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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동아일보 2002-07-07 17:33]
동학과 용담정-은적암
《“경신년(1860) 음력 4월에 이르러 온 세상이 혼란하고 백성들의 마음과 풍속이 나빠져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즈음에…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밖으로 한울님의 영기가 몸에 접하고 안으로 한울님의 가르침이 내리는데,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동학이 탄생했단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가 경북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龍潭亭)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동학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이제 용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그 자리에는 1974년에 새로 크게 지었다는 용담정이 절경 속에 서 있다. 경주의 물이 다 마를 정도로 가뭄이 들어도 언제나 물이 흘러나온다는 그 곳은, 풍광만 보고도 너무 좋아 당장 동학에 입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용담정 입구에 있는 ‘천도교용담수도원’의 김근오(金根五·78) 원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아무나 갈 곳은 아닌 모양이다.
“송월주 스님(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이 오셔서 그러시더군요. 이렇게 기운이 센 데서 어떻게 견디냐구요. 이 산에는 절들이 들어왔다가도 10년을 못 견디고 떠나고 말지요. 그런데 수운 선생은 여기에 자리를 잡고 동학의 뿌리를 내리셨어요.”
그 거센 기운이 체질에 잘 맞는 덕인지, 김 원장은 80이 가까운 노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동학 신도였던 부친의 유언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입교했다는 김 원장이 용담정을 지킨 지 벌써 30년. 용담정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지만,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했다.
“동학은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광복 후에는 별다른 역할을못했어요. 초등학교 하나 못 세웠지요. 그러니 신도도 많이 줄었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반성을 해야 할 일이지요.”
최제우는 용담에서 동학을 연 지 2년도 안 돼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용담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유림과 관의 압력을 받았고, 1862년 이를 피해 찾아간 곳은 전북 남원의 은적암(隱蹟庵)이었다. 그는 용담정과 은적암에 머물던 1860∼1863년에 ‘용담유사(龍潭遺辭)’와 ‘동경대전(東經大典)’을 지으며 동학을 완성해 갔다.
그는 특별한 기운이 모이는 곳만 찾아다녔는지 은적암 터도 용담정에 못지 않은 듯했다. 안내판만 서 있는 은적암 터에는 교룡산 산신단(蛟龍山 山神壇)의 흔적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신라시대 때 창건된 선국사(善國寺)란 오래된 절이 있다. 그는 선국사의 암자인 덕밀암(德密庵)에 머물면서 그 이름을 은적암으로 바꿔놨다. 그는 이렇게 불교와 무속과 자신의 학문적 바탕이었던 유학의 힘을 합쳐 외세와 맞서려 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곳은 교룡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 때 주요한 거점이 됐을 뿐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는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이 남원성 공략을 위해 주둔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네가 곧 한울님’임을 설파했던 동학에는 실제로 당시의 여러 사상들이 포괄돼 있다. 몰락한 양반 출신인 최제우의유교적 소양과 당시 부패한 계급사회의 변화를 거세게 요구하던 민중들의 변혁사상, 난세에 위안을 삼곤 하는 도가의 무위이화(無爲而化) 정신,유불도의 융합이라는 한국사상의 전통, 그리고 서학과 서양의 득세에 대한 위기감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이것은 바로 당시 조선의 역사적 상황이었고 철학적 현실이었다. 동학이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현실을 외면했던 조선 성리학과 달리 바로 이런 시대적 현실을 그대로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이 그런 동학사상의 현실적 표출이었는지, 아니면 변혁을 꾀하던 사람들이 동학의 조직과 이념을 이용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농민전쟁을 통해서 동학은 짧은 기간이나마 현실 속에서 그 이념의 상당부분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1800년대에 계속된 농민항쟁을 거치며 지배층의 수탈에 대해 집단적인 저항의식을 가지게 된 농민들이 시대적 비판의식을 반영한 동학과 결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동학 조직의 고부접주(古阜接主)였던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은 1894년 초 학정에 못이겨 일으켰던 고부 봉기를 승리로 이끌며 농민군 총대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지휘 아래 고부성에 이어 태인을 점령한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과 맞서 대승을 거두면서 1개월만에 호남지역을 장악했다.
