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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 그리워 사랑 그리워
| 서방님 내일은 내가 죽는날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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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
1050년 5월 20일부터 29일가지 10일간에 걸쳐 일제 시대 부민관이 였던 국립극장에서는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인 현제명의'춘향전' 이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되었다. 현제명은 일제 시대에 이미 연희전문에서 후일 한국 음악계의 중심이된 인물을 많이 길러 내었는가 하면 성악가로서의 활동도 활발해 레코드 취입등 인기있는 성악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무엇보다도 음악전문교육의 요성을 절감하고, 1945년 경성음악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했고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가 창립되자 예술대학으로 흡수시켜 음악부장을 맡았는가 하면 다시 음악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초대학장으로 이 나라 전문 음악교육의 기틀을 세웠다.
해방후 춘향전을 대본으로 한 전5막의 오페라를 완성했고 서울대 음대 주최로 6.25전쟁 한달전에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지휘는 현 제명 자신이 맡았으며, 연출엔 유치진, 출연 가수는 당시 활동중 인 성악가들이 참가하였다. 대본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했지만 음악의 흐름은 영악 선율을 따 르고 있어 한국적 내음이 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들에 게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을 뿐만아니라 아리아나 사랑의 2중창은 유행가처럼 즐겨 부르기까지 해 반응은 대단하였다. 전문 작곡가가 아니어서 오페라 춘향전의 곡을 쓰는데 당시 작곡가정회갑을 비롯한 당시 서울 음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되었으며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 려해 생각한다면 대단한 성과였다.
줄거리
제1막 (광한루)
5월 단오날. 전라도 남원 땅. 단오날을 맞아 봄나들이 나온 이도령과 방자, 춘향과 향단의 만남 이 이루어진다. 한눈에 반한 이도령과 그네를 뛰는 춘향이 아름답 다.
제2막 (춘향의 집)
이도령이 춘향의 집을 방문해서 춘향모 월매와 나누는 노래, 춘향 과 사랑의 백년가약을 맺는 그윽한 밤, 춘향과 사랑을 나누는 동안, 이도령의 부친이 한양으로 갑자기 승급하여 전출하게 됨으로 됨으로 이도령과 춘향은 이별을 한다. 이도령은 변치 말고 기다리라며 거울을 징표로 건네주고 춘향은 반지를 이도령에게 주며 애절한 이별을 한다.
제3막 (동헌)
남원 땅에 새로 부임한 변사또는 일은 하지 아니하고 고을의 기생 들을 모이게 하여 일일이 점고 한다. 기생들이 마음에 안 들자 절세 미녀로 소문난 춘향이를 대령시킨다. 끌려온 춘향이 수청을 거절하자 분노한 변사또가 춘향에게 매 를 때리고 옥에 가둔다.
제4막 1장 (남원 가는 길)
춘향과 헤어지고 서울로 올라와 열심히 공부하여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 전라어사로 호명 받아 호남일대를 순시하던 중 남원관리 의 횡포소식을 접하고 변장을 하고 남원으로 향한다.
제4막 2장 (옥중 상봉)
이도령이 춘향집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들어서자 춘향어미 월매가 거렁뱅이 신세가 되어 나타났다고 대성통곡. 옥에 갇혀 있는 춘향 이 꿈속에서 이도령을 만나 옥중가를 부른다. 이때 이도령이 거지 차림으로 월매와 함께 상봉하고 춘향은 사랑 이 변치 않음을 노래한다.
5막 (사또 생일잔치)
동헌에는 변사또의 생일잔치가 한창이고, 거지 행색의 이도령이 들어선다. 술 한잔에 시 한 수를 써주고 사라지는 이도령. 다시 생일 잔치가 절정에 이를 때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들어 선다. "암행어사 출도요" 결국 고을 일을 외면하고 놀기만 하던 부패관리인 변사또는 벌을 받게 되고 암행어사 이도령과 춘향은 재회의 기쁨과 더불어 온 고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 백년해로 한다.
현제명 玄濟明, 1902 경북 대구~1960. 4 서울.
