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몇 해 전 모 통신회사 광고의 '또 다른 세상…'이란 카피는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정말 '또 다른 세상'이다. 순간 광고의 한 장면처럼 '핸드폰을 끄지 않았구나'라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24번 국도는 봄햇살만큼 푸근했다.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메타세쿼이어 가로수는 동화속 병정처럼 도열해 있고, 나지막한 흙담 안은 여지없이 푸른 대숲이 들어 차 있다. 4㎞에 걸친 가로수길을 기분좋게 지나 이리저리 휘어진 시골길을 따라가면 대나무골 테마공원에 들어선다.
담양에 지천으로 널린 대숲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곳이다. 확실히 다른 숲과 구별되는 독특한 향기와 운치가 한눈에 느껴진다.
대숲 안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몇 걸음 내디뎠다. 싱그러운 숲 냄새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모습에 어느새 편안함을 느낀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대숲의 정기를 좀 더 느껴본다.
그 때였다. 대나무 숲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천지를 돌며 봄볕으로 무장한 바람이다. 바람은 숲 꼭대기 잎새들을 바르르 떨게 하더니 청아한 소리로 연주를 시작했다. 어떨 땐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같고, 어떨 땐 싸리비로 쓸어내는 소리같다. 눈을 감고 마음을 열고 그 소리를 가슴 한 가득 받아들이니 내 안으로 자연이 쑥 들어오는 기분이다.
그렇게 댓잎의 연주를 듣고 있는 동안 햇살은 푸른 숲을 가르고 머리 속을 헹구어 준다. 땅 위 그림자들은 수시로 모양을 바꿔가며 춤을 춘다.
그처럼 화려한 연주를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한참이나 대숲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바람은 다시 하늘로 사라져버린다. 햇살은 여전히 대나무 끝에 걸려있고 숲 속에는 어둑어둑한 침묵이 흐른다.
그제서야 동행이 있다는 사실을 떠 올렸다. 그러고보니 대숲에 들어와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싶어 은근히 동행에게 미안하다. 그래도 이 좋은 소리에 인간의 소리를 보태기 싫어 대숲 산책로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어간다.
첫번째 산책로가 끝나면 두번째 산책로가 기다리고 있다. 두번째 산책로를 돌고 나와 다시 첫번째 산책로를 한 번 더 돌았다.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몇 번이나 산책로를 왔다갔다 하며 도시에 지친 내 몸을 대숲에서 헹구어 내고 싶었다. 대나무는 속이 텅 비어 있어 무소유를 뜻한다고 하던가. 늘 좀 더 가지려고 아옹다옹했던 삶이 부끄럽게 다가온다.
죽림욕을 끝내고 나면 테마공원 위쪽의 소나무숲과 잔디밭이 기다리고 있다. 병풍을 두른 듯 주위의 산이 살포시 공원을 감싸안고 있다.
담양으로 대나무 여행을 왔다면 이곳도 들러보자. 담양IC를 빠져나오자마자 만나는 곳이 죽물박물관이다. 대나무에 대한 기본정보부터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제품들이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박물관 안이 답답하다 싶으면 뒤쪽에 펼쳐진 대나무정원으로 나가보자. 개울이 흐르고 어린 대나무들이 풋풋하게 서 있다. 정글 미로 흔들다리 죽마타기 등 대나무로 만든 놀이기구에서 한 껏 신이 난 아이들의 미소가 싱그럽다.
담양까지 왔다면 정자거리를 보지 않으면 아깝다. 화순으로 가는 887번 지방도로가에 서 있는 정자들은 어김없이 대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가로운 정자에 올라 대숲에 일렁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잊히지 않는 여행의 마무리가 될 것이다.
정보제공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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