농민들의 함성이 들판을 가득 메웠던 ‘황토현 전적지’. 제세문(濟世門), 보국문(輔國門)을 거쳐 들어가면 제민당(濟民堂), 구민사(救民祠) 뒤 제일 높은 곳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든 동상이 서 있고, 농민들은 동상 뒤 벽에 새겨진 채 여전히 녹두장군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 전적지보다 더 넓은 건너편 벌판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짓는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시대는 동학사상보다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더 필요로 하는 모양이었다.
고부에서 황토현을 거쳐 정읍, 태인, 전주로 농민군이 달렸던 길을 되밟아 가며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호남의 벌판을 보면서 예전에 이 길을 함께 걸었던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이 넓은 평야에서 매년 쏟아지는 그 많은 곡식을 두고도 굶주림에 못이겨 농민전쟁을 일으켜야 했다는 게 말이 되냐?”
예나 지금이나 부와 가난은 총량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남원 은적암 이야기
[신인간]
머리말
필자는 포덕 128년(1977년) 12월 16일에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백제후기에 쌓은 성)에 들어가 백설이 뒤덮인 복덕봉(福德峰)에 올라가 본적이 있다. 엄청나게 높고 큰 지리산 줄기가 동쪽 일대에 하늘과 맞닿은 듯이 펼쳐져 있었다. 날씨가 청명하여 저 멀리 하얀 노고단(老姑壇, 1,507m) 봉우리도 눈에 들어 왔다. 평지에서 바라보면 그저 높다는 느낌뿐인 지리산을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니 너무나 넓고 높았다. 대신사도 은적암이나 이 산상에서 이런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은적암에서 지은 <권학가>와 <검가>에 “호호망망 넓은 천지”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호호(浩浩)란 광대한 모양이고 망망(茫茫)이란 넓고도 아득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적절한 표현이며 실감나는 표현이다. 대신사는 포덕 2년 12월 그믐날에 이 남원 교룡산성 안 은적암(隱蹟庵, 원명 德密庵)에 올라와 7개월간이나 있었다. 은적암을 찾게된 동기와 남긴 행적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포덕과 관의 탄압
대신사는 <통유(通諭)>에서 이 곳에 오게 된 동기를 밝혔다. “지난 해 중동(11월) 때 떠난 것은 본시 강산 청풍을 노닐어 보기 위한 것도 아니오, 산간 명월이나 감상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빗나가는 세상 도리를 살피는 것과 한편 관의 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대신사가 포덕을 시작하자 엄청난 수의 선비들이 용담으로 찾아왔다. 이들을 상대로 순조롭게 포덕하였다. 그런데 8월에 이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대신사의 포덕에 대해 관이나 유생들이 이단 행위로 몰아갔다. “알도 못한 흉언괴설 남보다가 배나하며 육친이 무삼 일고 원수같이 대접하며 살부지수 있었던가”라는 글귀에서 보듯이 문중에서까지 비난하고 나왔다. 두 달 후인 10월에는 관장(官長)까지 나서서 포덕을 금지하라며 탄압하였다. 다른 종교가는 민중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으므로 찾아다니는 일을 중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신사는 용담으로 찾아오는 선비들을 상대로 하여 포덕하였기 때문에 대신사가 용담을 떠나야 중지할 수 있었다. <교훈가>에 “아서라 이내신명 운수도 믿지마는 감당도 어려우되 남의 이목 살펴두고 이같이 아니말면 세상을 능멸한듯 관장(官長)을 능멸한듯 무가내라 할길없네. 행장을 차려내어 수천리를 경영하니 …”라고 하였다. 결국 대신사는 하는 수 없이 용담을 떠나야 했다.
