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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양계
아양계는 1928년에 김기남이 풍류을 하기 위해 조직한 모임이다. 김기남은 아양정을 짓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아양계를 만든다. 아양정은 아양계가 풍류를 하기 위한 공간으로, 조선 후기의 풍류방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풍류방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유사한 형태의 풍류를 하기 위한 공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풍류방’이란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가악 활동이 성해지던 영․정조 때부터이다. 이 때부터 풍류방 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와서 더욱 활발해진다. 조선 후기에 부유한 중인지식층으로, 어느 정도 詩文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새로운 예술 수용층으로 부상함에 따라, 그들과 예술적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 만든 풍류방이 많이 생겨난다.
대체로 풍류방에서는 시조 ․ 가사 ․ 가곡 등 정악이 주된 놀이였으며, 대개 대가댁 사랑이나 별장, 재각, 이들이 공동으로 지은 樓亭이 풍류방의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 아양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주로 시문에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사람들로, 시문을 위주로 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비석에 새겨진 아양계원들의 명부를 보면 김기남을 제외하고는 풍류 인물로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대체로 예술적 소양을 지닌 부유층의 사람들로서, 풍류를 감상하거나 재정적 후원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아양정의 곳곳에 이들이 써서 걸어놓은 시문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고 한다(김행련, 김기남의 막내딸 1925년생 현재 전주에 살고 있음) 실제로 1928(戊辰)년에 세워진 ‘아양정동계비’의 ‘계원명록’에 102명의 계원 이름이 있는데, 이들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1931(辛未)에 만들어진 아양계안에는 55명의 회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정읍 인근에 사는 사람들로 주로 풍류(음악)을 했던 사람들이다.
아양정에서는 정악 중심의 가곡․ 가사 ․ 줄풍류(영산회상) 등 풍류방 음악을 주로 하였다. 풍류방 음악은 남에게 보여주는 음악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며 수양을 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흥겨운 것보다는 우아한 느낌을 주는 음악을 위주로 한 것이다.
김기남은 아양정에서 어린 여자 아이들을 수양딸로 삼아 이들에게 가곡 ․ 가사 ․ 줄풍류 ․ 북춤 ․ 검무 등을 가르쳤다. 아양정에는 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던 선생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전계문이다. 전계문은 아양정에서 풍류를 가르치면서 말년을 보냈다. 김기남은 당시의 최고의 명인이라 하는 전계문을 선생으로 두었다. 전계문은 향제줄풍류를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한 줄풍류의 시조로, 대금 ․ 가야금 ․ 거문고 ․ 양금 ․ 피리 등 모든 악기에 능통하였으며, 춤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김기남의 가야금 풍류도 전계문에게 배운 것이다. 아양정에는 전계문 외에 김상호가 있었는데, 김상호는 김소희의 아버지로 김소희와 같이 아양정에서 살았다. 아양정에서는 선생을 두고 판소리는 가르치지 않았는데, 김소희는 특별히 김상호가 가르쳤다.
이들 외에도 김용근과 신달용이 율객으로 있었다. 풍류를 할 때는 김기남이 가야금, 김용근이 거문고, 신달룡이 젓대, 김상호가(김상호는 젓대를 잘 불었다) 단소, 최계월이 양금을 잡았다. 여기에 김윤덕이 참여한 것 같다. 최계월은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입암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김윤덕인 것 같다. 당시에 임암에 살면서 풍류를 했던 인물은 김윤덕 외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최계월은 김기남의 수양딸로 아양정에서 전계문에게 춤과 가곡 ․ 가사를 배웠으며, 전경태에게 양금을 배웠다. 당시에 전경태는 시내 연지동 근처에서 춤을 비롯한 풍류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가곡 ․ 가사도 하였는데, 전계문의 소리에 미치지 못하고 노래를 부르는 법도 전계문과 많이 달랐다고 한다.(최계월:1925년생, 1937에 아양정에 들어가 1942년에 나옴, 여기에 기록은 주로 최계월과 김부현의 증언에 의한 것임. 김부현:1935년생, 김기남의 손녀(둘째 아들), 1941년부터 1950년 김기남 사망시까지 아양정에서 생활홤, 현재 용인에 거주)
아양정에서 풍류를 할 때면 각지에서 율객들이 수없이 많이 모였는데, 보통 한 악기당 3-4명씩이 되었다. 풍류는 일정한 날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시로 열렸으며, 이때마다 아양계원들은 물론 정읍의 유지들이 초청되었다고 한다. 풍류는 아양정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다니면서 하였는데, 인근의 고창 ․ 성내 ․ 김제 ․ 태인을 비롯한 멀리 광주까지 갔었다고 한다. 김기남은 풍류를 하러 갈 때는 반드시 수양딸들과 함께 갔다. 일반적으로 영산회상 한 바탕이 끝나면 가곡 ․ 가사를 부르고 마지막에는 춤으로 마쳤다 한다.
