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최악의 군주' 조선의 16대 왕 인조이다.
1623년 3월 13일 이귀 등 서인 일파는 광해군과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통해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 )을 왕으로 옹립한다. 그 능양군이 바로 인조이다.
이 정변을 계해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계해정사(癸亥定社) 계해반정(癸亥反正) 인조반정으로 부른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번째 아들인 정안군이다.
서자의 손자이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왕이 되기에는 많은 약점을 가진 가계다.
정안군은 선조와 인빈 감씨 사이의 소생에선 3번째 아들이다.
인빈 김씨는 신성군을 통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신성군이 임란중에 병사하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적통인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현실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꿈을 접고 한때 적대적이었던 광해군쪽으로 말을 갈아탄다.
그 덕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목숨을 잃는 피바람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자식들을 무사히 보호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도 탄탄하게 구축해 두었다.
병사한 신성군은 탄금대에서 목숨을 잃은 신립 장군의 사위였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장인은 강직하고 명망 높은 "구순"의 손녀였다.
이 결혼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인빈 김씨의 오래비인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여동생을 믿고 여러가지 세도를
부리다가 구순에게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에 김공량이 인빈을 찾아가 하소연 하고
구순을 험담하자 오히려 인빈은 선조를 설득해 구순의 손녀를 자신의 셋째 아들과 혼인시킴으로써
명망 높은 구순을 인척으로 맞아들인다. 아마도 그의 오래비 김공량은 상당히 머쓱 해졌을듯 하다.
그의 이러한 대범한 처세술과 자신의 아이들과 조정의 주요인물들과 맺어 놓은 인척관계를 보면
그만큼 권력의 성격을 잘 이해한 궁중 여인도 없었는듯 하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인조 반정의 주역은 신립 장군의 후손들과 구순의 후손들이 참여하게 된다.
정원군은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세아들을 낳았다. 장남인 능양군이 바로 훗날의 인조이다.
능양군의 뒤를 이은 동생들인 능원군과 능창군은 일찍 세상을 떠난 정원군의 형들인 의안군과
신성군의 양자가 되어 그 가계를 잇게 하였다.
능양군은 할아버지인 선조의 배려를 통해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궁중에서 자랐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에게도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5, 6세 때는 선조가 품안에 두고 번거러워 하지 않고 귀여워 했다고 하니
그의 어린시절은 궁궐에서 사랑받으며 행복한 시기를 보낸것 같다.
선조가 별세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는 정원군을 따라 경희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인렬왕후가 되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린 후에는 사저에 분가하였다.
반정 세력들은 광해군의 폐정을 이유로 정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형과 동생, 조카 등을 무고하게 죽여 인륜을 해쳤다는 점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사병을 키우고 역모를 꾀했다는 등의 이유로 유배하였다가 교동(喬桐)의
위소에서 죽였다. 또한 1613년에는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다.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그를 증살(蒸殺)하였다.
또한, 정원군의 아들이자 인조의 막내 동생인 능창군 이전(綾昌君 李佺)을 역모 혐의로 국문하고 교동에 금고하였다가
자살하도록 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서도 역시 계속 압박을 하던 중 1617년 무렵부터는 폐모론이 대두되었고 결국 존호를
폐하여 서궁(西宮)이라 칭하고 각종 공헌(貢獻)을 금지시키며 경운궁(慶運宮)에 유폐하였다.
두 번째 폐정은 지나친 토목공사와 인사의 파행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이었다.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하고 종묘를 중건한 것 외에 이후 새로이 경복궁 서쪽에 인경궁(仁慶宮)을,
새문동에 경덕궁(慶德宮 지금의 경희궁)을 연이어 건설하여 토목공사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측근들과 측근들의
요청과 뇌물 등에 따른 파행적인 인사와 지나친 부역과 세금으로 민생을 망가뜨렸다는 지적이었다.
세 번째는 명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한 재조(再造)의 은혜가 있는 나라인데 명의 요청에도 파병을 주저하고
1619년 사르후 전투(일명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는 등 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같은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원병을 보내는 문제에서만큼은 이이첨마저도 춘추(春秋)의 대의를
말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명분으로 반정을 주도한 이들은 훗날 즉위한 능양군과 그의 인척, 그리고 병권을 관장할 수 있었던 서인들이었다.
능양군의 친척으로는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 구굉(具宏) 구인후(具仁垕)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신경진을 통해 김류(金瑬)·이귀(李貴)와 연결되었고, 다시 이들을 통해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등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원래 1622년 가을 이귀가 평산부사에, 신경진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에 있을 때
범 사냥을 명분으로 군사의 이동 경계의 제한을 철폐하여 그것을 기회로 거사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다행히도 이들의 거사 시도는 김자점과 심기원(沈器遠)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어 해결되었으나 그 이듬해에도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추국청까지 설치되어 관련인들이 모두 잡힐 상황이 되자 곧바로 1623년 3월 13일 새벽에
거사하였다. 이귀·김자점· 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에 모이고, 뒤이어 이서가 이끄는 장단(長湍)의 군사와 김류가 이르렀다.