정처 없이 발정
11월(양, 12월 초) 초순에 장기에 사는 제자 최중희(崔仲羲, 후에 접주가 되다)를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무조건 발길 닫는 대로 향하였다. <권학가>에 보면 “어진친구 좋은벗을 일로(조)이별 하단말가. 산수풍경 다 던지고 동지섣달 설한풍에 촌촌전진 하다가서”라고 하였다. 『도수사』에서는 “광대한 이 천지에 정처 없이 발정하니 울울한 이내 회포 부칠 곳 바이없어 청려(靑藜杖)를 벗을 삼아” 길을 나섰다고 하였다. 처음 찾은 곳은 울산이었다. 서군효(徐群孝, 후에 접주가 됨) 등 가까운 도인들을 만났다. 며칠 후에는 누이동생(남편, 金振九)이 사는 부산으로 갔다. 부산 대신동 뒷산에는 누이동생이 순도한 수운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산당(山堂)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한다. 『대선생주문집』에는 남원으로 가다 성주(星州)에 들려 충무묘(忠武廟)를 참배하였다고 하였다. 두 차례나 성주에 가 보았으나 충무공 묘당은 없었다. 혹시 승주(昇州)를 성주(星州)로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닐지? 며칠 후 대신사는 부산에서 배편으로 웅천(熊川, 鎭海市)으로 갔다. 『천도교창건사』에는 “낙동강 좌편 웅천이라는 촌중에서 유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하기를 웅천에는 서씨 어머니 오빠(외삼촌)가 살고 있었다 한다.
다음은 고성으로 가서 성한서(成漢瑞, 나중에 접주가 됨)의 집에 머물다가 역시 배편으로 여수로 간 것 같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고적들을 살펴보고 승주(昇州)로 올라와 구례를 거쳐 남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남원에 당도한 것은 약 2개월 만인 1861년 12월 15일경이다. 광한루 오작교 밑에 사는 서형칠(徐亨七)의 집에 10여 일간 머물러 있었다. 『남원군동학사』에 의하면 서형칠은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한다. 하필 한약방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대신사가 경주를 떠날 때 남문 밖에서 약종상을 경영하는 수제자격인 최자원(崔子元)이 노자로 쓰라고 귀한 약재를 주었던 모양이다. 돈으로 바꾸려면 약방을 찾아가야 했다. 서형칠은 대신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신사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약방은 손님 출입이 잦아 번거로우므로 그의 생질인 공윤창(孔允昌)의 집으로 옮겨 모셨다.
『남원군종리원』에 의하면 서형칠과 공윤창이 먼저 입도하였다 한다. 뒤이어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局三), 서공서(徐公瑞),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이 차례로 입도하였다. 이 때 전주에 사는 신모(申某)도 찾아와 입도하였다 한다. 이들은 대신사가 “은적암으로부터 환향하신 후에도 서형칠, 양형숙, 공윤창 등이 용담정에 내왕하며 도맥(道脈)을 통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에는 이때부터 대신사의 포덕으로 동학이 발을 부친 것이다.
은적암에 은신
10여 일 후인 12월 그믐께 서형칠은 대신사를 다시 교룡산성 덕밀암(德密庵)으로 옮겨 모셨다. 『대선생주문집』에는 “때는 섣달 그믐이라, 한 해는 이미 저물고 절에서 때마침 종을 치자 여러 중들이 모두 모여서 법경을 외우고 소원을 축원하며 새벽 불공을 드렸다. 송구영신의 회포와 감회를 금치 못하면서 외로운 등잔불 아래서 한밤을 지샜다”고 하였다. 이 두 칸 짜리 덕밀암(德密庵)에서 최중희와 같이 6개월간 머물러 있었다. 대신사는 얼마 후 이 덕밀암을 은적암(隱蹟庵)이라 고쳐 불렀다.