아양계는 처음에는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전형적인 풍류방의 모습에서 점차 직접 음악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주를 이루어 오늘날 율계와 같은 모임으로 변했다. 아양계는 실로 풍류의 근원이다. 그 뿌리는 초산율계로 이어져서 오늘날 정읍 풍류로 전하고 있다. 아양계의 영향을 받아 각 곳에 풍류계가 많이 생겼으며, 성내 6.3회와 6.2계 흥덕의 아양계와 이리 구례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지방 풍류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은 아양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양계원비
남상숙(원광대학교 객원 교수)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탁본을 하고 있다.
契員名錄 (계원명록)
峨洋亭同稧碑記
湖南之井邑以山水之勝特箸於海東者也
호남의 정읍은 산수가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뛰어난 곳이다.
內藏山一枝逶迤三十里而特秀一峰者曰峨洋也
내장산 한줄기 구비돌아 삼십리에 빼어난 한 봉우리가 아양이구나
其下數間亭子翼然臨于一條淸冷之側而
그 아래 몇 간의 정자가 좌우로 펼쳐 날아갈 듯, 맑고 시원한 시냇가에 있어
隱暎於萬樹蒼翠之間也
우거진 푸른 숲에 은은히 비쳐 있다.
亭之東南又有二樂亭瀟灑於飛瀑奇石之上也
정자의 동남쪽에 이요정이 있으니, 기이한 바위 위에서 폭포가 시원스럽게 쏟아지고
亭之西北又起洗心亭逍遙於長川晴沙之際也
정자의 서북쪽에 세심정을 세웠으니, 긴 내와 개인 날 깨끗한 모래 가에 노닐고
以灰代瓦比竹樓而工省也
회(시멘트)로써 기와를 대신하니 죽루에 비해 공사비를 아끼고
曲欄流觴追蘭亭而契修也
난정을 추모하여 유상곡수의 계을 만들어
百篇雅韻傾大方之淸喉一片貞珉盡別庄之勝蹟也
뛰어난 문장가들의 수백편의 시를 모두 모아, 한 조각 단단한 돌에 새겼으니, 별장의 좋은 자취로구나.
名亭者誰主人自號也和琴者誰衆賓同樂也
정자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누구인가? 주인이 직접 지었구나. 거문고와 함께 즐기는 자는 누구인가? 같이 어울려 즐기는 여러 손님들이로다.
於是乎興嘆曰朝往而暮歸
이에 흥에 겨워 말하기를 아침에 정자에 가서 저녁에 돌아오니
雖信今日之駏蛩物換而星移孰記千年之鶴柱也
비록 오늘에 함께 즐겼던 것을 세월이 흘러, 어느 누가 천년 학표주라 기억하겠는가?
莫若結社而題名于石以供春秋之講信也
모임을 만들고 돌에다가 이름을 쓰고, 춘추로 만나 계를 하는 것만 같겠는가?
然則此事也豈特爲香山之故事也亦以兼藍田之貽規也
그러한즉 이 일이 어찌 한갓 향산에 기영회를 (백락천)만든 고사가 될 뿐이겠는가? 남전 여씨의 향약을 겸할 수 있을 것이다
主人笑曰若如此則誠美事也
주인이 웃으며, 이와 같이 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되겠다고 했다.
主人云誰石友居士金箕南也
주인은 누구인가 석우거사 김기남이라.
