각은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분노를 키운다. 사흘 전에 점순이가 총각에게 날린 말주머니는 배내병신, 고자와 같은 모멸적이고 도발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네가 건강한 사내임을 증명하라는 것이었으나 총각은 이를 또 자신을 모욕한 것이라고 오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럼 너 이담부터 안 그럴테냐?’ 라는 질문에 명색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그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동백꽃에 파묻히어 점순의 체중을 느끼면서 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그것을 알싸한 동백꽃 내음새로 오해한다. 독자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인데 총각이 이를 모르고 허둥대는 모습 앞에서 독자들은 총각을 딱하게 여기면서도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총각이 정말 아무 것도 몰랐을까? 3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고, 그때 점순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간간이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총각은 알고 있다. 거기에다 열일곱이나 된 것들이 같이 다니면 동네에 소문이 날 것이고 그 소문이 점순네 부모님께 들어가게 된다면……, 그래서 그 이후까지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또 마지막 장면에서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면서’라는 언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치 없는 늦된 사람으로 연기하며 오히려 독자의 반응을 살피는 그는 오히려 독자를 손바닥 위에 놓고 놀리는 고단수의 연출자가 아닌가. 이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2. 도회지 배경의 사랑 이야기
<따라지>는 사쿠라(벚꽃)가 핀 어느 봄날 사직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사직골 꼭대기의 ‘깨웃한’ 초가집에서, 밀린 방세를 받아내려는 집주인과 여기에 응할 수 없는 세입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대 희극적인 난투극을 그려낸다.
이 작품의 이야기 공간은 집주인 노파인 구렁이의 이동에 따라 세입자들의 방밖과 방안으로, 다시 집 안팎(고반, 골목길과 집, 사직공원)으로 교체되면서 전개된다. 이때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그들의 성격이나 신체특성, 직업에 따라 붙여진다. 이 작품에서 카페 여급인 ‘아키꼬’와 ‘영애’에게만 일반적인 이름이 주어진다. 집주인 노파는 ‘구렁이’, 아키꼬가 짝사랑 하는 소설가 지망생은 ‘톨스토이’, 변덕이 심한 그의 누나는 ‘히스테리’, 같은 세입자인 부녀(부녀) 가운데 아버지는 병색 짙은 노란 얼굴이라 ‘김마까’(일본어 노란색 참외 きいろの マクワウリ의 한국식 발음), 그의 딸은 버스차장이라서 버스걸로 지칭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영화적 기법( 특별히 몽따쥬 오럽랩 기법)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의 서두는 카메라 앵글이 집안에 고정된 채 열어놓은 쪽대문을 통해 사직공원의 사구라 꽃이 비쳐지고 곧 집안으로 앵글을 돌려 이엉이 흘러내리는 초가지붕과 밑둥이 나간 뒷깐의 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집주인 노파인 구렁이가 차례차례 열어젖히는 대로 톨스토이의 방, 김마까의 방, 아키코 방의 어수선한 모습들과 그곳에 기거하는 방주인들의 모습을 비추어 고단한 도회지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다시 카메라 앵글은 아키코의 방으로 들어가 뚫어진 문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아키꼬의 모습, 문구멍을 통해서 보이는 안채의 모습, 마루 위 뒤주 위에 놓인 정종병과 그 병에 꽃힌 복숭아꽃과 개나리꽃이 클로즈업 된다. 그리고 아키코의 회상속에서 톨스토이에 대한 7개의 삽화는 몽타쥬 처리되어 연결된다. 독자들은 사직골 꼭대기의 초가집 속에서 살아가는 따라지들의 삶의 현장과 그들의 꿈과 고민을 영화 장면을 보듯 보게 되는 것이다.
