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에 만나는 꽃과 시와 그림(5) - 상사화(相思花)
이 주일에 만나는 꽃과 시와 그림(5) - 상사화(相思花)

한 일주일 쯤 전, ‘이문동묵’ 운영자 목주님이 ‘개상사화’ 화분을 카페에 올리셨다. 팔공산 근처 꽃집서 어렵사리 ‘상사화’라고 구한 꽃이 과연 맞는지 노심초사하며 지내다 물 주려고 문을 연 아침, 분홍색 빛 꽃이 피어나 반가웠던 그 화분을 온라인으로 살펴 보며, 예전에 상사화를 보고 느끼던 감회가 떠올랐다.
한 칠 팔년 쯤 전, 초가을에 선운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선운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여러 가지 여운과 아취를 느끼게 하는 몇 안 되는 절 중의 하나이다. 그 절 계곡의 상사화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그간 많이 듣던 터라 잔뜩 기대하고 갔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는 상사화가 꽤 늦게 피었다. 하여 우리는 봉긋한 꽃봉오리만 보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상사화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어렵게 꽃집서 상사화를 구했는데, 이번에는 빨간색 꽃이 아닌 노랑색 개상사화였다. 그리고 다음 해 가을 그토록 원하던 상사화를 포항 오어사 절마당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해 인연이 닿아서 선운사 상사화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올 수 있었다.
그 후 선운사 빨간 상사화에 대한 집념이 무뎌져 갈 무렵, 빨간색 상사화를 화분으로 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좀 시큰둥해졌다. 마치 떼를 한참 쓰다가 장난감을 갖게 된 아이의 투정이랄까? 어쨌든 그 상사화도 지금은 나에게 없다. 친지가 찾아와 가져갔기 때문이다.

양순열 작, 세계일화
본래 상사화는 여름에 피는 종류와 가을철 개화하는 종류로 나뉘는데, 그 유명한 선운사 상사화는 가을 추석무렵에 빨갛게 계곡을 물들인다. 그리고 목주님이 화분서 피워낸 그 상사화는 여름 종류이다. 가을 종류를 보통 꽃무릇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보통 우리가 찾는 상사화 종류는 바로 이 가을꽃인데, 그 붉기가 동백꽃에 뒤지지 않아서 선운사의 또 다른 인기종인 동백을 압도할 만 하다. 그래서 “서정주 님이 선운사 가서 동백만 보고 오셔서, 그래서 동백꽃 시만 남겨, 상사화가 그만 시샘해서 더 붉어졌다.”는 우스개 말이 있다.
상사화(相思花)는 한자 말 그대로, ‘님을 그리워하는 꽃’이다. 봄에 녹색 잎이 마주보며 나지만 꽃이 필 무렵에 다 말라버려,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한다. 마치 사랑의 숨바꼭질을 하는 연인마냥,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슬픈 인연이다.
선운사 상사화는 붉고 진하다. 붉은 색이 지나쳐 꽃잎이 서로 얽혀 만나는 꽃그늘은 검은 기운이 가득하다. 핏빛 붉은 빛을 우려내고 토해내 근처 땅과 하늘을 붉게 물든다. 피를 토하다 죽어가는 촉나라 망제(亡帝)의 슬픈 귀촉도인가, 깊은 한과 붉은 마음 지닌채 빠져 죽은 장화 홍련의 혼령인가, 그 사무치도록 붉은 빛은 보는 이의 눈을 매혹하고 가슴을 아려 감정을 솟구치게 만든다. 이별이나 실연의 아픔을 겪어본 이라면 눈물을 한 바가지 쏟도록 만들 그런 고혹적인 붉은 빛이다.






상사화 개화 장면 연속 사진
선운사에 얽힌 슬픈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처자가 선운사에 며칠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스님 한 분에게 연모의 정을 느껴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시름시름 앓던 그 처자는 결국 죽고 말았고, 그 처자가 죽은 무덤 근처에 하나 둘 꽃이 피어났다.”
한 사백년 전, 허난설헌이라는 불세출의 여류시인이 이 세상을 별같이 잠깐 살다 간 적이 있다. 그 분은 남편과 시어미에게 재주를 인정받지 못한 채 평생을 한과 눈물로 지새다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그 분이 자신의 처지를 달래며 지은 가사 ‘규원가’ 끝자락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천상의 견우직녀 은하수 막혔어도
칠월칠석 일년일도 실기(失期)치 아니거든
우리 님 가신 후는 무슨 약수(弱水) 가렷관대,
오거나 가거나 소식조차 그쳤는고.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달콤한 사랑의 만남을 가지지 못하고 스러지고 만 그녀의 처지가 상사화의 한처럼 고스란히 담겨져 보인다.