稧長 鄭宰錫 李堯榮
總務 李成初 會計 金百珍 楊역泳 掌財 魯成佐
有司 宋正圭 柳應三 朴元明 孫仁贊 姜周攝 嚴中燮 殷南燮 朴學善
宋武燮 劉鳳夾 崔才同 李星九 殷奉奎 李斗榮 李得中 林亨述 尹明心
李在述 金永萬 朴凉來 朴聖漢 金相鎬 金南燮 崔太瑞 金成汝 金淇鍾
鄭載敬 鄭載根 崔基佑 鄭海鮮 安心旭 鄭載庸 李新八 金仁培 柳熙鳳
林敬凙 柳鍾洙 宋明仲 白洛龜 張成道 朴容來 崔錫龍 李學圭 張然錤
申宗煥 魯在錫 柳元佶 張在俊 柳道相 金東燮 柳泰基 金秀業 張用植
李永烈 沈錫澤 金益守 安汝相 金仁用 李明云 金正斗 金昌準 金一奉
金敎順 崔秉祿 金明瑞 李明述 都相喆 徐光玉 柳濟豊 金在中 楊俊洪
李在弘 孫大辰 朴仁明
金箕南 金炳玉 朴在浩 李乃春 金元一 李年豊 徐東燮 金學述 盧在鎬
元容善 金良必 金良玄 金岩乎 金順福 李寬玉 申長烈 孫在用 鄭判同
朴其敦 金鍾昊 林元國
戊辰(1928)淸和八日慶州李堯榮 謹記
역원록 (役員錄) 출처 : 정읍학 제2호(정읍학연구회. 2015.)
峨洋契序
日友人殷成益君言於余曰興德某某友設一契每於春秋會于各區觴詠以暢其情音樂以其懷名之曰峨洋蓋所謂靑山峨峨綠水洋洋之意也子其參同則於吾僉員之願淂矣余聞而歎賞曰此豈非世上事今焉已矣寧欲狂且醉自慰其滿腔鬱者耶且旣名契以峨洋則余雖辱參同以其奈余非知音者何然余嘗聞樂有正淫之別和人心氣正人情性者正也亂人心氣蕩人情性者淫也今諸君子之所謂樂者但一於和正而絶亂蕩之音則音雖不協於節奏而亦不害其爲知音者也殷君曰諾哉而諸君子之言亦同故余遂參同姑書此言于案端辛未春三月旬之七 同案人弦巖吳毅均書
어느 날 나의 친구 은성익(殷成益)이 나에게 말하기를, “흥덕(興德)의 벗 아무개와 아무개가 계를 만들어 매년 봄·가을에 각 지역에서 모여 술 마시며 시를 읊어 마음을 펴고 음악으로 회포를 풀고는 ‘아양(峨洋)’이라고 이름 하였는데, 이는 푸른 산이 우뚝하고 맑은 물이 넘실거린다는 뜻이네. 자네가 참여하여 함께한다면 우리들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세.”하니, 내가 듣고서 탄복하여 칭찬하기를, “이 어찌 세상일이 아니겠는가마는 이제는 그만두었었는데 어찌 심히 취하여 스스로 가슴 가득한 울적한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또 이미 계를 아양이라고 이름 하였다면 내 비록 욕되게 참여하여 함께하더라도 내가 음(音)을 아는 자가 아닌 것은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내 일찍이 들으니, 음악에는 정악(正樂)과 음악(淫樂)의 구별이 있다고 하니, 사람의 심기(心氣)를 조화롭게 하고 사람의 성정(性情)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악(正樂)이고 사람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성정을 방탕하게 하는 것이 음악(淫樂)이네. 지금 여러 군자들이 말하는 음악이라는 것은 다만 조화롭고 바르게 하는 데에 오로지 하고 어지럽고 방탕한 음악은 끊어버리는 것이니, 음(音)이 비록 절주에 어울리지 않더라도 또한 음을 아는 자가 되는 데에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네.”하였다. 은성익이 말하기를,“그렇네.”하니, 여러 군자들의 말도 같았다. 이 때문에 내가 마침내 참여하여 함께하고, 우선 이 말을 서안에 쓰노라.
신미년 봄 3월 17일에 같은 계원인 현암(弦巖) 오의균(吳毅均)이 쓰노라.
條目
-本契는 峨洋契라 함
-本契는 친목을 團하고 幽情을 暢敍하기 위하여 花柳丹楓佳節에 佳山麗水의 名勝을 玩賞하며 音律을 唱和하기를 목적함
-本契 講信日子는 春三月十二日秋月十二日로 完定함
본계 每講信時金壹圓錢을 各自據出하야 二十錢을 基本金m로 殖利하고 殘額金은 費用으로 需用함.
講信場所及有司는 每修契時前期議定함
-本契員 중 修契時有無故를 勿論하고 불참할지라도 該契費는 無遠辦出하고 其事由를 司에게 前期通知함
본계원중 和氣를 感傷하며 體面을 汚損하난 時는 無出.