집주인 노파인 구렁이는 그녀의 집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 가운데 가장 만만한 톨스토이 남매의 방을 빼기 위해 조카를 불러들여 톨스토이 남매의 세간살이들을 방밖으로 꺼내놓는다. 평소 톨스토이를 사모하던 아키코는 분노하여 영애와 함께 나서서 뻐드렁니의 행동을 저지 시키면서, 이들 사이에 일대 활극이 벌어지는데 이 장면은 영화의 그것과 일치한다.
얼자가 문턱에 책상을 떨구더니 용감히 홱 넘어 나온다. 아키꼬는 저자식 이 달마찌의 흉내를 내는구나 , 할 동안도 없이 영애의 뺨이 짤꺽-
" 이년아! 늙은이를 쳐?"
“아 이 자식보레! 누구 뺨을 때려?”
아키코는 악을 지르자 그 혁대를 뒤로 잡아서 나꿔친다. 마루 위에 놓였던 다듬잇돌에 걸리어 얼자는 엉덩방아가 쿵, 하고 잡은 참 날아드는 숯보구니는 독오른 영애의 분풀이다.
그러자 또 아랫방문이 확 열리고, 지팡이가 김마까를 끌고 나온다.
문턱으로 떨어지는 책상, 뻐드렁니의 손에 맞아 짤꺽 소리를 내는 영애의 뺨, 악을 쓰는 아끼코의 얼굴, 아끼코의 두 손에 나꿔채진 뻐드렁니의 혁대, 다듬잇 돌에 걸리어 나가떨어진 뻐드렁니의 엉덩이, 날아가는 숯보구니, 김마까보다 먼저 방밖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지팡이···· 이들 하나하나는 그들이 소속된 전체의 모습은 가려지고, 클로즈업된 부분들이 모여 이 사건의 긴박감과 속도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에서 클로즈업된 독립된 장면들이 순간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인 것이다.
방세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세입자를 혼내주려다가 오히려 혼쭐이 난 구렁이는 고반(파출소)로 가서 살인사건이 났다며 순사를 불러오고, 순사는 구렁이의 엄살과 달리 집안이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오히려 구렁이에게 꾸중을 한다. 그리고 피의자 신분의 아키코를 데리고 고반으로 향한다. 나른한 오후, 사직골 꼭대기에서 사직원 마당으로 내려온 순사와 아키코, 순사는 며칠 전 카페 손님을 쳤다는 아키코, 집주인 노파에게 유독 미움 받는 아키코를 보면서 저렇게 귀여운 아키코를 왜 주인 노파가 미워하는지 이상해 한다. 그때 열아홉 살 아키코는 멋대로 순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산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번에 집으로 가면 노파의 장독대에 오줌을 깔길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끝났다.
이 작품에서 젊은 남녀의 사랑은 카페여급 아키코가 소설가 지망생 톨스토이에 대한 연모로 나타난다. 톨스토이는 실업자 신세로 소설가를 지향하는 청년, 몽상에 잠겨서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런가 하면 봉직공장에 다니는 누님에게 얹혀 누님의 모든 히스테리를 그대로 감수하는, 지극히 소극적이다. 또 젊은 이성인 아키코가 들이대다시피 접근해도 다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수줍은 청년으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여고보를 중퇴하고 카페 여급으로 있는 아키코, 카페에서 가까운 좀더 편한 셋방을 나가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직골 꼭대기의 허름한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무쪼록 톨스토이와 가까워지고 싶어서이다. 아키코는 카페에서도 손님들 앞에 호락호락하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공격적이기도 하다. 가끔은 손님을 집으로 데려와 자기도 한다. 바로 옆방에 사모하는 톨스토이가 살고 있음에도 그녀는 성노동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어떤 거리낌도 없는 여성이다. 작고 어여쁘고 애교 많고 동시에 적극적인 성격의 아키코는 꿈속에서도 톨스토이를 생각하고, 한때는 톨스토이와 버스걸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도 할 정도로 지극히 솔직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 옥토끼> 는 어느 몹시 춥던 날 아침, 누군가의 집에서 기르던 옥토끼 한 마리가 주인공 집으로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당리로 이사 온 이후 되는 일이 없던 중에 옥토끼의 출현은 새해부터 운수가 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하게 된다.