작곡가·성악가. 기독교도로서 사업을 하던 부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회 성가대에서 서양음악을 익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면서 서양선교사에게서 피아노·바이올린을 배웠다. 전주 신흥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다가 숭실전문학교에서 알게 된 레인보우레코드회사 사장인 R. 하버의 추천으로 무디 성경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음악을 배웠다. 1928년 시카고에 있는 건(Gunn) 음악학교에서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미국 유학시절에 〈고향생각〉·〈산들바람〉 등의 가곡과 찬송가를 작곡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영어교수로 있으면서 음악부에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만들고 공회당에서 최초의 공연을 가지는 등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0년대에는 빅타레코드사와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 음반을 취입했다. 1932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1937년 미국 건 음악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유학가기 이전부터 박사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가 쓴 박사 학위 논문이 어느 글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44년에는 일제의 어용음악가 조직인 조선음악가협회와 경성후생악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친일행위를 했다. 1945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모체인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8·15해방 후 한민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고, 1950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향전〉을 총지휘했으며, 1954년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했다. 1955년 마닐라 음악회의에 참석, 195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국제음악회의에 참석했다. 1955년 예술원상 등을 받았고,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왕자호동〉, 가곡 〈오라〉·〈니나〉·〈나물캐는 처녀〉, 국민가요 〈희망의 나라로〉·〈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음원출처:http://kstaec.com.ne.kr
청춘 남녀가 만나 한눈에 반해 사랑하는 것은 인간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아직 인생의 경륜을 쌓지 못한 이들이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평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것은 경솔하고 무모한 일이다. 사랑은 불처럼 갑작스레 다가오나, 그 언약과 책임은 평생토록 그들의 운명을 바위처럼 내리 누를 터이니 말이다.
괴테(Goethe)의 희곡 <파우스트>에서 주인공 파우스트(Faust)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의 마법에 힘입어 젊은 청년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청순한 아가씨 마르가레테(Marguerite=Gretchen)를 유혹한다. 여인은 그 잘생긴 남자가 악마의 기운을 받은 난봉꾼인줄 모른다. 사실 여인을 매혹케 하는 모든 사내들은 악마의 미소와 도둑의 키스를 가지고 있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행복에 넘쳐 봄 한철을 즐겁게 보낸다. 그러다 여동생의 철없는 사랑행각을 꾸짖으러 온 오빠 바렌틴(Barentin)을 파우스트가 죽여 버린다. 오빠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본 마르가레테는 도망쳐서 파우스트의 아기를 낳으나, 자책으로 실성하여 갓난아이를 목졸라 죽인다. 사형이 언도된 마르가레테를 구하러 파우스트가 달밤에 감옥을 찾는다. 파우스트는 번민에 휩싸여 울부짖는 연인의 앞에 몸을 내던져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감옥을 벗어나 같이 머나먼 곳으로 가자고 이른다. 그러나 마르가레테는 속죄를 위해 그대로 감옥에 남고자 한다. 그녀는 환상 속에서 참수대(斬首臺)의 번쩍이는 칼날을 보고 몸을 떨며, 파우스트는 할 수 없이 그녀를 구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감옥을 남으며 이렇게 독백한다. "아, 나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파우스트가 떠난 감방에는 달빛만이 무심하게 비추이고 있다. 결국 두 청춘 남녀의 설익은 낭만적 사랑이 비극의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성춘향과 이도령은 광한루(廣寒樓)에서 만나 곧바로 사랑에 몰입했다. 청혼 절차나 혼약의 예식없이 장모의 집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순진한 춘향은 양가 부모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몽룡을 사모하였고 순정을 모두 바쳤다. 철부지들의 사랑이 오래 갈리가 없었다. 이몽룡은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버렸고 춘향은 홀로 남았다. 남자는 서울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암행어사를 봉행하면서 성숙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고, 여인은 사또 변학도의 위협을 당하며 절조의 자세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이몽룡이 남원에 당도하니 춘향은 이미 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남루한 복장으로 신분을 숨긴 이몽룡은 춘향을 찾아가 그녀를 위로하며 자신의 사랑이 변치 않음을 노래한다. 춘향 역시 자신의 첫 사랑 이몽룡의 간절한 마음을 확인하고 이제 사랑을 찾았으니 내일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죽을 운명에 처한 여인과 그녀를 사랑으로 보답하려는 청년의 대화는 오페라에서 처연하고 구슬픈 이중창으로 불려지고, 무대 위 저편에서 달이 그들을 지키듯 떠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두 사람은 달밤을 의지하여 발코니에서 만난다. 다음은 그 대화의 일부이다.
로미오 : 아가씨, 여기 이 과일나무들을 은빛으로 물들이는 저 신성한 달님에 걸고 맹세하겠어요.
줄리엣 : 제발, 달님에 걸고 맹세하지 마세요. 달이 바뀔 때마다 궤도를 바꾸는 저 변덕스러운 달님에 걸고는 맹세하지 마세요. 그대의 사랑도 저 달처럼 변덕스러울가 봐 두렵거든요.