진미숙 작, 꽃들
상사화
이설영
이생을 살다
주검을 안고 가는 날에도
그대만을 기억하겠습니다
백 년의 기다림이
생사를 넘고 넘어
천 년이 된다 하더라도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
빠알간 고운 빛깔로
아름답게 잉태되는 순간까지
지고지순한 사랑 키우며 기다리겠습니다
이미 이 몸은 수천 년 전부터
당신을 기다려온 그리움지기 였기에...

선운사 상사화
이재영
솟아 오른 꽃송이는 이미 진 잎을 그리워하고
엇갈린 잎사귀는 다시 꽃을 그리워한다 하니
저 꽃이 생각하는 잎사귀들 보이는 듯 하네
저 꽃을 생각하는 잎사귀들 보이는 듯도 하네
선운사 계곡 상사화 붉게 만발한 꽃밭 속에 서니
내 안에 머물던 그렇게 꽃 같은 순간들 피어나네
꿈결에 날아간 아름다운 기억들 문득 되살아나면
마음 깊이 이리도 붉은 꽃 한 송이 맺히는 것인가
지쳐 떨어진 한 송이 꽃은 다시 돋아나고 싶어할까
한참을 생각다 보니 온통 살아온 지난 날
내 나를 사랑한 날들의 이 붉은 나르시시즘이여.


선운사 상사화
선운사 상사화
박몽구
온 뿌리의 힘 모아
봄물을 만인루의 하늘로 올리기로
저 푸른 빛 다 갖겠다는 뜻 아니다
내 피와 살 아낌없이 녹여
동백숲 푸르름 부끄럽잖게
청청한 잎 올곧게 피워냄은
그대의 봄밤 하얗게 밝힐 뜻 아니다
불면 꺼질 듯 글썽이는 이슬과
멀리 보는 눈 가진 별빛 합방시켜
세상의 어느 꽃 견줄 수 없는
향기를 지닌 꽃 피워 올리는 것은
어제와 똑같은 새벽 맞겠다는 뜻 아니다
이제껏 쌓은 살 다 비움으로
완강하게 매인 밧줄의 미련 버림으로
그대 무성한 가시뿐인 가슴에 안겨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포옹

최순자 작, 꽃이되고픔
상사화(민요조)
이성준
보고파도 볼수없고
듣고파도 듣지못해
한숨속에 홀로피어
눈물묻힌 아름다움
한과사랑 깊이묻고
겉으로는 화려한척
거짓웃음 고운모습
슬품감춘 꽃잎이여
왜참았나 왜그랬나
꼭꼭숨어 약올리나
꽃잎눈물 알면서도
깊은땅속 잠자는잎
기약없이 일편단심
귀한잎새 기다리다
붉은울음 토해내며
고운생명 다할적에
함께못한 둘의운명
거역못해 울먹이며
슬픈꽃잎 시신안고
상사화잎 돋아나네
어지럽다 안타깝다
슬픈운명 꽃과잎새
견우직녀 애달파도
상사화에 비길손가
세상모든 슬픈인연
서러워도 참아내소
하찬꽃도 구슬픈데
인간인들 어이하리

전시회 관람 소감
정남선 한국화 전시회를 보고 나서
6월 보름께 일요일 점심께, 식사를 뒤로 미루고 대명동 우봉미술관에 가 보기로 했다. 우봉미술관이 프린스호텔 뒤편으로 옮겨온 지 한 6년쯤 되었다. 협성교육재단에서 3개의 전시공간에 미술용품점, 수장고 등을 갖춘 토탈개념의 미술전시관으로 문을 연 이 곳은 ‘보다 쾌적한 분위기에서 예술작품에 대한 실직적 쾌(快)를 체험하고 내적인 희열을 체험하는 공간’을 대구시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한다.

