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사회철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자본의 종류를 경제적 자본, 사회적 자본, 그리고 문화적 자본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 많은 학자들이관심을 갖고 논의하여 왔던 게 그의 독특한 개념인 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이다.
문화자본은 한 개인에게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주는 지식, 소양, 기술, 교육 등을 지칭한다고 정의된다.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의 하위 유형으로, 소양이나 매너 등과 같은 체화된(embodied) 문화자본, 예술품이나 과학기구 등과 같은 객체화된(objectified) 문화자본, 그리고 학위나 자격증 등과 같은 제도화된(institutionalized) 문화자본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이렇게 볼 때 문화자본을 간단히 요약하면, 개인이 몸에 익힌 교양과 인격, 예술품 소장과 감상, 그리고 학력과 전문적 자격증 보유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자본의 한 유형이라고 할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학교는 중립적 가치를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적 지배계급의 특정 문화를 전수하는 기관이므로, 따라서 학교는 특권층에게 이미 체화되고 보유되고 제도화된 지식과 문화를 재생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문화 재생산 이론은 기존의 특별한 계급의 문화를 특정 아이들에게 전수하는 기관이므로, 특정 계급에 속하지 않는 학생들은 장차 자신들의 사회 적응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전수받지 못하는 열외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이론은 그의 또 다른 개념인 '구별짓기'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한다. 부르디외의 '구분짓기'란 사회적 계급을 망라한 방대한 조사결과와 구조주의적 관점을 결합하여, 인간들이 갖고 있는 고상한 취미와 천박한 취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문화 재생산 이론과 연결짓고 있다.
반 세기 전 내가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일 먼저 기가 죽은 건 학교 친구들의 다양한 문화적 경험이자 자산이었다. 어느 친구가 숫자 '3'을 왼쪽으로 90도 눕혀 그린 다음 이게 어느 산이냐 물으니 옆 친구가 즉각 내게는 생소한 '인수봉'이라고 답하질 않나, 어느 친구는 책상 위에 프랑스 몽블랑(이 역시 생전 처음 본 상표임) 만년필을 떠억하니 놓아두질 않나, 어느 친구는 지난 일요일에 동숭동 극장에서 연극 구경을 했다질 않나...아무튼 시골 깡촌에서 올라간 나로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짓들을 잘도 떠들어대는데, 그럴 때마다 난 벙어리나 다름 없었다.
내가 가수 '나훈아'를 이야기하면 그들은 '냇 킹콜(Nat King Cole)'을, 내가 베토벤의 '엘리자를 위하여' 를 말하면 그들은 말러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를, 내가 밀레의 그림 '이삭줍기'를 들먹이면 그들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떠들었으니...굳이 부르디외의 문화 재생산 이론을 운위하지 않더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저급한 교양에, 예술작품 하나 소장하지 않은 천박한 수준에, 전문적인 자격증 하나 가지지 못한 하류층을 면할 수 없으리라 여겨졌으며, 지금 돌아보아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자 사실이었다. 그들은 불쌍한 하층민 정모군에게 끝까지 위로의 말 한 마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