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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천년을 이어온 미소-앙코르톰 글/사진: 이종원
앙코르톰 앙코르라는 '도읍지'란 의미이고 톰은 '거대하다.'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앙코르톰은 '거대한 도시'를 말한다. 한 변의 길이가 무려 3km의 정사각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벽의 높이만 8미터, 성벽을 따라 폭 100미터 해자를 팠고 그 넓이만 해도 45만평이 되어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울의 남대문마냥 앙코르의 모든 길은 이 남문으로 통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남문을 지나쳐야 한다. 입구에는 우유의 바다 휘젖기 조각상이 길게 이어졌다. 왼편의 54개 석상은 선신이고 오른쪽 54개 석상은 악신이다. 그들은 바수키라는 뱀을 당기고 있다. 앙코르왓에서 본 우유바다젖기 부조가 조각으로 환생된 것이다. 남문 앙코르 유적 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진이 바로 이 고푸라문일 것이다. 성문의 높이는 23미터, 번개와 하늘의 신인 인드라가 머리 3개인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는 인자한 관음보살 사면상이 동서남북을 수호하고 있다. 한때는 앙코르인이 들나들던 문이었던 것이 지금은 세계인을 들락날락하니 세게의 중심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 곳을 통과하는 관광버스는 32인승 한국백화점 쇼핑버스다. 그 많았던 서울의 백화점 버스가 천년고도 앙코르로 집결했다니 아이러니컬하다. 45인승 최신 대형버스도 앙코르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이 고푸라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년의 신비를 느끼려면 이렇게 몸을 낮추어야 한다.
관음보살의 잔잔한 미소덕에 이 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마음이 편해진다. 머리 셋달린 코끼리가 코로 연꽃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보인다. 바이욘사원으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야생원숭이떼가 나타났다. 급히 차를 세우고 바나나를 건내주었다. 야생원숭이지만 사람드을 전혀 무서워 하지 않는다. 어찌나 귀여운지 모른다. 우리에 갇혀 있던 원숭이만 보다가 이렇게 자연에서 가까이 원숭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바나나뿐 아니라 과자도 좋아한다. 맛있게 바나나를 먹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원숭이장군 하누만의 후예다. 앙코르에 가거든 원숭이에게 선물할 바나나를 꼭 챙기길.... 바이욘사원을 만나면서 버스는 무성한 열대수림을 가로질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앙코르제국의 모든 길은 바이욘으로 통한다고 말해도 좋을 듯 깊다. 바이욘은 앙코르톰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을 정점으로 폭 25미터의 도로가 무려 5개나 놓여 있다. 천년전의 도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내가 버스로 다녔던 그 길이 앙코르제국의 도로였던 것이다. 바이욘의 자태가 서서히 드러났다. 거무틱틱한 돌무더기의 집합체가 작은 성채를 이루고 있다. 주출입구는 동쪽에 있다.
자야바르만 7세 바이욘은 앙코르제국의 위대한 영웅 자야바르만 7세 스스로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원이다. 그는 왕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지방사령관이었다. 앙코르왕조를 끝없이 괴롭혔던 참족(베트남)을 섬멸하고 왕위에 올랐다. 광할한 제국을 건설한 광개토왕과 지방장군인 이성계 그리고 스스로 부처라고 자처한 궁예가 합쳐진 인물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출신의 한계 때문일까?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앙코르제국의 정통성을 이어줄 수 있는 위대한 건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앙코르톰이며 앙코르톰에서 가장 핵심적 건물이 바이욘이다. 자야바르만 7세는 종교개혁가이기도 하다. 그가 왕이 되자 정통성의 의문을 제시한 왕족들에게 위협을 느껴 그 타개책으로 카스트제도를 인정하는 힌두교 대신 혁신 종교인 대승불교가 절실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명명하고 국민들을 위해 수많은 병원을 짓고 빈민구제시설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바이욘의 건물구조 바이욘은 총 높이 43미터의 3층구조로 이루어졌으며 1층은 인간의 영역으로 8개의 고푸라 문과 민중들의 생활상, 참족을 무찌른 왕의 업적이 담긴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2층은 신들의 영역이며 힌두교 신들의 업적이 담긴 부조가 새겨져있으며 3층 지성소는 앙코르의 미소이자 큰 바위얼굴인 관음보살상이 세워져있다.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부조가 빽빽하게 새겨져있다. 