우봉미술관 전경

정남선 화백
그 날 전시장 앞에서 문을 여니 굳게 닫혀 있었다. 전화를(622-6280) 걸어도 도무지 받지 않는다. 우봉미술관은 전시기간 중 휴무인 줄로 알고 있는데, 약간 낭패의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꼼꼼히 안을 들여다 보니 실내등이 켜져 있다. 그래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 10여 분 지났을 까, 식사를 마치고 오는 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미술관 근처로 오고 있었다. 가방을 들고 미술관 문 앞에 서 있는 손님을 보았는지, 한 남자분이 먼저 가던 초등학생 아이에게 무슨 지시를 내린다. 그 아이가 와서 열쇠로 문을 열고 인사를 넙죽 하는데, 뒤이어 온 어른이 전시 오셨느냐고 물어 보신다. 그렇다고 말씀 드리고 상황을 보니 그 남자분이 작가이시고 그 아이가 아들이었다. 좀 기다린 것에 대한 고마움(또는 미안함)인지 선뜻 시원한 차를 권한다.


전시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들은 모두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통일되어 있었다. 전시공간의 작품들이 한 주제로 통일되어 있으면 무언가 편안하고 집중된 느낌을 받는다. 오늘 전시회 또한 그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정남선 님의 한국화 작품은 우선 그 주조색(메인 칼라)이 청록생 일변도였다. 배경 화면은 잘게 나누어진 중첩된 붓터치로 가름했으며, 청록색과 중간색 계열의 자연물이 화면을 분할하며 서 있는 가운데, 황색과 갈색의 인간들이 군집하여 또는 홀로 놓여져 있었다.
작가는 화면 속에 은유적으로 상징화된 여러 대상물들을 포진하여 두었는데, 그 배치와 설정방식이 매우 공식적이어서 관람객들로 하여금 하나의 단일한 사념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무 줄기에 층층이 달라붙은 주택들은 탑처럼, 혹은 아파트처럼 현대 주거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고, 나무를 기어오르는 아이들은 현실 속에서 이상을 향하는 의지를, 사슴을 타고 놀거나 난초잎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은 속세적인 삶의 희노애락을 나타내는 듯 하였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그림의 구도처럼, 그의 작품들에서는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하였다. 흡사 세속에서 안주하며 부대끼면서도 이상에 대한 갈망을 놓치 않으려는 우리 현대인들의 생활상을 구현해 놓은 듯 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철학 등에서 풍기는 무거움으로 꾸며지지 않고, 민화나 전설적인 이미지로 가볍게 싸여져 있었다.
작품 해설집에 이와 관련된 서술이 엿보여 소개한다. “평범한 인간의 심성과 염원들을 민화, 무속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화면에 은유적으로 풀어 나아가고 있는 정남선의 전반적인 작업경향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심성, 땅과 하늘 사이에 풀려 놓인 당연한 세속적 심정을 부인도 거부도 하지 않고 포용하려는 듯 하다.”
정남선 님의 그림에는 작품 제목이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거개가 다 ‘生’이라는 간단한 제목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의 제목이 그림 속에 감추어진 여러 형상들을 제한시킬 수도 있다고 볼 때, 작가님의 한 마디 ‘생’이라는 제목은 여러 수 많은 인생의 카테고리를 포함하는 크고 넓은 개념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전시를 잘 보고 나서 인사를 드리니, 방명록에 글을 남겨 달라는 부탁을 하신다. 순간적으로 많은 단어와 문구를 떠 올렸다. 그러나 결국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인사만 꾸벅하고 나왔다. 전시작의 제목처럼 그렇게 한 마디 인사말만 하고 그렇게 나왔다.
전시회 안내
1. 최학보 초대전
일시 : 7월 7일까지
장소 : 두산아트센터
요약 :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중견작가 최학보의 작품전, 유년시절에 느꼈던 낙서판과 놀이터인 벽, 암각화를 통해 보여지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벽을 여러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하여 재구성하였다.

2. 로커클럽 사진전
일시 : 7월 6일에서 9일까지
장소 : 봉산문화회관
요약 : 인터넷 사진 작가 모임인 로커클럽 대구경북지부의 첫 번째 회원전이다. 대구모임은 2001년 설립된 이후 3천 여명의 아마추어 작가들이 활약하고 있다.

3. 신정주 한국화전
일시 : 7월 6일에서 15일까지
장소 : 송아당화랑
요약 : 붓질의 행위에 비중을 둔 작품전, 수직과 수평의 붓질에서 나타나는 우연의 효과로 여러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다. 마치 음악처럼, 시냇물처럼, 우주의 약동처럼 번지고 갈라지고 흩어지는 붓의 힘과 흔적들이 여러 가지 삶의 존재 양식을 웅변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