능양군은 친병을 거느리고 연서역에 이르러서 이서의 군사를 맞았다. 전체적인 군사 규모는 장단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기타 인물들이 이끈 군사가 6~700명 정도로 1400여 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3경 무렵 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이 때 궁성의 수비를 책임지던 훈련도감 대장 이흥립(李興立)도 반정군과 함께 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후원에서 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도망쳐 안국신이 쓰던 의관을 쓰고 숨어 있었으나
안국신이 반정 세력에서 고하여 잡혀 왔다.
폐세자 이지(李祬) 역시 장의동(莊義洞) 민가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당시 광해군은 이이첨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반군의 횃불이 창덕궁의 여러 전각에 붙어 불에 탔다.
이후 반정 세력과 능양군은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직접 찾아가, 보새(寶璽)를 바쳤다.
이에 대비가 광해군을 폐하고 경운궁의 별당에서 능양군을 즉위시켰으니, 이가 바로 인조다.
인목대비는 언문으로 내린 교서에서 36가지로 광해군의 죄를 지목하는 등 그를 처형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새 왕과 반정세력의 간청으로 서인(庶人)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보냈다.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이위경(李偉卿)· 한찬남(韓纘男)·백대형(白大珩) 등
몇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귀양보냈다.
이 때 이이첨은 비교적 빨리 처형되었으나, 정인홍은 인조가 종묘에 친제하고
상세정보 난 뒤에야 복주하였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의 죄악을 묘당에
방을 걸어 게시하고 팔방에 반포하였다.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김류 등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논공 문제로 서인 간에 반목이 있었다.
이는 1년 뒤 이괄의 난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52명 중에서 약 8명은 모역 등의 여러 이유로 삭훈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초반 위기를 맞았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뒤 무섭게 성장하는 청나라를 얕잡아 보는 외교정책으로 정묘-병자호란을 맞았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죄수복 차림으로 '치욕의 삼전도 항복'을 그 오랑캐 청나라에 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끝까지 의심을 한다. 귀국 한달만에 그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세자빈 강빈은 왕에게 올리는 복에 독을 탓다는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려 죽인다.
손자 3명은 제주로 귀양을 보냈다. 큰손자 등 두 명은 제주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토록 '잔인한' 인조는 김자점이 보내준 '비선실세' 김귀인에게 처참하게 말년을 농락당한다.
인조반정이 성공하는데는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역할이 돋보인다.
그는 장단에서 군사 700명을 이끌고 반정에 가담해 반정을 성공시키는데 큰공을 세운다.
그는 남한산성을 쌓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가 남한산성에서 죽자 인조는 온조의 사당 숭렬전에
그를 모시는 등 각별하게 배려한다.
그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이었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한 그는 절제절명의 도박을 성공으로 이끈 뒤 완풍(完豊)부원군에 봉해졌다.
덕진산성에 남아있는 덕진당에는 인조반정과 이서(李曙)의 부인이 관련된 가슴 아픈 사연이 남아있다.
장단부사 이서가 반정군을 이끌고 출전하기 직전에 아내의 손을 잡았다.
성공한다면 1등 공신의 반열에 오르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부인 내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리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 걱정마시오. ”
이서의 아내는 눈물을 꾹 참았다.
“ 이번 거사가 성공하면 돌아오는 나룻배에 붉은 기를 걸어놓겠소.
만약 실패하면 흰 깃발을 걸터이니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피하시오. ”
이서는 신신당부를 한 뒤에 700명의 병사와 함께 임진강을 건넜다.
이서의 아내는 남편이 떠난 뒤 뒤뜰에 단을 만들어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떠난 남편은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것이다.
이서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는 남편이 죽는 악몽까지 꾸고 점점 더 수척해져 결국 병이 들고 말았다.
남편이 떠난지 한달여가 흘렀을 때 임진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계집종이 외쳤다.
“ 마님, 나룻배가 다가오는데 무슨 깃발이 보입니다. ”
“ 무슨 깃발이냐, 붉은기냐, 하얀기냐 ”
강심(江心)을 벗어난 나룻배가 점점 다가왔다. 계집의 목소리에 힘이 떨어졌다.
“ 흰깃발이 옵니다. ”
이서의 아내는 핏기없는 얼굴로 산성앞 낭떠러지로 걸어가 몸을 던졌다.
나룻배에는 분명 남편이 타고 있었다. 분명 붉은 깃발을 걸어놓았다.
그만 노를 젓던 사공이 더위를 참지못해 흰옷을 붉은 깃발에 걸었던 것이다.
이서의 아내가 몸을 던진 임진강은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서는 아내가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던 그곳에 덕진당을 짓고 아내의 원혼을 위로했다.
이후 임진강 어부들은 풍어를 기원하고 수재(水災)를 막기 위하여 덕진당에 제(祭)를 올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