현파(玄坡 朴來弘)는 『천도교회월보』에 ‘전라행’이란 기행문을 실었다. “은적암(隱蹟庵: 蹟字는 그 때 모시고 있던 梁國三 씨의 증언에 의함)은 읍의 서방 10리허의 지(地)에 교룡산성이 유하고, 성의 북우에 밀덕(密德)·복덕(福德) 양봉이 돌올탱천(突兀撑天)하고 봉덕봉의 동록 돌기한 소봉이 유하며 층암첩석(層岩疊石)이 향양(向陽)한 간에 좌우석면에는 ‘산신지위 경인(山神之位 庚寅) 쫛쫛쫛’ 등 무엇무엇의 각자가 유하고 여기저기에 산재한 고색창연의 석조석구(石槽石臼), 부러진 주초, 깨어진 와편은 누가 보던지 고사(古寺) 유허가 분명하니 이곳이 덕밀암(德密庵) 고지이라. 대신사께서 차암 일실을 청소하시고 은적암이라 하셨나니 암은 갑오 동란시 접주 심노환(沈魯煥)의 도소였던 죄로 후일 관병에게 분소(焚燒)를 당하고 그 유허만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필자는 포덕 126년(1977년) 12월부터 포덕 132년(1981년) 12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선국사(善國寺) 주지를 만났으나 모른다 하여 그냥 돌아왔고, 두 번째는 절간 밑에 사는 이윤기(李允基: 1887년생, 당시 94세)를 만났으나 뒤로 올라가면 된다고 하여 헤매다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세 번째는 이윤기를 다시 만나 뒤로 올라가면 된다는 말만 듣고 다시 올라갔었다. 지난번에는 절간 뒤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곧바로 올라갔으나 이번에는 절간 뒷길을 가다가 희미하게 나 있는 바른 쪽 길을 따라 올라갔다. 능선까지 이르자 바로 왼쪽 아래에 70평 정도의 절터가 나왔다. 기와장도 보였고 절터 왼쪽에는 대나무와 습기찬 샘터도 있었다. 여기서 다시 좌측 5m 지점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큰 암벽이 있었다. 지금은 주변을 잘 다듬어놓아 누구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절터 자리는 잡목을 쳐내어 시원하게 가꾸었고 큰 장승과 큰 돌탑(채화대)도 세워놓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포덕 131년(1990년)에 일본 도예가 심수관이 이 곳에서 채화해 갈 때 이처럼 잘 정리하였다 한다.
은적암서 논학문 지어
이 은적암에서 대신사는 많은 글을 지었다. 포덕 3년(1862년) 1월초에는 <권학가>를 지었다. 첫머리에 “전라도 은적암에 환세차로 소일하니 … 말로하며 글을지어 송구영신 하여보세”라고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논학문>을 지어 반포하였다. 보통 경신 4월 5일에 동학을 창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동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반포된 것이다. <논학문>에 의하면 도(道)와 학(學)을 구분하여 “도는 천도라 하지만 학인즉 동학이다(道雖天道 學則東學)”고 하였다. 언뜻 보면 도와 학은 같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도와 학은 다르다. 도는 신념체계를 이르는 것이고 학은 수행체계를 이르는 것이다.
대신사는 은적암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전주와 심지어 진산 및 금산까지 왕래하며 포덕에 힘썼다. 『전주종리원연혁』에는 “포덕 2년 신유(辛酉, 1861년)에 대신사께서 포덕 차로 최중희 씨를 솔하시고 자(自) 남원으로 본군(全州郡)에 오시어(駕) 물태풍속(物態風俗)을 주람(周覽)하신 후 포교를 위시하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최제우(崔濟愚)는 … 지례(知禮)와 김산(金山=金陵)과 호남의 진산(珍山)과 금산(錦山) 산골짜기를 오가면서 양민을 속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계를 받게 하였다”고 했다. 6월에는 <수덕문>과 <몽중노소문답가>를 지었다. <수덕문>은 학의 체계 즉 수행의 틀을 설명한 글이다. 주목되는 것은 선신후성(先信後誠)의 수행체계에 대한 설명이다. <좌잠>에서 언급된 신경성(信敬誠)의 본뜻을 이 <수덕문>에서 정확히 풀이하였다. 대개 신자(信字)는 믿을 신자라고 한다. 그러나 대신사는 참을 가리는 신자라고 하였다. 이 길이 옳은가, 저 길이 옳은가를 가려내는 신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誠)자 역시 정성 드리는 성자가 아니라 거짓됨이 없이 마음을 다하여 실행하는 이것이 성이라고 하였다. 경(敬)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문맥 속에 그 뜻이 들어 있다. 공경 경자로 해석하지 않고 옳은 길이라 판단하면 곧 그것을 내 것으로 몸에 배게 하는 것이 경이라 하였다. 먼저 바른 길을 판단하고 그것을 내 몸에 배도록 닦고 단련하여 실생활에 옮기는 것이 신경성이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학의 수행체제라고 하였다.