갤러리의 둘레만 1,200미터나 된다. 부조는 깊이 패여져 입체감도 뛰어나다. 앙코르왓의 부조가 스케일이 큰 대하드라마라면 바이욘의 부조는 잔잔한 감동을 주는 가족드라마다. 가끔 시트콤마냥 유쾌하기까지 하다. 가이드 권국근님의 명쾌한 설명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전쟁에 승리한 군인들의 행렬이 씩씩하다. 군인들 중에 태국인 용병도 보이고 보기드문 중국인용병도 보인다. 텃수염과 보관모양 그리고 갑옷이 인상깊다. 머나먼 중국에서 전쟁을 치루기 위해 앙코르까지 왔다고 상상해보라. 갑자기 명분없는 전쟁 때문에 이라크로 날아간 우리네 자이툰부대원이 생각난다. 자라가 엉덩이를 깨무는 장면이다. 어찌나 화가 나고 아픈지...저 표정을 보라. 사원인지...학교인지 모른다. 선생님의 열강이 이어지는데.....맨 뒤의 학생은 코를 처박고 졸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이렇게 아름다운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 아닐까? 톤레삽호수에서 낚은 물고기를 막대기에 엮어놓았다. 자세히 보면 물고기의 머리와 꼬리까지 구분해 놓았다. 더 자세히 보면 비늘까지도..... 이 장면만큼 역동적인 장면은 없다. 크메르인이 톤레삽호수에서 참파족(베트남)과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포동포동하고 인상이 좋지 않는 군인은 물론 참파족이다. 처음에는 크메르인이 밀리다가 나중에 극적인 승리를 보여준다. 그 전쟁장면이 어찌나 살벌한지........ 이때도 UDT(수중폭파대)가 있나보다. 배 밑으로 들어가 수중싸움을 벌이고 있다. 가운데 큰 물고기는 꼬리만 보이길래 질문했더니.... "물고기 앞부분은 배 반대편으로 들어갔잖아요." 바이온의 부조는 눈물겹도록 사랑스럽다. 당시 서민의 생활상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애 낳은 장면이다. 산파가 애를 기다리고 있다. 누워서 낳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애를 낳는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에도 이 자세는 가장 진통이 없는 자세라고 한다. 이밖에 닭싸움, 생선파는 아낙네, 고래잡는 자면, 장기 두는 사람들, 검투사등 1천년전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가이드가 단언한다. "1천년 전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다음날 톤레삽호수에 갔을 때 그리고 육로로 태국까지 갔을 때 부조에 나왔던 크메르 사람들이 그대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바이욘의 벽화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을 그렸기에 나는 앙코르왓보다 더 정을 느낄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천년전 과거세계를 다녀온 기분이다. 이 서양인도 똑같은 심정일게다. 천년전 돌의 집합이 던저는 감동의 무게에 그만 펄썩 주저 앉고 말았다.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반가운 푯말을 만났다. 'JSA' 캄보디아 관광청의 약자라고 하던데.....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갔다. 이 곳부터는 신성한 곳이기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신을 위한 공간답게 힌두신들의 업적이 담긴 부조가 가득하다. 미로처럼 방이 꾸며져 있어 한번 헤메기 시작하면 방향을 잃기 쉽다. 모놀의 아줌마 회원이 영문도 모른채 잘 다듬어진 돌을 어루만지고 있다. 가이드가 남근석이라고 말하자 아연질색한다. ^^ "에그머니나...." 신들의 핵심 공간에 하필 남근석이 놓았을까? 이는 시바신의 창조의 힘을 나타내기 위해 남성 성기를 올려 놓았다고 한다. 주로 여성기를 상징하는 요니위에 올려 놓는다. 우리네 시골에 있는 남근석과 여근석이 떠오른다. 그 원류는 힌두교의 시바신에서 나왔구나. 어쨌든 고대국가에서는 사람의 노동력이 무엇보다 절실했고 나라를 지킬 군사력이기도 하다. 앙코르톰과 주변에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니 이곳이 얼마나 큰 도시임을 말해준다. 실내의 돌틈 사이로 이끼가 자라고 잡초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런 장면을 유난히 좋아 한다. 딱딱한 돌에 작은 생명이 붙어 있어 함께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앙코르톰에서 한국적 문양을 발견하다. 2층갤러리에 올라 방향감각을 잃고 헤메다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서 놀랄 만한 문양을 발견했다. 우리 고유의 문양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전통혼례식때 신랑이 입은 한복의 학모양 흉배와 비슷하지 않는가? 이 곳엔 학이 있을 턱이 없으니 다른 새를 그려 넣었을지 모른다. 원형속에 그려 넣은 배치나 그 표정 주변에 새겨진 꽃문양들은 우리 것과 별 다를바 없다. 분청사기의 능청스런 물고기 문양이 갑자기 보고 싶은 것은 왤까? 하늘을 수놓은 미소-관음보살 3층으로 올라갔다. 수많은 미소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54개의 탑 (현재는 36개라고 함)마다 200여개의 큰 바위 얼굴들이 미소를 짓고 있다. 비슷한 얼굴같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이나 표정이 제각각이다. 