계장(契長)
고문(顧問) 송하연(宋夏淵)
강신유사(講信有司) 김근섭(金謹燮)
전유사(錢有司)
[좌목(座目)]
김근섭(金謹燮): 영감하(永感下), 계유(1873) 정월 14일생, 호 지산(只山), 김해인(金海人), 정읍군 북면 신성리.
국휘영(鞠揮泳): 자 내형(來炯), 엄시하(嚴侍下), 기묘(1879) 7월 18일생, 호 송암(松蓭), 담양인(潭陽人), 고창군 흥덕면 읍내리.
오의균(吳毅均): 자 홍백(弘伯), 구경하(具慶下), 계미(1883) 2월 8일생, 호 현암(弦巖), 동복인(同楅人), 고창 읍내리.
김용근(金蓉根): 자시하(慈侍下), 계미(1883) 6월 8일생, 호 금사(琴史), 김해인(金海人), 정읍군 신태인
진달홍(陳達洪): 자 기범(基範), 자시하, 갑신(1884) 11월 30일생, 호 춘파(春坡), 여양인(驪陽人), 원흥덕(元興德) 읍내리.
이문명(李文明): 을유(1885) 6월 27일생, 고창군 고창면, 덕정리
국동수(鞠東洙): 구경하, 병술(1886) 7월 12일생, 호 호정(壺汀), 담양인(潭陽人),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
박태호(朴泰鎬): 구경하, 정해(1887), 호 송은(松隱), 밀양인(密陽人), 흥덕읍.
박영근(朴永根): 엄시하, 무자(1888) 8월 17일생, 고창군 흥덕읍.
김기남(金箕南): 구경하, 기축(1889) 12월 14일생, 호 석우(石友), 광산인(光山 人), 정읍군 정주읍 장명리.
신영철(申永澈): 자 복경(楅京), 경인(1890) 4월 13일생, 평산인(平山人)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김종팔(金鍾八): 자시하, 경인(1890) 9월 26일생, 호 호석(湖石), 금령인(金寜人), 정읍군 정주읍 광교동 319.
박태술(朴泰述): 구경하, 경인(1890) 12월 9일생, 호 가옥(可玉), 밀양인(密陽人), 고창군 흥덕면 읍내리.
진철수(陳徹洙): 자 한철(漢哲), 자시하, 시묘(1891) 9월 23일생, 여양인(驪陽人), 고창군 흥덕면 읍내리.
국창현(鞠昌炫): 영감하, 임진(1892) 8월 3일생, 호 금헌(琴軒), 담양인(潭陽 人),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은성익(殷成益): 영감하, 임진(1892) 8월 3일생, 호 심초(心焦), 행주인(幸州人), 고창군 고창면 읍내리.
이주연(李鑄淵): 자 성홍(聖洪), 엄시하, 계사(1893) 정월 21일생, 호 난곡(蘭谷), 전부인(全州人), 고창군 부안면 오산.
박태용(朴泰鏞): 구경하, 갑오(1894) 정월 23일생, 호 우송(又松), 밀양인(密陽人), 고창군 흐덕면 읍내리.
박홍규(朴洪奎): 태안인(泰安人), 갑옥(1894) 4월 4일생, 호 걸산(杚山) 정읍군내.
박태선(朴泰璇): 영감하, 을미(1895) 6월 1일생, 호 송하(松何), 밀양인(密陽人), 고창군 흥덕면 읍내리.
김지중(金智中): 자 성숙(誠淑), 영감하, 을미(1895) 11월 7일생, 호 송파(松坡), 울산인(蔚山人),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박태성(朴泰聖): 밀양인(密陽人), 병신(1896) 2월 7일생, 호 가석(可石),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
신영갑(辛泳甲): 구경하, 병신(1896) 8월 10일생, 호 우송(又松), 영월인(寧越人), 부안군 읍내(현 고창군청, 현 남원 세무서).
김순택(金順澤): 병신(1896) 10월 8일생, 호 일정(一汀), 남원군 남원읍 하정 (현 고창군청).
백정기(白貞基): 정유(1897) 1월 14일생, 호 석천(石泉), 고창군 부안면 검산 리.
국일주(鞠日柱): 영감하, 무술(1898) 4월17일생, 담양인(潭陽人), 고창군 흥덕면 읍내.
박주양(朴柱暘): 자시하, 무술(1898) 9월 10일생, 호 청오(靑塢), 밀양인(密陽人), 고창군 흥덕면 읍내.
김강선(金康善): 경주인(慶州人), 기해(1899) 5월 5일생, 호 하강(何崗), 거(居) 흥덕.