뒤이어 지은 <몽중노소문답가>는 참위설을 원용하여 역사의 대전환기를 일깨워주는데 주력한 글이다.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도 또한 연천해서 억조창생 많은 백성 태평곡 격양가를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하여 대신사가 펼치는 무극대도가 바로 새 역사를 만드는 도(道, 길)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대신사가 지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모두 12가지 제목을 가진 글로 되어있다. 그 중 여섯 가지의 글을 여기서 지었다. <검가>까지 합치면 일곱 가지의 글을 지은 셈이다.
7월에 경주로 귀환
대신사가 남원에서 경주로 돌아온 시기는 포덕 3년 3월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신사의 글을 보면 7월에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 포덕 3(1862)년 6월(양 7월) 상순께 발표된 <통유(通諭)>는 남원에서 지은 글이다. “이제 막 장마 비가 내리는 계절이라 바람이 일고 비가 뿌려 길게 자란 풀이 옷을 적시니 족히 애처롭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장마비가 내리는 계절과 길게 자란 풀이 옷을 적시는 계절은 바로 6월 중순경이다. 따라서 대신사는 6월 중순까지 이 은적암에 머물러 있었음이 확실하다.
6월(음)에 지었다는 <수덕문>도 은적암에서 지은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소식을 주고받으니 역시 서로간에 그리운 회포를 견디기 어렵구나. 가까이 만나 서로 정을 들어내고자 하나 필시 혐의를 두고 지목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고로 이 글을 지어 펴 보이니 … ”라고 하였다.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었다면 어디서 지었을까? 6월에 <통유>를 지은 것으로 보아 <수덕문>도 은적암에서 지은 것이 분명하다. 결국 6월까지 대신사는 남원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대신사는 경주로 돌아와 박대여의 집에 있다가 7월 어느 날 처음으로 용담 집에 갔다고 하였다. 즉 “7월에 집으로 가던 날 말을 타고 오다가 회곡(回谷)에 이르렀다 … ”고 하였다. 대신사가 3월에 경주로 왔다면 무엇 때문에 4개월씩이나 미루다가 7월에야 집으로 갔을까? 공백이 너무 길어 3월 귀환설은 설득력이 없으니 잘못된 기록이다. 대신사는 7월에 경주로 와서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며칠간 머물었다가 7월 어느 날 용담 집으로 간 것이다.
결론
은적암은 초기 동학 창도과정에서 대신사가 중요한 행적을 남긴 곳이다. 오던 도중 구례쯤에서 <교훈가>를 지었고 남원에 와서 <도수사>를 지었다. 그리고 암자에 들어가 새해를 맞으면서 <권학가>와 <논학문>을 지었다. 그리고 6월 중순에는 <통유>를, 하순부터는 <몽중노소문답가>와 <수덕문>을 지었다. 여기서 경전의 반을 지었는데 더욱이 <교훈가>, <논학문>, <수덕문> 등 중요한 글을 지었다. 어찌 보면 경상도에서 득도한 대신사는 전라도 은적암에 와서 무극대도를 다듬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도인들은 이 은적암을 무심히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쯤 은적암을 찾아가 대신사가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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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는 교룡산성 안에 자리하고 있어 흔히 '산성절'로 부른다. 창건은 685년(신문왕 5) 삼국통일 직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남원 소경(小京)이 설치되면서 함께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 용천(龍泉)이라는 맑은 샘물이 있어 절 이름을 용천사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선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교룡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현재까지 명확하지 않으나 예로부터 국방의 요충지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 빈번한 왜구의 침입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등 국난이 있을 때마다 전라좌영이 있었던 남원부에서는 곡성, 옥과, 구례, 창평, 장수, 운봉 등 6개 군현에서 거둬들인 군량미를 이곳 교룡산성 안에 보관했음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이렇듯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던 교룡산성이기에 이곳을 지키고 운영하기 위해 지금의 선국사가 나름대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선국사는 산성을 지키는 본부로도 사용되어 수성장(守城將)과 별장(別將)이 배치되었고, 그래서인지 전성기에는 승려가 300여 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1895년에는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접주 김개남이 남원과 교룡산성을 점령하여 관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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