더구나 햇볕이 비추는 방향이나 각도,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다양한 미소를 감상할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행복을 이곳에 모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층 갤러리를 뱅뱅 돌아다녀도..... 문턱에 기대어 몇 시간의 상념에 빠져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며칠이고 머물고 싶었다. 천상의 미소가 내 얼굴에도 나타날 것 같은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기반위에 불교를 세우다. 1,2층은 힌두교의 향내가 풍겨났지만 가장 중요한 3층만은 불교의 조각물로 장식했다. 힌두교에서 불교로 국교를 바꿨어도 민중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신앙의 잔재를 하루아침에 지워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긴 불교의 뿌리는 힌두교가 아닌가? 그렇기에 힌두교의 기반위에 불교문화를 가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고 정점에는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을 세우면서 힌두교를 아우르고 있다. 자야바르만 7세 자신이 곧 부처와 동격이라는 것을 만방에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든 종교적 신망이든간에 앙코르시대 바이욘은 삼라만상 우주의 핵심이며 천상세계를 구현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200여기의 미소중에 단연 으뜸을 차지하는 미소는 2층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일명 '바이욘의 미소'라고 불리운다. 보면 볼수록 신비감아 빠져든다. 살짝 내려깔려진 눈, 복스러운 코, 두툼한 입술이 살아 있는 듯하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내려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세사이 지옥으로 변했어도 바이욘은 그 미소를 잃지 않았다. 희뿌연 얼굴도 세월의 무게탓인지 무틱틱한 색으로 변했고 얼굴까지 깨졌어도 그 미소 하나만은 여전히 지켜냈다. 과거 천년은 크메르인을 위한 미소였다면 앞으로의 천년은 세계인을 위한 미소가 될 것이다. 돌쌓기 앙코르왓이 반듯한 돌을 다듬어 견고한 신의 건축물을 만들어냈다면 앙코르톰은 천연 돌을 엮어 만들어 자연미가 물씬 묻어난다. 치개인적으로 앙코르톰이 훨씬 정이 간다. 자연미가 넘친다고 견고함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돌의 맞물림이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힘차게 물고 있다. 아직까지 복원은 끝나지 않았다. 무수히 쌓여 놓은 돌무더기가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건물을 새로 올리는 것보다 다시 복원하는 일이 열배, 스무배나 더 힘들다고들 한다. 거대한 퍼즐게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앙코르톰은 3일내내 보았다. 첫날은 가이드의 설명을 듣었고 다음날은 해질무렵 해자에 물든 사원을 보았고 비가 주룩누룩 내리던 마지막 날엔 앙코르의 모든 추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원의 물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사원이 존재하는 한 이림자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 각인된 감동의 그림자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번 유적지를 들릴 때마다 앙코르제국의 후예들을 잊지 못한다. 혹독한 시련의 역사를 딛고도 이렇게 맑은 눈망울을 지닌 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 수많은 돌들은 과연 어디에서 옮겨 왔을까? 앙코르 주변에서 돌이 나온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100만명의 앙코르 인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앙코르 유적이 세계 7대불가사의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앙코르톰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분명 앙코르는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다시 찾아야 할 인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천년을 이어온 관음보살의 미소는 앞으로 내 인생을 비추는 환한 등불이 될 것이다. *주의 모든 원고와 사진의 저작권은 저작자에 있습니다. 사전동의 없이 무단게재 할 경우 저작권법에 저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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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대평원의돌들은 어디에서모았을까 그위대한 석공의 후예는 캄보디아 어느곳에남아있을까? 킬링필드의 많은 유골이생각나 전쟁의상처를 다시 생각하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