박석기(朴錫紀): 기해(1899) 11월 20일생, 호 효강(曉崗), 원(元)평창읍내.
김우철(金宇哲): 경자(1900) 정월 28일생, 장성군 장성면 영천리(현주소 전남도청).
신용식(愼鏞植): 영감하, 신축(1901) 정월 17일생, 거창인(居昌人),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
김하중(金河中): 구경하, 임인(1902) 3월 22일생, 호 소하(小河), 울산인(蔚山 人), 광주군 호남정.
김정의(金正義): 경주인(慶州人), 갑진(1904) 7월 24일생, 호 송재(松齋), 성내면 산림리.
김영상(金泳相): 을사(1905) 8월 30일생, 호 일파(一坡), 정읍 읍내(순천세무서).
김대현(金大鉉): 영감하, 병오(1906) 6월 22일생, 김해인(金海人), 고창군 성내면 신대리.
신용선(愼鏞善): 자시하, 병오(1906) 9월7일생, 거창인(居昌人),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
신용의(愼鏞椅): 병오(1906) 11월 7일생,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
전재완(全載完): 용궁인(龍宮人), 정미(1907) 11월 24일생, 호 포월(浦月), 고창 읍내.
신용국(愼鏞局): 영감하, 경술(1910) 4월 23일생, 거창인(居昌人), 고창군 흥덕면 사천리.
황상규(黃祥奎): 자 학로(學魯), 자시하, 계추(1913) 10월 19일생, 호 성암(省菴), 우주인(紆州人), 이리부 신흥동 400.
정경태(鄭坰兌): 자시하, 병진(1816) 2월 7일생, 호 석암(石菴), 진주인(晉州 人),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
유종구(柳鐘九): 구경하, 경신(1920) 2월 17일생, 고흥인(高興人), 정읍군 내장면 운암리.
송창섭(宋昌燮): 구경하, 갑자(1924) 1월 12일생, 여산인(礪山人), 부안군 주산 면 사산리.
한홍매(韓紅梅): 청주인(淸州人), 을묘(1915) 정월 17일생, 호 춘산(春山), 광주부 명치정 5정목 73(광주예기조합내).
이영산(李榮山): 구경하, 기유(1909) 2월 26일생, 충남 공주군 산성정.
성난향(成蘭香): 창령인(昌寜人), 병진(1916) 2월 22일생, 호 소운(素雲), 광주부 명치정 5정목 73(광주예기조합내).
한갑득(韓甲得): 기미(1919) 12월 20일생, 광주부 수기옥정(須奇屋町) 590번지.
한승호(韓昇鎬): 갑자(1924) 2월 4일생, 광주부 수기옥정.
김재록(?)(金在彔): 성내면 산림리.
신달용(申達龍): 자시하, 을묘(1915) 4월21일생, 평산인(平山人), 정읍군 영원면 신영리
최태현(崔泰鉉): 신해(1911) 2월 18일생,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최대진(崔大振): 을미(1895) 8월 20일생, 정읍군 고구면 고구리.
전홍용(全洪龍): 영감하, 신묘(1891) 정월 26일생, 천안인(天安人), 정읍군 시기리.
김경홍(金景弘): 영감하, 기묘(1879) 12월 27일생, 김해인(金海人),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강석만(姜石萬): 고창군 성내면 신대리.
박향란(朴香蘭): 갑자(1924) 3월 3일생, 거 신태인.
금주(申錦珠): 고창군 고창면 읍내리(현 전주조합내).
김소란(金笑蘭): 정사(1917) 5월 5일생, 거 신태인.
김옥희(金玉姬): 정묘(1927) 9월 9일생, 거 신태인.
박운향(朴雲香): 정읍예기조합(정읍예기조합).
정연옥(鄭蓮玉): 정읍예기조합.
최계월(崔桂月): 정읍예기조합.
최옥희(崔玉姬): 정읍예기조합.
조도홍(曺桃紅): 흥덕.
임화선(林花仙): 정읍예기조합.
김난초(金蘭草): 정읍예기조합.
김이화(金梨花): 정읍예기조합.
금 주(金 珠) : 경성 봉익정 11~2호
최유색(崔柳色): 정읍예기조합.
박말남(朴末男): 정읍예기조합.
영감하 : 부모가 죽고 없는 사람
엄시하 : 아버지만 살아 계신 사람
구경하 : 부모가 다 돌아가신 사람
자시하 : 어머니만 있는 사람
김행연