새해 몹시 추운 날 등으로 미루어 이른 봄날, 행운의 옥토끼가 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업자인 남자 주인공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옥토끼를 약혼녀인 숙이에게 가져다준다. 옥토끼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날마다 만나며, 토끼를 통해서 그들은 부자가 될 꿈을 꾼다. 옥토끼를 길러서 새끼를 받고, 그 새끼가 자라 다시 새끼를 받고 그렇게 거듭 거듭 새끼를 받아서 큰 돈을 만들자고 한다. 다행히 숙이의 정성으로 옥토끼는 잘 자랐고, 성장한 토끼의 짝을 채워주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데, 돈을 변통하지 못해 망설이다가 숙이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닷새가 지났다. 그리고 어머니를 통해서 숙이네가 옥토끼를 잡아먹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놀란 총각은 숙이를 찾아가 들이대자, 무안하고 미안해진 숙이는 남자에게서 약혼기념으로 받은 돈지갑을 내민다. 남자는 당황하고 이후에 토끼고기를 먹게 된 전후 사정을 알게 된다. 연초회사에 다니는 숙이가 며칠 앓게 되어 밥을 못먹자 숙이 아버지가 토끼를 잡아 숙이의 몸보신을 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숙이의 사정을 알게 된 남자는 부랴사랴 되돌려 받은 약혼기념 지갑을 숙이의 허리춤에다 꾹 찔러주고 돌아오며 속으로 외친다. 제가 내 옥토끼를 먹었으니까, ‘인제는 틀림없이 너는 내꺼다!’라고.
가난한 청춘남녀의 사랑에 장애물은 역시 돈이었다. 숙이를 좋아하여 어머니를 통해 숙이네에 통혼을 했지만 숙이네는 거절했다. 그것은 남자에게 뚜렷한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숙이네는 연초공장에 다니는 숙이의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집안이다 보니 딸은 돈 많은 집으로 시집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만, 그래서 부모 허락 없이 두 사람만의 비밀 약혼을 하고 그 기념으로 반지 대신 야시장에서 산 돈지갑을 건네주고 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숙이의 소박하고도 착한 마음이 느껴진다. 옥토끼를 기르며 토끼 관련 정보를 자세히 약혼자에게 전하는 말투에서도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을 읽게 된다.
한 마리 옥토끼를 사이에 두고 아들과 어머니의 작은 갈등, 어머니는 아들을 이기지 못했고, 아들은 옥토끼를 약혼자에게 선물했다. 두 사람은 옥토끼를 사이에 두고 날마다 만나서 옥토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했다. 그러다가 모르는 사이에 옥토끼를 먹어버린 약혼녀, 약혼자가 아끼는 옥토끼를 먹어버렸기로 ‘인제는 하릴없이 나의 아내가 꼭 되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다시금 행복에 잠기는 약혼자의 모습에서 조금은 어린애 같은 단순함과 몽환적 성격, 동시에 순직하고도 따뜻한 마음을 보게 된다.
3. 나가며
김유정의 소설 작품 가운데 봄을 배경으로 사랑을 다룬 작품들- <봄·봄>,<산골>, <동백꽃>,<따라지>,<옥토끼>-을 농촌배경과 도회지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어떤 비평가는 인생을 소년기·청춘기·중장년기·노년기로, 하루를 아침·점심·저녁·밤으로, 1년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물을 샘물· 강물· 바다· 눈비로 나누어 이들 4유형으로 나뉜 앞부분(소년과 청년/ 아침과 점심/ 봄과 여름/ 샘물과 강물)의 이미지가 우세하면 대체로 행복한 결말로, 뒷부분의 이미지가 우세하면 대체로 불행한 결말로 끝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유정의 작품 가운데 ‘봄’을 시간 배경으로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소년 내지 청년임을 볼 수 있다. <봄·봄>의 데릴사위는 26세이고 점순은 16세이다. <동백꽃>의 총각과 점순은 모두 17세이다. <산골>의 이쁜이도 16세이고 도련님과 석숭도 모두 비슷한 연령대로 보인다. 도회지 배경인 < 따라지>의 아키코는 19세, 톨스토이도 20대 초반 정도로, <옥토끼>의 숙이와 남자의 경우에도 20대 안팎으로 보인다.