프로코피에프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중 사랑의 맹세
줄리엣이 말했듯, 달은 해와 달리 변하고 사라지는 존재이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사랑이 변심하여 그녀를 저버릴 까봐 두려워 달을 비유로 들어 그이의 마음을 붙잡으려 하고 있다. 그녀의 원대로 남자의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세태가 그들을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가 극진히 사랑하고 서로를 원했다. 그러나 가문끼리의 싸움에서 로미오가 쫓기는 몸이 되자,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동반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어찌 보면 줄리엣은 발코니 위에서 달빛을 로미오에 비유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운명에 비유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사랑은 달님과 같이 변하고 때때로 구름에 가리워져 앞일을 예측할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은 1949년 서울 부민관에서 처음으로 상연되었다. 당시 한국음악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작곡가 현제명이 극작가 이서구에게 의뢰한 대본을 바탕으로 지은 5막짜리 그랜드 오페라였는데, 이 오페라 상연으로 인해 한국 음악사의 한 획이 새로 그어졌다. 이후 우리나라에는 백 수십 편의 창작 오페라가 공연되었고, 오페라 예술의 외연(外延)이 확대되면서 해외 걸작 오페라들도 국내 주요 공연장에서 자주 상연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창작 오페라들은 음악가들과 청중에게 다소 외면당하였다. 상연이 이루어진 후 롱런으로 이어지지 못해 세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오늘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볼 때, 해방 직후 상연된 <춘향전>은 여러 모로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제명이 꿈꾼 오페라는 유럽 본무대에서 상연되는 대작 오페라와 비견될 수 있는 걸작 대형 오페라였다. 전체 런닝타임이 1시간 반을 뛰어넘었고 당시 출연자들은 주역만 열 다섯 명이나 되어 이상춘,이인범,서상필,이관옥,이금봉,권원한,김혜란,이정희,김학상,전노식,이영순,김형로,김학근,정영재,오현명이 출연하였고, 합창단 등 보조인원도 백여 명에 달하였다. 현제명 선생은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를 본떠서 막간에 발레도 추가했고, 오프닝 무도회인 추천가(鞦 韆歌), 병사들의 합창 격인 사령(司令)들의 합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가는 아름답고 빛나는 이중창이었고, 알토 가수가 불렀던 월매(月梅)의 카바티나(Cavatina)는 애절하고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페라의 최고 백미(白眉)는 옥중 장면이었다. 큰 칼을 뒤집어 쓴 채 머리를 산발하여 감옥에 갇힌 춘향의 가여운 모습과 그 이중창은 <오텔로:Othello>의 '버들의 노래'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의 '파리를 떠나서' 등과 필적할 만한 이미지이자 선율이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달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한 여인의 흰 옷자락을 차갑게 비추며 드라마틱한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 듯 했다. 이와 같은 극적 전개와 탄탄한 대본과 플롯, 정교한 무대장치를 통해 현제명의 <춘향전>은 우리나라 가극역사를 10여 년 가량 앞당기게 하였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이제 다시 춘향전의 무대 속으로 들어가 본다. 달빛이 비추는 감옥의 바깥에서 이몽룡이 손을 잡고 간절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춘향은 죽음을 준비하며 마지막 인사를 연인에게 건넨다. 의아하게도 노래는 삼박자의 춤곡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체절명의 비극적 상황에서 두 사람은 왈츠풍 선율에 가사를 매기고 있다. 고난이 끝간데 없고 삶이 모진 구석으로 내몰릴 때, 사람은 그 속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고 하였던가, (겉으로 보기에) 인생에 실패한 낙오자와 사랑에 배신당한 여인이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옥중의 춘향이 먼저 노래를 연다. 그간 편지 한 통도 제대로 받지 못해 몇 년간 울적하고 비통하게 기다리던 그녀였다. 달에게 간절히 빌고 빌었더니 이제사 이도령이 돌아왔다. 그녀는 원망도 않고 푸념도 마다한 채 있는 그대로 낭군을 받아들인다. 이에 이도령이 화답한다. 이도령 역시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건너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남자의 노래에는 힘이 서려있고 희망의 기운이 스며있다. 두 사람의 교창(交唱)이 끝나면 이중창으로 바로 이어진다. 남자는 높은 음을, 여자는 낮은 음을 맡아 화음을 고르면서 정겹고 다정하게 노래를 부른다. 비록 두 사람은 떨어져 있고 감옥의 굴레에 있으나, 마음은 그 곳을 떠나 하늘 위로 날아다닌다.
두 번째 절에서 춘향은 죽을 예감에 이도령에게 자신의 주검을 맡긴다. 어머니에게는 이도령을 건사해 달라고 청한다. 눈물을 삼키며 이도령은 춘향을 달랜다. 우리 민족이 곤경과 시련에 처했을 때마다 찾던 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 말을 남자가 여인에게 보내며 손을 잡는다. 이 구절을 통해 관객과 청중들은 동족만이 공유하는 단어, 한(恨)과 기원(祈願)의 정서에 휘감긴다. 초연 당시 일제강점기의 질곡(桎梏)을 살아왔던 청중들이 부민관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옷깃을 적시고 눈시울을 훔쳤을까? 그렇듯 이 사랑의 이중창 <그리워 그리워>는 우리 백성의 정서와 한을 가장 높이 아로새긴 민족의 노래로 영원히 자리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