앞에서 본 작품들에서, 봄날에 펼쳐지는 이들 사랑 이야기는 모두 그들 나이로 보아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봄·봄>의 경우 3번째의 데릴사위로 들어왔다고 하지만, 지금 점순이 16세, 첫 번째 사위가 들어왔을 때는 12세 정도, 사랑에 대해서는 철부지, 결국 지금의 3번째 사위야 말로 점순의 첫사랑으로 보아 마땅하다. <따라지>의 아키코는 카페여급과 성노동자의 역할을 보이지만, 그러나 마음속에 톨스토이를 품은 지금, 아키코에게 톨스토이는 영원한 첫사랑이 된다.
김유정의 사랑 이야기에서 사랑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보면 여성의 역할이 단연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며 도발적이다. 이에 비해 남성은 지극히 소극적 방어적이며 수동적이다. <동백꽃>의 총각은 여성의 도발적 공세에 대해 봄이 되더니 점순이 미쳤나보다고 오해하고, 점순의 의도된 포옹 앞에서도 여성의 향기가 아닌 동백꽃 향기에 자신의 첫경험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봄·봄>의 사위는 점순의 ‘바보’라는 호통 앞에 어미 잃은 황새 새끼처럼 슬퍼하고, <산골>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도련님도 작별을 거부하는 이쁜이 앞에서 저고리 옷고름을 떼어주며 달래기에 전전긍긍한다. 같은 작품에서 석숭도 이쁜이 말이라면 언제나 순하고 착한 ‘곰’이 된다. <따라지>의 톨스토이는 적극적으로 접근해오는 아키코에게 당황하며 수줍어하고, 뻐드렁니의 횡포 앞에서 그를 도우려는 아키코 앞에서 사뭇 울상이 되고 만다.
이들 작품을 사회·경제적 활동 측면에서 볼 때 여성주인공들은 모두 한결같이 밝고 활달하고 적극적이고 따뜻한 성품에 부지런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농촌 처녀들은 시키지 않아도 집안일을 해내고, 도회지 처녀들은 경제 활동( 아키코는 카페여급이고 숙이는 연초공장에 나간다)에 참여한다. 이에 비해 농촌 총각들은 (<산골>의 도련님 제외) 농사일을 돕지만 여성보다는 소극적이고 눈치가 없거나 어린애 같은 단순함, 보수적이고 우직함을, 도회지 배경의 <따라지>의 톨스토이와 <옥토끼>의 총각은 모두 실업자이다.
주어진 현실이 각박할 때에 우리는 더 많은 꿈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향해서 손을 내민다. 세상이 춥고 어둡다고 느껴질 때 봄날과 사랑을 꿈꾸고 그 사랑을 직접 체험해 간다는 것은 사랑의 당사자는 물론 그것을 지켜보는 이에게도 커다란 축복이 된다. 유정은 봄날의 청춘들이 펼쳐가는 사랑 이야기들을 통해,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사랑도 피어나리라’.
인문기행 김유정문학촌에 참석했던 이의 기록:
김유정의 혼을 찾아-《나의 책, 나의 인문기행..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김유정의 혼을 찾아-《나의 책, 나의 인문기행》:춘천탐방
9월 어느날 국립중앙도서관 인스타그램 광고에 '해방공간으로의 초대 춘천지역 탐방' 행사 신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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